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이브라힘 왕세제의 초대를 받아서 모인 감정가들은 나흘에 걸쳐 연회장에 진열된 미술품과 유물들에 대해 꼼꼼하게 감정을 진행했다. 그런 뒤 하루 동안 자신들이 감정했던 작품들에 대한 일차 의견서를 작성했다. 그들이 작성한 의견서는 연회장에 마련된 각자의 컴퓨터에 입력되었으며, 그대로 압둘에게 전송되었다.
엿새째 되는 날, 감정가들은 다시 한 자리에 모여 회의를 진행했다. 그들은 하루 종일 회의한 끝에 먼저 만장일치로 진위 판정이 이루어진 작품들을 골라냈다. 다들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정도로 뛰어난 감정가들이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많은 작품들에 대해 의견이 일치했다. 감정가들을 위해서도, 그들을 초대한 이브라힘 왕세제를 위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삼분의 일 정도의 작품에 대해서는 감정가들 사이에 견해가 엇갈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작품들은 일단 판정 결과를 내는 걸 보류하고 여러 가지 과학적 검사를 진행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작품의 성격에 따라 어떤 연구소에 검사를 의뢰할지를 정하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느라 또 하루가 지나갔다.
감정가들이 리야드에 온 지 9일째 되는 날, 이브라힘과 압둘이 전시회장을 함께 찾아왔다. 이미 보고서는 모두 제출했지만, 마지막으로 감정가들로부터 직접 감정 결과에 대한 브리핑을 듣기 위해서였다.
먼저 위작으로 판정한 서양 작품들에 대해서는 영국의 해들리가 대표로 나서서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뭉크의 절규와 바이런의 회고록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을 모두 위작으로 판정하고 그 이유를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 작품들 모두 이브라힘 왕세제가 적지 않은 돈을 써서 사들였던 것이기 때문에 그로서는 저절로 표정이 굳어질 수밖에 없는 설명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자리에 있는 절규는 의심의 여지없는 위작입니다. 뭉크의 화풍을 그대로 재현해 낸 솜씨는 칭찬할 만 하지만 군데군데 잔 실수를 너무 많이 저질렀어요. 바이런의 회고록 역시 종이의 종류 자체가 당대의 것이 아닙니다.”
이브라힘은 해들러가 설명을 이어가는 내내 씁쓸한 표정을 지었지만, 발표가 끝날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판정 결과를 묵묵히 받아들였다. 해들러의 뒤를 이어 중국의 위작들에 대해 판정 이유를 설명한 사람은 나카지마 교수였다. 그는 먼저 연회장에 진열되었던 송명대의 도자기들과 여러 점의 회화, 서책, 골동품들을 모두 위작으로 판정했다.
“일부 도자기에는 최근에 만든 물건을 오래된 물건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손을 댄 흔적이 뚜렷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위작으로 판정하기가 더 쉬웠지요. 위조범들이 이미 잘 알려진 수법을 썼거든요. 전문 감정가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어서 물건을 사기 전에 실력 있는 전문가의 의견을 들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말에 이브라힘이 불편한 듯 헛기침을 했고, 도윤을 비롯한 몇몇 감정가들도 쓴웃음을 지었다. 감정가가 고객을 두고 학생을 꾸짖는 선생 노릇을 하려들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박물관의 구매 담당자라면 모를까, VIP 수집가일 경우에는 가급적 삼가야 할 행동이었다.
‘나카지마 교수 밑에서 배우는 도쿄 대 학생들이 불쌍하군. 평소에 얼마나 제자들을 쪼아댈지 안 봐도 뻔 하겠어.’
도윤은 마치 강의를 하듯 설명을 이어나가는 나카지마와 그 앞에서 공개적으로 체면을 구긴 꼴이 된 이브라힘 왕세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가만히 혀를 찼다.
위작에 대한 감정 이유를 밝히는 시간이 끝나자, 곧바로 진작들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프랑스의 메시앙과 도윤이 나섰다. 나카지마 교수는 진작으로 판정받은 중국 작품들에 대한 설명도 자신이 맡고 싶어 했지만, 컴퓨터로 전송된 의견서를 살펴본 압둘이 도윤에게 그 일을 부탁했다. 그 때문에 나카지마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메시앙은 스페인의 고메스와 미국의 아담스와 함께 여기 모인 감정가들 가운데 가장 유머가 풍부하고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먼저 회화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했다.
“쿠르베의 ‘목욕하는 여인’과 마티스의 ‘붉은 나무가 있는 파란 벽돌 집’, 그리고 코로의 ‘나폴리 해안’은 모두 지금까지 한 번도 공개적으로 거래된 적이 없는 그림들이지만 진품이 틀림없습니다. 제목은 저희들이 임의로 붙인 것이니까 나중에 왕세제께서 원하시는 대로 수정하셔도 됩니다. 그거야 말로 최초 공개자의 권리와 같은 거지요. 하지만 ‘나폴리 해안’을 걸프 만으로 바꾸지는 마십시오. 그건 권리의 남용이니까요.”
메시앙은 적절한 농담을 섞어가며 진작으로 판정된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번에는 이브라힘 역시 기분 좋은 웃음을 입에 건 채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간간히 웃음까지 터지는 시간이 끝나자 이번에는 도윤이 자신의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중국 서화의 경우 대개 작자가 제목을 적어놓은 경우가 많아서 아쉽지만 왕세제께서 마음대로 바꾸는 건 곤란할 것 같습니다. 일단 왕세제께서 수집하신 중국의 회화 네 점은 다행히도 모두 진작입니다. 송대의 곽희와 명대의 문징명, 청대의 명시민과 근대의 오창석에 이르기까지 대가들의 작품을 두루 수집한 것을 보고 개인적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짓고 있던 압둘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방금 도윤이 언급한 화가들의 그림은 모두 그 자신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들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표정을 살핀 도윤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반면에 무덤에서 출토된 장신구와 도자기들 가운데는 진품보다 가짜가 더 많았습니다. 그래도 강희제 때의 소삼채와 옹정제 때의 두채, 그리고 건륭제 때의 분채와 협채 등은 쉽게 구할 수 없는 명품들이었습니다. 적당히 기교를 부리면서도 그게 도를 넘지 않았으니 과연 청대의 명품 도자기라고 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도윤은 삼십분 가량 비교적 소상하게 작품들을 해설하고는 발표를 끝냈다. 그로서는 대체로 쉽고 무난하게 설명을 했다고 생각했었는데, 발표가 끝나자마자 나카지마 교수가 불쑥 이의를 제기했다.
“이 박사가 언급한 진품들 가운데 ‘본명용호결’에 대한 언급이 빠쳤더군요. 그건 위작으로 본다는 뜻입니까? 제가 분명히 진품이 틀림없다고 말씀을 드린 것 같은데요?”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도윤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껌뻑거렸다. 저 사람 지금 뭐하자는 거야?
‘본명용호결’은 이브라힘 왕세제가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밝힌 바로 그 비단 두루마리였다. 하지만 도윤은 몇 가지 의문점 때문에 그 두루마리에 대해 좀 더 과학적인 검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었고, 그 점에 대해 나카지마 교수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었다. 그랬던 그가 이제 와서 갑자기 그걸 틀림없는 진품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도윤은 저절로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억지로 펴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두루마리는 천 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게 제 의견입니다. 그 이유를 이미 설명 드린 것 같은데, 혹시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셨던가요? 제가 딱히 반대 의견을 들은 기억이 없어서 여쭤보는 겁니다.”
“두루마리가 비단으로 만들어졌으니 그렇게까지 오래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말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마왕퇴에서 나온 백서는 무려 이천년 전의 물건이 아니오? 그렇다면 천 년 된 비단 두루마리가 있다고 해서 이상하다고 보기만은 어렵지 않겠습니까?”
“마왕퇴의 경우에는 시신과 비단이 부패되지 않도록 여러 가지 약물처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무덤도 완전 밀봉 상태나 다름없었지요. 하지만 ‘본명용호결’의 경우에는 그런 약물 처리가 되어 있는지는 고사하고 당시 무덤의 상태조차 확인이 안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판정을 내리기 전에 과학적 검사와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도윤의 얘기에 다른 감정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비록 중국 미술품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방금 도윤이 한 얘기는 일반적인 감정 방법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키지마 교수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원칙적으로는 그렇지만 고대 서화는 내 전공 분야가 아닙니까? 본래 감정이라는 건 과학적 검사 이전에 감정가의 오랜 경험과 안목에 의지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이 박사도 내 의견을 조금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줬으면 좋겠소. 그게 아니라면 설마 서양 근대 회화와 중국 도자기에 이어서 중국 고대 서화에 대해서도 식견을 자랑할 셈이오?”
이것 봐라? 도윤은 그만 실소를 터트릴 뻔 했다. 결국 특별한 근거를 내세우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잘난 체 하는 게 기분 나쁘다는 소리에 불과하잖아? 당신 감정가 맞아?
도윤의 시선이 이브라힘 왕세제에게 돌아가더니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나는 더 얘기하기 싫으니 어떤 의견을 받아들일지 당신이 알아서 결정하라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그러자 지금까지 가만히 설명을 듣기만 하던 왕세제가 나카지마 교수에게 물었다.
“나카지마 교수께서는 ‘본명용호결’에 대한 번역을 완료하셨지요?”
나카지마 교수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 결과를 이미 보내드렸는데 내용을 읽어보셨습니까?”
“읽어봤습니다. 아주 뛰어난 번역이더군요.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 두루마리를 몇 번이나 세밀하게 살펴봤습니다. 원래 제 전문 분야인데다 보고 또 본 끝에 내린 결론이니 왕세제께서도 저 두루마리가 진품이라는 걸 믿으셔도 될 겁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도윤은 나카지마가 왜 저렇게 강한 어조로 두루마리가 진품임을 주장하는지 비로소 이해했다. 자신이 며칠 동안 공을 들여 번역한 두루마리가 위작으로 판명될 경우 그동안 고생한 보람이 모두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카지마 교수는 그걸 참기 어려웠던 게 분명했다.
‘하여튼 저 밴댕이 소갈머리하고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명색이 학자라는 사람이 사실이 아니라 이익을 따라서 주장을 바꾸면 되겠어? 어쩐지 제대로 된 진위 판정도 하기 전에 번역부터 하겠다고 덥석 나서더라니. 명식이 도쿄 대 교수라는 사람이, 쯧쯧.’
도윤이 계속 입을 다물고 있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그러자 이브라힘이 손뼉을 짝 하고 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감정하랴 의견서 쓰랴, 또 회의하고 설명하랴. 아마 몹시 바쁘고 피곤하실 겁니다. 잠시 차라도 마시면서 쉬었다가 30분 후에 다시 시작합시다.”
그는 그 말을 하고는 연회장을 나갔다. 그와 동시에 미리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직원들이 들어와 감정가들에게 원하는 차의 종류를 물었다. 도윤은 차를 주문하지 않고 연회실 한 켠에 미리 준비되어 있던 커피 한 잔을 따라 연회실을 나갔다. 저택 주변을 산책할 생각이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 * *
“이도윤 박사!”
도윤이 저택 근처의 잔디밭을 산책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돌리자 이브라힘 왕세제가 압둘과 함께 서 있는 게 보였다.
“이런, 벌써 휴식 시간이 끝난 줄 몰랐습니다. 곧 연회실로 들어가겠습니다.”
그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왕세제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시간은 충분합니다. 괜찮으시면 저하고 잠깐 얘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싫은데요? 그 말이 입 밖에까지 나오려는 걸 억지로 삼켰다.
“물론입니다. 따로 궁금하신 거라도 있습니까?”
도윤이 선선히 대답하자 이브라힘이 그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함께 걸으면서 얘기하자는 뜻이었다. 도윤이 어쩔 수 없이 그와 함께 걷기 시작하자 압둘이 두 사람과 약간 거리를 둔 상태에서 뒤를 따랐다.
“그 ‘본명용호결’ 말입니다. 내가 알기로는 고대 중국의 불로장생술에 관한 것이라고 하던데 이 박사도 혹시 내용을 읽어보셨습니까?”
결국 그 얘기냐? 도윤은 애매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읽어보았습니다. 내용이 그리 길거나 복잡하지 않은 편이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훑어볼 수 있었습니다. 나카지마 교수가 번역본을 드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라도 있었습니까?”
“글쎄요. 이해가 된다 안 된다를 논하기에는 내가 그 방면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습니다. 이 박사께서 보니까 어떻던가요? 거기 적힌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는 생각이 듭니까?”
정말 중국의 불로장생술에 대해 어떤 기대를 걸고 있는 건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제씩이나 되는 사람이? 도윤은 잠시 이브라힘의 눈을 쳐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저는 두루마리 자체가 가짜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당연히 거기 적힌 내용도 신뢰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글 자체가 중국에 전해지는 여러 가지 신선술이나 비방에서 조금씩 발췌해서 짜깁기를 한 것이더군요. 중국에는 의외로 그런 책이 흔합니다.”
“역시 가짜로 본다는 말이군요.”
“설사 그 두루마리가 진짜라고 해도 내용은 터무니없는 것일 가능성이 큽니다. 중국에서 신선술이 가장 성행했을 때조차도 이른바 술사나 도사들이 지어준 약을 먹고 죽은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오늘날의 중국 전통 의학은 그런 시행착오를 수도 없이 겪은 끝에 완성된 겁니다. 이른바 임상 의학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지요.”
“현대의 중국 의학은 어떨지 몰라도 과거의 신선술은 믿을 게 못 된다는 뜻입니까?”
“저와는 입장이 다른 사람들도 많겠지만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이브라힘은 한 동안 말이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더니 도윤이 이제 그만 연회장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려는 찰나, 느닷없이 툭하고 그의 허를 찔렀다.
“제가 연회장 안에 진열된 작품들 가운데 특별한 물건이 있다고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물론 기억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게 뭔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작품들 중에서 붉은 빛이 흘러나오는 걸 본적이 없으셨습니까? 진작이든 위작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이야, 이 양반도 갑자기 훅 들어오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인가 보네? 도윤은 하마터면 딱딱하게 굳어질 뻔한 얼굴을 애써 감추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갑자기 붉은 빛이라고 하면 뭘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말씀하시는 불이 제가 아는 전등 불빛 같은 게 아니라 다른 특별한 의미가 따로 있는 겁니까?”
그러자 왕세제가 손을 내저으며 껄껄대고 웃었다.
“아닙니다. 그냥 해본 소리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슬람 문화권에 전해 내려오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문득 떠올라서 한 말이었습니다. 신이 축복한 고귀한 물건에서는 붉은 빛이 나는데, 그 빛은 오직 신의 선택을 받은 대리인만 볼 수 있다는 얘기가 있거든요. 누구든 그 대리인을 얻으면 술탄이 될 수 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왕세제께서는 왕이 되고 싶으신가 보군요. 하지만 제가 알기로 그건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요. 형님이신 현 국왕께서 돌아가시면 별 일이 없는 한 제가 그 자리를 이어받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때가 되면 저도 이미 다 늙은 할아버지가 되겠지요.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 많은데 그럴 경우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을까봐 그게 걱정이 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이브라힘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뒤에 압둘을 꼬리처럼 매단 채 저택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 * *
결국 다시 속개된 회의에서 ‘본명용호결’은 나중에 탄소동위 원소 측정을 비롯한 과학적 검사의 대상으로 삼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왕세제는 애써 두루마리를 번역한 나카지마 교수에게 십만 달러라는 돈을 지불했지만 그렇다고 그게 틀림없는 진품이라는 그의 주장을 수용하지는 않았다. 도윤을 쳐다보는 나카지마 교수의 눈빛이 독살스럽게 변했다.
이틀에 걸쳐 작품에 대한 최종적인 분류작업이 모두 끝나고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일정이 무사히 완료되자 석훈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기뻐했다.
“이상하게 이번 여행은 처음부터 가슴이 조마조마하더라고요. 이제 일이 무사히 다 끝나니까 겨우 마음이 놓이네요.”
하지만 석훈과는 달리 도윤은 여전히 기분이 꺼림칙했다. 세계적인 감정가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은 것치고는 어딘지 전체적인 준비와 진행이 어수룩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이 만한 대가들을 모았으면 사실 모든 감정이 완결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왕세제 측의 준비는 그러기에 너무 미흡했다. 무엇보다 정밀 감정을 위해서는 반드시 과학적 검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뻔히 알 텐데도 그것을 위한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다는 게 이상했다. 게다가 감정 첫날 얘기했던 것과는 달리, 왕세제는 모든 일정이 끝날 때까지 자신이 언급했던 특별한 유물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감정을 모두 끝낸 감정가들에게는 사흘 동안 리야드 일대를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관광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각각의 감정가들이 무엇을 원하든 그에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말라는 이브라힘 왕세제의 특별 지시가 내려진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날 저녁, 한 인물이 조용히 이브라힘 왕세제를 찾아갔다. 프랑스의 모리스 메시앙이었다.
그는 왕세제를 알현한 뒤 단도직입적으로 한 가지를 물었다.
“왕세제께서 첫날 언급하셨던 그 특별한 유물 말입니다. 그게 혹시 붉은 빛이 흘러나오는 물건을 말씀하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이브라힘이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눈을 동그란 채 뜬 채 자신을 쳐다보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메시앙을 똑바로 쳐다봤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