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어……. 엄청나네!”
말을 해놓고도 아차 싶었다. 기껏 한다는 말이 고작 ‘엄청나네’라고? 그게 명색이 미술품을 감정한다는 놈이 할 소리냐? 천하의 걸작을 앞에 두고?
하지만 드레스를 한껏 차려입고 나선 최서라의 자태는 정말 ‘엄청나다’는 말 외에는 다른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원래부터 미모가 뛰어난 그녀였지만 제대로 단장하고 나선 모습은 말 그대로 여신이었다.
가드너 미술관의 개관 기념 파티 초대장에는 몇 가지 분명한 요구 조건이 명시되어 있었다. 남자는 턱시도를, 여자는 반드시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도윤은 보스턴에서 턱시도를 빌려 입었지만, 최서라는 한국에서부터 아예 드레스를 가져왔다.
“누가 디자인 한 거야? 옷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이네?”
입을 떡 벌리고 자신을 쳐다보는 도윤을 향해 최서라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이지희 선생님 작품이에요. 작년에 고모가 선물해주신 건데 괜찮아 보여요?”
괜찮아 보이냐고? 말 그대로 죽인다. 날이 더운 때라 과하지 않은 노출을 한 엷은 하늘색의 드레스는 그녀의 몸매를 부드럽게 드러내주고 있었다. 옷의 디자인도 훌륭했지만 그게 최서라의 몸 위에 입혀지자 다른 사람은 절대로 입으면 안 될 것처럼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그 위에 목걸이와 귀걸이 등의 장신구까지 걸치자 몸 전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 보석들은 또 어떻게 세관을 통과했어? 모두 신고한 거야?”
말을 해 놓고 나서 다시금 주먹으로 입술을 쳤다. 이 무슨 직업 본능에 충실한 바보 같은 멘트란 말인가? 다행히도 최서라는 그의 말을 타박하지 않고 그냥 풋 하고 웃어주었다.
“당연히 크리스털 유리로 만든 이미테이션이에요. 외국에 나오면서 진짜 보석이 박힌 장신구를 들고 다니는 건 아무래도 부담스러워서요.”
“그렇구나. 하지만 서라가 걸치니까 진짜 보석보다 더 아름다운 거 같아.”
빈 말이 아니었다. 솔직히 도윤이 보기에는 최서라가 아니라 그녀의 목과 귀에 걸린 보석들이 오히려 호강을 누리는 것 같았으니까. 전문 분야는 아니지만 그래도 보석을 좀 볼 줄 안다는 도윤조차 처음에는 그게 유리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런 진심을 느꼈는지 그녀도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가드너 미술관의 개관 기념 파티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초대받았다. 정확한 인원은 알 길이 없지만 대충 보기에도 이백 명은 족히 넘어 보였다. 초대된 손님들 가운데는 상원 의원이나 하원 의원 같은 정치인들이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었고, 큰 기업의 임원이나 연예인, 심지어 스포츠 스타의 얼굴까지 눈에 띄었다.
“가드너 관장님의 인맥이 굉장히 넓은가 보네요. 유명 인사들이 이렇게 많이 참석할 줄은 몰랐어요. 저한테도 낯이 익은 사람들이 여러 명 보여요.”
최서라가 주변을 둘러보며 작게 속삭였다. 도윤 역시 예상보다 쟁쟁한 손님들의 면모에 약간은 놀란 상태였다. 다만 그는 올슨으로부터 미리 들은 얘기가 있었다.
“원래는 이 정도까지 거물급 손님들이 많이 참석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야. 그런데 작년에 잃어버렸던 그림들을 되찾으면서 미술관을 찾는 관람객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더라고.”
“도윤 씨가 렘브란트와 베르메르의 그림을 찾아준 그 사건 말이죠?”
“내가 찾아줬는지는 가드너 관장밖에 모르지. 언론에서도 그림을 되찾은 경위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 걸 보면 CIA에서 비밀 유지를 철저히 한 것 같아. 아무튼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품 도난 사건이 해결되었다고 하니까 미술관에 대한 대중적 인기가 갑자기 높아졌어.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정치인과 유명 인사들도 관심을 갖게 된 거 같아.”
“도윤 씨 덕분에 가드너 미술관이 부흥의 계기를 마련한 셈이네요?”
“내 덕분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 아무튼 미술관의 흑자가 크게 늘어난 건 사실일 거야. 그러니까 가드너 관장도 우리한테 비행기 표까지 보내주면서 초대를 한 거겠지.”
사실 특별 초대를 받아 오기는 했지만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손님들의 대부분이 도윤에게는 낯선 사람들이었다. 가드너 관장은 그런 그를 직접 데리고 다니면서 여러 유명 인사들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공식적으로는 그가 특별 초대 손님이라는 것을 밝히기 곤란했지만, 그래도 특별대우를 해주려고 노력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도윤과는 달리 몇몇 참석자들은 그의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고, 심지어 몇몇은 그를 알아보고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네거나 악수를 청하기도 했다. 트루쓰 앤 밸류 첫 시즌 우승자라는 것 말고도 얼마 전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홍도관의 낙찰 건 때문이었다.
“이 박사가 평범한 항아리 취급을 받던 도자기의 진가를 알아냈다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서양 회화에만 조예가 깊은 줄 알았는데 동양의 도자기에 대해서도 그렇게 뛰어난 안목을 가지고 계신 줄은 몰랐어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메트로폴리탄의 하이든 부장으로부터 앞으로 미술계를 이끌고 갈 천재 감정가라고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젊은 감정가를 그렇게까지 칭찬하는 건 처음 봤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다방면에 조예가 깊으세요? 보통 사람은 한 가지만 제대로 하기가 힘든 법인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제가 가지고 있는 소장품들도 한 번 감정해 주시겠어요?”
도윤은 그들의 인사에 일일이 대답하면서 되도록 좋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했다. 오윤수와 장은서의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서라도 유명 인사들과는 두루 안면을 익혀둘 필요가 있었다. 오늘의 인연이 조금이나마 밑거름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이었다.
최서라 역시 그의 팔짱을 끼고 우아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사람들을 상대했다. 어떤 면에서는 그녀의 미소가 도윤의 말재주보다 사람들에게 더 큰 호감을 가져다주었다.
“서라와 함께 오기를 정말 잘 했네. 이렇게 파티에 잘 어울리는 사람일 줄은 몰랐어.”
도윤이 조그맣게 속삭이자 최서라가 피식 웃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런저런 파티에 참석할 기회가 많았어요. 솔직히 내키지 않는데도 어쩔 수 없이 참석한 경우도 많았지만 덕분에 파티에서 사람들을 상대하는 요령을 배웠어요.”
그녀의 도움 덕분에 미국 상류 사회의 파티에 처음 데뷔한 것치고는 도윤 역시 부드럽게 분위기에 녹아들 수 있었다. 적어도 에밀 파스쿠레가 마이크를 들기 전까지는.
* * *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다들 잠시만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가드너 미술관에서 수석 감정사로 일하는 에밀 파스쿠레라고 합니다. 오늘 이 자리를 빛내주신 여러분을 위해 저희 가드너 미술관에서 조그만 여흥을 마련했습니다. 바로 미술품 감정이죠.”
에밀이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소개하는 순간, 가드너 관장이 끙 하고 신음 소리를 내었다. 내키지는 않지만 당사자인 도윤까지 승낙을 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허락한 일이다. 하지만 그는 에밀이 시작부터 미술관의 이름을 내세울 줄은 몰랐다. 그 바람에 이제부터 벌어질 일이 마치 관장 자신의 계획인 것처럼 보이게 된 것이다.
“한 달쯤 전에 저희에게 특별한 의뢰가 접수됐습니다. 한 신사분이 여덟 점의 그림을 감정해 달라며 맡겼지요. 그 분은 만약 그림이 진품으로 확인되면 가드너 미술관이 구입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저희로서는 나쁠 게 없는 제안이었죠. 감정료를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진품이라면 아무래도 경매에서 낙찰 받는 것보다 싸게 구입할 수 있을 테니까요.”
에밀은 그 대목에서 잠시 말을 멈추더니 손님들을 향해 장난스럽게 윙크했다.
“여덟 점의 그림은 모두 16~17세기에 북유럽에서 활동했던 유명한 화가들의 것이었습니다. 피터르 데 호흐, 아드리안 반 오스타드, 루카스 반 레이덴 등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었지요. 하지만 더 놀라운 점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 신사분이 가져온 여덟 점의 그림이 사실은 모두 2차 세계 대전 때 나치가 프랑스에서 약탈해간 것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말에 몇 군데서 가벼운 감탄성이 터져 나오면서 파티에 참석한 손님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2차 세계 대전 때 나치가 유럽 전역에서 미술품을 약탈했던 사건은 워낙 유명했다. 당시의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까지 여러 편 만들어졌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 그림들은 이미 원 소유주들에게 모두 반환되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반환되지 않고 남아 있는 작품들이 있다고?
“감정가로서의 실력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들이는 재주는 제법이네요. 저 사람이 트루쓰 앤 밸류 두 번째 시즌에 나갔으면 시청률이 제법 올랐겠어요.”
최서라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도윤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그 사이에 에밀이 마치 쇼 프로그램의 사회자처럼 무대 뒤쪽을 향해 손을 내밀며 소리쳤다.
“저희 미술관은 얼마 전에 그 그림들에 대한 감정을 끝마쳤습니다. 어떤 그림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과연 진작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의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해 보시죠.”
에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러 명의 직원들이 이젤을 들고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에밀의 뒤쪽에 이젤들을 나란히 세우고 그 위에 서로 크기가 다른 여덟 점의 그림을 올려놓았다. 사람들의 이목이 모두 그쪽으로 쏠렸다. 에밀은 일부러 옆으로 비켜나서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껏 그림을 감상하도록 잠시 내버려 두었다.
손님들은 모두 보스턴에서 가장 대표적인 미술관 가운데 한 곳의 개관 기념 파티에 초대된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미술품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안목에 대해 은근한 자신감마저 가지고 있었다. 손님들의 상당수가 그림 앞까지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저마다 한 마디씩 의견을 내놓았다.
“죄다 처음 보는 것들이야. 그래도 이건 분명히 호흐의 그림이군. 하지만 그의 그림 중에 뜨개질을 하는 여인을 그린 작품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저쪽 오른쪽에 있는 건 오스타드의 솜씨로 보여. 풍경을 처리하는 기법이 아무리 봐도 그의 것과 똑같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게 진작이라면 내가 사고 싶군.”
“저건 라이덴의 그림이군. 확실해. 그런데 그가 저런 그림도 그렸어?”
손님들은 여덟 점의 그림을 감상하며 저마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시된 그림들 가운데 분명히 자신들이 알고 있는 화가의 화풍과 유사한 것들이 여러 점 눈에 띄었다. 그러나 하나 같이 처음 보는 그림들이라는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선뜻 진작으로 단정 짓기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다. 느긋하게 그들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던 에밀이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처음 저 그림들을 대했을 때 저는 상당히 당혹감을 느꼈습니다. 눈치를 보니 여러분들도 비슷한 심정이신 모양이군요. 유명 화가들의 화풍과 아주 흡사하지만 완전히 낯선 그림들이 무려 여덟 점입니다. 아무리 봐도 어떤 것이 진작인지 쉽게 구분하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손님들 가운데 여러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자신만만한 미소를 머금은 에밀이 마이크를 든 채 그림들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손을 번쩍 들어 그 가운데 네 점을 가리켰다.
“여기 피터르 데 호흐의 ‘뜨개질하는 여인’과 ‘대장간 풍경’, 아드리안 반 오스타드의 ‘여행자와 수다 떠는 마을 사람들’, 그리고 루카스 반 레이덴의 ‘세 명의 동방박사’는 모두 진품입니다. 하지만 나머지 네 점은 아쉽게도 위작이지요. 지금부터 제가 하나하나 이유를 설명 드리겠습니다.”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을 쓱 둘러보던 에밀의 시선이 도윤과 마주쳤다. 순간 그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혔다. 마치 ‘너도 궁금하지? 잘 들어봐’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도윤은 하마터면 실소를 터트릴 뻔 했지만 꾹 참았다. 그래. 무지하게 궁금하다.
“먼저 호흐의 ‘뜨개질 하는 여인부터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호흐는 차분함 속에서 우러나오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중시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모습을 놀랍도록 정밀하게 묘사해내곤 했지요. 덕분에 우리는 그의 그림을 통해 400년 전 네덜란드의 평범한 일상을 접할 수 있습니다. 감동적인 평범함을 말이죠.”
프랑스계 미국인이라서 그런가? 에밀은 적절한 문학적 표현을 섞어가면서 감칠맛 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위아래를 오르내리는 감정의 고저와 멎고 서는 말의 흐름을 기가 막히게 조절하는 그의 설명 방식은 타고난 이야기꾼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람들의 마음을 절묘하게 매료시켰다.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될 정도였다.
“… 반면에 마지막에 있는 그림은 명백하게 아드리안 반 오스타드의 그림을 흉내 낸 위작입니다. 그는 민중의 고단한 삶을 해학적으로 그려내기를 좋아한 농민 화가였지요.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이면에 풍자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어서는 그런 풍자의 정신을 전혀 느낄 수 없어요. 붓을 놀린 솜씨는 훌륭하지만 어쩔 수 없는 모작에 불과하다는 증거입니다.”
물 흐르듯이 이어지던 에밀의 설명은 거의 40분이 넘어서야 끝났다. 아무리 작품이 여덟 점이나 된다지만 자기 입으로 말했던 파티의 여흥거리로는 너무 긴 시간이 걸린 것이다. 그 때문에 놀라운 말재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흥미를 보이던 손님들 가운데 일부는 다소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일부는 중간에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자아도취가 심한 인간이에요. 파티를 강연장으로 만들려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말을 많이 하는지 모르겠네요.”
에밀에 대한 최서라의 평가는 시종일관 가혹했다 하긴 첫 만남에서부터 곱지 못한 인상을 주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때 에밀이 다시 한 번 손바닥을 짝 쳤다.
“자, 지금까지 이 그림들에 대한 저의 감정 결과를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왜 여덟 점 가운데 절반인 네 점만을 진작으로 인정했는지 다들 이해하셨습니까?”
손님들 가운데 몇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밀이 씩 웃으며 사람들을 둘러봤다.
“하지만 이대로 끝내면 제 말이 너무 일방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시겠죠? 그런데 마침 이 자리에 여러분도 잘 아는 또 다른 감정가가 계십니다. 그 분을 이 자리에 모셔서 견해를 들어보았으면 하는데 어떻습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당연하다는 듯이 도윤에게로 쏠렸다. 파티에 참석한 감정가가 도윤 하나뿐은 아니었지만, 에밀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그에게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분들도 이미 눈치 채셨군요. 실력이 뛰어난 분이시니 어쩌면 제가 놓친 부분을 설명해주실 수도 있을 거라 믿습니다. 여러분! 트루쓰 앤 밸류 첫 시즌의 우승자이자 중국의 붉은 항아리를 발견한 천재 감정가. 이도윤 박사를 소개합니다.”
에밀이 이도윤의 이름을 부르자 다소 시큰둥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금 이쪽으로 향했다. 이미 자리를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 있던 사람들조차 흥미를 느꼈는지 도로 다가왔다. 도윤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다소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앞으로 나갔다. 그러자 에밀이 곧바로 그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려 했다.
“잠깐만요. 잠시만 그림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도윤은 에밀의 행동을 저지시킨 뒤 이젤에서 여덟 점의 그림을 하나씩 들어 올려 캔버스의 뒷면을 살폈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그것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에밀이 마이크를 들이대며 물었다.
“자, 그림을 모두 살피셨으면 말씀해 주시죠. 이 박사님께서는 이 시대에 가장 뛰어난 젊은 감정가 가운데 한 명으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조금 전에 제가 이 그림들을 감정한 결과를 모두 들으셨을 겁니다. 어떻던가요? 제 견해에 동의하십니까?”
도윤이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일부는 동의하지만 아쉽게도 일부는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사람들 입에서 오오 하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두 감정가의 생각이 다르다고 하자 흥미가 부쩍 일어난 게 분명했다. 에밀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부러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 그렇습니까? 저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감정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천재 감정가께서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부분이 있는가 보군요.”
“그다지 불만스럽지는 않습니다. 저를 비롯한 모든 감정가들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언제나 실수를 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죠. 아마 감정가라면 누구나 다 올바른 감정에 실패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건 감정가들의 숙명이나 다름없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오늘 제 감정에도 바로 그런 실수가 있었다는 뜻이군요.”
“글쎄요. 실수를 한 게 누구인지는 장담하기 어렵지요. 다만 파스쿠레 씨의 견해가 저와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더 궁금하군요. 그럼 결론부터 들어보기로 하죠. 이 박사께서 보시기에는 이 그림들 가운데 어떤 게 진작이고 어떤 게 위작인 것 같습니까?”
도윤은 천천히 좌중을 쓸어보았다. 파티에 참석한 이들 가운데 거의 절반 이상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입가에 미소를 슬쩍 머금은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선언했다.
“저 여덟 점의 그림들은 모두 위작입니다. 아쉽게도 진작이 하나도 없군요.”
순간 여기저기서 헉 하고 헛바람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었다. 두 사람의 견해가 다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설마 진작이 한 점도 없다고 얘기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시종일관 여유 만만한 미소를 입에 물고 있던 에밀의 얼굴도 와락 일그러졌다. 그가 매서운 눈빛으로 도윤을 쏘아보았다. 도윤의 말은 그에게도 뜻밖이었던 것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