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이브라힘의 저택에서 송별 만찬이 열리던 날, 오후 여섯 시 반이 되자 직원들이 손님들의 방문을 두드려 만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렸다. 대부분의 감정가들이 대답을 했지만 두 개의 방만은 조용했다.
“이도윤 박사 일행과 메시앙 씨가 방에 계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리 문을 노크해도 두 방 모두 대답이 없었습니다.”
처음 직원들이 그렇게 보고했을 때만 해도 압둘은 그다지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손님들이 방에서 깜빡 잠이 들었거나 근처를 산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찬 십 분 전에 다시 직원을 보냈는데도 여전히 응답이 없다는 보고가 돌아오자 비로소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저택 주변을 산책하고 있는 손님들은 없나?”
“적어도 CCTV 상으로는 정원에 계신 분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다들 방에 있다는 얘기인데…, 내가 직접 올라가 보지.”
하지만 그가 계속 노크를 하고 나중에는 주먹으로 문을 쾅쾅 두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두 방 모두 전혀 응답이 없었다. 결국 그는 마스터키를 가져오게 해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지만 그런 그의 눈앞에 보인 모습은 텅 빈 방 안뿐이었다. 메시앙과 이도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저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이다.
그는 석훈을 포함한 세 사람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도대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호가 연결되지 않는다는 허망한 안내 멘트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어느 새 만찬 시간이 되었다. 그는 다급하게 왕세제의 서재로 뛰어갔다.
“이도윤 박사와 그의 경호원 안석훈, 그리고 메시앙 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만찬장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던 이브라힘 왕세제가 이마를 찌푸렸다.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입니다. 방은 물론이고 저택 주변에서도 보이지 않습니다. 전화를 걸어봤지만 신호가 연결되지 않는다는 대답뿐이었습니다. 세 사람 모두 휴대폰을 꺼 놨거나…….”
압둘은 잠시 망설이다가 차마 하기 싫은 말을 내뱉고 말았다.
“신호가 닿지 않는 지역에 있는 게 분명합니다.”
이브라힘의 표정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변했다. 그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혹시 차를 빌려서 시내로 나갔는지 알아 봤어? 그랬다가 아직 못 돌아온 거 아니야?”
“이미 확인했습니다만 저택에 있는 차들은 현재 모두 차고에 있습니다. 밖에 나가 있는 것은 한 대도 없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저택에 초대된 손님들은 누구도 차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시내에 외출할 일이 있을 경우 왕세제가 보유하고 있는 수십 대의 차들 가운데 하나를 빌려 타고는 했다. 그런데 그 차들이 모두 제자리에 있다는 것은 적어도 차를 타고 밖에 나간 손님들이 없다는 뜻이었다.
“저택 안팎에서는 모습이 보이지 않고 차들도 모두 차고에 있다고? 그럼 그 세 사람이 걸어서 시내로 나갔다는 말이야? 아니면 하늘로 날아서 사라졌나?”
이브라힘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더니 나중에는 아예 호령이었다. 화가 잔뜩 난 게 분명한 그의 질책에 압둘은 결국 마음속에 담고 있던 마지막 가능성을 털어놓고 말았다.
“세 사람이 공모해서 함께 이곳을 벗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그 방법이 짐작되지 않지만 일단은 그런 가능성도 염두에 두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도윤과 메시앙이 함께 움직였다는 거야?”
“서로 싸우다가 어디 쓰러져 있는 게 아니라면 반대로 함께 도망쳤을 수도 있습니다.”
“메시앙은 나한테 이 박사가 링커일지도 모른다고 말한 장본인이잖아? 그것도 제 발로 찾아와서 이 박사를 이곳에 잡아두라고 말하기까지 했어.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메시앙이 이 박사와 함께 도망쳤을 거라고?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압둘은 이브라힘의 추궁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도 사실 그 점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하필 만찬 시간 직전에 세 사람이 동시에 사라진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당장 경비원들을 풀어서 저택 주변을 샅샅이 뒤지라고 해. 공항에 연락해서 세 사람이 리야드를 빠져나갔는지 확인하고. 여차하면 경찰과 군부에도 협조를 부탁해.”
마음 같아서는 직접 나서서 세 사람을 찾고 싶었지만 이브라힘은 일단 만찬장으로 가야했다. 그곳에서 감정가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자 자기 나라로 돌아가겠다는 사람들을 무려 사흘이나 관광까지 시키면서 기다리게 만든 게 바로 이브라힘 자신이었다.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약속대로 선물도 안겨줘야 했다. 압둘의 생각도 비슷했다.
“경비원들에게 손님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시 수색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경찰에 연락해서 공항으로 가는 도로를 통제시키고 출국 기록도 확인하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일단 만찬에 참석하십시오. 새로운 사실이 확인되는 대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에 압둘을 사납게 노려본 이브라힘이 콧김을 뿜으며 만찬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당장 이도윤과 메시앙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이유를 다른 감정가들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 * *
만찬의 분위기는 어색했다. 무엇보다 호스트인 왕세제부터가 배가 뒤틀리는 것을 억지로 참으면서 웃고 있는 듯한 기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게다가 감정가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그의 말은 자주 더듬거렸고 심지어 중간 중간 끊기기까지 했다. 마치 정신이 완전히 딴 데 팔려 있는데 억지로 만찬에 참석한 듯한 인상이었다.
그나마 만찬에 제공된 요리가 뛰어나다는 게 다행이었다. 실력 있는 요리사들이 정성을 다해 만든 호화로운 요리들이 잇달아 식탁을 장식했고, 술 대신 제공된 음료들도 맛이 괜찮았다. 게다가 만찬이 시작되기 직전, 왕세제가 약속했던 후한 보수가 각자의 통장에 입금되었다는 사실이 감정가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했다.
왕세제가 약속했던 후한 선물도 그들을 기쁘게 만들었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의 상징이 박힌 순금 공예품을 모두에서 선물했고, 언제든지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할 수 있는 1등석 항공권과 함께 5성급 호텔 스위트룸에서 일주일간 머물 수 있는 숙박권까지 주었다. 그것만 해도 웬만한 작품을 감정했을 때 받을 수 있는 금액을 상회했다.
하지만 그런 이브라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만찬장의 분위기는 시작부터 다소 어수선했다. 메시앙과 이도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시앙은 영국의 해들리와 함께 세계 최고의 감정가로 거론되는 인물이었고, 이도윤 역시 이번 감정을 통해 다른 대가들에게 그 실력을 확실히 인정받은 상태였다.
“이 박사는 감정 첫날부터 몸이 안 좋은 것 같더니, 결국 탈이 난 게 아닐까요?”
“글쎄요. 아직 젊은 사람이니까 어지간히 아프지 않다면 잠깐 얼굴이라도 비쳤을 텐데.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하네요.
“메시앙 씨도 보이지 않는 걸 보니 혹시 둘이 먼저 귀국한 건 아닐까요?”
“그럴 리가요? 그게 가능했다면 우리도 이미 비행기를 탔을 겁니다. 둘 다 몸이 안 좋아서 방에서 쉬고 있는 게 아닐까요?”
왕세제 측에서 두 사람의 불참 이유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만찬장에는 추측만 난무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압둘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만찬장으로 들어와 이브라힘의 귀에 몇 마디를 속삭이면서 급변했다. 보고를 들은 이브라힘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쩍 벌리더니 한 쪽에 앉아 있던 나카지마를 불렀다.
“나카지마 교수님. 방금 저한테 이상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교수님께서 한 시간 반쯤 전에 비행기를 타고 리야드 공항을 떠났다고 하는군요. 그럼 도대체 지금 이 자리에 앉아계신 분은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황당하기는 나카지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잠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실소를 터트렸다. 하지만 자신을 쳐다보는 압둘과 이브라힘의 얼굴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는 곧바로 웃음기를 지워야 했다.
“죄송하지만 저야말로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저에게 분신술을 쓰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 자리에 있는 제가 동시에 비행기를 탈 수 있겠습니까?”
그의 말이 너무나 당연했기에 다른 감정가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압둘이 물었다.
“혹시 지금 여권을 가지고 계십니까? 제가 받은 보고에 의하면 나카지마 교수님의 여권을 소지한 누군가가 한 시간 반쯤 전에 킹 칼리드 공항에서 비행기를 탄 게 분명합니다.”
“여권이라면 제 방에 있습니다. 원하시면 지금이라도 확인시켜 드릴까요?”
“번거로우시겠지만 부탁드립니다.”
압둘이 대뜸 여권을 확인하자고 하자 다른 감정가들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그와 함께 자기 방으로 올라간 나카지마는 경비원들이 보는 앞에서 침대 옆의 테이블 서랍장을 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여권 대신 정체를 알 수 없는 소형 여행 안내책자만이 덩그러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오늘 점심시간 직후에도 제가 분명히 확인했습니다. 그때는 여기에 여권이 있었다고요. 그리고 이 책자는 처음 보는 겁니다.”
압둘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가 경호원들에게 눈짓을 보내자 두 사람이 다가와 양쪽에서 나카지마의 팔짱을 꼈다.
“실례인 줄은 알지만 현재 나카지마 교수님은 불법으로 우리나라를 출국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잠시 조사에 협조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압둘도 눈앞에 있는 나카지마가 비행기를 탔을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누군가 그의 여권을 훔쳐서 공항을 빠져나가는데 이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 그렇더라도 당장은 일의 전말이 명백해질 때까지 그를 구속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나카지마는 소리를 높여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결국 경호원들에 의해 방에서 끌려 나가고 말았다.
만찬은 순식간에 파장이 났고, 감정가들은 찜찜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자기 방으로 올라가야 했다. 그로부터 한 시간 가량 지났을 때, 압둘의 휴대폰으로 장문의 문자가 하나 날아왔다. 내용을 확인한 압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 *
압둘이 일개 소대 병력을 이끌고 킹 칼리드 국제공항의 주차장을 급습했을 때에는 사방에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는 이브라힘 왕세제 직속의 경비대 병력만을 이끌고 이곳을 찾았다. 이미 공항 경비대와 경찰을 비롯해 여러 곳에 협조 요청을 한 상태였지만, 정작 저택을 떠나려는 그에게 왕세제가 따로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다.
“자네가 받은 문자가 사실이라면 그곳에 메시앙과 놈의 일당들이 있을 거야. 그자들을 발견하면 은밀히 이곳으로 데려와. 경찰이나 다른 왕족들의 관심이 쏠리기 전에 우리가 자체적으로 놈들에 대한 심문과 처리를 끝내야 해.”
그는 심지어 경찰과 공항 측에 냈던 협조 요청마저 모두 철회했다. 만약 문자의 내용대로 메시앙이 딴 마음을 품고 뭔가 일을 꾸몄다면, 오히려 경찰의 개입을 차단시켜야만 했다. 이번 일의 내막이 세상에 밝혀질 경우 자칫 자신이 더 곤란해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압둘은 주차장에 서 있는 메시앙의 승합차를 쉽게 찾아냈다. 도윤이 보낸 문자가 너무나 자세하게 차의 위치를 일러준 덕분이었다. 경비대가 삼엄한 경계 속에 차 문을 열어젖혔을 때, 무려 여섯 명의 남자들이 온몸이 테이프로 꽁꽁 묶인 채 소파와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어찌나 온몸을 빈틈없이 칭칭 동여매었던지 처음에는 그 가운데서 메시앙을 구분해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경비대가 남자들의 눈과 입을 가리고 있던 테이프를 모조리 뜯어내자 그제야 간신히 파랗게 질려 있는 메시앙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서운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압둘을 발견한 메시앙이 발작을 하듯 소리 질렀다.
“이도윤과 놈의 경호원이 우리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자는 위조 여권을 가지고 리야드를 떠나려고 시도할 거예요. 놈들을 빨리 잡아야 합니다.”
그 작자들은 이미 리야드를 떠났어, 이 개 자식아. 압둘은 온몸이 땀에 젖은 메시앙의 초췌한 몰골을 보면서 단숨에 그를 때려죽이고 싶었다. 제 딴에는 이중으로 모략을 꾸밀 생각이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이브라힘 왕세제와 리히터 회장 양쪽 모두에게 빅 엿을 선사하고 말았다. 메시앙의 인생은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압둘이 받은 문자는 다름 아닌 메시앙의 휴대폰에서 발신된 것이었다. 그는 주차장을 급습하기 전에 이미 문자의 발신지가 아랍에미레이트의 아부다비라는 것을 확인했다. 내심 짐작하고 있었지만 메시앙의 말을 들으니 문자의 발신자가 이도윤이라는 것이 더욱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쯤 아부다비마저 떠났을 것이다.
“이 자들을 모두 차에 옮겨 실어. 최대한 빨리 저택으로 돌아간다.”
압둘은 기껏 풀었던 남자들의 입을 다시 테이프로 동여맨 뒤 자신들이 끌고 온 차에 차곡차곡 실었다. 그는 저택으로 돌아와 메시앙 일행을 지하에 감금한 뒤 곧바로 이브라힘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왕세제는 단숨에 지하로 달려와 메시앙을 직접 심문했다.
그의 심문은 도윤과는 달리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 처절한 고문과 함께 진행되었다. 도윤이 보낸 문자를 통해 메시앙의 뒤에 리히터 회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본인의 입을 통해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심문 결과는 이브라힘으로 하여금 이를 악물게 할 정도로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리히터 회장의 전용기가 킹 칼리드 공항에 도착했다가 두 시간 전에 다시 이륙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아마 메시앙 일당과 함께 이 박사를 태우러 왔다가 소식이 없자 그냥 떠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 박사의 문자와 메시앙의 자백 내용이 모두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브라힘이 심문을 끝낸 다음 자신의 서재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압둘이 새롭게 조사한 결과를 들고와 보고했다. 왕세제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를 갈았다.
“그러니까 독일의 리히터가 겁도 없이 뒤에서 이번 일을 꾸민 게 확실하다는 말이지? 감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그것도 내 저택 한 가운데서 나를 농락했다는 거야?”
“이 박사가 링커라는 사실을 밝히면 전하께서 그를 이곳에 억류시킬 거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런 다음에 겁에 질린 이 박사를 설득해서 자발적으로 자신의 품 안으로 기어들어오게 만들려는 수작이었겠지요. 전하에 대한 감정을 악화시키고 자신에 대한 호감은 극대화시키려는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강력한 경쟁자를 매도함으로써 반사 이익을 챙기려 했다는 말이지? 역시 장사꾼다운 짓거리야. 이 자식을 어떻게 손을 봐줘야 속이 시원할까?”
이브라힘의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당장이라도 총을 들고 독일로 뛰어가고 싶어 하는 게 분명했다. 그의 모습에 불안을 느낀 압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곧바로 리히터 회장에서 보복하는 건 위험합니다. 저쪽에서도 일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을 겁니다. 리히터 회장은 다니엘 로스차일드보다 더 큰 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독을 품고 잔뜩 웅크리고 있는 그를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오히려 우리가 역풍을 맞을 우려가 있습니다. 시간을 두고 방법을 생각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브라힘은 대답을 하지 않고 한동안 씨근거리기만 했다. 압둘의 말이 맞다. 하지만 그 자식을 그냥 내버려둔다는 게 말이 돼? 그는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가까스로 목을 뚫고 치솟아 오르려는 화를 어느 정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이도윤 일행이 나카지마의 여권과 메시앙의 전해준 위조 여권을 가지고 공항을 빠져나간 건 알겠어. 하지만 여권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의 경호원은 어떻게 공항 검색대를 무사히 통과했을까? 나카지마와는 생김새가 너무 다르잖아?”
왕세제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은 것을 확인한 압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박사는 원래 중국에서 유물 복원학을 공부했습니다. 그가 나카지마 교수의 여권 사진을 직접 바꿨을 가능성이 큽니다. 복원과 위조는 원래 일맥상통하니까요.”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그러려면 도구와 재료가 필요하잖아? 이 박사가 여기 올 때부터 여권을 위조하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서 가져왔다는 거야?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하고?”
“이 박사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그의 경호원이 시내에 혼자 나갔다 온 적이 있습니다. 아마 그때 필요한 재료를 구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어쩌면 나카지마가 거짓말을 하거나 은밀히 그를 도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 역시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위조 여권을 준비해서 입국했을 가능성을 검토하겠습니다.”
압둘로서는 최대한 합리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려고 애쓴 결과였지만, 그의 추측은 사실과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이브라힘은 그의 판단을 받아들였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압둘이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물었다.
“메시앙과 그의 일당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순간 압둘의 눈이 파랗게 빛났다.
“전부 사살해서 사막 한 가운데 묻어버려. 메시앙은 대외적으로 사막 여행 도중 실종된 것으로 처리해. 나머지 놈들은 처음부터 입국한 적이 없는 것으로 하고. 알겠지?”
“나카지마 교수도 함께 처리합니까?”
“그 친구는 일단 밀수든 뭐든 죄목을 걸어서 구금시켜. 정말로 아무런 혐의가 없다면 결국 풀어줘야 하겠지만, 당장은 좀 더 심문을 해볼 필요가 있어.”
일은 이브라힘의 지시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후일담이지만 나카지마는 무려 일 년 넘게 사우디아라비아의 구치소에 수감된 상태로 지내야했다. 그는 최종적으로 밀수범이라는 딱지를 붙인 채 일본으로 추방되었다. 그로서는 죽지 않은 것만 해도 운이 좋은 결과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