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도윤이 완전히 의식을 잃자 석훈이 그의 몸 옆으로 미끄러져 내린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그는 도윤이 했던 것처럼 그것을 윗도리 안에 숨겨 넣고는 곧바로 방을 나섰다. 그가 찾아간 곳은 유물들이 진열되어 있는 연회장이었다. 석훈이 다가가자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원들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이 박사님? 오늘 감정은 끝내신 거 아니었습니까? 왜 다시 여기를…….”
그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석훈이 미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몸이 아프다보니 정신이 깜빡깜빡하네요. 테이블 위에 중요한 메모를 두고 왔거든요. 얼른 들어가서 그것만 가지고 나오겠습니다.”
그동안 도윤을 따라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피나는 노력을 기울인 끝에 석훈도 이제는 영어가 제법 능숙해졌다. 그는 상대가 요구하기도 전에 먼저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서 건넸다. 경비원들은 휴대용 탐지기를 이용해 그의 몸에 다른 전자장비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선선히 출입을 허용했다.
“얼른 들어가서 가지고 나오세요. 곧 불을 끄고 문을 잠거야 하니까 서두르셔야 합니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금방 나오겠습니다.”
경비원들의 태도는 엄격했지만 그래도 석훈에게 예의를 지켰다. 그들의 눈에는 석훈이 VIP인 도윤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석훈과 도윤은 얼굴은 물론이고 체구마저 확연히 달랐다. 그러나 도윤은 자기 방에서 양피지의 능력을 전해 받기 전에 석훈에게 미리 환각 능력을 걸어놓았다. 그 때문에 경비원들은 각진 석훈의 얼굴을 뻔히 쳐다보면서도 그를 영락없이 도윤이라고 생각했다.
석훈은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도윤이 미리 말해준 대로 CCTV에 얼굴이 정면으로 노출되지 않게 조심하면서 브레스토의 양피지가 들어있던 유리상자로 다가갔다. 그는 자신의 몸으로 유리상자를 가린 뒤 옷 속에 감춰두었던 원래의 양피지를 꺼냈다. 그러고는 유리 상자를 살짝 들어 올린 다음 안에 있던 가짜와 바꾸었다.
그는 유리상자에서 빼낸 가짜 양피지를 다시 옷 속에 집어넣고서는 태연한 표정으로 중앙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거기서 도윤이 미리 적당히 한글로 휘갈겨 놓은 메모지를 집어넣은 뒤 그것을 주머니에 넣고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CCTV를 의식한 행동이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퇴근이 늦어지셨겠네요. 그럼 수고하세요.”
그가 인사를 하고 다시 방으로 올라갈 때까지 경비원들은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게 도윤이 아닌 석훈이라는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석훈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도윤의 상태를 살핀 뒤, 창문을 열고 연회장에서 가지고 온 양피지를 불에 태웠다. 그는 타고 남은 재를 화장실 변기에 흘려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소파에 앉아 이마의 땀을 닦았다.
객관적으로 보면 문서 하나를 바꿔치는 간단한 일이었고,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간단한 일 때문에 진땀을 흘릴 만큼 엄청나게 긴장했었다. 일이 무사히 끝났다는 생각이 들자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차라리 사람을 두드려 패는 게 낫지, 이런 일은 정말 체질에 안 맞네.”
바로 옆에 도청기가 있다고 해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그가 연회장에서 빼내 태워버린 양피지 뭉치는 사실 모양과 색깔만 그럴싸할 뿐, 실제로는 종이였다. 점심을 먹은 뒤에 그가 저택 경비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직접 시내에 나가서 사온 모조 양피지였던 것이다.
미술 용구를 파는 가게에 가면 빈티지 느낌이 나는 물건을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가짜 양피지 종이를 구할 수 있다. 도윤은 점심시간 때 자기 방에서 인터넷을 검색한 끝에 리야드 시내에서 모조 양피지 종이를 파는 가게를 찾아냈다. 그런 다음 그가 오후 내내 연회장에서 물건을 감정하는 동안 석훈에게 차를 타고 시내에 나가 그 종이를 사오게 한 것이다.
모조 양피지를 구한 석훈은 이브라힘의 저택으로 돌아온 후 연회장 건너편에 있는 화장실에서 그를 기다렸다. 미리 약속한 시간에 그곳을 찾은 도윤은 그가 구한 양피지에 환각 능력을 걸어 진짜처럼 보이도록 만든 것이다.
자신이 만든 가짜 양피지를 옷 속에 숨긴 도윤은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와 저녁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다른 감정가들이 모두 저녁 식사를 위해 연회장을 떠나자, 그는 슬그머니 유리 상자 앞으로 다가가 몸으로 CCTV를 가리고 감춰뒀던 양피지를 상자 안의 진짜와 재빨리 바꿨다. 연회장 중앙의 테이블 위에도 미리 한글 메모지를 작성해 두었다.
그렇게 해서 빼낸 양피지의 능력을 전해 받은 그가 기절하자, 이번에는 도윤의 모습으로 보이게끔 환각 능력이 걸린 석훈이 연회장에 들러 다시 한 번 진짜와 가짜를 바꾼 것이다.
자신이 태워버린 가짜 양피지를 떠올린 석훈이 문득 실소를 터트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감히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그 환각 능력이라는 건 정말 대단하네. 설마 카메라까지 속일 수 있을 줄이야.’
환각 능력은 단순히 사람에게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 주변의 빛을 조작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촉감과 미각, 후각까지 모두 완벽하게 속이는 대단한 능력이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나중에 연회장에 설치된 CCTV 영상을 확인하더라도 화면 속에는 분명히 진짜 양피지와 진짜 도윤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도윤은 그 능력을 백마사의 우물 속에서 찾은 부채로부터 전해 받았다. 원래 부채의 주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장과로의 능력이 실로 대단했다는 뜻이다. 그는 그 능력을 이용해서 당대의 현종과 그 주변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이고는 했었다.
‘그럼 이제 도윤이 형은 네 개의 능력을 전해 받은 건가? 진짜 부럽네.’
얌전히 누워 있는 도윤을 보면서 석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가 무사히 깨어날 때까지 옆을 지키는 것뿐이다. 석훈은 그날 밤을 소파에 앉은 채로 보냈다.
* * *
저녁 일곱 시가 되기도 전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도윤은 다음날 아침 식사 시간 때까지도 깨어나지 못했다. 석훈은 누가 찾아오기 전에 먼저 식당으로 내려가서 막 식사를 마치고 나가던 경호원을 붙잡고 떠듬거리는 영어로 말했다.
“이도윤 박사님의 상태가 별로 안 좋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죄송하지만 오늘은 감정을 하지 못할 것 같네요. 오후에 몸이 좀 괜찮아지면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다행히 경호원은 석훈의 거친 영어를 용케 알아들었다. 그가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듯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압둘이 직접 식당으로 찾아왔다.
“이 박사께서 편찮으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귀한 분을 모셨는데 탈이 났다니 죄송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군요. 저희가 가까운 병원으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석훈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내저었다.
“약이라면 벌써 저희가 가지고 온 것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크게 아픈 건 아니니까 그냥 오늘 하루만 휴식을 취하면 될 겁니다. 이 박사님도 병원에는 갈 필요가 없다고 하셨어요. 공연히 부담을 주기 싫으니까 그냥 하루만 쉬게 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럼 제가 병문안이라도…….”
“어제 밤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시더니 조금 전에야 간신히 잠이 드는 걸 보고 내려왔습니다. 말씀은 고맙지만 지금은 그냥 편히 주무시게 내버려두시는 게 도와주시는 겁니다. 나중에 깨어나면 제가 비서실장님에게 연락을 드리라고 전하겠습니다.”
압둘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직접 도윤을 찾아보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석훈이 그건 오히려 기껏 잠든 도윤을 괴롭히는 짓이라면서 난감한 표정을 짓자 어쩔 수 없이 뜻을 접었다.
“주방에 환자가 위에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준비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언제든지 깨어나시면 꼭 연락을 주십시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압둘이 식당을 떠나자 석훈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아침을 먹던 접시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욕이 뚝 떨어졌다.
식당을 나간 압둘은 곧바로 경비원들을 소집했다. 그들에게 몇 가지를 물은 그는 다른 감정가들과도 잠시 대화를 한 뒤, 이번에는 경호실을 찾아가 그곳에서 보관하고 있던 CCTV 녹화 영상을 확인했다. 그런 뒤에야 다시 이브라힘 왕세제의 서재 문을 두드렸다.
“이도윤 박사가 아프다고?”
그로부터 간단한 보고를 들은 이브라힘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 연회장을 지키던 경호원이나 함께 작업을 하던 감정가들의 말에 의하면 어제부터 계속 머리와 배가 아프다고 했답니다. 아마 감기나 몸살 증상인 것 같습니다.”
“감기? 꾀병을 부리거나 뭔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고? 방으로 찾아가서 상태를 직접 확인했나?”
“함께 따라온 개인 비서의 말에 따르면 밤새 뒤척이다가 오늘 아침에야 간신히 잠이 들었다고 해서 일단은 그냥 자게 내버려두었습니다. 나중에 깨어나면 확인해 보겠습니다.”
“브레스토의 회고록은 그건 무사히 제자리에 있던가?”
“그렇잖아도 연회장에 들러 확인했습니다. 물건은 유리 상자 안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래도 한 번 잘 살펴봐. 혹시 가짜로 바꿔치기 했을 수도 있잖아.”
“전하를 뵙기 전에 경호실에 들러서 어젯밤 CCTV 영상을 전부 확인했습니다. 이 박사가 저녁에 연회장을 떠났다가 나중에 급히 돌아와서 책상에 놓아둔 메모지를 가져가기는 했지만 특별히 이상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연히 누군가에게 능력을 전해주는 기척도 없었고요.”
“방에 둘이 있을 때 나눈 대화 내용 중에는 특별한 게 없었나?”
“대화 내용을 도청해서 녹음해 두기는 했지만 두 사람이 있을 때는 한국어만 써서 아직 내용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해석해 놓겠습니다.”
당장은 굳이 그것까지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는 뜻이었다. 이브라힘이 인상을 살짝 찌푸리더니 다른 질문을 던졌다.
“링커의 도움을 받은 사람은 충격으로 최소 반나절 이상 정신을 잃는다고 했지?”
“네. 하지만 어제 하루 종일 저택 내에서 정신을 잃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혹시 이 박사가 능력을 전해 받고 누워 있는 건 아닐까?”
그거야말로 진실에 가까운 얘기였지만 압둘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시다시피 링커는 유물에 담긴 능력을 스스로 전해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박사가 아닌 다른 사람이 링커였다고 해도, 그는 어제 마지막으로 연회장을 떠난 이후로 개인 비서 이외에는 누구와도 접촉한 적이 없습니다.”
“그 개인 비서라는 사람이 설마 링커일리는 없다는 말이지?”
“그 자는 미술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이나 안목이 부족한 인물입니다. 더구나 라스푸친의 목걸이와 관련된 사건에서는 아예 러시아를 방문한 적도 없습니다.”
그제야 이브라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하긴 이 박사가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한 사람이 바로 자네였으니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면 가장 먼저 그 점을 파고들었겠지. 수고했어.”
압둘이 인사를 하고 서재를 나가자 이브라힘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만약 이번에 초대한 아홉 명의 감정가들 가운데 정말로 링커가 있다면 어제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브레스토의 양피지에 주목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어제 하루 동안 관찰해 본 바에 의하면 누구도 양피지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저들 가운데는 링커가 없다는 뜻인가?”
가슴이 답답하고 짜증이 울컥 치밀었다.
* * *
도윤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오후 네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장과로의 환각 능력을 전해 받았을 때 서른 시간 가깝게 정신을 잃었던 것과 비교하면 그나마 24시간을 넘기지 않은 이번 경우는 그리 오래 누워 있었다고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옆에서 그를 지켜야 했던 석훈의 입장에서는 피가 마르는 스물두 시간이었다.
“어때요? 몸에는 이상이 없는 거 같아요?”
그가 눈을 뜨자 석훈이 득달같이 달려와 물었다. 도윤은 고개를 좌우로 젓고 팔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능력을 전해 받은 사람은 비록 오랫동안 누워 있었더라도 깨어날 때는 몸이 전보다 훨씬 가벼워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도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몸은 아주 가뿐해. 그런데 지금 몇 시냐?”
“벌써 오후 네 시가 넘었어요. 그렇잖아도 압둘 비서실장이 세 번이나 전화를 걸었어요. 어찌나 목을 졸라대던지 형이 조금만 더 늦게 깨어났으면 내가 숨 막혀 죽었을 거요.”
얘기만 들어도 자신이 정신을 잃은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눈에 훤했다. 사실 이번에는 그리 오랜 시간 동안 기절했던 편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하필이면 쓰러진 장소가 남의 나라, 그것도 이브라힘 왕세제의 저택이라는 게 문제였다.
“난 좀 씻을 테니까 그 사이에 네가 압둘한테 전화해라. 나 깨어났다고.”
욕실에 들어간 도윤은 샤워를 하면서 새로 받은 능력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놀랍게도 그가 이번에 받은 능력은 무려 두 가지였다. 그것들은 브레스토가 회고록에서 언급했던 그 자신의 능력과 동일했다.
새로 받은 능력 가운데 하나는 근처에 능력을 담은 유물이 있을 경우 그것의 위치를 느낄 수 있는 일종의 감지력이었다. 앞으로 능력을 개발함에 따라 감지 범위가 점차 늘어나기는 하겠지만, 당장은 대략 반경 백 미터 내에 존재하는 유물의 위치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하나는 유물의 능력을 사람이나 사물에게 옮겨주는 것이었다. 사람으로 하여금 능력을 전해 받게 하는 힘은 링커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니 새로울 게 없었다. 그러나 사람이 아니라 사물에게도 능력을 옮겨줄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능력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능력을 담은 유물을 발견했을 때, 거기 담긴 능력만 내가 원하는 물건으로 싹 옮길 수 있다는 얘기잖아? 이번에 양피지에 담긴 능력을 몰래 전해 받느라 생고생을 했던 걸 생각하면 의외로 굉장히 유용한 능력일 수도 있겠는데?’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현재 그가 지닌 능력조차 원하는 사물에 옮길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렇게 해서 유물을 만들었더라도 누가 주인이 될지는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만약 그것까지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경우, 도윤의 자손들은 조상이 가진 능력을 대대손손 물려받을 수 있을 것이다.
새로 받은 능력의 특성을 머릿속으로 대충 정리한 그는 욕실에서 나와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자 잠시 후 누군가 노크를 했다. 석훈이 문을 열자 압둘이 서 있었다.
“이 박사님! 몸은 좀 어떻습니까? 쓰러지셨다고 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도윤은 걱정보다는 탐색에 가까운 눈빛으로 자신을 살피는 압둘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걱정해주신 덕분에 지금은 훨씬 좋아졌습니다. 어제는 열도 있고 배가 몹시 아팠는데 다행히 자고 일어나니까 싹 나았습니다. 어렵게 불러주셨는데 컨디션 조절에 실패하는 바람에 하루를 완전히 날렸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니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나저나 내일부터라도 다시 감정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힘드실 것 같으면 굳이 무리하실 필요 없습니다. 무엇보다 이 박사님의 건강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니겠습니까?”
“아직 젊어서 그런지 하루 푹 쉬었더니 거뜬합니다. 당장 내일부터 아무 문제없이 일할 수 있을 거예요. 왕세제님께도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치게 되어 죄송하게 됐다는 말씀을 전해주십시오.”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럼 괜찮으시다는 걸 확인했으니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부디 내일까지 무리하지 말고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압둘은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떠났다. 그가 떠난 뒤 석훈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입을 열려고 하는 걸 도윤이 손으로 막았다. 녀석이 물으려는 건 들으나마나 이번에 새로 얻은 능력이 무엇이냐 하는 것일 게 뻔했다. 그러나 이 방은 아직도 도청 장치가 도처에 깔려 있었다. 아무리 저들이 한국어를 모른다고 해도, 녹음된 파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안전하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