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202화 (202/300)

202화

보석 세공은 고든 뱅크스가 맡고, 그것과 어울리는 목걸이와 반지의 틀은 듀란이 만들기로 했다. 각각 보석 세공과 금속 공예 분야에 있어서 영국 최고라고 인정받는 장인들이 나선 것이다. 도윤은 두 사람에게 만만치 않은 세공비를 지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듀란은 재료비만 받겠다며 그 이상의 사례를 사양했다.

“장인이란 후한 보수를 약속하는 사람들을 위해 솜씨를 발휘하기 마련이지. 하지만 가끔은 돈과 무관하게 혼을 불태우고 싶을 때도 있어. 이번에 만들 목걸이와 반지는 자네 두 사람에 대한 내 결혼 선물이라 생각하게.”

듀란과는 달리 뱅크스는 도윤이 주는 사례를 거절하지 않았다. 사실 최악의 경우 재료를 녹여서 다시 쓰면 되는 금속 공예와는 달리, 보석 세공은 조그만 실수가 회복할 수 없는 손상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더구나 도윤이 맡긴 시바의 눈물은 무게와 투명도, 색상 등이 모두 뛰어난 최상급 보석이었으므로 어지간한 뱅크스도 적지 않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예전부터 생각해 온 디자인이 있어. 그런데 여태까지 적당한 재료를 구하지 못해서 계속 머릿속에만 묵혀두었지. 마침 자네가 가지고 온 블루 다이아몬드가 그동안 구상했던 아이디어를 실현시키기에 딱 좋아. 넉넉잡고 한 달만 기다리게. 그럼 내가 영국 여왕도 탐 낼만한 멋진 작품을 만들어줄 테니까.”

지금부터 한 달이면 최소한 11월에는 완성된 목걸이와 반지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 오윤수와 장은서의 전시회 준비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에 최서라에게 프러포즈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도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합니다. 좋은 작품을 만들어주시면 그 은혜를 평생 잊지 않을게요.”

그러자 듀란이 껄껄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모두 눈썰미 하나는 엄청난 친구들이 아닌가? 우리도 그 안목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할 거야. 걱정 말게.”

보석 자체가 워낙 고가의 물건이기 때문에 도윤은 뱅크스와 듀란을 상대로 계약서를 작성했다. 보석이 손상될 경우를 대비해서 거액의 보험까지 들었다. 뱅크스는 세공이 끝난 보석에 대해 EGL(유럽 보석 연구소)의 감정서까지 첨부해서 한국으로 보내주기로 했다.

“이 보석에 대해 외부에 알리지 말아주세요. 당분간은 비밀로 하고 싶으니까.”

물론 언젠가는 보석의 존재를 공개할 테지만 당분간은 숨길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시바의 눈물을 직접 건넨 압둘의 관심을 끌기가 싫었던 것이다. 물론 아무리 압둘이라고 해도 뱅크스와 듀란의 손에 의해 환골탈태한 시바의 눈물을 알아보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는 새로 탄생할 ‘서라의 기쁨’을 극히 제한된 몇몇 사람들끼리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했다.

“너, 민아 씨에게도 보석에 대해서는 입도 뻥끗하지 마라. 프러포즈 전까지는 철저하게 비밀을 지켜야 돼. 알았지?”

깜짝 선물은 청혼의 오랜 전통이다. 그걸 망칠 위험이 가장 큰 놈은 역시 석훈이었다.

* * *

압둘이 이브라힘의 서재에 들어섰을 때, 왕세제는 오래된 양피지 두루마리를 책상 위에 펼쳐놓고 있었다. 워낙 오래된 것이라 조금만 힘을 잘못 주면 쉽게 찢기거나 바스러질 위험이 있는 것이라서 평소에는 잘 꺼내지도 않던 것이었다. 책상 위에 펼쳐진 양피지를 조심스럽게 들여다보고 있는 이브라힘의 모습을 발견한 압둘은 속으로 탄식을 토했다.

‘저건 또 왜 꺼내셨지? 잘못해서 손상되기라도 하면 능력이 사라질 텐데…….’

이브라힘이 보고 있는 양피지는 라스푸친의 목걸이나 에티오피아의 참 십자가처럼 신비한 힘이 숨겨져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유물이었다.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양피지를 남긴 사람이 바로 오래 전에 활동했던 스피리돈 브레토스라는 이름의 링커였기 때문이다.

13~14세기 무렵에 지금의 그리스 지역에서 활동했던 브레토스는 특이하게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다른 사물에 옮길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죽기 전에 지금 이브라힘이 보고 있는 양피지에 자신의 능력을 담았고, 그 사실을 양피지에 기록했다. 압둘은 저 양피지를 발칸 반도의 한 오래된 수도원에서 찾아내서 아주 비싼 값에 매입했다.

양피지를 가지고 있던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브레스토의 주장을 미친 자의 헛소리로 치부했다. 그러나 이브라힘은 양피지에 기록된 내용을 믿었다. 거기에는 브레토스 자신의 인생에 관한 자전적 서술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내용 가운데 은밀하게 알려진 링커의 특성과 일치하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브레토스가 양피지에 남긴 능력의 특성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는 또 다른 링커가 있다면 직접 능력을 전해 받고 그 특성을 파악할 것을 요구했다.

“이 양피지에 담긴 능력이 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링커를 찾아야 할 텐데 말이야. 이건 내 것이면서도 내 것이 아니야. 그게 좀 웃기지 않아?”

이브라힘이 문득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서재에 들어온 뒤에도 아무런 말없이 서 있기만 하던 압둘이 그제야 인사를 드렸다.

“압둘입니다, 저하. 에티오피아에서의 일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이브라힘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다. 압둘은 에티오피아를 떠나기 전에 이미 전화를 통해 상세한 보고를 했다. 그가 예수의 참 십자가를 얻었으며 그것을 비행기에 실었다는 얘기를 들은 이브라힘은 뛸 듯이 기뻐했다. 그의 재촉을 받은 압둘은 리야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참 십자가를 가지고 이브라힘의 저택으로 향했다.

“수고했어. 참 십자가는 가지고 왔나?”

“밖에 있습니다. 가지고 들어오라고 하겠습니다.”

압둘이 서재의 문을 열고 신호를 보내자 곧 두 명의 경호원들이 오래된 통나무를 안으로 옮겨왔다. 그들은 소파에 통나무를 기대놓고는 곧바로 서재를 나갔다. 이브라힘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다가오더니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통나무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이게 정말로 치료의 능력을 가지고 있을까? 정말로 예수가 처형된 십자가가 맞아?”

그의 말에 압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는 얘기가 모두 사실이라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집회를 주도했던 사제는 사기꾼이었습니다. 녀석은 십자가의 능력을 전해 받지 못했습니다.”

“확실해?”

“죽기 전에 본인의 입으로 고백했습니다. 놈이 가지고 있던 능력은 치료가 아니라 통증을 완화시켜주는 진통 능력이라고 하더군요. 이 십자가가 진품인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녀석이 치료의 능력을 전해 받지 못한 것은 확실합니다.”

사실 죽은 사제가 사기꾼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미 집회에 참석하기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압둘은 에티오피아에 가기 전에 미리 예전에 집회에 참석했던 이들을 조사했고, 치료를 받았다던 그들이 집회 이후에 오래지 않아 모두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다.

‘이 십자가에 어떤 능력이 담겨 있는지는 몰라. 하지만 그 사제가 치료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건 분명해.’

다만 놈이 진통의 효과를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압둘로서도 뜻밖이었다. 하지만 그게 십자가로부터 전해 받은 게 아닌 이상 놈의 능력은 더 이상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당에서 코웃음을 치며 사제의 목을 꺾을 수 있었다.

한참 동안 통나무를 쓰다듬던 왕세제가 문득 중얼거렸다.

“시바의 눈물은 없던가? 그것도 함께 찾았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그 말에 압둘이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문과는 달리 사제의 몸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압둘은 자신의 손으로 시바의 눈물을 도윤에게 건넨 사실을 숨겼다. 당시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부하에게도 단단히 입단속을 시켰다. 그는 자신이 직접 발굴해서 키운 사람이었고, 이브라힘보다는 압둘을 더 따랐다. 부하는 비밀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압둘이 짐짓 죄송스러운 표정을 짓자 이브라힘이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괜찮아, 괜찮아. 시바의 눈물처럼 큰 블루 다이아몬드를 놓친 건 아깝지만 그래도 그게 참 십자가와 비교될 만한 물건은 아니지. 이번에 자네가 큰 공을 세웠어.”

“다니엘 로스차일드가 끼어드는 바람에 하마터면 일이 어려워질 뻔 했습니다. 알라께서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그래. 나도 뉴스를 봤어. 하마터면 내가 자네를 사지로 몰아넣은 꼴이 될 뻔 했었더군.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그런데 다니엘은 현장에서 죽은 게 확실한가?”

“네. 총격전 끝에 사망했습니다. 원래부터 죽어 마땅한 놈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다니엘 로스차일드의 죽음에 대해 일말의 동정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이브라힘은 그가 누구의 총에 의해 죽었는지조차 묻지 않았다. 그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화제를 링커에게로 돌렸다.

“그럼 이제는 링커를 찾는 일에 전념해야 하겠군. 라스푸친의 목걸이든 예수의 참 십자가든, 거기 깃든 능력을 전해 받으려면 링커가 있어야 하잖아. 안 그래?”

적어도 둘 중 하나는 치료나 노화방지, 혹은 장수에 도움이 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브라힘은 그걸 전해 받고 싶었다. 압둘이 조심스럽게 건의했다.

“이 박사를 리야드로 초대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의 말에 이브라힘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되물었다.

“자네는 역시 이도윤을 가장 유력한 링커 후보라고 생각하는가 보군.”

“젊은 나이에 그만한 안목을 지닌 감정가는 한 세기에 한 명 나오기도 힘듭니다.”

“미국의 에이브 커팅은 어때? 일본의 와타나베나 벨기에의 뤼샹도 뛰어난 감정가잖아?”

그 사람들을 이도윤에게 비교하는 건 곤란하지. 이브라힘이 언급한 이들은 세계 최고의 감정가들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압둘이 보기에 그들 가운데 누구도 이도윤의 나이에 그토록 뛰어난 감정 실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었다.

“물론 저하께서 언급하신 사람들도 세계 최고의 감정가로 손꼽히는 사람들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역시 이도윤을 따라가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 그렇다고 이도윤 한 명에게만 모든 걸 걸기는 너무 아쉬운데……. 그러지 말고 그 친구들을 몽땅 부르면 어떨까?”

“네?”

압둘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세계 최고의 감정가들을 몽땅 부른다고? 무슨 명목으로? 그가 당황하는 게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던 이브라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세계 최고의 감정가들만을 위한 파티를 열도록 하자고. 행사의 목적이나 명분은 자네가 알아서 만들어 봐. 대신 그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는 큰 선물을 줄 거라고 얘기해. 특히 이 두루마리의 주인은 아마 횡재를 하게 될 거야. 무슨 뜻인지 알겠지?”

압둘은 이브라힘이 뭘 어떻게 하겠다는 얘긴지 금세 알아들었다. 그는 세계적인 감정가들을 앞에 저 양피지 두루마리를 내놓을 생각인 게 분명했다. 양피지 자체는 비록 오래된 것이기는 하지만 특별히 귀한 물건이라고 하기는 곤란했다. 내용도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황당하기 이루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 감정가들 가운데 진짜 링커가 포함되어 있다면 분명히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다.

“지금이 벌써 10월이니까 올해 내에는 아마 힘들 것 같고, 내년 초나 봄쯤에 적당한 행사를 기획해서 그들을 초대하겠습니다.”

“그래. 선전을 잘 해야 할 거야. 실력 있는 감정가들인 만큼 자존심들도 센 모양이니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압둘은 이브라힘의 서재를 나오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브라힘의 아이디어는 일리가 있었다. 그 감정가들 사이에 진짜 링커가 포함되어 있다면 제 아무리 담백한 사람이라고 해도 양피지에서 느껴지는 유혹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거야 말로 전대의 링커가 후대의 링커에게 남겨준 유산이었으니까.

* * *

영국에 들렀다가 돌아와 보니 서울은 어느새 10월이었다. 최서라는 다시 돌아온 도윤을 반겨주었지만 가 보지도 않은 이집트의 풍광에 대해 질문을 해서 그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도윤이 한국을 떠나기 전에 에티오피아를 거쳐 이집트에 들렀다가 올 거라고 말해 둔 탓이었다. 피라미드는 예전에도 구경을 한 적이 있었으므로 대충 둘러댔지만 그래도 두 눈 똑바로 뜨고 거짓말을 하려니까 저도 모르게 진땀이 흘렀다.

도윤과 석훈은 에티오피아에서 겪었던 일을 철저하게 숨기기로 했다. 워낙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위험했던 사건이기도 했거니와 석훈은 본의 아니게 사람을 둘이나 죽였다. 그런 일을 무슨 모험담처럼 떠들고 다닐 수는 없었다.

비록 상대가 먼저 총을 쏘았다고는 하지만 살인의 충격은 그리 쉽게 씻기는 게 아니었다. 석훈은 서울에 돌아와서도 한 동안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였는데, 다행히 걱정했던 것보다는 일찍 후유증에서 벗어났다. 원래도 신경 줄이 질긴 놈이기도 했지만 척준경으로부터 받은 능력이 정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준 덕도 있는 것 같았다.

도윤은 서울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일부러 분당까지 가서 오주현과 오광표 부녀를 만났다. 오주현은 11월 1일까지 미국 대학의 조기 입학 전형을 위한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데다 한국에서도 수능 시험을 치르기로 했다. 그 때문에 워낙 정신없이 바쁜 상태라 저녁을 사주겠다고 불러내는 것 자체가 미안할 지경이었다.

“주현이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저도 차근차근 준비를 하고 있고요.”

오광표는 결국 오주현이 미국 대학에 합격하면 인도로 가기로 결심했다. 명색이 대기업 연구 이사였기 때문에 그러려면 사전에 주변을 정리하고 주현이 합격할 때를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주현의 합격 여부는 12월에 발표가 나니까 올해가 가기 전에 두 사람의 행보 역시 결정될 것이다.

도윤은 10월 한 달 동안 현소 화랑에서 열리는 갤러리를 돕기 위해 애썼다. 그러자니 한국으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전국을 돌아다니며 화가들을 만나고 그들의 작업 결과를 살펴야 했다.

이세준과 서연희는 다른 건 몰라도 아들이 화가나 조각가들과 인맥을 쌓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 했다. 그로 인해 도윤은 현소 화랑에서 가장 출장이 잦은 직원이 되고 말았다.

10월도 하순으로 접어든 어느 날, 그날도 도윤은 대전까지 내려갔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아침 일찍 KTX를 타고 대전으로 가서 그곳에서 활동하는 화가를 만나고, 일이 끝나자마자 다시 돌아오던 참이었다. 저녁에는 최서라와 만나 식사를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사무실로 올라가기 위해 빌딩 로비를 지나던 그의 눈에 어린 아이 하나가 데스크의 안내 직원과 실랑이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아이는 이제 겨우 열 살 정도 되어보였는데,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는 게 자칫하면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보였다.

“무슨 일이에요?”

도윤이 데스크로 다가가며 묻자 직원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아이를 가리켰다.

“얘가 벼루를 하나 감정해 달라고 떼를 쓰네요. 그것도 꼭 이 실장님에게 감정을 받아야 한다는 거예요. 실장님이 안 계시니까 다음에 오라고 해도 영 말을 듣지 않습니다.”

도윤은 최근 들어 팀장에서 실장으로 승진했다. 부모님 소유의 회사에서 이루어진 자체 승진이었으므로 본인이나 화랑 직원들 모두 별다른 반응이 없는 밋밋한 승진이었다.

직원이 일하는 안내 데스크 위에 보자기 하나가 놓여 있었다. 도윤이 보자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아이에게 물었다.

“내가 이도윤 실장인데, 저건 네가 가지고 온 물건이니?”

도윤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울상을 짓던 아이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아저씨가 이도윤 박사세요?”

“응. 형이 이도윤 박사가 맞아.”

“그럼 아저씨가 저거 좀 감정해주세요.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우리 집 가보였대요. 할아버지가 저걸로 글씨를 쓰면 머리가 좋아진다고 하셨어요.”

이 자식이 형이라니까 굳이 아저씨라고 하네? 도윤은 쓴 웃음을 지으며 안내 데스크 위에 놓인 보자기를 풀었다 그러자 안에서 돌로 만든 벼루가 하나 나왔다. 뚜껑도 없이 그냥 작은 책 하나 크기의 벼루였는데, 상태를 보니 오래된 건 분명하지만 모양이나 장식이 밋밋한 게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하지만 벼루를 보는 순간 도윤은 눈을 크게 떴다.

‘응? 이것 봐라?’

벼루 자체는 그냥 평범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 벼루로부터 붉은 빛이 흘러나와 눈앞의 아이에게 이어지는 게 보였다. 능력이 담긴 벼루라는 뜻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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