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이브라힘이 감정가들에게 관광을 즐기라며 준 사흘 동안의 자유 시간은 온전한 의미에서의 자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처음 관광을 즐기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도윤과 석훈은 계획을 앞당겨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출국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자 압둘이 두 사람을 찾아와 아주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관광 일정이 끝나면 마지막 날 송별 만찬이 있을 예정입니다. 왕세제께서 그 전까지는 다른 일정이 있으셔서 따로 시간을 내기가 어렵거든요. 대신 만찬에 참석하시면 약속된 보수 외에도 따로 선물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정말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게 아니라면 일정을 조금만 늦춰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부탁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내내 신사다움을 잃지 않았던 압둘의 말투에 다소 강압적인 분위기가 배어 있었다. 도윤은 갑자기 바뀐 그의 태도가 찜찜했다.
“왕세제께서 선물을 주신다니 고맙기는 하지만 저희도 갑자기 일정이 생겨서요. 죄송하지만 그 선물은 사양하면 안 될까요? 그냥 계약서에 적힌 보수만 주시면 됩니다.”
“아랍 문화권에서 상대의 선물을 거절하는 것은 뺨을 때리는 것과 마찬가지 행위입니다. 지금까지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하셔야 되겠습니까?”
물론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은근히 체류를 강요하는 듯한 압둘의 말을 듣고 나니까 더욱 더 그놈의 선물인지 뭔지를 받고 싶지 않아졌다. 문제는 계약서였다.
처음 리야드에 올 때 정했던 계약 기간은 보름이었다. 하지만 이미 감정이 모두 끝난 터라 계약 기간보다 조금 일찍 떠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을 꺼냈다. 그런데 눈치를 보니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심지어 선물은커녕 아직 보수도 지급받지 못한 상태였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관광은 사양하지요. 대신 나일라 아트 갤러리를 구경하고 싶습니다. 평소에 그곳의 소장품들이 궁금하기도 했거니와, 갤러리에 친구가 근무하거든요.”
“리치오 폴리니를 말씀하시는가 보군요. 사막 관광도 나름 괜찮은데 내키지 않으십니까?”
“사막이라면 좀 지긋지긋한 기억이 있어서요. 미술관이면 충분합니다.”
이라크의 황무지에서 총격전을 벌인 이후로 사막에는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이곳까지 와서 일부러 끝없는 모래 구릉을 구경하러 다시 찾아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시키겠습니다.”
압둘이 씩 웃으며 인사하고 돌아가자마자 옆에 있던 석훈이 코웃음을 쳤다.
“이거 아무래도 입장료는 공짜인 대신 퇴장료를 받겠다는 속셈인가 본데요?”
“그러게 말이다. 보나마나 우리 마음대로 비행기 표를 끊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어떡하죠? 아무래도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데.”
석훈의 말마따나 분위기가 갑자가 아주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당장 그날 오후부터 저택의 경비원 수가 늘어나면서 분위기는 더욱 살벌하게 변했다.
그 시각, 메시앙은 자신의 방에서 컴퓨터 메신저를 켰다. 착발신 모두 암호화와 해석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중간에 신호를 가로채도 내용을 알 수 없도록 만든 특수 메신저였다.
―이도윤 일행을 고립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탈출 작전을 시작해 주십시오.
―그의 정체를 확인했나?
―링커가 확실합니다. 그 외에는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알았다. 이틀 후 오후 세 시 정각에 약속장소로 차를 보내겠다. 여권은 가지고 있겠지?
―여권은 잘 가지고 있습니다. 모레 세 시 정각에 약속장소로 나가겠습니다.
이틀 후 오후 세 시면 만찬이 열리기 네 시간 전이다. 메시앙은 컴퓨터를 끈 뒤 가방 안에서 미리 준비했던 여권을 꺼냈다. 한국과는 달리 붉은 색 표지의 여권 첫 장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도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밑에 적힌 국적과 이름은 달랐다. 일본국, 카와시마 고지로. 그것은 도윤의 얼굴이 박힌 일본 여권이었다.
* * *
“분위기가 영 이상해. 이런 말 하는 게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면 빨리 사우디를 떠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누군가 자네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아. 이곳은 한국이나 이탈리아만큼 인권이 중시되는 국가가 아니야.”
다음날, 나일라 아트 갤러리에서 만난 폴리니가 이탈리아어로 속삭인 말이었다. 도윤으로부터 그가 한 얘기를 전해들은 석훈의 얼굴이 무섭게 경직되었다.
“형, 내 생각에도 폴리니 씨 얘기를 듣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여기도 그렇지만 어제 오후부터 저택 분위기가 살벌하게 변했다는 건 형도 아시잖아요. 아무래도 그 왕세제나 압둘에게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해요.”
그 말에는 도윤도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문제는 그 꿍꿍이가 도대체 뭐냐는 것이었다. 일감으로 떠오른 것은 라스푸친의 목걸이나 에티오피아의 참 십자가와 관련해서 그에게 감정을 부탁할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이렇게 자신을 억류시키려는 시도까지 하면서 압박할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폴리니 말을 따른다고 해도 리야드를 훌쩍 떠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왕세제의 힘이라면 석훈과 그의 이름을 출국 금지자 명단에 올리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비행기 표를 산다고 해도 공항을 빠져나가기 힘들 가능성이 컸다.
나일라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밤새 머리를 맞대고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궁리했다. 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영국 한 복판에서 부하들을 시켜 로켓탄까지 갈겨댄 인간이야. 차라리 그가 뭘 원하는지 알아낸 다음에 협상을 시도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이브라힘이 원하는 게 뭔데? 혹시 내가 링커라는 걸 알아차린 건가? 설마 브레스토의 회고록에서 능력을 빼낸 걸 들킨 거야? 그건 정말 눈치 채기 힘들 텐데?
도윤의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꼬여갈 즈음,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방향에서 구원의 손길이 찾아왔다. 자유 관광 일정의 마지막 날인 이튿날 저녁, 뜬금없이 프랑스의 모리스 메시앙이 두 사람의 방을 찾아왔다.
“저택 분위기가 조금 묘하게 변한 것 같지 않습니까?”
방에 들어서자마자 다짜고짜 채 던진 그의 질문에 도윤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그렇잖아도 경비가 조금 더 엄해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혹시 이유를 아십니까?”
도윤이 얼른 얼굴을 펴고 묻자 메시앙이 묘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다.
“글쎄요. 이런 말을 하면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이브라힘 왕세제가 이 박사를 사우디에 억류시키려는 속셈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저를 억류시킨다고요? 무엇 때문에 말입니까?”
“그는 이 박사가 링커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런 식으로 폭탄이 떨어질 수도 있구나. 이브라힘이 그를 링커라고 생각한다는 말도 황당했지만 그 말이 메시앙의 입에서, 그것도 아무런 망설임 없이 불쑥 튀어나왔다는 사실이 도윤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그는 애써 놀란 표정을 수습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링커라고요? 그게 뭡니까? 그게 뭐기에 저를 링커라고 생각한다는 거죠? 그리고 그 링커인지 뭔지가 저를 억류시키려는 왕세제의 행동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메시앙은 도윤의 말에 직접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독일의 리히터 회장님을 아시죠? 토마스 리히터. 독일 드라이바인 그룹의 총수이자 커페 자동차 사장인 그 분 말입니다.”
아, 이 자식이 왜 동문서답을. 하지만 도윤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예전에 그 분의 저택을 방문해서 작품을 감정해드린 일이 있지요.”
“그때 이후로 리히터 회장님께서는 이 박사가 링커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계속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를 통해 저한테 그걸 직접 확인해달라는 부탁을 하셨지요.”
“이젠 이브라힘 왕세제도 모자라서 리히터 회장님까지 그런 의심을 한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링커가 뭐기에 그분들이 그러는 겁니까? 무슨 미술품 절도범이라도 됩니까?”
나름 사력을 다해 연기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메시앙은 도윤의 말에 가볍게 코웃음을 치더니 이내 씩 웃더니 아예 직격탄을 날렸다.
“능력을 담고 있는 유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아우라를 볼 수 있는 사람. 뿐만 아니라 거기에 담긴 능력을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게 옮겨 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간. 잘 아실 텐데요? 이 시대의 유일한 링커인 이도윤 박사님.”
메시앙의 눈빛이 독사처럼 빛났다. 도윤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다 피식 웃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군요. 그러니까 리히터 회장님이 메시앙 씨를 이곳으로 보냈다는 말입니까? 제가 그 링커인지 뭔지 확인하기 위해?”
“맞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곳에 와서 이 박사가 링커가 틀림없다는 확신을 갖게 됐죠.”
“메시앙 씨는 척 보면 누가 링커인지 아닌지 한 눈에 알 수 있나 보군요.”
비아냥이 섞인 질문이었다. 그러나 메시앙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링커가 아닙니다. 하지만 진정한 예술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를 볼 수 있지요. 당신의 친구인 폴리니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제 신안은 그보다 조금 더 뛰어납니다. 저는 능력을 담은 물건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아우라도 볼 수 있거든요. 비록 당신처럼 거기 담긴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옮겨주지는 못 하지만요.”
폴리니가 아우라를 볼 수 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어? 도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메시앙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스피리돈 브레토스가 남긴 회고록 말입니다. 다들 그걸 읽고 나서 황당한 옛날이야기를 적었다고 생각하더군요.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브레토스 말고도 그런 능력을 지닌 사람들에 관한 기록을 읽은 적이 있거든요. 브레토스는 링커였습니다.”
도윤은 일부러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황당한 얘기를 믿다니, 나이답지 않게 어린아이처럼 순순한 마음을 가지고 계셨군요. 하지만 그게 저하고 무슨 상관이죠?”
“우리가 감정을 시작한 첫날, 브레토스의 회고록은 붉은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튿날 아침에 확인해 보니 그 빛이 사라졌더군요.”
도윤은 가슴이 섬뜩했다. 이 자식, 진짜로 붉은 아우라를 볼 수 있구나! 애를 쓰고는 있지만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는 게 점점 힘들어졌다. 메시앙의 말이 이어졌다.
“능력이 담긴 유물의 빛이 사라지는 경우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안에 담겨 있던 능력이 어디론가 옮겨졌다는 뜻이지요. 왕세제의 도움을 받아서 그날 저녁의 CCTV 녹화 화면을 확인해 봤습니다. 그날 가장 늦게 연회장을 나간 사람이 바로 이 박사님이시더군요.”
“제가 거기 있는 능력을 누구에겐가 옮겼다는 말입니까? 재미있지만 황당한 얘기군요.”
“솔직히 저도 확신은 하지 못합니다. 녹화 영상에 의하면 회고록은 그 연회장을 떠난 적이 없는데다 링커는 유물에 담긴 능력을 스스로 전해 받을 수 없으니까요. 그걸 전해 받았을 것으로 짐작되는 사람도 찾지 못했고요. 하지만 어딘가에 있겠죠. 누군가는 적어도 한 나절가량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 테니까요.”
메시앙이 링커와 그에 관련된 일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동시에 도윤은 이번 일이 어떻게 진행된 것인지 깨달았다.
“연회장의 CCTV를 확인했단 말이군요. 그것도 메시앙 씨가 직접. 이브라힘 왕세제에게 제가 링커라고 애기를 한 겁니까? 그래서 저택의 경비가 강화된 건가요?”
“실례인 줄은 알지만 그 편이 이 박사에게 현재의 상황을 빨리 받아들이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리히터 회장님은 이 박사의 적극적인 협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적극적인 모략과 협박을 통해서 말이군요.”
도윤이 이를 갈며 내뱉은 소리에 메시앙이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정말로 웃긴다고 생각했는지 한참 동안 입을 벌린 채 껄껄대더니 도윤의 옆에 있던 석훈이 주먹을 불끈 쥔 뒤에야 비로소 웃음을 그치고 말을 뱉었다.
“세상에는 링커가 무엇인지, 혹은 누구인지 아는 사람들이 극히 적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링커를 얻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지요. 현실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들은 이 박사가 저항하기에는 너무나 큰 권력과 돈을 가지고 있습니다.”
도윤은 더 이상 사실을 부정하는 게 의미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메시앙은 이미 직접 확인한 사실을 통해 그가 링커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도윤이 씩 웃으며 물었다.
“이왕 붙으려면 이브라힘 왕세제가 아니라 리히터 회장에게 붙으라는 얘기군요.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이브라힘은 위험한 인물입니다. 그는 원하는 것을 얻으면 이 박사를 결코 살려두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리히터 회장은 다르죠. 그는 이 박사의 도움을 받을 경우 큰 보상을 할 겁니다. 물론 안전도 보장할 테고요. 누가 친구이고 누가 적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브라힘 왕세제는 그렇다 치고, 리히터 회장이 친구인지는 어떻게 알죠?”
메시앙이 씩 웃더니 주머니에서 여권을 하나 꺼내서 펼쳤다. 붉은색 표지의 일본 여권. 그 안에는 카와시마 고지로라는 이름과 함께 도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내일 오후 세 시에 모처로 우리를 데려갈 차가 올 겁니다. 그 차를 타면 곧바로 킹 칼리드 국제공항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그곳에 리히터 회장의 전용기가 기다리고 있기로 했습니다. 따로 비행기 표를 끊을 필요도 없으니 간단한 수속만 마치면 곧바로 사우디아라비아를 떠날 수 있습니다.”
도윤이 자신의 앞에 놓인 여권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분명히 위조 여권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히터 회장의 입김이 닿은 것이라면 공항 정도는 무사히 통과할 수 있겠지.
“우리 속담에 병도 주고 약도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에 딱 부합하는 상황이군요. 우리를 태운 비행기는 어디로 갑니까? 그리고 제 일행은 어떻게 공항을 통과하죠? 보아하니 제 여권밖에 준비하지 않은 것 같은데.”
그 말에 메시앙이 여권을 도로 집어넣으며 씩 웃었다.
“행선지는 지금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안전한 곳이고, 이 박사가 원하기만 하면 어디로든 자유롭게 갈 수 있는 장소라는 건 약속드리죠. 아, 그리고 일행 분의 여권 말입니다만…….”
그는 억지로 화를 참고 있는 듯한 석훈을 쓱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사실 이 박사가 수행원을 데리고 오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권을 하나만 준비했죠. 하지만 이미 리히터 회장님께 사실을 말씀드려서 일행 분의 사진이 박힌 여권을 하나 더 준비해달라고 부탁해 놨습니다. 내일 공항으로 가면 방금 보여드린 이 박사님의 여권과 함께 일행 분의 것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으라고…….”
듣고 있던 석훈이 발끈하며 나서려는 것을 도윤이 손을 들어 말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세 시 이전에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그가 생각보다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했는지 메시앙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벌써 결심하신 겁니까?”
“제 손으로 제비 다리를 부러뜨려놓고 다시 치료해준 놀부를 보는 것 같지만 일단은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더 급하니까요. 부채를 따지는 건 나중에 하죠.”
“하하, 일겠습니다. 그럼 내일 두 시까지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짐은 되도록 간단하게 챙기십시오. 남들이 보면 이상하게 여기지 않도록 말이지요.”
메시앙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악수를 청하고는 방을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석훈이 득달처럼 물었다.
“형, 진짜 저 개자식 말대로 할 거예요? 호랑이 입을 피해 사자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겠다는 거예요?”
도윤이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 있냐? 이 자식들이 사람을 호구로 알아도 분수가 있지…….”
이를 갈며 말을 내뱉는 그의 눈이 새파랗게 빛났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