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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184화 (184/300)

184화

에밀 파스쿠레의 무례한 행동은 가드너 관장을 적잖게 당황스럽게 만든 게 분명했다. 그는 잠시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불청객을 쳐다보더니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밀의 저런 행동이야 그가 어릴 때부터 익히 겪어왔던 것이다. 지금은 그를 나무라는 것보다는 일단 두 사람을 소개시켜서 어색한 상황을 수습하는 게 먼저였다.

“인사하십시오. 우리 미술관의 수석 감정사인 에밀 파스쿠레입니다. 실력이 아주 뛰어나기도 하지만 파스쿠레의 아버지와 저희 아버님은 의형제나 다름없는 사이죠. 에밀? 이쪽은 한국에서 온 이도윤 박사와 약혼녀이신 최서라 박사이시네. 인사드리게.”

도윤은 최서라를 분명히 여자 친구라고 소개했다. 그런데 그게 갑자기 약혼녀로 바뀌었다. 그 바람에 최서라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가드너 관장은 그 점을 미처 눈치 채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그가 약간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는 사이, 에밀이 도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손을 불쑥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에밀 파스쿠레입니다. 이름에서 아실 수 있겠지만 프랑스계 미국인입니다. 그렇잖아도 워낙 소문이 자자하신 분이라서 어떤 분인지 궁금했는데 이렇게 만나는군요. 반갑습니다.”

도윤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조금 전에 관장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이도윤입니다. 이쪽은 여자 친구인 최서라고요.”

도윤은 그녀와의 관계를 여자 친구라고 다시 바꾸어서 소개했다. 하지만 에밀은 애초부터 그런 문제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도윤의 손을 꽉 쥐었다가 놓더니 관장이 미처 권하기도 전에 빈자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태생이 안하무인인 위인임이 분명했다.

“사실 진작부터 기회가 닿으면 이 박사를 보고 싶었습니다. 젊은 분인데도 감정 솜씨가 뛰어나다는 얘기를 귀가 따갑게 들어서요.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도윤이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에밀의 태도에서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느낀 가드너 관장이 얼른 나섰다.

“이 사람아. 이제 처음 만난 분한테 벌써부터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정 물어볼 게 있으면 내일 다시 얘기하세. 어차피 파티에서 볼 게 아닌가? 시간은 많아.”

하지만 그런 그의 노력은 에밀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는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로 태연하게 관장의 제안을 무시했다.

“관장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궁금한 게 있으면 참지를 못하는 성격이 아닙니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왕 얼굴을 본 김에 몇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어떤 게 궁금하십니까?”

눈치를 보니 어차피 여기서 다음에 보고 얘기하자며 발을 빼기는 어려울 게 뻔했다. 도윤은 속으로 골치 아픈 놈을 만났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짐짓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밀이 씩 웃으며 넌지시 밑밥을 깔았다.

“이 박사님이 우승했던 트루쓰 앤 밸류 첫 시즌 말입니다.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시청률이 상당히 높았던 걸 보면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그에 반해 두 번째 시즌은 완전히 엉망이었죠. 출연했던 감정가들이 죄다 아마추어 수준에 불과했으니까요. 그래서 더더욱 첫 시즌의 우승자를 보고 싶었습니다.”

에밀의 말은 사실이었다. 도윤이 우승했던 첫 시즌과는 달리 이듬해에 방송된 두 번째 시즌은 시청률이 완전히 바닥을 기었다. 그 바람에 작년과 같은 인기를 예상하고 거액의 광고료를 지불했던 회사들로부터 안 좋은 소리를 실컷 들어야 했다. 결국 그게 치명타가 되어 트루쓰 앤 밸류의 세 번째 시즌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두 번째 시즌에 출연했던 감정가들도 아마추어 수준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

나름 예의를 차리려던 도윤의 말은 이어진 에밀의 질문으로 인해 중간에 끊기고 말았다.

“두 번째 시즌 출연자들은 아마추어가 맞습니다. 게다가 방송국에서도 각본을 잘못 짠 게 분명해요. 첫 시즌의 성공으로 기고만장해서 기획을 대충했다는 뜻이죠.”

각본이라고? 도윤은 물론이고 최서라와 가드너 관장의 얼굴까지도 살짝 굳었다. 특히 가드너 관장은 첫 시즌에서 꼼수를 부리려고 했던 전력도 있기 때문에 표정이 더 안 좋았다.

“각본이라니? 자네 지금 방송국 측에서 사전에 각본을 짜서 방송을 만들었다는 건가?”

에밀의 시선이 잠시 가드너 관장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도윤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야 모르죠.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물어보는 겁니다. 첫 시즌에서 정말 미리 짜인 각본이 없었습니까? 올슨 씨는 아니라고 우기지만 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요. 솔직히 중국에서 항아리를 감정하시는 분이 유럽과 미국의 걸작들에 대해 그렇게 세부적인 사항까지 환하게 알고 있다는 건 믿기 어려운 게 사실 아닙니까?"

항아리 감정사? 이번에는 도윤도 어쩔 수 없이 정색을 했다. 이 자식 봐라?

북경에서 열렸던 아리스 옥션의 경매에서 홍도관은 다빈치의 ‘살바토르 문디’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높은 가격에 낙찰되었다. 그 사실이 워낙 전 세계적으로 보도가 됐기 때문에 적어도 미술계 사람들이라면 홍도관을 경매에 올린 사람이 이도윤이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에밀은 그 사실을 빗대어 도윤을 항아리 감정가라고 폄하한 것이다.

도윤은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려는 턱을 억지로 폈다.

“세상에는 종종 믿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고는 하지요. 그래서 언제나 놀랍고 새로운 게 아니겠습니까? 제가 그렇게 여러 분야에 대해 해박하다는 게 설마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 줄은 몰랐군요. 파스쿠레 씨는 전문 분야가 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도윤의 대답에 약간의 빈정거림이 숨어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에밀의 눈초리가 살짝 좁혀지더니 코에서 가벼운 콧바람이 새어나왔다.

“저는 유럽 근대 미술 작품이 전문 분야입니다. 주로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쪽이죠. 듣자하니 이 박사께서도 그 분야와 관련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으셨다고요?”

“학위 논문은 감정이 아니라 미술사에 관한 거였습니다. 뭐 덕분에 인상파에 대해 적지 않게 배우는 기회가 되기는 했지만 그걸 감정 실력과 곧바로 연결시키는 건 무리겠지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미국이나 유럽도 아니고 아시아에서 오신 분이 서양 미술 작품들을 그렇게 정확하게 감정한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러니 제가 트루스 앤 밸류 첫 시즌에서 뭔가 미리 짜인 각본이 있지 않았을까 의심하는 거 아닙니까?”

아시아에서 오신 분? 이젠 대놓고 인종차별까지 하겠다는 거야? 도윤의 얼굴에 섬뜩한 미소가 맺혔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부드러웠다.

“당시 경연에서 탈락한 분들이 방금 에밀 씨가 한 말을 들었다면 상당히 기뻐하겠군요. 자신이 떨어진 게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저도 사실 첫 시즌에서 우승한 건 운이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적당히 해라. 도윤은 부글거리는 속을 애써 눌렀다. 하지만 에밀은 멈추지 않았다.

“애매하게 말을 돌리면서 끝까지 각본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시는군요. 혹시 저 말고도 당시의 방송에 대해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글쎄요. 한국에서는 그런 식의 의심을 하는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의 사정은 다른 모양이군요.”

“다릅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다르죠.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내일 파티에서 이 박사의 솜씨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도윤은 잠시 숨을 골랐다. 드디어 본론이 나오는 건가? 왠지 저 말을 이 자리에서 금방 생각해냈을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일부러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제 실력을 확인할 기회요? 글쎄요. 워낙 보잘 것 없는 솜씨라서 굳이 여러분이 그걸 확인할 필요까지 있을지 모르겠군요.”

“남자라면 빼지 말고 당당히 도전해 보시죠. 마침 우리 미술관에 좋은 물건이 들어왔거든요. 2차 대전 때 나치에 의해 프랑스 로스차일드 가문의 미술품이 무수히 도난당했던 사실은 아시죠? 그 중 일부를 우리 미술관에 팔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윤은 끝까지 침착함을 유지하고 싶었다. 그러나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저도 모르게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영국과 프랑스, 독일을 비롯해서 거의 유럽 전역에 퍼져 있다. 에밀이 프랑스의 로스차일드 가문이라고 했으니 영국의 다니엘과는 아마 직접적인 연관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겪은 일 때문에 저절로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런 그의 반응을 에밀은 다른 식으로 해석한 게 분명했다. 놈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에 나치는 ERR을 만들어서 프랑스의 로스차일드 가문이 소유하고 있던 많은 예술품들을 집중적으로 약탈했죠.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고 세웠던 비시 정권 역시 그 약탈에 적극적으로 협조했고요.”

나치가 자신들을 노린다는 것을 알아챈 프랑스 로스차일드 가문의 일원들은 대부분 사전에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로 이주했다. 그로 인해 그들이 가지고 있던 많은 미술품들이 프랑스 밖으로 반출되었다. 하지만 개중에는 미리 몸을 피하지 못하고 프랑스에 발이 묶인 이들도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들의 미술품을 비롯한 재산은 나치에 의해 압수당했다.

에밀이 꺼낸 얘기는 도윤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니 당시에 나치가 약탈했던 미술품을 누군가 들고 왔나 보군요. 하지만 그 미술품들은 종전 후에 대부분 원래의 주인들에게 반환된 걸로 알고 있는데요? 아직도 남은 게 있었단 말입니까?”

나치는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 각지에서 빼앗은 미술품들을 몇 군데의 장소에 집중적으로 모아놓았다. 자기들 딴에는 관리와 운송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조치였는데, 그것이 오히려 종전 후에는 연합군들의 일을 크게 줄여주는 결과를 낳았다. 그들은 베를린이 함락될 때까지 모아두었던 미술품을 미처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한 것이다.

도윤의 질문을 받은 에밀이 손가락을 하나 세워 좌우로 흔들었다.

“물론 대부분은 반환되었습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대부분이에요. 몇 개는 결국 회수에 실패했지요. 그래서 요즘도 가끔씩 사라졌던 미술품들이 상자 째로 발견되기도 합니다.”

“가드너 미술관을 찾은 누군가가 그런 미술품 가운데 일부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까?.”

“맞습니다. 그 분이 가지고 온 미술품 상자를 제가 직접 개봉해서 내용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감정을 마쳤지요. 저는 이박사에게도 그걸 감정해볼 수 있는 기회를 드리고 싶은데, 혹시 생각이 있으십니까?”

에밀이 말한 상자 안에는 여덟 점의 유화가 들어 있었다. 모두 크라나드, 아이작 반 오스타인 루카스 반 라이덴 등의 북유럽 쪽 화가들이 그린 그림이었다. 그는 그림들을 이용해 도윤에게 일종의 감정 대결을 제안한 것이다.

“이 사람아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귀한 손님을 모시는 자리에서 트루쓰 앤 밸류의 번외편이라도 찍자는 거야? 쓸 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냥 돌아가게.”

보고 있던 가드너 관장이 벌컥 화를 내며 에밀을 나무랐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서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좋은 생각이라며 손가락을 탁 튀기기까지 했다.

“트루쓰 앤 밸류 번외편이라,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네요. 마침 당시 심사를 맡았던 세 분도 내일 파티에 참석한다고 하셨죠? 그 분들이 보는 앞에서 누가 진짜 최고의 감정가인지 실력을 겨뤄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좋은 여흥거리가 될 것 같은데요.”

“그만 하게! 이 사람이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가드너 관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때 도윤이 손을 들어 그를 말렸다. 이미 그의 얼굴에는 싸늘한 미소가 짙게 배어 있었다.

“아닙니다. 한 번 해보도록 하죠.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대신 내일 파티에서 에밀 씨께서 먼저 감정 결과를 발표해 주십시오. 한 달 전에 그림을 감정했다고 하셨으니 이미 결과를 가지고 계실 것 아닙니까?”

에밀도 도윤이 선뜻 감정 대결을 받아들겠다고 얘기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말씀대로 제가 먼저 결과를 말씀드리죠. 이거 생각보다 배짱이 두둑하시군요. 하지만 그 뱃속에 들은 게 근육인지 바람인지는 내일 저녁에 밝혀지겠죠. 몹시 기대됩니다. 하하하.”

갑자기 도윤이 에밀의 도전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자 옆에서 계속 놈을 노려보던 최서라마저 깜짝 놀랐다. 그녀가 슬그머니 도윤의 팔을 잡았다.

“도윤 씨. 하지 마세요. 왜 그런 무리한…….”

하지만 도윤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밀어냈다.

“괜찮아. 문제 될 게 없잖아? 감정하다가 정 판단이 안 서면 에밀 씨가 말한 그대로 결론을 내리면 되지, 설마 가드너 미술관의 수석 감정사가 실수를 했겠어?”

도윤은 일부러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최서라는 그가 몹시 화가 난 상태라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입으로는 웃고 있지만 눈빛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서늘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내일의 파티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 * *

다음날 점심 무렵, 네 명의 사람들이 도윤이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왔다. 하버드의 타일러 교수를 비롯해서 오주현에게 추천서를 써주겠다는 의사를 밝힌 사람들이었다. 다만 추천서를 쓰기 전에 그녀의 그림을 한 번쯤은 직접 볼 필요가 있었는데, 도윤이 이번에 그림을 가져왔다고 연락을 한 것이다.

“원래는 제가 일일이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이렇게 직접 오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결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도윤은 네 사람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시카고 예술 대학의 브렌트 교수가 그런 소리 말라면서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다 함께 보스턴에 모이기로 했는데 굳이 일을 그렇게 번거롭게 만들 필요가 뭐 있겠소. 어서 그 기특한 학생의 그림이나 꺼내보시오. 궁금합니다.”

도윤은 다시 한 번 네 사람에게 일일이 고개를 숙인 뒤 가방 안에서 주현의 그림을 꺼냈다. 그림을 찬찬히 감상하던 네 사람 모두의 눈에서 한결같이 감탄의 기색이 흘러나왔다.

“이건 사진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낫군. 지난번에 보여준 그림들이 작년에 그린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고작 일 년 사이에 많이 발전했군요. 대단한 학생입니다.”

메트로폴리탄의 하이든 부장이 한 말이었다. 그의 평가는 정확했다.

그림 자체의 깊이만 놓고 보면 오주현의 그림은 작년에 비해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그에 반해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분명히 괄목할 만한 성장이 있었다. 원래부터 재능이 풍부한 아이였는데, 최근에는 마음먹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도윤이 추천한 아틀리에의 화가가 틈틈이 기초적인 부분들에 대한 친절하게 지도를 해준 덕도 있었다.

“이 학생을 우리 대학으로 보내시오. 이 박사도 시카고 예술 대학이 미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뛰어난 곳이라는 걸 잘 알죠? 우리 학교로 보내면 내가 담당 교수들에게 잘 말해 두겠습니다. 열심히 키워보라고.”

브렌트 교수가 선수를 치고 나가자 까미유가 불편한 듯 헛기침을 했다.

“뉴욕 대에도 미국에서 손꼽히는 미술학과가 있어요. 그리고 뉴욕에는 좋은 미술관이 가장 많잖아요. 대가들의 그림을 통해 배우려면 역시 뉴욕으로 오는 게 낫지 않겠어요? 이 학생이 원한다면 제가 당장이라도 추천서를 써 주겠어요.”

두 사람의 다툼을 시작으로 나중에는 타일러 교수와 하이든 부장까지도 저마다 자신과 친분이 있는 미대에 추천서를 써주겠다고 나섰다. 다들 전문가들이다 보니 오주현의 재능을 알아차린 것이다. 도윤은 자기 일도 아니면서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네 사람 모두에게 각자 추천서를 써 달라고 부탁했다. 어차피 대학을 한 군데만 지원할 게 아닌 이상 그들이 추천하는 대학에는 모두 지원을 시킬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일부러 그림도 네 점을 골라서 가져왔다. 미대에 지원하려면 자신이 직접 완성시킨 작품을 한 점씩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각자의 직장으로 돌아가는 대로 오주현의 추천서는를 써서 한국으로 보내주기로 했다. 그러면 원서를 낼 때 다른 서류와 취합해서 한꺼번에 보내면 된다. 그 문제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자 까미유가 문득 그림 감정 대결 얘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이따 저녁 때 열릴 파티에서 에밀 파스쿠레와 감정 대결을 벌인다면서요?”

그는 가드너 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그로부터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 말에 다른 사람들이 깜짝 놀란 것과는 달리, 도윤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피식 웃었다.

“감정이야 늘 하던 건데요, 뭐. 보스턴에서 한 번 더 한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겠어요? 파티의 여흥 거리로 괜찮을 것 같아서 그냥 하자고 했습니다.”

그 말에 도윤의 지도교수였던 타일러 교수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이 박사 자네가 그냥 남들의 여흥을 돋우기 위해 감정 대결을 수락했다고? 개가 웃을 소리로군. 자네가 그림과 관련된 일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따 저녁 때 개망신을 당하는 꼴을 보게 되겠군.”

네 사람 모두 에밀이 도윤의 감정을 거스른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울러 그가 감정 대결에서 질 리가 없다고 믿는 분위기였다. 그 때문에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들이 아는 한 도윤은 그림에 관한 일에 있어서는 양보가 없는 인간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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