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원래 루이스 체스맨 세 세트를 만들려면 나이트 하나와 워더 네 개가 더 필요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워더 하나가 소더비 경매에 나타나서 100만 파운드에 낙찰되었다. 이제 나이트 하나와 워더 세 개만 더 있으면 완전한 세 세트의 루이스 체스맨을 완성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느닷없이 그 중 두 개가 등장한 것이다.
“이제 나이트와 워더가 등장했으니까 모자란 것은 워더 두 개뿐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한 세트는 더 완성할 수 있는 기물이 모인 거예요. 혹시 이것들을 파실 생각입니까?”
도윤을 쳐다보는 스콧의 눈길이 강렬했다. 꼭 팔아달라는 뜻이 담겨있는 눈빛이었다. 도윤은 일부러 즉답을 하지 않고 최서라의 눈치를 봤다.
“글쎄요. 이건 저희 두 사람이 함께 기념으로 간직하기로 한 것이거든요. 제 마음대로 팔 수 있는 게 아닌데다, 이왕 팔려면 경매에 올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스콧은 도윤의 의중을 금세 알아차렸다. 그의 눈길이 이번에는 최서라를 향했다. 그러자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마지못한 듯 대답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대영박물관에서 구입할 생각이 있다면 굳이 경매에 올리지 않고 적당한 금액에 넘겨드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러려면 한 가지 조건을 들어주셔야 해요.”
스콧의 목소리가 급해졌다.
“조건이요? 어떤 조건입니까?”
“저희가 나이트와 워더를 넘겨드리면 에든버러에 있는 체스맨들을 가져와서 한 세트를 더 만들 수 있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만약 그렇게 되면 저희도 그 작업에 참여시켜 주세요.”
“작업에 참여시켜 달라고요? 구체적으로 어떤 작업 말입니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지금 전시되어 있는 체스맨 세트는 원래의 한 세트가 아니라는 게 저희들의 생각이에요. 서로 다른 세트의 기물이 뒤섞여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왕 두 박물관의 기물을 한데 모아 새로 두 개의 세트를 완성시킬 생각이시라면 최대한 본래의 세트를 재현하고 싶다는 거예요.”
“이 박사님과 최 박사님이 직접 기물들을 골라 세트를 재구성하고 싶다는 뜻입니까?”
“네. 그렇죠. 저도 나름 공예품에 관심이 많아서 한 번쯤은 그렇게 보람된 일을 하고 싶거든요.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이 나이트와 워더는 대영박물관 측에 넘기겠어요.”
생각지도 못했던 최서라의 요구에 스콧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세트를 재구성하는 일은 엄밀한 고증을 거쳐야 하는 작업이라서…….”
“저희가 조합한 세트 구성 그대로 박물관에 전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저와 이 박사는 그냥 그 작업을 직접 해 보고 결과를 사진으로 찍어서 간직하는 정도면 만족이에요. 그렇게만 해 주시면 박물관이 저희들의 견해를 따르든 안 따르든 상관하지 않겠어요.”
그제야 스콧의 얼굴에 안도의 웃음이 맺혔다.
“그 정도라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두 분 모두 이 분야의 전공자이고, 이 박사께서는 요즘 명성이 높은 감정가가 아니십니까? 아마 학예실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스콧은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누군가와 제법 길게 통화를 하더니 전화를 끊고 미안한 얼굴로 두 사람에게 양해를 구했다.
“일단 학예실장님에게 간략하게 보고를 드리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휴대폰 번호나 묵고 계신 호텔과 방 번호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일단 돌아가 계시면 저희가 논의를 한 다음에 다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최서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이트와 워더를 들어올렸다.
“저희는 상관없어요. 그런데 충분히 논의를 하려면 아무래도 이게 필요하지 않을까요? 일단 물건이 진품인지부터 감정을 해봐야 얘기가 효과적으로 진행될 수 있잖아요.”
“그렇긴 합니다. 그럼 저희가 나이트와 워더를 잠시 빌릴 수 있겠습니까?”
“얼마든지요. 보관증만 하나 써 주시면 돼요.”
“감사합니다. 정말 친절하시군요.”
스콧은 곧바로 장예주를 비롯한 세 사람을 자신의 사무실로 데리고 가서 보관증을 써 주었다. 그가 사인한 뒤 장예주가 다시 증인 자격으로 함께 서명하자 스콧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최서라에게 악수를 청했다. 최서라 역시 웃으면서 물었다.
“저희는 당분간 런던에 머무를 테니까 서두르지 마시고 천천히 상의해서 결과를 알려주세요.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어떻게 할지 결정이 나겠죠?”
“그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그 안에 결론이 안 나면 기물을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박물관이 자신들의 손에 들어온 기물을 다시 돌려주겠다고? 결론이 어떻게 나든 그들은 반드시 나이트와 워더를 구입하려 들 거라는 게 도윤의 생각이었다.
보관증을 받은 세 사람은 그대로 대영박물관을 빠져나왔다. 애초에 주 목적이 루이스 체스맨 세트를 확인하려던 것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곳에 머물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세 사람이 그레이 코트로 다시 나오자 장예주 박사가 물었다.
“아무래도 여기 오기 전부터 두 사람 사이에 뭔가 얘기가 되어 있었던 것 같은데, 정말 나이트와 워더를 박물관 측에 넘길 거야?”
그 말에 최서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값만 제대로 쳐 주면요. 어차피 세트를 만들 수도 없는 걸 달랑 두 개만 가지고 있어서 뭐하겠어요? 저희들 덕분에 한 세트가 더 만들어지면 이곳과 에든버러 두 곳에 온전한 세트를 전시할 수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럼 여러 사람에게 좋은 일이잖아요.”
“하긴 대영 박물관이 설마 경매 기록까지 있는 물건을 가지고 값을 후려치지는 않겠지. 그거 두 사람의 공동 소유라고 했지? 두 개면 최소 200만 파운드일 테니까 팔게 되면 결혼식 비용은 충분히 나오겠네.”
도윤과 최서라는 그냥 웃고 말았다. 200만 파운드면 결혼식 비용이 아니라 신혼여행으로 초호화 세계 일주를 하고도 남을 것이다. 물론 시간이 그렇게 넉넉하지는 않겠지만.
* * *
스콧의 부탁 때문에 갑자기 며칠간의 여유가 생겼다.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향한 이후로 이렇게 아무런 일정 없이 한가한 시간을 갖기는 처음이었다. 도윤과 최서라는 모처럼 생긴 둘 만의 시간을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어디 특별히 가고 싶은 데 있어?”
도윤의 물음에 최서라로부터 즉각적인 대답이 나왔다.
“런던 아이를 타고 싶어요.”
높이가 135m인 런던 아이는 템스 강변에 위치한 거대한 회전 관람차다. 런던의 대표적인 명물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일종의 거대한 놀이기구였다. 어린 아이도 아니고 굳이 여러 번 탈 만한 건 아니라는 게 도윤의 생각이었다.
“그건 저번에도 나하고 같이 탔었잖아. 근데 또 타고 싶어?”
“또 타고 싶어요. 그걸 타면 높은 데서 런던의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어서 좋아요.”
“높은 곳에서 런던 풍경을 보고 싶다면 차라리 샤드 빌딩 전망대를 가는 게 낫지 않아? 거기도 높이가 300미터나 되는데다 편안히 앉아서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실 수도 있잖아.”
“샤드 전망대는 템스 강하고 너무 멀어요. 게다가 움직이지도 않잖아요. 그건 고개가 뻣뻣한 거만한 거인의 머리에 불과해요. 움직이지 않는 건 인생의 진리를 품을 수가 없다고요.”
“그럼 런던 아이는 인생의 진리를 품고 있다는 거야? 단순한 놀이기구에 너무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거 아냐?”
도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 아가씨가 오늘따라 조금 이상하네? 하지만 최서라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런던 아이가 정상을 향해 올라갈 때는 늘 가슴이 두근거려요. 발밑으로 보이는 런던의 풍경이 점점 확대되면서 내가 굉장히 대단한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그러다가 다시 내려올 때는 기분이 차분히 가라앉아요. 한껏 들떴던 마음도 다시 겸손해지고요.”
“그거야 회전 관람차니까 당연한 거 아냐? 올라갔으면 다시 내려와야지. 잠깐 올라갔다 내려오는 사이에 기분의 변화가 그렇게 다양하게 변하는 것도 꼭 좋은 건 아닌데……. 서라가 의외로 아직 소녀 같은 감성을 가지고 있었네?”
최서라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재벌가에서 태어난다는 건 처음부터 샤드 전망대처럼 높은 곳에서 인생을 시작하는 거나 마찬가지에요. 관람차처럼 천천히 올라가는 게 아니라 눈을 뜨는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을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사는 거죠. 심지어 웬만해서는 내려갈 걱정을 할 필요도 없어요. 그래서 별 생각 없이 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거만한 인간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얘기가 갑자기 왜 이렇게 심각해져? 도윤은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갑자기 안 하던 소리를 하네? 서라는 거만하지 않아. 재벌가 사람 같지 않게 충분히 겸손하다고. 근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혹시 무슨 일 있어?”
최서라의 눈가에 갑자기 물기가 맺혔다.
“오늘 아침에 고모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할아버지가 다시 입원하셨대요.”
“회장님께서? 갑자기 몸이 안 좋아지신 거야? 그럼 일정 취소하고 바로 귀국하자.”
도윤이 깜짝 놀라서 그녀의 손을 잡자 최서라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도윤 씨에게 치료 능력이 있다는 건 알지만 그걸로는 더 이상 할아버지를 치료할 수 없어요. 알잖아요? 노화로 인해서 몸이 쇠약해지는 건 치료 능력으로도 어쩔 수 없다는 걸.”
도윤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최인탁 회장이 처음 병원에 입원했을 때만 해도 분명한 질환이 있었다. 그래서 도윤도 치료 능력을 이용해 그의 몸을 완쾌시키는 게 가능했다.
그 이후로도 그는 이따금씩 최 회장을 만나 안마를 빙자해서 치료 능력을 사용했다. 그의 건강을 유지시켜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치료를 거듭할수록 이른바 약발이 떨어진다는 걸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라스푸친의 목걸이로부터 받은 치료 능력이 질병을 치료하는 데는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지만, 그래도 자연스러운 노화까지 되돌리지는 못한다는 뜻이었다.
도윤이 한껏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자 최서라가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이 처음 입원하시는 것도 아니니까. 병원에 며칠 계시다가 금방 또 퇴원하실 거예요. 고모도 그렇게 얘기하셨어요.”
“그래도 그렇지. 여기 일은 나중에 처리해도 되니까 일단 귀국하자. 루이스 체스맨 따위가 뭐가 중요해? 가족이 먼저지.”
“할아버지께 이미 전화 드렸어요. 그랬더니 절대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시더라고요. 담당의사하고도 통화해서 당장 어떻게 되지는 않을 거라는 얘기를 들었어요. 걱정 말아요.”
도윤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마음이 울적해 진거야? 갑자기 지금 있는 자리에서 뚝 떨어질까 걱정도 되고?”
그의 말에 최서라가 애매한 표정으로 웃었다.
“제가 아까 재벌가에서 태어난다는 건 전망대에서 인생을 시작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했죠? 근데 사실 정확하게는 전망대가 아니라 옥상이에요. 그것도 난간이 없는. 모든 걸 내려다보며 살 수는 있지만 한 발짝만 잘못 내딛으면 까마득한 밑으로 떨어지는 곳이에요.”
“무서워진 거야? 그런 곳에서 사는 게?”
“무서워진 게 아니라 늘 무서웠어요. 그 옥상은 사실 보기보다 몹시 비좁거든요. 늘 남의 등을 떠밀어서 밑으로 떨어트리려는 사람들도 많고요.”
도윤은 최서라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는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잠시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가만히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누가 서라를 밀어서 떨어트리려고 하면 내가 손목을 부러뜨려 줄 테니까. 그리고 그냥 뛰어내리고 싶어지면 언제라도 얘기해. 적어도 내가 낙하산은 되어줄 테니까.”
최서라가 도윤의 품안으로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 말없이 서로를 포옹한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도윤은 마음이 착잡하고 안쓰러웠다. 돈이든 권력이든 보통의 사람들에게 허용되는 선을 넘어서는 순간 평온함이 사라진다. 막연히 알고 있던 그 추상적인 얘기가 자신의 곁에 있는 여자에게는 일상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괜히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최서라를 밀어서 떨어트리려는 사람들이란 분명히 일가친척들일 것이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외아들인 아버지 밑에서 또 다시 외아들로 태어나 자란 그로서는 집안 식구끼리의 심각한 갈등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채 자랐다. 자신으로서는 차마 짐작도 되지 않는 그 끔찍한 일을 최서라는 어릴 때부터 말없이 가슴으로 삭이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는 문득 포옹을 풀고는 최서라에게 말했다.
“근데 그거 알아?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도 언제나 밑으로 떨어질 것을 걱정하며 산다는 걸. 그게 어떤 건지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해 줄까?”
그 말에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던 최서라가 풋 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도윤 씨가 뭐가 평범하다고요? 누가 그래요? 아마 도윤 씨를 아는 사람들 중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아직도 남자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구나? 나 무지하게 평범해. 아무튼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어떤 공포를 느끼며 사는지 알 수 있는 곳으로 데러가 줄게. 가자.”
“그런 데가 있어요?”
“있지. 그것도 이 영국 땅에.”
도윤은 그 길로 차를 하나 렌트해서 런던을 출발했다. 거의 쉬지도 않고 세 시간 가까이 운전한 끝에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영국 남부의 해안 절벽으로 유명한 세븐 시스터즈였다.
절벽 위에서 보면 세븐 시스터즈는 그냥 평범한 초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해안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갑자기 땅이 뚝 떨어져나간 것처럼 깎아지른 절벽이 나타났다. 마치 한순간에 평지가 사라진 듯한 느낌을 주지만, 특이하게도 절벽의 단면이 온통 새하얀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멀리서 보면 녹색과 흰색이 기묘하게 어우러진 장관을 연출했다.
“여기가 평범한 사람들이 느끼는 추락의 공포를 알 수 있는 곳이라고요?”
차에서 내린 최서라가 절벽 가장자리를 따라 걸으며 물었다. 도윤은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멀리 한가하게 풀을 뜯고 있는 소와 양들을 가리켰다.
“저기 봐. 저쪽은 그냥 얕은 언덕이 구비치는 평범한 초원에 불과하잖아? 하지만 저기서 이쪽으로 조금만 걸어오면 곧바로 하얀 절벽이 해안을 향해 수직으로 떨어지는 모습이 나타나는 거지. 자칫 실수 하면 곧바로 천국행이라고.”
해안까지 60미터 정도의 높이를 가지고 있는 세븐 시스터즈의 절벽 가에는 실제로 일체의 난간이 없었다. 자연의 원형을 보존한다는 취지에서 그런 것인데, 그 때문에 요즘도 심심치 않게 관광객들의 추락 사고가 일어나곤 한다. 한때는 자살의 명소로 불리기도 했었다.
게다가 평소에도 나무가 휘어질 정도로 거센 바람이 자주 불기 때문에 절벽 가까이 가는 것은 몹시 위험했다. 대신 언제든지 발끝 아래로 하얀 절벽이 내려다보이는 곳까지 접근하는 게 가능했다. 도윤은 최서라와 함께 절벽 끝까지 다가가 손으로 밑을 가리켰다.
“여길 봐. 사방이 온통 하얀 절벽이라서 보기에는 참 아름답지?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만 실수하면 그대로 인생 아웃이라고. 보통 사람들이 사는 평평한 땅에도 이렇게 갑작스러운 절벽이 도처에 숨어 있어. 바닥처럼 보이는 곳에도 늘 더 추락할 곳이 있는 거지.”
“하지만 샤드 전망대는 여기보다 훨씬 높아요. 더 무섭기도 하고요.”
“십 미터에서 떨어지든 백 미터에서 떨어지든 추락하면 죽는다는 점에서는 다 똑같아. 재벌가의 일원이든 평범한 소시민이든 늘 발밑을 조심해서 살아야 하는 건 마찬가지라고. 어떤 면에서는 평번한 월급쟁이들의 삶이 더 무서워. 여기서 더 떨어지면 진짜 비참해지거든.”
최서라는 도윤이 뭘 말하려는지 알아들었다. 그녀는 하얀 절벽 가장 자리 끝까지 조심스럽게 다가서더니 그곳에서 한 동안 심호흡을 하면서 먼 수평선을 바라봤다. 한참 동안 주변 풍광을 구경하던 그녀가 문득 돌아서며 쌩긋 웃었다.
“그래도 좋네요. 떨어지면 큰일이지만 그 전까지는 눈이 참 즐거운 곳이에요.”
도윤이 씩 웃으며 그녀의 곁에 섰다.
“위험하지 않은 삶이란 없어. 지금은 높은 곳에서 영원히 살 것 같아도 언젠가는 밑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점도 마찬가지고. 그걸 너무 무서워하지 마. 다만 우리는 옥상이나 절벽에서 뛰어내리지 말고 런던 아이처럼 천천히 내려가자고.”
최서라가 다시 도윤의 품에 안겼다. 두 사람은 한 동안 서로를 꼭 안고 있다가 문득 도윤이 한손으로 그녀의 턱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두 사람의 입술이 서로 부딪혀 떨어질 줄 몰랐다. 말썽꾸러기처럼 세차게 몰아치던 바람이 어느새 잔잔히 가라앉았다. 해가 서쪽 수평선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