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여덟 점 가운데 진작이 하나도 없습니까? 그게 이 박사의 견해예요?‘
에밀은 노골적으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참석한 손님들의 표정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자 도윤이 안타깝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네. 저도 내심으로는 이 가운데 하나라도 진작이 있기를 바랐습니다. 저 역시 감정가이기 이전에 미술 애호가의 한 사람이니까요. 호흐나 오스타드의 걸작이 하나라도 더 발견된다면 그것만큼 기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위작이군요.”
에밀은 원래부터 이 자리를 많은 유명인사들 앞에서 벌이는 자신과 도윤의 감정 대결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사람들에게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진정한 실력자는 조급하지 않은 법이니까. 하지만 예상을 벗어난 도윤의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발끈하고 말았다. 표정 관리에 실패한 것이다.
그가 위작이라고 감정한 작품들에 대해 도윤도 같은 견해를 제시한 경우에는 문제될 게 없었다. 하지만 나머지 네 점도 모조리 위작이라고? 그건 내가 많은 손님들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진작이라고 소개하고 설명까지 했던 건데?
그는 사실 도윤이 뛰어난 감정가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는 확실히 자신에게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전시된 여덟 점들 중에는 워낙 뛰어난 솜씨로 만들어진 위작이 무려 네 점이나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고 해도 이 자리에서는 기껏해야 내 감정 결과를 고스란히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야. 당장은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을 텐데 별 수 있겠어? 섣부르게 이견을 제시했다가 망신을 당하느니 그냥 내가 했던 설명을 따라하는 쪽을 택하겠지. 그럼 사람들은 천하의 이도윤도 에밀 파수크레한테는 별 수 없다고 생각할 거야.’
만약 자신이 도윤의 입장이라면 애초부터 이런 말도 안 되는 감정 대결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그의 자존심을 자극했던 건데 역시 아직 젊은 녀석이라서 그런지 덥석 미끼를 물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도윤은 미끼를 문 것도 아니라 낚싯꾼은 자신의 손등마저 물어뜯겠다며 달려들고 있었다.
‘어리석은 놈. 난 한 달이라는 시간을 두고 과학적인 방법까지 동원해서 감정했어. 그런데 너는 여덟 점이나 되는 그림을 대충 쓱 보고 결론을 내렸다는 거야? 가짜를 진짜라고 잘못 감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란 말이지? 어디 오늘 한 번 제대로 망신을 당해 봐라.’
그는 오늘의 대결이 이도윤을 희생양으로 삼아 감정가로서의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도윤이 자신더러 감정 결과를 먼저 발표해달라고 했을 때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자신의 견해를 훔치려 한다고 지레짐작한 것이다. 에밀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되돌아왔다.
“저희 둘 다 위작이라고 감정한 작품들에 대한 의견은 나중에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보다는 제가 진작이라고 감정한 것까지 모조리 위작이라고 판단하신 이유를 듣고 싶은데요. 아마 이 자리에 계신 손님들도 무엇보다 그 점을 궁금해 하실 것 같은데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다들 그 점을 궁금해 하고 있었으니까. 도윤이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파스쿠레 씨가 위작이라고 감정한 것들에 대해서도 조금 보충 설명해야 할 내용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파스쿠레 씨가 진작이라고 감정한 그림들에 대해 먼저 설명하도록 하죠. 먼저 피터르 데 호흐의 ‘뜨개질 하는 여인’부터 살펴볼까요?”
도윤이 걸음을 옮겨 호흐의 그림 앞에 가서 섰다.
“그림의 구도와 색깔의 배합, 정교하면서도 깔끔한 경계선의 처리는 물론이고 화면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정서에 이르기까지, 전체적인 분위기는 호흐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할 때 놀라울 정도로 흡사합니다. 위작자가 오랫동안 그의 그림을 연구한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그가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 에밀이 참지 못하고 불쑥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작이라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아쉽지만 화가들 가운데는 남의 작품을 그대로 흉내 낼 수 있는 솜씨를 지녔으면서도 딱 한 가지가 부족해서 진정한 예술가로 거듭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바로 독창성입니다. 이 그림을 그린 위작자가 바로 그 안타까운 유형의 화가입니다. 신의 눈과 손을 가졌으면서도 정작 예술가의 혼을 품지 못한 불운한 천재지요.”
“그렇군요. 하지만 천재를 안타까워하기 전에 이 작품이 왜 위작인지부터 먼저 정확하게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손님들이 모두 그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군요.”
에밀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도윤은 그 웃음 뒤에서 파랗게 빛나는 악의를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잘 하면 한 대 치겠군. 그는 가볍게 혀를 차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말씀드렸듯이 호흐의 ‘뜨개질하는 여인’은 저조차도 진작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정교하게 그려진 위작입니다. 아마 다양한 호흐의 작품을 참조해서 필요한 부분들을 여기저기서 베낀 다음에 조합한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실내의 가구와 여인의 모습, 창밖에서 비쳐드는 명암의 처리 등이 다소 어색하게 어우러져 있어요.”
“글쎄요? 하지만 그런 식의 평가는 감정가에 따라 견해가 갈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너무 주관적인 견해에 의존해서 위작으로 단정하시는 거 아닙니까?”
에밀이 또 끼어들었다. 도윤은 일부러 그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원래 감정가의 안목 감정이라는 게 주관적인 요소가 상당히 개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 같은 젊은 감정가는 경험이 많은 대가들을 넘어서기 힘든 거죠. 흔히 말하는 전문적인 주관성이라는 건 세월이 쌓여야지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저도 이 그림을 감정하는 데 있어서 제 주관이 개입되었다는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손님들을 쓱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그림에서 여인이 뜨개질을 하고 있는 부분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 부분만은 이 그림이 위작이라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범죄는 없다는 말이 있죠? 이 부분은 바로 그런 주장을 입증해주는 증거입니다.”
도윤이 가리킨 곳은 여인이 뜨개질 하고 있는 물건, 이제 막 온전한 스웨터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었다. 본격적인 설명이 시작되면서 그의 말이 조금 더 빨라졌다.
“뜨개질로 목도리나 옷을 만드는 기술은 본래 서양에서 비롯됐습니다. 하지만 근대화 이후에 중국과 일본, 한국 등을 비롯한 아시아에도 빠른 속도로 전파됐지요. 그 때부터 아시아 각국에서 새로운 뜨개질 문양과 기법이 속속 개발되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몇 개의 대나무 바늘로 그렇게 창조적이고 다양한 문양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놀라운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지요. 개중에는 서양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도 많습니다.”
그때 손님들 가운데 누군가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럼 이 박사는 그림 속의 뜨개질 문양이 네덜란드의 게 아니라고 보는 겁니까?”
도윤은 누군지 모를 그 손님을 향해 미소를 씩 지어보였다.
“맞습니다. 뜨개질이나 자수는 제 전문분야가 아닙니다. 하지만 다행히 이 문양은 저도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한때 북경을 중심으로 유행되었다가 나중에는 상해와 홍콩까지 퍼져나갔던 독특한 양식이거든요. 중요한 건 이 문양이 1980년대 이후에 중국에서 개발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400년 전의 네덜란드 아낙네는 알 수 없는 문양이라는 거죠.”
파티장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트루쓰 앤 밸류에서 도윤이 여인의 초상화를 감정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여인의 옷에 장식된 레이스를 가지고 그 그림이 위작임을 밝혀냈었다. 그런데 오늘, 도윤은 또 다시 얼핏 보면 그냥 스쳐지나갈 수도 있는 뜨개질 문양을 가지고 그림이 위작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저 문양이 유럽에는 없었다는 걸 자신할 수 있습니까?”
에밀이 씹어뱉듯이 말을 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 때늦은 저항에 불과했다.
“글쎄요. 혹시 모르죠. 과거의 어떤 네덜란드 아낙네가 저 그림에서 보는 것과 똑같은 문양을 독자적으로 개발해 냈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은 단지 지금까지 전해지는 어떤 기록에서도 19세기 이전의 유럽에 저런 뜨개질 문양이 있었다는 사실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예요.”
도윤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에밀에게서 시선을 돌려 손님들을 쳐다봤다.
“하지만 저로서는 이 그림이 적어도 80년대 이후에 그려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중국이나 홍콩에서 만들어진 위작일 가능성이 클 겁니다. 아니면 그쪽 출신의 중국계 이민자가 그렸을 수도 있고요. 아예 엉터리로 그렸다면 모를까, 중국에서 유행했던 뜨개질 문양을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보아 어쩌면 뜨개질에 익숙한 중국 여자일 수도 있겠군요.”
에밀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잠시 화를 억누르려고 애썼다. 도대체 어떤 감정가가 중국에서 한때 유행했던 뜨개질 문양까지 기억한단 말인가? 간신히 끓어오르는 울화를 진정시킨 그가 이번에는 다른 그림들을 가리켰다.
“좋습니다. 호흐의 그림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있다고 치죠. 나머지 그림에 대해 얘기해 봅시다. 가령 제가 진작이라고 감정한 아드리안 반 오스타드의 ‘여행자와 수다 떠는 마을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거기도 하필이면 중국에서나 쓰이는 농기구가 그려져 있던가요?”
그의 어조는 상당히 도전적이었다. 하지만 도윤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설마 그런 운이 매번 반복될 리가 있겠습니까? 파스쿠레 씨가 진작으로 감정한 나머지 세 작품은 저로서도 진위를 판단하기 려울 정도로 각 화가들의 화풍을 그대로 재현해 냈어요. 솔직히 이 그림을 만든 위작자가 누구일지 궁금할 정도입니다. 한 번 만나보고 싶을 정도로 빼어난 솜씨에요.”
“하지만 결국 진작이 아닌 위작으로 본다는 얘기 아닙니까? 이유가 뭐죠?”
“그 전에 먼저 한 가지 묻겠습니다. 가드너 미술관에서는 이 그림들의 물감 시료를 채취해서 감정 의뢰를 해 봤겠지요? 결과가 어떻게 나왔습니까?”
에밀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이미 전문적인 연구 기관에 각 그림들의 물감 성분을 분석해 달라고 의뢰했습니다. 그 결과 예외 없이 17세기에 네덜란드에서 널리 쓰였던 물감을 사용했다는 결과를 통보받았지요. 아울러 캔버스 천의 재질 역시 예전에 사용되던 것입니다.”
“역시 그렇군요. 이 정도로 정교한 위작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캔버스나 물감의 재료를 선택하는 데서 실수를 범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혹시 이것도 검사를 의뢰했나요?”
도윤이 이젤 위에 걸려 있던 그림을 하나 들어서 뒤집었다. 그러자 캔버스 뒷면에 나치 독일을 뜻하는 ‘卍’자 표시의 스탬프가 선명하게 찍혀 있는 게 보였다. 사람들의 입에서 다시 탄성이 터져 나오는 순간 도윤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는 히틀러의 명을 받아 유럽 전역에서 수많은 미술품을 약탈했습니다. 그들은 약탈한 미술품이 독일 제국의 소유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캔버스의 뒷면에 이처럼 나치문양이 새겨진 스탬프를 마구 찍어댔죠.”
“그렇다면 그 스탬프는 이 그림들이 나치가 약탈했던 것이 확실하다는 증거가 되겠군요.”
에밀이 단정하듯 불쑥 끼어들었다. 하지만 도윤은 애매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이 스탬프가 파스쿠레 씨가 진작이라고 감정했던 작품들에만 찍혀 있었다면 확실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위작으로 감정한 그림들에도 동일한 스탬프가 찍혀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건 좀 이상하지 않나요?”
도윤은 그 말과 함께 진열된 그림들을 하나씩 들어 올려 뒤집었다. 그러자 그의 말처럼 여덟 점의 그림 모두의 뒷면에 나치 문양의 스탬프가 찍혀 있는 게 보였다.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하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2차 세계 대전 때 자행된 독일군의 미술품 약탈은 기본적으로 큄멜 보고서에 기초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나폴레옹 전쟁을 비롯한 이전의 여러 전쟁 기간 동안 독일에서 해외로 빠져나간 미술품들의 목록을 적은 보고서였죠. 큄멜 보고서는 그걸 되찾겠다는 의도에서 작성된 것이었지만 실제 약탈은 보고서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어서 무분별하게 자행됐습니다.”
도윤은 그 대목에서 잠시 말을 멈추고 손님들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큄멜 보고서가 원래 세 항목으로 구분되어 작성되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일부에 불과했다. 그것을 확인한 도윤이 천천히 설명을 했다.
큄멜 보고서의 첫 번째 항목은 해외로 빠져나간 독일 소유의 미술품들 가운데 소재지가 확인된 것들이었다. 큄멜은 그 작품들을 중요도에 따라 다시 몇 부분으로 나누고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들을 우선적으로 회수할 것을 건의했다.
세 번째 항목에 포함된 작품들은 해외로 빠져나갔다가 이미 독일로 돌아와 있는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굳이 약탈할 필요가 없었지만 큄멜은 그 가운데서도 히틀러의 취향에 맞는 소장품들을 모두 수거할 것을 주장했다. 철저하게 독재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주장이었다.
도윤이 문제 삼은 것은 두 번째 항목에 열거된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과거 독일에서 약탈된 게 분명하지만 당시까지 아직 소재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작품들이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여덟 점의 그림들이 처음 소개되었을 때 속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그림을 보고 제목을 유추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는 했지만 하나 같이 큄멜 보고서의 두 번째 항목에서 언급한 것들이었거든요.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어째서 과거 독일군도 찾지 못했던 작품들이 버젓이 나치 문양이 찍힌 채 상자 속에 들어가 있었을까하고요.”
사람들이 또 다시 웅성대기 시작했다. 도윤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짐작한 탓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좌중을 한 바퀴 둘러본 그가 선언하듯 말을 뱉었다.
“저는 이 그림의 위작자가 큄멜 보고서를 아주 잘 이용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 항목에서 언급된 그림들은 분명히 존재했던 것들이지만 현재까지 아무도 실물을 확인하지 못한 작품이니까요. 위조하기에는 딱 좋은 대상이 아닐까요?”
“하지만 그건 너무 억측입니다. 어쩌면 말 그대로 과거 사라졌던 작품들이 수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운 좋게 발견되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에밀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미 평정심을 잃은 그는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하지만 도윤은 그의 항의에 그저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큄멜 보고서에서도 소재지를 확인하지 못했던 작품들에 어째서 나치 문양이 찍혔을까요?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는 거기서 잠시 말을 멈췄다가 씩 웃었다. 지금 당장은 그도 명확히 입증할 수 없지만 어쩌면 마지막 한 방이 될 수 있는 카드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저는 이 나치 문양에 대해서도 상당히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술관 측에 한 가지 과학적인 감정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그는 다시 그림 하나를 집어 들어 사람들에게 뒷면을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나치 문양이 찍힌 스탬프를 가리켰다.
“잉크는 크게 필기용 잉크와 인쇄용 잉크로 나뉩니다. 쉽게 굳으면 안 되는 필기용 잉크와는 달리 인쇄용 잉크는 점성을 높이고 빨리 마르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첨가물을 섞기 마련이죠. 그런데 그 성분이 시대에 따라 큰 차이를 보입니다. 저는 이 스탬프 잉크의 성분을 조사하면 정확히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확인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설마 나치가 시간 여행을 하는 기술을 개발해서 현대에 개발된 잉크를 가져다쓰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물론 도윤은 이미 그 잉크에서 희미하게 반사되는 형광등 불빛의 색깔을 보고 적어도 21세기 이후에나 개발되어 쓰이고 있는 스탬프용 잉크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의 뛰어난 눈썰미에만 의존해서 짐작해낸 사실이기 때문에 명확한 입증을 위해서는 역시 과학적 성분 분석이 필요했다.
도윤의 설명이 모두 끝났을 때 에밀의 얼굴은 이미 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가 당황과 공포,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석상처럼 굳어 있는 모습을 본 가드너 관장이 쯧 하고 혀를 찼다. 그가 손을 들어 지시를 내리자 미술관 직원들이 서둘러 이젤과 그림을 수거해서 물러났다. 여전히 석고상처럼 굳어 있는 에밀 역시 누군가에 의해 부축을 받으며 퇴장했다.
그는 거의 넋을 잃은 상태였다.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계획한 감정 대결이 오히려 스스로를 기어오르기 힘든 절망의 낭떠러지로 떨어트리는 끔찍한 결과를 낳고 만 것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