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메시앙이 방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윤과 석훈은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그곳에 일본 감정가 나카지마 유토가 먼저 와 있었다. 테이블 위에 반쯤 비워진 와인 병이 있고 얼굴이 불그스레한 것으로 보아 식사를 하면서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
“관광을 나가신 것 아니었습니까? 일찍 들어오셨네요?”
도윤이 먼저 말을 걸자 마침 빈 잔에 와인을 채우던 나카지마가 그를 흘깃 올려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묘하게 신경을 거스르는 웃음이었다.
“마스막 요새를 구경하러 갔다가 별로 볼 것이 없어서 일찍 돌아왔소. 그러고 보니 하루 종일 관광도 나가지 않고 저택에 틀어박혀 있었다고요?”
틀어박혀 있어? 표현이 좀 그렇기는 하지만 그냥 웃어넘겼다.
“몸이 좋지 않아 방에서 쉬었습니다. 마스막 요새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보네요?”
“메카라도 가지 않는 이상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특별히 볼 게 있겠소? 어쩌면 그냥 방에서 쉰 이 박사가 더 현명했을지도 모르겠군. 뭘 얼마나 거창한 선물을 하려고 사람을 붙잡아두는 건지. 줄 게 있으면 빨리 주고 얼른 집에나 보내줄 것이지.”
마스막 요새에서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는지 나카지마의 말투가 자못 거칠었다. 도윤은 더 이상 말을 섞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석훈과 함께 따로 테이블을 잡고 앉았다. 그런데 직원이 요리를 내오고 막 식사를 하려는 순간 갑자기 나카지마가 그들의 테이블로 건너왔다. 그는 주저앉듯이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더니 도윤을 게슴츠레 쳐다봤다.
“본명용호록 말입니다. 정말 그게 위작이라고 생각하시오?”
취기가 올라서 그런지 눈길부터가 도전적이었다. 일본어는 모르지만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낀 석훈이 얼굴을 굳히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도윤이 재빨리 그에게 눈짓을 보내 도로 주저앉혔다.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이유는 이미 말씀을 드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나카지마가 그를 노려보더니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이 박사가 말한 이유 정도야 이미 잘 알고 있던 것들이요. 하지만 내 주장은 그걸 다 감안하더라도 두루마리가 진품이라는 것이었소. 그런데도 이브라힘 왕세제는 끝까지 내 말을 믿지 않았지. 덕분에 며칠 동안 헛수고를 한 셈이 되었소. 기껏 두루마리 내용을 모조리 번역했는데, 결과적으로 가짜를 놓고 쓸 데 없는 공을 들인 꼴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게 내 탓이냐? 그리고 감안하기는 뭘 다 감안해? 기껏해야 근거도 없는 편견과 고집에 불과한 주장을 했으면서. 애초에 천 년이 넘은 비단 두루마리를 덮어놓고 번역하겠다고 달려든 게 당신이잖아? 속으로 어이가 없었지만 한 번 더 참았다.
“그게 위작이라는 건 그저 제 의견일 뿐입니다. 실제로 이브라힘 왕세제께서도 교수님의 공을 인정해서 적지 않은 번역료를 지급하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뭉개진 내 체면을 억지로 세워주려는 짓일 뿐이지. 왕세제가 처음부터 내 말을 믿었더라면 본명용호결을 다시 검사하라고 연구소로 보내지도 않았을 거 아니요?”
“왕세제께서 누구 말을 믿었든 그게 진실을 결정하는 건 아닙니다. 검사 결과 그 두루마리가 진짜로 천 년 전의 것으로 밝혀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나카지마가 도윤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이 실소를 터트렸다.
“고베의 골동품상에 처박혀 있던 고흐의 해바라기를 한눈에 알아본 사람치고는 너무 겸손을 떠시네? 듣자하니 그 골동품상 주인영감에게 그림 값을 후려친 덕분에 큰돈을 벌었다면서요? 그러고 보니 그때나 지금이나 젊은 사람이 사람을 후려치는 재주가 참 좋습니다.”
가까이 앉은 탓에 말을 할 때마다 나카지마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풀풀 풍겼다. 본명용호결은 그렇다 쳐도 고흐의 해바라기까지 언급한 것은 대놓고 시비를 걸자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도윤도 더 이상 좋은 말로만 상대하기가 어려워졌다.
“제가 해바라기를 싸게 산 건 맞지만 그렇다고 값을 후려쳤다고 하시는 건 지나칩니다. 원 주인에게 해바라기의 가치에 대해 충분히 설명했고, 당시에 제시했던 액수는 제가 동원 가능한 한계 금액이기도 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덕분에 큰돈을 벌기는 했지만요.”
나카지마가 다시 한 번 들으라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이 박사. 일본 사람들이 고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압니까? 돈도 돈이지만 이 박사가 고베에서 한 짓은 일본의 보물을 몰래 훔쳐간 것이나 다름없어요. 아무리 값을 치르고 샀다고 해도 그건 사실상 사기나 도둑질과 다름이 없소.”
사기나 도둑질? 어금니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도윤은 식사를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따라 석훈도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오늘 언짢은 일이 있으셨던 모양이군요. 술도 과음하신 것 같고요. 저는 먼저 일어날 테니 더 따지실 일이 있으면 내일 술이 깬 다음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지요.”
그가 석훈을 데리고 식당을 빠져나가려는데 뒤에서 나카지마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등에 날아와 꽂혔다.
“하여튼 조센징들이란 하나같이 양심이 없고 체면도 모른다니까. 얼치기 영감태기를 등쳐서 떼돈을 벌었으면 최소한 미안해하기라도 해야 될 거 아니야?”
아무소리 없이 방으로 돌아온 도윤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잠시 울화를 가라앉히려고 노력한 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석훈에게 말했다.
“석훈아. 아무래도 계획을 조금 바꿔야겠다.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진짜, 이 놈의 사우디아라비아에는 왜 이렇게 건드리는 놈들이 많은 거야?
* * *
인도에서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지 않았으면 화를 삭이느라 한동안 고생해야 됐을 것이다. 두 사람이 방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데바 인스트루먼트의 오광표 이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작년 연말에 딸을 미국으로 보내고는 곧바로 오성 전자에 사표를 냈다. 그 뒤로 현재는 데바 인스트루먼트 본사가 있는 인도 벵갈루루로 부임한 상태였다.
“이 박사님! 됐습니다. 됐어요. 드디어 우리가 새 TPU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오광표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오광표는 침착하고 냉정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간단한 인사마저 생략한 채 대뜸 소리부터 지르는 것만 봐도 얼마나 흥분했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었다. 도윤 역시 순간적으로 나카지마로 인해 울화가 치밀었던 일을 까맣게 잊을 정도로 가슴이 쿵쿵 뛰었다.
“정말입니까? 백 퍼센트 성공이에요?”
“백 퍼센트요? 이백 퍼센트 성공입니다. 단일 칩인데도 기존의 TPU에 CPU를 결합한 것보다 성능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 발열 문제까지 완벽하게 해결했어요. 칩을 생산해 줄 파운드리 업체만 선정하면 늦어도 올 여름부터는 대량 생산이 가능할 겁니다.”
파운드리 업체란 반도체를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설비와 기술을 갖춘 회사를 말한다. 데바 인스트루먼트가 비록 칩을 개발하는데 성공했지만 그걸 만들어낼 공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따라서 새 TPU를 대량 생산하려면 파운드리 업체에 제조를 위탁해야만 했다. 도윤은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잘 됐네요. 제가 당장 인도로 날아가겠습니다. 며칠 안 걸릴 테니까 그때까지는 섣불리 파운드리 업체를 선정하지 말고 잠시 기다려달라고 전해주십시오.”
“염두에 두고 있는 회사가 있습니까? 혹시 미래 전자에 일을 맡기려고요?”
“네. 하지만 그 전에 미래 전자하고도 조정해야 될 일이 있어요. 아무리 장인이 될 분이 사장으로 있는 회사라고는 해도 무조건 맡길 수는 없지요.”
“네. 알겠습니다. 이곳 경영진에게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렇잖아도 작년 말까지 끝날 거라던 새로운 TPU 개발이 예상보다 늦어지는 바람에 은근히 걱정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칩이 완성되었다는 얘기를 듣자 도윤 역시 뛸 듯이 기뻤다. 그런데 그 순간,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원래는 한국에 있는 최서라에게 부탁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광표의 말을 듣는 순간 여러 가지 생각들이 한꺼번에 흩어졌다가 다시 조립되더니 그럴싸한 계획이 떠올랐다. 도윤은 막 전화를 끊으려는 오광표를 다급히 다시 불렀다.
“저기 오 이사님. 제가 사정이 있어서 그런데 그쪽에서 저 대신 비행기 표 두 장만 끊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비행기 표요? 그야 물론 가능합니다. 어떤 비행기 표가 필요하십니까?”
“내일 저녁에 리야드의 킹 칼리드 국제공항을 출발해서 벵갈루루로 가는 비행기입니다. 시간은 저녁 6시 이후면 적당할 텐데 되도록 6시에 가까울수록 좋습니다. 벵갈루루행 비행기가 없으면 인도 아무 도시로 가는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정 안 되면 차라리 유럽이나 중국행이라도 좋아요. 중요한 건 날짜하고 시간, 그리고 출발 공항입니다.”
“내일 저녁 여섯 시경 킹 칼리드 공항에서 출발하는 비행기 표 두 장이란 말씀이죠? 목적지는 벵갈루루 행이면 더 좋지만 그게 안 되면 아무 곳이든 상관없고요.”
“맞습니다. 정확히 그렇게 표를 예매해주시면 됩니다. 티켓은 킹 갈리드 공항에서 수령하는 것으로 해 주시고요.”
“이 박사님 이름으로 예약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이름은 카와시마 고지로. 일본 사람이고 나이는 서른셋입니다.”
이어서 도윤은 메시앙이 잠깐 보여주었던 여권에 기록된 카와시마의 생년월일과 여권 번호, 그리고 영문 표기를 줄줄이 불러주었다. 메모를 하는지 잠시 침묵을 지키던 오광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리야드에 계시죠? 안전하신 겁니까?”
이 양반도 눈치가 빠르네? 도윤의 의도는 목적지에 상관없이 내일 무조건 사우디아라비아를 떠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산 비행기 표를 가지고.그 때문에 오광표는 혹시 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걱정이 된 것이다.
“물론 안전하지요. 걱정하지 마시고 오 이사님은 카와시마 고지로 이름으로 비즈니스 석 두 장만 끊어주세요. 비즈니스가 없으면 퍼스트 클래스도 괜찮습니다.”
도윤이 전화를 끊자 옆에서 보고 있던 석훈이 혀를 찼다.
“아니, 형은 잠깐 본 여권에 적힌 내용을 그새 다 외운 거예요? 아무튼 머리 하나는 징글맞게 좋다니까? 그나저나 비행기 표라면 여기서 형이 직접 예매해도 되잖아요?”
“내 이름으로 예매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자칫하면 이브라힘 왕세제에게 그 사실이 알려질 수도 있잖아? 그럼 공항에서부터 출국을 저지당할 가능성이 커. 잔소리 말고 이제부터 내 말 잘 들어. 여기서 삐끗하면 우리는 호랑이든 사자든 아무든 입 냄새 지독한 놈들의 먹잇감이 되고 말거야.”
그날 저녁 늦게, 오광표로부터 킹 칼리드 발 벵갈루루 행 저녁 6시 반 비행기 표 두 장을 예약했다는 문자가 예약 번호와 함께 날아왔다. 이로써 계획의 첫 걸음이 내딛어졌다. 이제는 나머지를 준비할 때였다.
* * *
다음날 점심시간, 나카지마가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으로 내려간 사이에 도윤과 석훈이 그의 방에 몰래 잠입했다. 나카지마는 분명히 방문을 잠갔지만 이곳은 호텔이 아니라 이브라힘의 개인 저택이었다. 손님용 방마다 전자식 자물쇠를 달아놓지는 않았기 때문에 석훈은 미리 준비한 두 개의 쇠꼬챙이로 쉽게 그의 방문을 열 수 있었다.
“설마 방 안에도 CCTV가 달려 있지는 않겠지요?”
석훈의 말에 도윤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 방에도 도청 장치만 있었잖아? 여기가 감옥도 아닌데 손님들 방에 그런 걸 달아놨다가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잘 살펴보기는 해야겠지만 아마 몰카는 없을 거야.”
두 사람은 소리를 내지 않게 조심하면서 나카지마의 방을 뒤졌다. 잠시 후, 석훈이 침대 옆에 놓인 작은 테이블 서랍장 안에서 그의 여권을 찾아냈다. 오늘은 관광 일정이 없기 때문에 식당까지 여권을 들고 가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했는데, 그 짐작이 맞았다.
도윤은 나카지마의 여권을 빼낸 뒤, 미리 준비한 여권 크기의 여행용 안내 책자에 환각 능력을 걸었다. 나카지마는 적어도 오늘 하루 동안은 그것을 자신의 여권이라 생각할 것이다. 두 사람은 가짜 여권을 처음의 서랍장 안에 집어넣고는 그의 방을 빠져나왔다. 그런 다음 식당에 내려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이곳에서의 마지막 점심 식사를 했다.
오후 두 시가 되자 메시앙이 그들의 방문을 두드렸다. 석훈이 문을 열어주자 작은 여행용 가방 하나를 든 그가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왔다. 메시앙은 두 사람의 짐이 정리도 되지 않은 채 방 안 여기저기에 그대로 놓여 있는 것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짐을 하나도 챙기지 않은 겁니까? 한 시간 후에 우리가 탈 차가 저택으로 올 겁니다. 그냥 맨몸으로 가실 건가요?”
도윤이 양 팔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리히터 회장의 전용기에서도 식사와 음료는 제공하겠죠? 우리는 여권과 지갑, 그리고 휴대폰만 있으면 다른 건 필요 없습니다. 나중에 필요한 게 생기면 현지에서 다시 사면 되니까요. 설마 우리를 인적도 없는 곳으로 데려갈 건 아니죠?”
메시앙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두 분은 이곳을 떠나 몰타 섬으로 가게 될 겁니다. 그곳에 회장님의 별장이 있거든요. 뉴욕이나 파리 같은 대도시는 아니지만 필요한 건 얼마든지 사실 수 있을 거예요.”
“그렇군요. 비행기는 언제 어디로 옵니까?”
“리히터 회장님의 전용기는 현재 이곳을 향해 날아오고 있습니다. 비행기는 잠시 킹 칼리드 공항에 머무르다가 오후 7시 정각에 다시 그곳을 출발할 예정이에요. 이브라힘 왕세제가 만찬을 시작하는 시각에 우리는 이곳을 떠나는 거죠.”
세 사람은 세 시가 거의 다 될 때까지 방 안에서 기다리다가 방을 나섰다. 그들이 태연한 표정으로 저택의 정원을 산책하는데 부식을 실은 것으로 짐작되는 냉장 트럭 하나가 주방 쪽으로 접근하는 게 보였다. 메시앙이 재빨리 속삭였다.
“저게 우리가 타고나갈 차입니다. 오늘 저녁 만찬을 위해서 저택 주방장이 상당한 양의 식재료를 주문했거든요. 곧 하차 작업이 시작될 테니까 우리도 준비합시다.”
리히터 회장의 손길이 리야드의 식료품 회사에까지 뻗어있다는 뜻이군. 차가 식재료를 내리기 시작하는 걸 본 세 사람은 경비원들의 눈을 피해 주방에 딸린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메시앙이 들고 있던 가방에서 식료품 회사 직원들이 입고 있는 것과 똑같은 유니폼을 세 벌 꺼냈다.
옷을 갈아입은 그들은 식당 직원들이 부식의 양과 종류를 확인하는 사이에, 재빨리 텅 빈 냉장칸에 올라탔다. 차를 타고 온 식료품 회사 직원이 얼른 냉동칸의 문을 닫았고, 잠시 후 그들이 탄 차는 리야드 시내를 달리고 있었다.
저택을 떠난 차는 도중에 한 곳에 멈춰 섰다. 그곳에서 하차한 세 사람은 이번에는 12인승 승합차로 바꿔 탔다. 승합차 안으로 몸을 들이밀던 도윤이 흠칫했다. 체구가 건장하고 눈매가 날카로운 요원들이 네 명이나 더 타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을 대비해서 두 분의 탈출을 도와줄 우리 측 사람들입니다.”
혹은 만약을 대비해서 우리를 억류할 사람들이기도 하겠지. 속으로 코웃음을 친 도윤과 석훈이 승합차 안에서 다시 본래의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야 메시앙이 여권을 내밀었다. 그런데 약속과는 달리 여권이 하나뿐이었다.
“일행 분의 위조 여권은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는 전용기에 실려 있습니다. 일단 공항에 도착하면 이 박사님은 제가 드린 여권을 이용해 먼저 출국 수속을 하십시오. 일행 분은 또 다른 여권을 건네받은 뒤에 나가면 됩니다. 안전을 위해서라도 두 분이 따로 행동하는 게 나을 겁니다.”
도윤이 여권을 받아 주머니에 넣으면서 물었다.
“저희는 함께 움직일 겁니다. 출국 수속은 이 친구가 여권을 받고 난 다음에 하죠.”
“말씀드렸지만 되도록 두 분이 따로 움직이시는 게…….”
“메시앙 씨. 진짜 제 일행을 위한 여권이 준비되기는 한 겁니까?”
너희 입장에서는 방해가 될 게 뻔한 석훈이까지 챙기겠다고? 내가 아무런 증거도 없이 무조건 당신 말을 믿어야 해? 도윤이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자 메시앙도 얼굴이 굳었다.
“저를 믿지 않으시는군요?”
“아무리 사정이 급하다고 해도 우리가 서로를 믿고 의지하기에는 알고 지낸 시간이 너무 짧지 않나요? 더구나 당신은 이브라힘에게 내가 링커라고 일러바친 사람인데?”
승합차 안의 공기가 삽시간에 차가워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