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208화 (208/300)

208화

장예주 박사와 만난 이틀 뒤, 도윤은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이번에는 석훈을 데리고 가지 않고 혼자만 짐을 꾸렸다. 그동안 그의 신변을 계속 위협하던 다니엘 로스차일드가 이미 죽은 뒤였기 때문에 더 이상 개인 경호원을 데리고 여행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대신 석훈에게는 다른 지시를 내렸다.

“처음부터 화가들을 후원하기 위한 재단을 설립하면 너한테 그 일을 맡기기로 했잖아. 내년에 결혼식을 올리기에 앞서 재단을 정식으로 발족할 거야. 나 없는 사이에 노영태 변호사님이 거기에 필요한 절차를 진행시킬 테니까 너도 그 일을 좀 도와드려.”

아무리 석훈이 튼튼하고 믿음직스러운 경호원이라고 할지라도 녀석을 계속해서 몸 쓰는 일에만 동원시키기는 미안했다. 도윤은 이제부터라도 석훈이 본격적으로 사무직 일을 배우기를 희망했다. 녀석도 내심 생각하고 있던 일이라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노영태 변호사님한테서 일을 배울 수 있으면 좋지요. 그 분이 저 때문에 답답해 할까봐 걱정이 되긴 하지만. 아참, 그나저나 비에코 주식은 어떻게 할 까요? 이제 주가가 보합세인 것 같던데 그거 그냥 계속 가지고 있어요?”

연초에 상장된 비에코 주식은 8월까지 지속적으로 상승 곡선을 그리며 주가가 올라갓다. 하지만 9월에 들어서면서 다소 주춤하더니 현재까지는 소폭의 등락을 거듭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만해도 이미 액면가의 서른 배 이상으로 올랐으니 석훈이 느끼기에는 그만 처분하고 현찰을 챙기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아직은 아니야. 내년 초까지는 꽉 잡고 있어. 한 번 더 오를 테니까.”

“이 상태에서 또 뛴다고요? 정말이에요?”

“그래. 베트남 정부에서 세우는 정유 공장에 비에코에서 돈을 투자했어. 공장이 완성되는 대로 지분의 일부를 넘겨받기로 했는데 그게 아직 주가에 반영되지 않았거든. 그게 반영되면 반드시 주가가 오를 테니까 팔려면 그때 가서 팔아.

“우와, 그럼 도대체 재산이 얼마나 늘어나는 거예요? 계산이 잘 안 되네.”

석훈은 상상만 해도 즐거운지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사실 녀석은 현재 상태로도 강남의 건물주들이 부럽지 않을 정도의 알부자였다.

도윤이 가지고 있는 비에코 주식의 액면가는 700억에 약간 미치는 못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상장 이후로 주가가 서른 배 넘게 뛴 덕분에 시가로 따지면 2조가 넘는 엄청난 액수가 되었다. 석훈의 보유한 1퍼센트 역시 액면가로는 25억이었지만 시세로는 750억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설사 그걸 모두 당분간 주식으로 묶어둔다고 하더라도 석훈은 그동안 도윤으로부터 받은 집과 현찰만 하더라도 당장 직장을 그만 두더라도 평생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도윤의 얘기를 들은 녀석이 은근히 욕심을 부렸다.

“사실 돈이야 지금 통장에 있는 것만 해도 충분해요. 내년 되어서 비에코 주식을 처분하게 되면 그때 가서 좋은 투자처 하나만 추천해주세요. 그럼 그리로 싹 옮길 테니까.”

도윤은 기가 막혀서 혀를 차다가 참지 못하고 석훈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내가 미술 감정가지 투자 전문 회사 사장인 줄 알아? 너무 욕심 내지 말고 지금 가지고 있는 거나 잘 관리해. 쓸 데 없이 욕심 부리다가 한 방에 훅 가는 수가 있어.”

석훈이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투덜거렸다.

“사장만 아니다 뿐이지 형 소유로 되어 있는 투자 회사가 한두 개가 아니라는 걸 내가 뻔히 알고 있는데 무슨……. 그 데바 인스트루먼트인가 뭔가 하는 데는 혹시 제가 투자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거기도 잘만 되면 크게 대박을 터트릴 거라면서요?”

“거긴 시중에 풀린 주식이 전체의 1퍼센트도 안 돼. 나중에 한 번 더 증자할지도 모르기는 하지만 당장은 사고 싶어도 시중에 풀린 주식 자체가 없다는 뜻이야. 괜히 이상한 데까지 손 뻗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얌전히 있어.”

석훈의 말마따나 녀석이 데바 인스트루먼트 주식을 살 수만 있다면 또 다시 대박을 터트릴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그건 데바에서 정말로 획기적인 TPU 개발에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다. 반대의 경우에는 도윤이 거기에 투자한 천오백 억이 순식간에 허공으로 흩어질 위험성이 존재했다. 그는 석훈에게도 도박을 권할 생각이 눈꼽 만큼도 없었다.

‘그보다는 미래 건설 주식을 슬슬 처분해야 할 텐데…….’

베트남에 정유 공장을 세우는 일을 맡은 덕분에 그동안 미래 건설 주가가 제법 올랐다. 하지만 노영태 변호사는 더 이상 주가가 오를 만한 요인이 없다고 판단했고, 도윤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당장은 거기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미래 건설 주가가 하루아침에 곤두박질 칠 위험이 없는 이상 지금 보름 뒤로 다가온 오윤수와 장은서의 전시회에 집중할 때였다.

* * *

뉴욕에 도착한 도윤은 오윤수와 장은서, 그리고 은서의 아버지인 장찬수를 데리고 다시 보스톤으로 날아갔다. 뉴욕의 작업실에 있던 작품들은 이미 모두 가드너 미술관으로 옮겨진 뒤였기 때문에 거기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이제부터는 보스턴의 호텔에 숙소를 정하고 전시회가 시작될 때까지 그곳에서 일을 해야 했다.

“반갑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다시 만난 가드너 미술관의 조나단 가드너 관장은 도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도윤은 오윤수 일행을 가드너 관장에게 소개했다.

“이미 인사를 나눈 것으로 알고 있기는 하지만 이번에 전시회를 열게 된 오윤수와 장은서 화백입니다. 두 사람에게 기회를 주셔서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도윤의 말에 가드너 관장이 그게 무슨 말이냐며 손을 내저었다.

“두 분 모두 다시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저야 말로 재능 있는 젊은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게 되어서 영광이지요. 예의상 하는 말이 아니라 뉴욕에서 처음 두 분의 그림을 봤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이 박사께서 추천하신 분들이니 좋을 화가들일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직접 작품을 대하니까 그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더군요.”

가드너 관장은 도윤에게 전시실을 빌려주겠다고 약속한 뒤에 직접 뉴욕에 있는 두 사람의 작업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관장이 그림을 전시하는 모든 화가들의 작업실을 직접 찾아가지는 않는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가 도윤의 추천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그는 거기서 두 사람의 작품을 보고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을 받았다. 오윤수의 작품은 동양적 기법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림의 아이디어와 구성은 수묵화의 한계를 한참 뛰어넘은 것이었다. 사실 도윤이 늘 하던 말대로 오윤수의 작품은 먹으로 그린 서양화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탈 아시아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장은서의 그림 역시 인간이 저렇게 세밀한 그림과 정교한 색상을 구현하는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보통 현대 화가들은 드로잉의 정교함을 추구하지 않는 경향이 강한데 장은서의 그림은 오히려 그런 흐름을 완전히 역행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드너 관장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다.

“두 분의 그림을 보니까 왜 전시회의 주제를 ‘꿈과 현실’로 정했는지 단번에 이해가 가더군요. 이번 전시회는 아마 보스턴 화단에 적지 않은 충격을 줄 겁니다. 긍정적인 충격 말입니다. 현대 회화는 기존의 것을 부수는데 집중되어 있어요. 하지만 두 분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부수는 방법에도 독창성이 요구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될 겁니다.”

“그렇게 좋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이번 전시회에 거는 기대가 큽니다.”

도윤은 웃으면서 그의 칭찬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가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은 가드너 관장의 그것과는 약간 달랐다.

그가 이번 전시회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은 충격과 감동이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단지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감동을 느끼고는 한다. 그러나 평범한 관객들은 충격 이전에 감동을 먼저 요구한다. 도윤은 두 사람의 작품이 미술계 인사들에게는 충격을, 그리고 평범한 관객들에게는 감동을 주기를 바랐다. 그동안 오윤수와 장은서가 한 작업은 분명히 그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킬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가드너 관장과 인사를 주고받은 뒤에 세 사람은 그의 안내를 받아 전시회가 열릴 장소를 둘러보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곳에는 아직 그림이 한 점도 걸려 있지 않았다. 이제야 비로소 인테리어 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내부 인테리어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가드너 미술관 측과 여러 차레에 걸쳐 논의했다. 그것을 위해 가드너 미술관의 큐레이터들이 수시로 뉴욕을 방문해서 두 사람과 협의했다. 그 결과로 나온 아이디어에 따라 인테리어를 진행할 예정이었는데, 그래도 중간 중간 화가들의 세부적인 수정 요구가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도윤 일행이 보스턴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전시 준비 작업이 시작되었다. 오윤수와 장은서가 전시회 공간을 꾸미는 일에 집중하는 동안, 도윤은 가드너 관장의 도움을 받아 보스턴 일대의 미술계 인사들과 지속적인 만남을 가졌다. 결국 전시회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 * *

채 보름이 안 되는 기간 동안, 도윤은 태어나서 가장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시카고 예술대학의 브렌트 교수와 뉴욕의 하이든 과장, 그리고 소더비의 까미유를 비롯한 많은 지인들도 적극적으로 그에게 새로운 사람들을 소개했다. 그들과 만나 악수하고 명함을 돌리며 전시회에 꼭 들러달라고 부탁하는 사이, 어느새 개막일이 성큼 다가왔다.

“은서가, 우리 딸이, 미국 한 가운데서 이렇게 큰 전시회을 열게 될 날이 오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박사님.”

전시회가 시작되던 날, 요윤수와 장은서의 그림을 구경하기 위해 밀려드는 사람들을 지켜보던 장찬수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열심히 홍보를 한 덕분인지 개막 첫날부터 제법 많은 사람들이 전시회를 찾았다. 일단 첫 단추는 제대로 꿰어다는 뜻이다.

도윤이 전시회를 찾은 미술계 인사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대화를 하고 있는데, 마침 그를 만나러 왔던 소더비의 까미유가 갑자기 옆구리를 쿡 찔렀다. 도윤이 고개를 돌리자 까미유가 손가락을 살짝 들어 한 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파란 눈에 갈색 머리를 지닌 장신의 백인 남자 하나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전시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잭 마틴이에요. 보스턴 글로브의 문화 예술 파트 선임 기자인데, 혹시 아세요?”

“아뇨. 처음 보는 사람이네요.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하는 인물인가요?”

“그러시는 게 좋을 거예요. 평소에도 데뷔전을 하는 무명화가들을 씹어서 완전히 매장시키는 걸 좋아하기로 소문난 변태니까요?”

변태라고? 지금까지 알고 지낸 까미유는 남들에게 함부로 거친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었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변태라는 말까지 나왔다는 것은 상대가 그만큼 정상의 범주를 넘어선 사람이라는 뜻이다. 도대체 어떤 인간이기에 그래? 그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마침 그를 발견한 마틴이 도윤을 향해 다가왔다.

“그림이 아주 독특하군요.”

도윤이 일부러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그렇습니까? 아무래도 신인 화가들이다 보니까 기존 화가들의 그림과는 다른 느낌이 들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런데 실례지만 누구신지…….?”

도유은 상대의 이름과 신분을 뻔히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모른 척했다. 그러자 마틴이 씩 웃으면서 그에게 명함을 하나 건넸다. 도윤도 그에게 현소 화랑의 실장으로 되어 있는 자신의 명함을 줬다. 나중에 정식으로 화가들을 후원하는 재단을 출범시키면 그곳의 명함을 사용하겠지만 아직까지는 현소 화랑의 감정 담당 실장이라는 게 그의 공식적인 직함이었다.

도윤이 건넨 명함을 슬쩍 훑어본 마틴이 ‘아하!’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도윤 박사님이시군요.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트루쓰 앤 밸류에서 우승한 실력자시죠? 저도 그 쇼를 아주 재미있게 봤습니다.”

이 자식 봐라? 나를 뻔히 보고 다가왔으면서 마치 몰랐다는 듯한 표정은 또 뭐야? 더구나 마틴은 일부러 ‘쇼’라는 단어를 강하게 발음했다. 트루쓰 앤 밸류가 TV 쇼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말투에서는 의도적으로 도윤을 비아냥대려는 느낌이 배어 있었다. 도윤은 얼굴 근육에 더욱 더 힘을 주며 웃었다.

“그림을 좋아하기는 하는데 적접 그리는 재주가 없어서 남의 그림을 감상하는 쪽으로 직업을 택했습니다. 마틴 기자님도 문화계 쪽에 계시니까 제 심정을 이해하실 겁니다. 오늘 그림을 보시니까 어떻습니까? 혹시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던가요?”

마틴이 전시장을 한 바퀴 쭉 돌아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아쉽지만 눈에 쏙 들어오는 작품이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문화의 차이 때문에 약간 이질감이 느껴져서 그런 가 봅니다. 이왕 미국에서 전시회를 열 생각이었으니 조금 더 이쪽의 사고방식을 받아들인 작품을 그렸다면 더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서구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글쎄요. 그보다는 아직 예술적 수준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군요. 두 사람 모두 한국 출신의 화가라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그쪽은 회화의 역사가 짧고 문화적 토대가 부실하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겠지요. 작은 웅덩이에서는 고래가 자랄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마터면 곧바로 주먹이 나갈 뻔 했다. 이 멸치 같은 자식이 어디서 고래를 운운해! 도윤은 더 이상 억지로 웃으려고 애쓰지 않고 얼굴을 차갑게 굳혔다.

“글쎄요. 한국이 회화의 역사가 짧은 나라가 아니기도 하지만 단지 역사의 길이만으로 미술계의 성숙함을 논하는 건 어폐가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만 해도 고작 4백년 밖에 되지 않는 역사 속에서도 벌써 이만큼 훌륭하게 성장하지 않았습니까? 미국 화가들이 나름대로 특색 있는 화풍을 개척하기 시작한 게 백 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싱글대며 비아냥대던 마틴의 얼굴에 금이 갔다.

“개인의 재능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나라나 지역의 재능 역시 서로 다를 수밖에 없지요. 어떤 곳에서는 천 년이 걸리는 일이 다른 곳에서는 불과 십 년도 걸리지 않는 경우는 흔하니까요. 한국은 오랫동안 외침과 내란에 허덕이느라 차분하게 예술을 발전시킬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전쟁이 적었던 나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히려 유럽이야말로 역사 전체가 온통 전쟁과 혼란으로 이어지던 곳이 아닙니까? 그런 곳에서도 다빈치와 루벤스, 고흐와 피카소가 나왔지요. 주제를 문학으로 바꾸면 오히려 고난은 예술을 꽃피우는 밑거름이 된다는 걸 알 수 있기도 하고요. 기자시니까 그런 건 저보다 더 잘 아실 겁니다.”

마틴의 얼굴이 굳었다. 어쭙잖은 말장난으로는 상대를 망신주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하버드에서 박사를 받으셨다고 들었는데 확실히 혀가 부드러우시군요. 하지만 현대 회화의 발전은 역시 시장과 함께 힐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 어딜 가든 결국 자본주의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으니까요. 오늘 전시회의 성공 여부는 어차피 얼마나 많은 그림이 팔리느냐에 달려 있지 않을까요?”

“글쎄요. 신인 화가의 그림이 팔리면 얼마나 팔리겠습니까? 그저 많은 미술 애호가들이 마음뿐만이 아니라 지갑도 흔쾌히 열어주기를 기대해야죠.”

“그런 식의 막연한 바람만으로 되겠습니까? 그렇게 느긋한 마음으로 전시회를 진행하다가는 한두 점이라도 팔리는 그림이 있을까 걱정이 돼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 생각과는 좀 다르군요. 제가 걱정하는 건 이번 전시회에 걸린 작품들이 다 팔리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아무리 못해도 절반 이상은 팔리지 않을까요?”

“그 말 책임지실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책임질 수 있지, 이 자식아. 정 안 되면 내가 다 사면 그만이야! 하지만 그러 말을 했다가는 당장 황당한 인간으로 신문 기사에 이름이 오르내릴 것이다. 도윤은 속으로만 이를 갈며 물었다.

“책임을 진다고요? 제가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입니까?”

“제가 사실은 오늘 전시회에 관해 조금 날카로운 기사를 하나 쓸 생각이었습니다. 전시회를 준비하신 분의 입장에서는 조금 달갑지 않은 내용이 포함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만약 이번 전시회를 통해 그림의 절반 이상이 팔리면 그 기사를 포기하겠습니다.”

“그럴 경우 당연히 비판적인 기사를 쓰는 건 마틴 기자님 스스로 자기 명성을 깎아내리는 일이 되겠지요. 그래도 궁금하군요. 만약 그렇게 많이 팔리지 않으면 제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다시는 미국 땅에서 저 두 사람의 전시회를 열지 않겠다고 약속하시죠. 어떻습니까?”

오윤수와 장은서의 미래를 네 알량한 기사와 맞바꾸라고? 제 정신이냐? 도윤은 순간 울컥 끓어오르는 마음을 느꼈다. 이 자식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다음 화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