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214화 (214/300)

214화

“나는 세상에서 잊히었네.

한때 거기서 참 많은 시간을 허비했건만 꽤 오랫동안 나로부터 아무 소식도 못 들었으니 내가 죽었다고 믿는 것도 당연하겠지.

…….”

악보에 적힌 곡의 가사는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나는 세상에서 잊히었네’라는 시였다. 말러는 이 가사에 곡을 붙여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가곡을 만들었다.

이 곡의 오케스트라 버전은 1905년, 빈에서 초연되었는데, 그해 11월에 말러는 ‘나는 세상에서 잊히었네’의 친필 악보를 저명한 음악학자인 귀도 아들러에게 선물했다. 말러의 선물에 감동한 아들러는 이 악보를 자신의 서재에 있는 금고에 보관했다.

말러와 아들러는 모두 유대인이었다. 1935년에 이르러 유대인들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자 아들러는 가족을 모두 미국으로 보냈다. 그러나 이미 80세가 넘는 고령이었던 그는 막내딸과 함께 오스트리아 빈에 남기로 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대인에 대한 나찌의 탄압이 본격화되기 직전인 1941년,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문제는 그와 함께 남았던 딸이었다.

아들러가 죽자 고령의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남아 있던 딸 멜라니 아들러는 뒤늦게 오스트리아를 빠져나가기 위해 애를 썼다. 그는 하이제러라는 변호사를 고용해서 출국 비자를 받으려고 했는데, 하이제러는 거꾸로 아들러의 서재와 금고에 대한 소유권을 넘길 것을 요구했다. 멜라니는 그의 요구를 완강히 거부했고, 결국 나찌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아들러의 서재에 있던 희귀본과 금고는 이미 모두 사라진 뒤였다. 특히 금고에 들어있던 말러의 악보는 오랫동안 행방이 묘연했는데, 2000년 9월, 그것이 홀연히 소더비 경매장에 등장했다. 악보를 위탁한 사람은 리하르트 하이제러, 멜라니를 협박했던 바로 그 변호사의 아들이었다.

악보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은 구스타프 아들러의 손자 톰 아들러는 즉각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지루하고 더러운 법정 공방 끝에 드디어 악보에 대한 소유권을 되찾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악보는 얼마 후에 다시 소더비에 의해 경매에 붙여졌다.

경매에 올릴 작품들에 대한 감정을 모두 끝낸 도윤은 왕이푸를 만난 자리에서 사연이 기구한 말러의 악보를 언급하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고생해서 할아버지의 유품을 되찾았는데 곧바로 다시 경매로 팔아버린 건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결국 아들러의 손자도 돈 때문에 소송을 벌였다는 뜻이잖아요?”

왕이푸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대뜸 코웃음을 치며 아들러의 손자를 비웃었다.

“아마 중국인이었다면 절대로 팔지 않았을 거요. 그건 조상들이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지키려 했던 유산이니까. 아들러의 손자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미국인이요. 그 사람들은 모든 것의 가치를 돈으로만 따지지. 나도 한평생 돈을 벌기 위해 악착같이 살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도윤이 생각하기에 돈에 대한 집착은 중국 사람들도 만만치 않아 보였지만 굳이 그 점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대신 새로운 호기심이 생겼다.

‘말러의 악보는 누가 주인일까? 어떤 능력을 담고 있는 거지? 만약 누군가 저 물건의 가치를 안다면 가격이 엄청 뛸 텐데. 지금도 가격이 비싸기는 하지만…….’

희귀한 물건일수록 가격이 높아진다는 점을 생각할 때 능력이 담긴 물건의 가치는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걸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도윤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엄청나게 희귀한 물건인데 수요자는 그보다 더 희귀한 것이다.

‘나는 세상에서 잊히었네’의 친필 악보가 마지막으로 경매에서 낙찰되었을 때의 가격은 52만 파운드였다. 이번 경매에서는 아마 500만 위안, 한국 돈으로 8억 이상에 팔릴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다. 말러의 자필 서명이 들어있는 악보는 여러 편이 남아있지만 하필 아들러의 금고 속에 들어있던 것이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보관상태가 좋기 때문이다.

* * *

왕이푸 회장은 도윤이 북경에 도착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에게 이사 직함을 주기로 결정한 게 분명했다. 그가 감정 이사를 맡겠다고 동의한 지 불과 이틀 만에 아리스 옥션 건물 내에 전용 사무실이 만들어졌다. 비록 전담 비서가 임명된 건 아니지만, 그가 북경에 올 때마다 수행원이 근무할 비서실까지 딸린 제대로 된 사무실이었다.

“이 양반, 아무래도 내 발에 단단히 족쇄를 채워놓고 싶은 모양이네.”

도윤은 자신에게 배정된 방을 둘러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수장고에서 작품들을 감정하는 동안 서둘러 인테리어를 한 게 분명한데도, 사무실에는 고급 책상과 소파를 비롯한 가구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현소 화랑에도 그의 사무실이 있기는 했지만 이곳과 비교하면 초라한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사무실만 보면 주객이 바뀐 듯한 상황이었다.

“점심 식사 함께 하실래요?”

그가 새로 받은 사무실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열더니 뒤늦게 노크를 했다. 왕이푸 회장의 딸인 왕화였다. 어차피 감정도 마친 상태였기 때문에 경매가 끝날 때까지는 별다른 일정이 없었다.

“그러죠. 하지만 너무 고급스러운 곳 말고 그냥 근처에서 간단히 먹읍시다.”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까 사무실이 너무 호화스럽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네요?”

역시 눈치가 빠른 여자다. 도윤은 희미하게 실소를 머금었다.

“일 년에 며칠 쓰지도 않을 곳 아닙니까? 성의는 고맙지만 솔직히 부담스럽습니다.”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쓰세요. 아리스 옥션은 세계적인 경매 회사를 꿈꾸는 곳이에요. 그런 회사의 이사라면 그에 맞는 품격을 갖추어야죠.”

그런가? 도윤은 생각이 조금 달랐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왕화는 정말로 회사 건물 근처의 평범한 식당으로 그를 안내했다. 식탁 위에 주문한 요리가 차려지자 젓가락을 들던 도윤이 문득 프리뷰 전시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어제가 프리뷰 전시 첫날이었잖아요. 그런데 손님들이 대부분 중국인이던데요? 이번에 경매에 올릴 작품들은 대부분 서양의 명작이라서 외국 수집가들이 훨씬 많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반응이 약한 것 아닌가요?”

그의 말에 왕화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가 펴졌다.

“어제는 첫날이라서 그랬을 거예요. 오늘은 외국인들이 많이 올 거라고 기대하고 있어요. 그 사람들은 일정 때문에 대개 경매가 임박해서야 도착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녀의 말에 도윤은 그냥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도 틀린 건 아니지만 완전히 맞는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홍콩이나 상해만 하더라도 이 정도의 작품이 경매에 올라올 경우 프리뷰 전시회 첫날부터 외국인들로 붐비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하긴 아리스 옥션의 지명도가 상해나 홍콩을 따라가기는 아직 이르지.’

측천무후와 고종의 합장묘인 건릉에서 나온 유물들을 대상으로 한 경매는 중국 내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더구나 작년에는 도윤 자신이 위탁했던 홍도관으로 인해 아리스 옥션이 잠깐이나마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아직은 회사 문을 연 지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기존의 큰 경매 회사들의 이름을 앞지르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이번 경매가 성공적으로 끝나면 상황이 달라질 거예요. 동서양의 걸작들을 아우르는 큰 회사라는 게 입증될 테니까요. 말이 나온 김에 프리뷰 전시장에 함께 가 보실래요?”

“프리뷰 전시장에요? 아직 안 가 보셨어요?”

“당연히 가봤죠. 하지만 말씀을 듣고 보니까 오늘은 상황이 어떤지 궁금해져서요. 이 박사님도 말을 꺼낸 당사자니까 바쁘지 않으시면 같이 가시죠?”

도윤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로서는 감정을 마치고 나자 경매가 끝날 때까지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북경 시내라면 과거 이곳에서 공부할 때 물리도록 둘러보았으니 새삼 관광을 할 기분도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호텔 방에 처박혀 시간을 보내기도 애매했다. 그는 흔쾌히 그녀를 따라 프리뷰 전시장으로 향했다.

“확실히 어제보다는 외국인들이 많아지기는 했네요.”

전시장에 들어선 도윤이 작품을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고급 시계와 세련된 양복. 한눈에 봐도 내일 있을 경매에 참가하기 위해 온 듯한 서양인들이 전시장 곳곳에서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왕화가 은근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갑자기 뒤에서 아이의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누군가 어색한 중국어로 다급하게 소리쳤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이에요?”

도윤과 왕화가 잠깐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 황급히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사내 아이 하나가 가슴을 움켜쥔 채 주저앉아 있는 게 보였다. 아이의 엄마인 듯한 여자가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로 아이를 감싸 안은 채 앞에 서 있는 중년의 여자에게 항의하고 있었다.

“그렇게 아이를 마구 밀치면 어떻게 해요?”

딱 보니까 중년 여성이 아이를 밀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이가 가슴을 부둥켜안은 채 주저앉아 있는데도 두 모자 앞에서 선 여자의 태도는 당당했다.

“그러니까 도대체 왜 애를 데리고 이런 곳엘 들어오느냔 말이에요. 입구에 다섯 살 이하의 아이는 들어올 수 없다고 써있는 거 못 봤어요?”

“우리 아이는 여섯 살이에요. 그리고 그거 하고 애 가슴을 밀친 것 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렇잖아도 아픈 아이란 말이에요.”

“흥. 여섯 살은 무슨? 네 살도 안 돼 보이는데. 그리고 누가 뭘 함부로 밀쳐요 밀치긴? 아이가 하도 전시대 앞에서 알짱거리기에 옆으로 비키라고 살짝 건드린 걸 가지고. 애가 또 엄살은 무척 심한 것 좀 봐. 누가 보면 당장 죽는 줄 알겠네.”

도윤이 보기에 잘못하면 애가 당장 죽을 것 같았다. 두 여자는 서로를 향해 삿대질을 하느라 미처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했지만 그의 눈에는 아이의 상태가 빠르게 심각해지고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파랗던 아이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변해 가는데 한 손으로 가슴을 꼭 누르고 있는 게 아무래도 그 쪽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전시장 내의 옥션 직원들이 소란이 발생한 곳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지만 그들보다 도윤이 먼저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는 다짜고짜 엄마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의 얼굴을 돌려세웠다. 그러자 아이의 눈이 완전히 뒤집혀져 있는 게 보였다.

“얘. 정신 차려 봐. 아저씨 말 들려? 아저씨 말 들리냐고.”

느닷없이 건장한 남자가 다가와 아이를 흔들자 그제야 엄마도 아이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번에는 엄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우진아! 염우진! 너 왜 그래? 많이 아픈 거야? 도와주세요. 제발 누가 도와주세요.”

도와달라는 말은 중국어였지만 아들을 부를 때 쓴 건 한국어였다. 그제야 도윤도 아이와 엄마가 모두 한국인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쩐지 중국어 발음이 어색하더라니.

그는 일단 옆으로 다가온 직원들에게 구급차를 불러달라고 지시했다. 직원들도 아이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걸 한눈에 알아보고 다급하게 전화기를 들었다. 그 사이에 도윤은 아이의 가슴에 손을 얹고 치료 능력을 불어넣었다. 남들이 보는 가운데 능력을 쓰는 게 껄끄럽기는 하지만 그러지 않으면 아이가 당장 숨이 넘어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애가 평소에 가슴 쪽에 병이 있었습니까?”

도윤이 손바닥으로 아이의 가슴을 마사지 하듯 누르면서 물었다. 말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손을 통해 흘러나온 붉은 기운이 계속해서 아이의 가슴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지만 그 빛을 볼 수 없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저 심장 쪽에 충격을 주려는 행동으로만 보였다. 아이의 엄마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얼마 전에 감기를 심하게 앓기는 했지만 특별히 심장이나 폐에 문제가 있지는 않았어요. 바깥바람을 좀 쐬고 싶다기에 마침 몸도 다 나은 것 같아서 데리고 나왔는데…….”

어린 아이들은 후천적으로 류머티스 성 심장 질환을 앓기도 한다. 특히 고열이 동반되는 병을 앓는 과정에서 심장이나 판막에 문제가 생기기도 하는데 도윤이나 아이 엄마에게 그런 것까지 판단할 만한 의료 지식은 없었다. 어쨌든 도윤은 전력을 다해 아이의 가슴에 치료 능력을 불어넣었고, 덕분에 아이의 상태가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변했다.

구급차가 도착하고 대원들이 들 것을 들고 전시장 안으로 뛰어들었을 때쯤, 아이는 여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였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숨이 돌아온 상태였다. 도윤은 아이 엄마를 구급차에 함께 태워 보낸 뒤, 차를 타고 곧장 그 뒤를 따랐다. 북경에 머무는 동안 아리스 옥션에서 제공한 차였다. 그가 차에 시동을 거는데 왕화가 문을 열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병원까지 따라 가시게요?”

그녀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도윤에게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명색이 회사 이사이지 않습니까? 전시장에서 발생한 돌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회사의 이미지가 달라질 거예요. 인터넷 세상이잖아요.”

그렇잖아도 아이가 쓰러지고 도윤이 달려들어 응급처치를 하는 모든 상황을 손님들 가운데 몇 명이 휴대폰 카메라로 찍고 있었다. 왕화도 그걸 보았는지 그의 말을 수긍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도윤이 아이를 따라 병원으로 가려는 것은 꼭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아이는 말러의 악보가 놓인 진열대 앞에 쓰러져 있었다. 그런데 쓰러진 아이에게 고개를 돌리는 순간 악보에서 흘러나온 붉은 빛이 아이에게로 연결되는 게 보였다. 우진이라는 아이가 유물의 주인이라는 뜻이었다.

‘인연이라는 게 참 무섭네. 조금만 시간이 어긋났어도 아이가 유물의 주인이라는 걸 알 수 없었을 텐데. 게다가 북경에서 하필이면 한국 아이가 유물의 주인으로 등장할 줄이야.’

도윤은 운전을 하면서도 속으로 혀를 찼다.

그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이가 의사로부터 긴급 조치를 받고 응급실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상태가 아주 심각하지는 않다는 것을 확인한 의사가 아이의 피를 뽑고 엑스레이를 비롯한 몇 가지 검사를 실시한 모양이었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아이는 일단 응급실에서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도윤과 왕화가 병원 응급실까지 찾아오자 아이의 엄마는 깜짝 놀라면서도 몹시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게다가 도윤이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그녀를 안심시켰다.

“보호자 분 계세요? 입원 수속을 밟아야 하는데 어느 분이 오시겠어요?”

도윤과 왕화가 번갈아가며 아이 엄마를 위로하는데 간호사가 찾아와서 수속을 권했다. 아이 엄마가 중국어에 아주 능숙하지는 않은 눈치였기 때문에 왕화가 그녀와 함께 입원 수속을 하러 데스크로 갔다.

“제가 옆에서 보고 있겠습니다. 안심하고 다녀오세요.”

도윤은 나서서 아이 옆을 지키겠다고 했다. 그러자 아이가 중국어를 할 줄 몰랐기 때문에 아이 엄마도 그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한 번 감사를 표시하고는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이 모두 사라지자 도윤은 재빨리 침대 주변에 커튼을 치고 다시 한 번 아이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런 뒤에 전력을 다해 치료 능력을 불어넣었다.

도윤과 왕화는 아이가 병실로 옮겨지는 것을 보고 난 다음에야 병원을 떠났다.

“같은 나라 사람이라서 그런 거예요? 이 박사가 그렇게 아이에게 친절한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왕화가 헤어지기 전에 도윤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건 중국인들도 마찬가지잖아요. 남의 나라에서 만난 동포에 대해서는 대개 친절해지기 마련 아닌가요? 더구나 아이가 아프면 어른이 당연히 도와야죠.”

“그렇기는 한데, 사실 동포가 동포의 등에 칼을 꽂는 경우도 많아요. 아무튼 이 박사님의 새로운 면모를 본 것 같아서 좋네요. 그럼 편히 쉬세요.”

비유가 조금 살벌하기는 했지만 그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왕화를 내려준 도윤은 곧바로 차를 몰아 다시 아리스 옥션 건물로 향했다.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온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왕이푸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일 경매에 올릴 말러의 악보 말이에요. 제가 개인적으로 조금 살펴보고 싶은 부분이 있는데, 오늘 저녁에 잠시 제 사무실로 가져와도 될까요?”

왕 회장은 도윤의 갑작스러운 청에 다소 의아해하기는 했지만 선선히 그의 요구를 승낙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감정 이사이자 이번에 경매에 붙일 물건들에 대한 최종 감정을 맡은 사람의 부탁이었다.

왕이푸의 허락을 받은 도윤은 곧바로 전시실로 내려가 미리 연락을 받아 기다리고 있던 관리 직원으로부터 말러의 악보를 넘겨받았다. 그런 뒤 그는 저녁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악보를 가방 안에 넣고 다시 아이가 입원한 병실로 향했다. 다소 급하게 서두르는 감이 없지 않았지만, 아이에게 유물에 담긴 능력을 전해주려면 오늘밖에는 시간이 없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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