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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205화 (205/300)

205화

미국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강타자로 유명한 베이브 루스는 달리는 기차 칸에 붙어 있는 행선지 표시를 읽을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혹은 빠르게 넘어가는 책갈피 속의 글자나 그림을 알아보는 게 가능했다고도 한다. 모든 야사들이 그렇듯이 백 퍼센트 신뢰하기는 어려운 얘기들이지만 그만큼 눈이 좋았다는 뜻이다.

타자들은 설사 아마추어 선수들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시속 백 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날아오는 야구공을 정확히 보고 때릴 수 있어야 한다. 당연히 눈이 좋고 반사 신경이 빠를수록 더 정확한 타격을 할 수 있다. 뛰어난 동체 시력과 반사 신경이야말로 훌륭한 타자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뜻이다.

“진우야. 아저씨하고 잠깐 게임 하나 할까?”

도윤은 두툼한 책을 들고 병실로 돌아와 진우 옆에 앉았다. 그가 게임을 하자고 하자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게임이요? 어떤 게임인데요?”

“간단한 거야. 여기 책 중간에 책갈피가 꽂혀 있는 거 보이지? 지금부터 아저씨가 이 책을 이렇게 비스듬히 들고 파라락 넘길 거야. 그럼 진우는 그걸 잘 보고 있다가 책갈피가 꽂힌 부분에 어떤 그림이 있는지 알아맞히면 돼.”

“그림을 알아맞힌다고요? 그건 별로 재미없을 것 같은데…….”

도윤이 생각하기에도 각종 컴퓨터 게임에 익숙해진 요즘 아이들에게 고작 넘어가는 책장 속의 그림을 알아맞히는 것은 그다지 흥미 있는 놀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의 동체 시력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현재로서 그게 가장 간단한 방법이었다. 그는 당근은 제시했다.

“만약 진우가 열 번 가운데 일곱 번 이상 맞히면 아저씨가 이따 저녁에 맛있는 거 사줄게. 돈까스나 스테이크 같은 거 좋아하니? 네가 이기면 다 먹을 수 있어.”

“돈까스요? 그럼 저 할게요.”

맛있는 걸 사준다는 말에 진우의 반응이 금세 달라졌다. 배고픔으로 고생한 경험이 있는 아이를 먹을 걸로 유혹한다는 게 조금 미안했지만 당장은 제일 효과적인 떡밥이었다. 도윤은 씩 웃으면서 책갈피를 적당한 곳에 꽂았다.

그는 한 손으로 책을 살짝 휘었다가 손가락을 조금씩 미끄러트렸다. 그러자 책이 한 장씩 빠른 속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걸 뚫어지게 보고 있던 진우가 손을 번쩍 들었다.

“의사 아저씨가 환자한테 주사를 놓고 있어요.”

도윤은 넘어가던 책을 멈추고 책갈피가 꽂힌 부분의 그림을 확인했다. 정답이었다.

“정답. 아주 잘했어. 그럼 이제 아홉 번 남은 거다?”

“네. 아홉 번 중에 여섯 번만 더 맞히면 되는 거죠?”

“물론이지. 여섯 번만 더 맞히면 저녁에 돈까스 먹으러 갈 수 있어. 시작한다.”

도윤은 계속해서 서로 다른 그림이 그려진 책장에 책갈피를 옮겨가면서 테스트를 했다. 진우는 엄마가 갑자기 기침을 하는 바람에 잠시 한눈을 팔았을 때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아홉 번을 모두 정확하게 알아맞혔다. 도윤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기가 막히네.’

그 역시 미술 감정사답게 눈이 좋은 편이기는 하지만 진우처럼 정확한 동체 시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원래 타고난 것이든, 아니면 벼루의 능력을 받은 덕분에 시력이 좋아진 것이든, 진우의 동체시력은 진짜였다. 그는 병실 밖으로 나와 석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석훈아. 너 몇 가지 준비해서 병원으로 좀 와야겠다. 진우의 신체 능력을 테스트해봤으면 좋겠어. 지금부터 내가 불러주는 거 잘 기억했다가 이따 병원으로 올 때 가지고 와. 부근에 적당한 운동장이나 공원이 있는지도 알아보고.”

전화를 끊은 도윤은 진우와 엄마가 있는 병실을 쳐다봤다. 이거 잘 하면 구한샘 이후로 또 하나의 스포츠 스타를 키울 수 있겠는데?

* * *

비록 군대를 다녀온 뒤로는 경호원 일을 하고 있지만, 석훈은 원래 체대 출신이다. 도윤의 얘기를 들은 녀석은 자신이 뭘 준비해야 하는지 금세 알아들었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석훈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가방 하나를 들고 병실로 찾아왔다.

“진우를 잠시 데리고 나갔다 오겠습니다. 혼자 계셔도 괜찮겠어요?”

도윤이 양해를 구하자 진우 엄마는 선선히 승낙했다.

“진우야 엄마가 피곤해서 좀 자야할 것 같은데 아저씨들하고 잠시 놀다 올래?”

“아저씨들하고 놀아요? 뭘 하고 노는데요?”

진우의 말에 석훈이 씩 웃으며 물었다.

“진우 달리기 잘 하니?”

아이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어떤 게 잘하는 거예요?”

“남들보다 빨리 달리거나 더 오래 달릴 수 있으면 잘 하는 거지.”

“빨리 달리는 건 몰라도 오래 달리는 건 자신 없는데…….”

진우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평소 체력이 모자란다는 듯이었다. 그러자 석훈이 씩 웃으며 아이의 손을 잡았다.

“걱정하지 마. 자꾸 뛰다 보면 오래 뛰어도 숨이 안 차게 될 수 있어. 이 부근에 경치가 좋은 공원이 하나 있는데 아저씨하고 가볍게 한 번 뛰어볼래?”

“꼭 뛰어야 해요? 다른 거 하면서 놀면 안 돼요?”

“아저씨가 원래 운동을 했었거든. 그런데 요즘은 바빠서 운동할 시간이 거의 없었어. 모처럼 한 번 뛰어보고 싶어서 그러는데 이왕이면 진우도 아저씨하고 함께 뛰자. 어때?”

진우는 도윤과 석훈을 고마운 아저씨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썩 내키지 않으면서도 대뜸 거절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러자 석훈도 도윤처럼 당근을 내밀었다.

“진우가 아저씨하고 운동을 해주면 끝난 다음에 아이스크림 사줄게. 진우는 어떤 아이스크림 좋아하니?”

“호두 들어있는 거요. 엄마도 그거 좋아해요.”

“그래? 그럼 엄마 것까지 많이 사서 병원에 가지고 오자. 그래서 엄마하고 같이 먹으면 되잖아. 그치?”

“네. 좋아요.”

간신히 아이를 유혹하는데 성공한 석훈이 진우를 데리고 나갔다. 아들이 병실을 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진우 엄마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그녀는 도윤과 최서라에 이어 석훈까지 나서서 진우를 챙겨주는 모습을 보자 가슴이 울컥했다. 한편으로는 그 벼루가 정말 그렇게 귀한 물건인가 싶기도 했지만, 세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은 단순히 이익을 보자고 하는 사람들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녀는 정말로 도윤에게 마음속으로부터 감사해 했다. 그러자 도윤이 그런 소리 말라며 손을 내저었다.

“진우를 위해서라도 빨리 나아서 일어나셔야죠.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세요?”

“그냥 병원에 입원한 것뿐인데도 이상하게 어제보다 몸이 훨씬 나아진 느낌이에요. 병원 밥이 좋은가 보네요.”

“병원 밥이 뭐 별 거 있겠습니까? 그보다는 마음이 편해져서 그럴 거예요. 내일 담당 의사가 출근하면 본격적으로 검사도 하고 진료를 할 거에요. 아마 큰 병은 아닐 테니까 그때까지 편하게 쉰다고 생각하세요.”

물론 그녀의 몸이 나아진 이유는 어제 도윤이 한 시간 가량 계속 치료 능력을 불어넣어준 덕분일 것이다.

진우가 석훈과 함께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진우 엄마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도윤은 그녀에게 편히 쉬라고 얘기한 뒤 일단 병실을 나갔다. 그런 다음 그녀가 완전히 잠이 들기를 기다려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그는 진우 엄마가 깊이 잠 든 것을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그녀의 팔을 잡았다. 이번에도 대략 한 시간 정도 능력을 쓰자 폐로 스며들면서 사라지던 힘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생각보다 치료 효과가 좋네? 이 정도면 내일 하루만 더 치료하면 나을 수 있겠는데?’

지금 상태로도 내일 검사에서 특별한 이상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도윤은 이왕이면 하루 더 치료를 해서 그녀를 완치시킬 생각이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 * *

이틀 연속 한 시간이 넘게 전력을 다해 치료 능력을 쓰자 도윤도 살짝 지쳤다. 그는 피곤한 몸을 끌고 근처의 아이스크림 가게로 향했다. 진우의 테스트를 끝낸 석훈이 아이와 함께 그곳에 있겠다고 전화를 했기 때문이다.

“어땠어? 재능이 있는 거 같아?”

도윤이 전화로 묻자 석훈이 일단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아이 할아버지가 한때 야구선수였다고 해서 일단 그쪽에 초점을 맞춰서 테스트했어요. 30미터하고 50미터 달리기 속도는 상당히 좋아요. 지금 당장 리틀 야구부에 집어넣어도 달리기로는 남들에게 밀리지 않을 것 같던데요?”

“오래 달리기는?”

“그것도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기본적인 체력이 상당히 떨어져 있는 상황이라 그건 아이가 조금 더 몸을 추스른 다음에 다시 테스트를 해봤으면 좋겠어요.”

“근력이야 당장은 큰 의미가 없을 테고 시력하고 반사 신경은 어때?”

“눈은 정말 좋던데요? 근처에 있는 안경점에 들어가서 시력 측정을 해봤는데 2.0이 나왔어요. 근데 제 느낌에는 그보다 더 좋을 것 같아요. 안경점에 있는 시력표는 2.0이 최고잖아요. 아마 병원에서 굴절도나 초점 반응 같은 걸 재면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거예요.”

석훈의 말에 의하면 반사 신경도 나쁘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워낙 테스트 시간이 짧아서 거기까지는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야구 선수로서의 가능성은 어때? 잘 키우면 성공할 것 같아?”

“아직 어리니까 지금 단정 짓기는 어렵죠. 캐치볼을 같이 해보기는 했는데 아직은 팔에 힘이 부족해요. 하지만 투수는 몰라도 타자로서는 재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도윤은 석훈과 함께 진우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준 뒤 병실로 돌아가기 전의 근처의 야구 연습장으로 데리고 갔다. 날아오는 공을 직접 때려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이가 아직 초등학교 5학년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해 공의 구속을 80~100Km로 맞췄다. 그만 해도 유소년 야구 선수가 아니면 공을 제대로 건드리기 어려운 속도였다.

깡, 깡, 깡, 깡

진우는 처음 몇 번은 조금 헤매는 것 같더니 곧 감을 잡았는지 날아오는 공을 놓치지 않고 때려내기 시작했다. 아직 힘이 약해 배트가 밀리는 경우가 많았고, 설사 제대로 맞았다고 해도 멀리 날아가지는 못했다. 그러나 공을 맞추는 능력만큼은 확실히 대단했다.

“우리 진우 잘 하는데? 야구선수 해도 되겠다.”

땀을 흠뻑 흘리며 케이지를 나오는 진우에게 도윤이 엄지손가락을 척 치켜들었다. 진우도 기분이 좋았는지 얼굴 가득히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거 정말 재미있어요. 나중에 또 하면 안 돼요?”

“당연히 되지. 또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아저씨한테 얘기해. 얼마든지 하게 해줄 테니까.”

“진짜요? 신난다!”

진우를 병실로 데려다 준 도윤은 석훈에게 기다렸다가 아이에게 약속했던 돈까스를 사 준 뒤 집으로 데리고 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따로 할 일이 있었다. 처음부터 모른 척 했다면 모를까, 아예 본격적으로 나서기로 한 것이다.

그날 저녁 그는 최서라를 만났다. 도윤의 얘기를 모두 들은 최서라는 흔쾌히 그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진우 엄마를 미래 전자 본사 구내식당에 취직시켜주라는 말이죠? 진우하고 함께 서울에서 살 수 있도록.”

“그래. 진우가 야구 선수로 성공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일단 기회는 줘보고 싶어서. 근데 그러려면 야구부가 있는 초등학교로 전학을 시키든가 최소한 리틀 야구단에 입단 시켜야 하잖아. 그런데 알아보니까 마석에는 그런 곳이 없더라고.”

“알았어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한 번 알아볼게요. 근데 집은 어떻게 할 거예요? 서울로 이사 오려면 최소한 전세나 월세라도 구해야 할 텐데.”

“그건 내가 구해줄 거야. 벼루 값이라고 하고 방 두 칸짜리 전세 집을 얻어줘야지.”

“그 벼루가 사실은 그렇게 귀한 물건은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요?”

“귀한 거야. 적어도 내 눈에는 그래.”

도윤은 이번 일을 통해 링커로서의 책임과 사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가졌다. 유물에 남긴 능력을 주인에게 전해주는 일이 어떤 의미에서는 시대와 시대, 호근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진우의 할아버지는 야구선수로서의 재능을 타고났으면서도 불운한 사고로 인해 평생을 반 백수로 살았다. 그 할아버지의 한이 벼루를 남았다가 손자인 진우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중간에서 그 일을 완성시킨 사람이 바로 도윤 자신이었다.

‘진우가 야구를 좋아하는 것 같으니 다행이야. 이왕 이렇게 됐으니 할아버지의 한이 손자를 통해 풀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는 진우를 적극적으로 돕기로 했다. 그건 재단을 세워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링커의 책무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나중에 진우가 마음이 바뀌어 야구를 안 하겠다고 한다면 몰라도, 적어도 아이가 재능을 꽃피울 수 있는 기회는 주고 싶었다.

일단 그가 적극적으로 나서자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도윤은 다음 날도 다시 한 번 병실을 찾아가 진우 엄마를 치료했다. 다행히 검진 결과도 좋게 나와 진우 엄마는 이틀을 더 병원에서 몸조리를 한 뒤 무사히 퇴원했다. 그런 그녀에게 최서라가 미래 전사 본사의 식당에서 일할 것을 권했고, 진우 엄마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10월이 채 가기도 전에 진우 모자가 거처할 집을 구하고 진우를 서울로 전학시키는 일이 마무리 되었다. 석훈이 힘을 써 준 덕분에 진우는 야구부가 있는 초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애가 아직은 힘하고 체력이 딸려요. 하지만 너무 야단치지 말고 꾸준히 훈련을 시키면 금세 다른 아이들을 따라잡을 거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석훈은 진우의 학교까지 직접 찾아가 야구부 감독의 손을 잡고 아이를 잘 가르쳐달라며 간곡히 부탁했다. 이럴 때는 녀석의 체육계 인맥이 참으로 유용했다.

도윤은 진우 모자에게 학교 근처에 있는 작은 빌라를 전세로 얻어주었다. 진우 엄마는 차마 말은 못하지만 벼루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 챈 것 같았다. 하지만 아들을 위해서라도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저도 그렇고 진우도 그렇고, 세 분을 평생 은인으로 생각할게요. 나중에 우리 아이가 잘 되면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진우 엄마는 세 사람의 손을 번갈아 잡으며 몇 번이나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도윤으로서도 모처럼 좋은 일을 한 듯해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진우 모자의 일로 정신없이 지내는 가운데 어느새 11월이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영국에서 물건이 도착했다. 특별 운송비까지 물으면서 공수된 목걸이와 반지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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