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219화 (219/300)

219화

저택의 식당은 테이블을 치우면 작은 연회장으로 써도 될 정도로 넓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겨울 해가 지평선에 걸릴 즈음, 도윤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모여든 아홉 명의 감정가들이 그곳으로 모였다.

참석자들을 한 명씩 둘러보던 도윤의 얼굴에 웃음이 배어나왔다. 처음 감정가라는 직업을 택하기로 결심한 이래로 늘 한 번쯤은 만났으면 했던 사람들. 드디어 그들의 얼굴을 직접 보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대가들 사이에 자신이 앉아 있다는 사실이 한없이 대견했다.

‘스페인의 알베르토 고메스는 나이가 칠십이 넘었을 텐데도 아직 정정해 보이네. 영국의 프레디 해들리는 듣던 대로 고집스러워 보이고, 프랑스의 모리스 메시앙은 와인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고 했지? 러시아의 세르게이 바스코프는 외모만 봐서는 군인처럼 생겼고, 독일의 세나 디트리히는 젊었을 때 미모가 상당했겠는데?’

이탈리아의 알리체 마로네와 미국의 타일러 아담스는 학회에서 한 번 얼굴을 본 적이 있다. 물론 당시에는 청중의 입장에서 그들의 발표를 들었을 뿐이기 때문에 두 사람은 도윤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인 일본의 나카지마 유토. 그를 보는 순간 도윤은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일본이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지에서 문화재를 가져간 것은 약탈이 아니라 정당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소유권 이전이라고 했지? 돈을 주고 수입하거나 당시 정부의 허가를 얻어서 가져갔으니 오히려 문화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기여한 것이라고 말이야.’

나카지마가 뛰어난 감정가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도쿄 대학 교수라는 점을 생각할 때, 안목에 비례하는 학자적 양심은 전혀 갖추지 못한 셈이었다.

식당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서로 안면이 있거나 오래 전부터 친분을 유지하던 사이였다. 그들은 옆자리에 앉은 다른 감정가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며 이브라힘 왕세제를 기다렸는데, 그 대화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도윤 하나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나이가 마흔을 넘지 않은 사람은 나밖에 없구나. 역시 대가라는 소리를 들으려면 실력 못지않게 경험과 연륜이 쌓여야 하는 건가? 하지만 한국이나 중국에서만 활동하면 서양 예술품에 대해서는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없는 건 아닐까? 테이트브리튼에서 근무하던 장예주 박사도 결국 한국으로 귀국한 걸 보면 동양인은 설사 유럽에서 활동하더라도 여간해서는 제대로 인정받기 힘든 것 같기도 하고…….

“이 박사 생각은 어떻습니까?”

도윤이 실내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멍하니 생각에 빠져있는데 문득 누군가 그를 불렀다. 미국에서 온 타일러 아담스였다.

“네? 무슨 생각 말입니까? 아, 죄송하지만 말씀하시는 걸 정확히 듣지 못했습니다.”

도윤이 미안해하자 아담스가 씩 웃으며 다시 물었다.

“이브라힘 왕세제가 우리를 다 함께 모이게 한 이유가 무엇일 것 같으냐는 말입니다. 솔직히 이 자리에 있는 감정가들은 한 명을 초대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게 사실 아닙니까? 내가 알기로 왕세제는 우리를 다 부르기 위해 엄청난 돈을 썼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굳이 이런 자리를 만든 이유가 무엇일지 짐작이 되지 않아서 하는 말이에요.”

“글쎄요? 솔직히 저도 그게 궁금하기는 한데 압둘 비서실장에게 물어도 대답을 해주지 않더군요. 역시 뭔가를 감정해달라는 게 아닐까요?”

그 말에 프랑스의 메시앙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야 당연히 뭔가를 감정시키려는 거겠지요.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유명하다 싶은 감정가를 죄다 불렀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궁금해 하는 건 도대체 어떤 물건을 감정시키려고 우리를 한꺼번에 초대했느냐는 점입니다. 솔직히 웬만한 작품이라면 우리 가운데 한두 명만 불러도 충분히 제대로 된 감정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점에는 도윤도 공감이었다. 자신에게 이미 지불한 왕복 비행기 값과 감정비만 해도 몇 만 달러에 달했다. 모르긴 해도 이 자리에 있는 다른 감정가들에게는 훨씬 많은 액수를 지불했을 것이다. 아무리 도윤이 최근 뜨고 있는 천재 감정가라고 해도 이미 업계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어낸 대가들에게 견줄 수는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왕세제가 이 박사를 이 자리에 부른 이유도 궁금하긴 합니다. 설마 이 박사에게도 다른 분들과 동일한 자격으로 뭔가를 감정시킬 생각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나카지마 교수의 말이었다. 속으로 실소를 삼킨 도윤이 고개를 돌리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나카지마가 보였다.

“글쎄요. 그 점에 대해서는 이따가 왕세제께 직접 물어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설마 저에게 사우디아라비아를 구경시켜주기 위해서 부르기야 헸겠습니까?”

도윤은 시비나 다름없는 나카지마의 말을 적당히 받아넘겼다. 네가 보기에는 언제나 늙은 생강이 더 매울 것 같지? 사실은 작은 고추가 더 매울 수도 있어. 그가 고개를 숙인 채 코웃음을 치는데 저택에 근무하는 직원이 왕세제의 입장을 알렸다.

“이브라힘 왕세제께서 들어오십니다.”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아랍의 전통 복장을 걸친 이브라힘 황세제가 식당에 들어섰다. 그 옆을 압둘이 따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발견한 감정가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상대방에게 예를 표하는 이슬람식 인사법이었다.

이브라힘이 자리에 앉기 전에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사람들을 쭉 둘러보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여러분을 이 자리에 모신 이브라힘 파티흐 알 사우드입니다. 제가 초대하기는 했지만 세계적인 감정가들이 이처럼 한 자리에 모인 것을 보니 벌써부터 마음이 든든하고 흐뭇합니다. 아무쪼록 오늘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요리를 마음껏 즐기시고 내일부터는 여러분들의 실력을 아낌없이 발휘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자리에 앉자 곧바로 준비된 요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브라힘은 식사를 하는 동안 참석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면서 그들의 출신과 경력 등을 간단히 소개했다. 그렇게 한차례 소개가 끝났을 때, 가장 연장자인 스페인의 고메스가 질문을 던졌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희는 아직 이 자리에 모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이제 왕세제께서 직접 모습을 보이셨으니 저희가 뭘 감정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브라힘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이미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저한테 반드시 정확하게 감정을 해야 할 작품들이 몇 점 있습니다. 오늘은 이미 해가 졌으니 다들 편하게 쉬십시오. 내일 아침 식사 후에 그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아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여기 계신 아홉 분들의 고견을 기대하겠습니다.”

“어떤 작품들인지는 지금 말씀해주기 어렵다는 뜻이군요.”

“어차피 내일이면 직접 보실 수 있을 테니 너무 서두르지 마십시오. 한 가지만 미리 말씀드리자면 그 중에는 여러분이 보고 깜짝 놀라실 작품들도 있습니다. 하룻밤 정도는 어떤 작품일지 궁금해 하며 보내시는 것도 내일의 재미를 위해 도움이 될 겁니다. 하하.”

이브라힘과는 달리 도윤을 비롯한 감정가들은 그저 유쾌하게 웃을 수만은 없었다. 아무리 왕세제라지만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감정가들을 모아놓고 너무 숨기기만 하는 태도가 다소 무례하게 비춰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왕세제의 말대로 어쩔 수 없이 다음날 아침까지 불쾌함과 호기심을 삭일 수밖에 없었다.

* * *

다음날 오전, 아침 식사를 마친 감정가들이 다시 한 자리에 모였다. 그들이 모인 곳은 입구와 창문을 제외하면 사면이 온통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연회장이었다. 중앙에 놓인 커다란 회의용 테이블 위에 무선 인터넷이 연결된 노트북이 사람 수대로 놓인 것을 제외하면 다른 가구가 전혀 없는 넓은 공간이었다.

연회장 벽을 따라 스무 개 가량의 액자가 걸렸고, 그 사이에 물건이 놓인 진열대가 몇 개 드문드문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만 액자와 진열대를 모두 천을 덮어 놓아서 당장은 무엇이 진열되어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사람들이 각자 회의용 테이블 주위에 자리를 잡고 앉자 압둘이 서너 명의 직원들을 데리고 연회장으로 안으로 들어섰다.

“지금부터 여러분이 진행하실 감정의 모든 과정을 옆에서 제가 도울 겁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요청하십시오. 아무쪼록 정확하고 세심한 감정을 부탁드립니다.”

간단히 말을 마친 압둘이 박수를 짝 치자 대기하고 있던 직원들이 액자와 진열대를 덮고 있던 천을 하나씩 걷어냈다. 그들은 천을 모두 걷어내자마자 재빨리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실내에 있던 감정가들은 그들이 사라졌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큰 충격에 빠졌다. 눈앞에 정체를 드러낸 작품들이 예상을 훨씬 벗어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저건 뭉크의 절규잖아? 저게 왜 여기에 있지?”

러시아에서 온 세르게이 바르코프가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는 벽 한쪽에 걸려 있는 뭉크의 절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처럼 입 밖으로 말을 뱉지는 않았지만 다른 감정가들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뭉크는 평생 네 점의 절규를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은 우리가 잘 아는 유화지만 두 번째는 석판화, 그리고 세 번째는 템페라 화법으로 그린 작품이었다. 이 세 작품은 현재 모두 노르웨이의 오슬로 국립 박물관에서 전시 중이었는데, 파스텔화로 그린 네 번째 작품만이 개인 소장품이었다.

오슬로 박물관은 그 동안 두 차례에 걸쳐 뭉크의 그림을 도난당했다가 되찾은 전력이 있다. 그 때문에 다른 도난 미술품들이 그렇듯이 현재 박물관에서 걸려 있는 뭉크가 사실은 위작이 아니냐는 얘기가 떠돌고는 했다. 그런데 마치 그 소문이 진실이기라도 하듯 그 도난당했던 절규가 이브라힘 왕세제의 집에서 모습을 나타난 것이다.

“절규를 훔친 절도범들이 그걸 가지고 위작을 만들었을 거라는 얘기가 있었지. 어쩌면 그 추측이 사실이었을지도 모르겠군. 만약 저게 진작이라면 오슬로 박물관에 걸려 있는 것은 위작이라는 얘기가 되잖아? 왕세제가 왜 끝까지 우리가 어떤 작품들을 감정하게 될지 밝히지 않았는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군.”

나카지마가 마치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듯이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다른 감정가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도윤을 비롯한 몇 명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특히 도윤은 단번에 연회장에 걸린 절규가 위작이라는 것을 알아봤다. 그림에서 아무런 빛도 흘러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교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저건 아무리 봐도 위작이야. 도둑들이 자신들이 훔친 진작을 바탕으로 위작을 만든 건 확실해 보이지만, 그들이 박물관 측에 도로 넘긴 건 진작이 분명해. 그리고 이브라힘 왕세제에게는 위작을 팔았겠지. 아니면 누군가 속아서 산 물건을 나중에 왕세제가 다시 샀을 수도 있고.’

도윤은 과거 유럽을 여행할 때 오슬로 박물관을 들러 거기에 걸려 있는 뭉크를 직접 본 적이 있었다. 당시 세 점의 절규에서는 모두 빛이 흘러나왔다. 도난을 당했던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됐든 진작을 회수하는 데는 성공했다는 뜻이다. 그에 반해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난 절규는 위작이 분명했다.

절규는 시작이었다. 베일을 벗은 나머지 작품들 역시 대부분 이 자리에 모인 감정가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그중에는 이미 훼손되거나 사라졌을 것으로 추정된 것들도 있어서 도윤 역시 적지 않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건 혹시 콜린 맥카흔의 ‘우레웨라 벽화 아닙니까? 설마 그게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는 말입니까? 이걸 도대체 어떻게 구했죠?”

영국의 프레디 해들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유화 한 점을 손으로 가리켰다. 가로 150cm, 세로 170cm 크기의 유화는 대부분 녹색이 약간 섞인 검은색으로 그려져 있어서 어둡고 우울한 느낌을 주었다. 미술용 물감이 아니라 가정용 페인트로 그린 이 그림은 1975년 당시 이미 뉴질랜드에서 가장 위대한 화가라는 칭송을 받고 있던 콜린 맥카흔의 작품이었다.

이 그림은 백인들에 의해 땅을 빼앗긴 뉴질랜드 원주민 투호이 족의 역사와 신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었다. 벽화로 불리기는 하지만 맥카흔은 벽화 제작 당시 벽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지 않고, 캔버스 위에 작품을 완성한 다음 벽에 못을 박아 그것을 고정시켰다.

벽화는 원래 뉴질랜드 와이카레모아나 호수 근처의 관광 안내 센터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1997년 밤, 이 그림이 도난당하고 말았다. 도둑들은 지키는 사람도 거의 없는 안내 센터에서 손쉽게 그림을 떼어내어 사라졌는데, 그 뒤로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 그림이 엉뚱하게도 이브라힘 왕세제의 손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전시대 위에 놓인 다른 물건들도 비슷했다. 미국에서 온 타일러 아담스는 이미 불타버린 것으로 알려진 시인 바이런 경의 회고록 원고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모습으로 유리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독일의 세나 디트리히는 이라크 지역에서 도단당한 것이 분명한 페르시아와 수메르 문명의 유물들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아무래도 왕소의와 황금중이 도굴했다는 강희제의 무덤에서 나온 물건인 것 같은데요? 그 사람들이 굉장히 험하게 도굴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모자의 상태는 생각보다 훨씬 양호하네요. 어찌 보면 가장 훼손되기 쉬운 물건인데…….”

나카지마가 백조 깃털로 만든 황금장식 조관(朝冠)을 들여다보며 신음을 뱉듯 중얼거렸다. 관리들이 조정에서 쓰는 관모인 그 모자는 도윤이 보기에도 진품이 틀림없었다.

실내에 전시된 물건들을 보면서 도윤은 이브라힘 왕세제가 생각보다 엄청난 소장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정도의 물건을 모으려면 아무리 왕세제라도 오랜 세월에 걸쳐 막대한 돈과 노력을 쏟아 부었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물건을 얻기 위해 불법적인 거래도 서슴지 않은 게 틀림없어.’

몇몇 소장품들은 명백하게 범죄와 연관되어 모습을 감춘 것들이었다. 그게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이브라힘이 이 물건들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게다가 압둘이 에티오피아에서 가져간 참 십자가는 아예 전시되지도 않았다.

‘그건 보나마나 진품이라고 생각한 거겠지. 어차피 예술품도 아니니까 믿거나 말거나지. 그래도 탄소 동위 원소 측정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라스푸친의 목걸이 역시 보이지 않았다. 그건 당연했다. 목걸이를 다니엘 로스차일드에게 뺏긴 장본인이 바로 도윤이었으니, 아무리 이브라힘이 뻔뻔하다고 해도 그걸 피해자의 눈앞에 버젓이 내놓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도윤이 아는 몇몇 물건이 이곳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브라힘에게 또 다른 엄청난 수집품들이 더 있다는 뜻이었다.

‘이미 진품이라고 확신하고 있거나, 위작이라고 판단되어 처리해 버린 것들은 당연히 여기에 내놓지 않았겠지.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쨌든 대단한 사람이기는 해.’

전시된 작품들 하나하나가 세상에 알려지면 엄청난 파란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작품들 가운데서도 유난히 도윤의 눈길을 끄는 물건이 딱 하나 있었다. 몇 장으로 이루어진 양피지 묶음이었는데, 내용이 라틴어로 작성되어 있엇다.

‘이건 일종의 자서전인가? 아니 그보다는 회고록에 더 가깝겠군.’

도윤이 문서의 내용을 잠시 살피고 있는데 압둘이 슬며시 다가왔다.

“그 양피지에 흥미가 있으신가 보군요.”

고개를 돌린 도윤이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글쎄요. 아직은 앞의 몇 줄만 대충 읽어봤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누군가 자기 인생을 돌아보며 쓴 회고록인 것 같습니다.”

그러자 압둘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스피리돈 브레토스라는 그리스 수도사가 작성한 양피지이죠. 13~14세기경에 활동한 사람인데 유명한 인물이 아니라서 아마 이름을 들어보지는 못하셨을 겁니다. 저희도 맨 마지막에 쓰인 본인의 서명을 보고서야 저자의 이름을 확인했을 정도니까요.”

“말씀대로 처음 듣는 수도사군요. 그런데 그리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면 왜 이 양피지를 여기에 두신 겁니까? 이런 양피지 문서라면 남아 있는 게 엄청나게 많을 텐데요.”

압둘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가치로만 따지면 그렇게 비싼 물건이라 보기 어렵죠. 하지만 내용 중에 재미있는 것들이 제법 있어서 여러분의 감정을 받아보고 싶었습니다. 시간은 충분하니까 이 박사께서도 한 번 읽어보십시오. 약간 해괴하고 황당한 내용들이 기술되어 있는데 그게 나름대로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압둘은 그 말을 하고는 곧바로 다른 감정가들에게 다가갔다. 도윤은 그의 등을 뚫어지게 노려보다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저 내용이 재미있어서 가져다 놓았을 뿐이라고? 어디서 씨도 안 먹힐 소리를.

양피지에서는 선명한 붉은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능력을 담고 있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붉은 빛이 도윤 자신을 포함해서 이 자리에 있는 감정가들 가운데 무려 세 명의 몸과 이어지고 있었다. 영국의 해들리와 프랑스의 메시앙이 그 주인공이었다.

유물의 주인이 한 명으로 고정되어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유물에서 흘러나온 붉은 빛이 동시에 세 명의 주인과 연결되는 모습을 보는 건 도윤으로서도 처음이었다.

‘뛰어난 감정가와 연관된 유물인 모양이군.’

압둘이 밝히지는 않았지만 스피리돈 브레토스는 특이하게도 자신의 능력을 사물에 담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링커였다. 그 내용이 양피지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고작해야 양피지 묶음의 첫째 장만 읽은 도윤으로서는 그런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는 당장 양피지를 읽지 않고 일단 그 자리를 떠났다. 아무래도 압둘이 일부러 이 양피지를 여기에 가져다 둔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는 일단 시간을 두고 천천히 양피지의 내용을 해독하기로 했다. 그런 뒤에 거기에 잠재된 능력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천천히 생각해볼 작정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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