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35. 고학(孤鶴) 미술 대회>
두바이를 떠난 도윤과 석훈은 오전 아홉 시가 조금 넘어 인도 벵갈루루 공항에 도착했다. 미리 연락을 받은 오광표가 차를 가지고 마중 나온 덕분에 두 사람은 아무런 문제없이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광표는 두 사람의 호텔 방까지 따라 올라왔다.
“데바 인스트루먼트의 골루이 사장님이 이 박사님을 점심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혹시 피곤하시면 오늘은 쉬고 내일쯤 다시 일정을 잡자고 할까요?”
한국에서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도윤이 오광표의 직장 상사나 마찬가지였다. 비록 그가 데바 인스트루먼트에서 정해진 직책을 맡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오광표를 지금의 자리에 앉게 해 준 사람이 도윤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 때문인지 오광표는 딸의 학부모 입장에서 만났을 때와는 달리 그에게 깍듯한 자세를 취했다.
“아닙니다. 저희도 일정에 여유가 있는 편이 아니라서 가능하면 빨리 일을 진행시키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냥 식사 초대에 응하겠다고 전해주세요.”
비록 연구 이사로 재직하기는 했지만 오광표는 오랜 시간 동안 회사 밥을 먹은 사람이었다. 그는 도윤이 사용한 단어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저기, 진행할 일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TPU 개발에 성공했다는 건 시제품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뜻 아닌가요? 그럼 이제 남은 건 개발 성공 사실을 발표하고 대량 생산을 해줄 파운드리 업체를 찾는 거지요.”
“파운드리 업체라면, 염두에 두고 계신 회사가 있으십니까?”
조심스럽게 묻는 오광표를 향해 도윤이 씩 웃었다.
“아무래도 오성이나 미래 전자 가운데 하나가 되겠지요. 두 회사 모두 반도체를 제작하는 미세 공정에 관한 기술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생산 능력도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우리가 굳이 대만이나 중국 회사에 일을 맡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야 물론이지요. 당연한 말씀입니다.”
점심때까지는 시간 여유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세 사람은 서둘러 움직였다. 당장 필요한 것은 쇼핑이었다. 도윤과 석훈 모두 사우디에서 짐을 하나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갈아입을 속옷조차 없었다. 두 사람은 호텔 근처에서 여행용 가방을 하나 산 다음 그 안에 치약과 치솔, 면도기 등부터 시작해서 필요한 물건들을 꽉꽉 채웠다.
호텔로 돌아온 도윤과 석훈은 서둘러 샤워와 면도를 한 다음 속옷부터 정장까지 완전히 새로 갈아입었다. 이곳까지 오는데 사용했던 나카지마의 여권과 메시앙이 준 위조 여권은 쇼핑 도중에 갈기갈기 찢어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인도에서 한국으로 갈 때는 본인들의 여권을 사용하면 되기 때문이다.
골루이 사장이 도윤을 초대한 곳은 작은 회의실 형태의 밀실을 갖춘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밀실 한쪽 벽에 PPT용 대형 모니터까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평소에도 식사와 회의를 동시에 진행할 수 있는 용도로 만든 방이 분명했다.
점심 식사 자리에는 오광표가 도윤을 수행했고, 골루이 사장 역시 몇 명의 임원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끝난 뒤, 짐작했던 대로 골루이 사장을 따라온 임원들이 즉석에서 브리핑을 시작했다.
“이번에 우리 데바 인스트루먼트가 개발에 성공한 TPU는 현재까지 등장한 어떤 인공지능 칩보다 월등한 성능을 자랑합니다. 더구나 CPU와의 연결이 필요 없이 자체적으로 그 만한 성능을 낸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제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 개발 팀에서 자체적으로 테스트한 결과에 따르면 ……….”
약 삼십 분에 걸쳐 이루어진 브리핑에서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수치들이 나열됐다. 도윤이 IT 쪽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다는 점을 감안해서 되도록 쉽게 설명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쇼핑을 하는 과정에서 오광표로부터 미리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월등한 속도와 냉각 장치가 필요 없을 정도로 낮은 발열. 브리핑을 간단히 요약하면 새로운 TPU의 장점은 그 두 가지로 모아졌다. 비록 인공 지능 관련 제품에 특화된 칩이라는 한계가 있기는 했지만, 앞으로의 개발 여부에 따라 CPU 시장까지 넘볼 수 있는 엄청난 가능성을 지닌 제품이라는 얘기였다.
“며칠 내로 제품 개발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공표할 겁니다. 명목적으로는 인공지능용 TPU지만 사실상 기존의 CPU를 대체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골루이 사장의 자신있는 말에 도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기존의 컴퓨터에 사용해도 문제가 없다는 얘기인가요?”
“데스크 탑이나 서버용 컴퓨터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당장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운영 체제 문제도 있고, 새 TPU를 장착할 메인 보드도 개발해야 합니다.”
“그 작업도 데바 인스트루먼트에서 진행 중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또한 연구 팀에서 7나노 이하의 미세공정 기술을 도입한 칩 설계를 이미 진행 중입니다. 그게 완성되면 노트북은 물론이고 핸드폰이나 태블릿 등에도 우리 제품을 장착할 회사들이 많을 겁니다. 무엇보다 속도가 빠르고 발열이 획기적으로 적으니까요.”
골루이 사장은 현재 진행 중인 개발 작업이 끝나면 내년 1월에 열리는 CES, 즉 ‘국제전자제품박람회’에 독립적인 부스를 열고 신제품을 대대적으로 홍보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게 성공한다면 데바 인스트루먼트의 주가는 엄청나게 치솟을 것이다.
현재 도윤은 무려 45%의 지분을 가진 데바 인스트루먼트의 최대 주주였다. 물론 골루이 사장을 비롯한 다른 인도 경영진들이 가지고 있는 지분의 합이 50%가 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그가 경영권을 장악하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이미 TPU 개발에 성공했으므로 오광표에게도 약속대로 2%의 지분을 양도해야 했다.
그렇더라도 데바 인스트루먼트의 주가가 대박을 칠 경우 그의 재산은 폭발적으로 늘어날 게 분명했다. 굳이 구글이나 페이스북 등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성공한 IT 기업의 주가는 액면가의 열 배 백 배가 우스울 정도로 치솟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 브리핑에서 언급된 내용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조만간 재계의 순위가 바뀔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 자리에 오기 직전, 오 이사에게서 전화로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파운드리 업체를 한국 회사들 가운데서 선정하고 싶다고요?”
브리핑이 모두 끝나자 골루이 사장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현재로서는 그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도윤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구체적인 수치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현재 한국의 오성과 미래는 뛰어난 반도체 제조 관련 기술과 생산력을 동시에 갖춘 세계적으로 몇 안 되는 기업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제가 애국심 때문에 그 회사들을 고려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특별한 이견이 없다면 제가 여기 있는 오 이사와 함께 한국에 들어가서 업체 선정 작업을 진행했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얘기에 골루이 사장과 인도 임원진들은 일단 난색을 표시했다. 그들은 당장 결론을 내리는 대신 이틀 후에 다시 회의를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도윤의 입장에서는 다소 고민스러운 부탁을 했다.
“이번에 개발한 TPU에 걸맞은 이름을 붙이고 싶습니다. 펜티엄이나 라이젠 같은 식으로 말입니다. 이 박사께서 회사의 최대 주주이신데다 미술사 박사이시니까 이왕이면 좋은 이름을 지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당황한 도윤이 극구 사양했지만 골루이 사장은 거의 강권하다시피 그에게 작명의 임무를 떠맡기고는 임원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도윤이 약간은 걱정스러운 심정으로 오광표에게 물었다.
“저 사람들이 설마 파운드리 업체 선정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겠죠? 당장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반응이 시원치 않아서요.”
그러자 오광표가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인도 사람들은 간단한 문제를 결정할 때도 가급적 난상 토론을 거치는 걸 좋아합니다. 그 때문에 상대가 아무리 그럴 듯한 의견을 제시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덜컥 인정하는 경우가 별로 없죠. 저들도 업계 상황을 잘 알고 있으니까 이틀 뒤에는 태도가 달라질 겁니다.”
오광표의 말대로 이틀 뒤 다시 만난 골루이 사장과 임원들은 별다른 이견 없이 도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다만 골루이 측에서 선정한 임원 두 사람이 한국으로 함께 가서 구체적인 협상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였기 때문에 도윤도 흔쾌히 그들의 조건을 수락했다. 이로써 그는 새 TPU를 생산할 파운드리 업체 선정에 대한 실질적인 권한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전에 말씀하신 칩의 브랜드 명 말인데요. ‘싸이레인(Cyrain)’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개발한 TPU가 원래 인공지능용 칩이잖아요. 그러니까 ‘싸이버(Cyber)’와 ‘브레인(Brain)’을 합해서 ‘싸이레인’으로 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나중 얘기지만 도윤은 당시에 새 칩의 브랜드 이름에 대해 조금 더 고민할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그가 제안한 ‘싸이레인’은 현장에서 별 다른 반대 없이 채택되었고, 나중에 가장 유명한 컴퓨터용 TPU의 이름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그 이름을 지은 당사자인 도윤은 너무 무성의한 작명이었다는 이유로 평생 ‘싸이레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회의를 마치고 헤어지기 전에 골루이 사장이 도윤에게 신신당부했다.
“되도록 빨리 파운드리 업체 선정을 끝내주십시오. 현재 우리에게 시간은 말 그대로 돈입니다. 하루 더 빨리 생산에 돌입하면 그 만큼 더 이익이 많이 날 거라는 뜻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도윤도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다만 그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협상 상대가 얼마나 이번에 개발된 TPU의 가치를 인정하느냐가 관건이었다.
* * *
토마스 리히터로부터 급히 오라는 전화를 받은 크리스틴은 회장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뭔가 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했다. 웬만한 일에 대해서는 눈도 꿈쩍하지 않는 그녀의 아버지가 심각한 표정으로 사무실을 서성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메시앙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죽은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소파에 앉자마자 리히터 회장이 대뜸 내뱉은 말에 크리스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모리스 메시앙 말인가요? 아빠가 아끼던 그 감정가가 죽었다고요?”
“그래. 너도 알다시피 신안을 가지고 있는 친구지. 그것도 링커가 아니면서도 능력을 담고 있는 유물을 구별해낼 수 있는 사람 말이다. 잃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죽었어.”
“메시앙이 왜 사우디에서 죽은 거죠? 아빠가 그에게 위험한 일을 시키셨던 거예요?”
크리스틴의 질문은 자신의 아빠에게 묻는 말이라기보다는 추궁에 가까웠다. 리히터 회장이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입술을 깨물더니 긴 한숨을 토했다.
“보기보다 안전한 일이었다. 특수 훈련을 받은 요원들을 다섯 명이나 딸려 보낸 건 물론이고 내 전용기까지 동원했어. 리야드의 킹 칼리드 공항에서 사람 하나만 태우고 오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지. 설사 잘못되더라도 그가 목숨을 잃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메시앙이 죽었다면서요? 그 사람이 설마 사우디에서 벼락을 맞아 죽지는 않았을 거 아니에요. 어떤 사람을 데리고 오는 일이었죠? 메시앙을 죽인 게 누구에요?”
“너도 잘 아는 이도윤 박사를 데리고 오기로 했다. 그런데 탈출 과정에서 이브라힘 왕세제가 보낸 사람들에게 붙잡힌 모양이야. 나도 아직 정확한 경위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메시앙과 특수 요원들 모두 사우디에서 실종됐어.”
사우디에서 내국인이 아닌 외국인이 실종되었다는 건 죽었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크리스틴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토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이도윤 박사를 부르고 싶으셨다면 그냥 초대하지 그러셨어요? 그 사람은 전에도 아빠의 요청을 받고 그림을 감정하러 저희 집을 방문했었잖아요.”
크리스틴으로서는 당연한 의혹이고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어서 나온 리히터 회장의 대답에 그녀는 너무 놀라서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너도 예전에 이 박사가 링커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한 적이 있었지? 그 의심이 맞았다. 이 박사는 링커야. 메시앙이 이브라힘 왕세제의 집에서 그 증거를 잡았어.”
리히터 회장은 애초에 메시앙이 무슨 목적을 가지고 이브라힘 왕세제의 초대에 응했으며, 거기서 도윤이 링커임을 확인하는 순간 어떤 일을 진행시켰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크리스틴은 더욱 더 자신의 아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사 이 박사가 링커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쳐도 꼭 그렇게까지 하셔야 됐어요? 그건 사람을 일부러 궁지로 몰아서 아빠 손아귀에 쥐고 흔들려고 한 거잖아요. 그렇게 필요한 사람이었다면 메시앙처럼 설득해서 자기편으로 만들지 그러셨어요?”
그녀의 말에 리히터 회장이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 박사는 아쉬운 게 없는 사람이다. 집안이 넉넉한데다 내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 자신의 이름으로 된 재산만 해도 엄청나. 인물 좋고 집안 좋고 머리까지 좋은데다 감정가로서도 조만간 전 세계로부터 인정을 받는 위치까지 올라갈 게 분명해. 그 사람은 누가 뭐래도 링커가 아니냐. 신안을 가진 사람들과는 비교 자체가 어렵지.”
“그럴수록 더욱 더 좋은 관계를 유지했어야 하잖아요. 억지로 토끼몰이를 할 게 아니라.”
하나 밖에 없는 딸이 자꾸 따지고 들어서 그런지 리히터 회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재능이 있는 사람은 무조건 밑으로 거두어야 하는 법이야. 그게 불가능하면 아예 철저히 부숴버리는 게 나아. 성공이란 협상이나 공존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 빼앗는 거다. 그게 내가 지금까지 드라이바인 그룹과 케퍼 자동차를 성공시킨 비결이었어.”
“그래서 이 박사도 빼앗아서 독점하려고 하셨단 말이에요?”
“당연하지! 링커는 남들과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메시앙만 하더라도 그가 신안을 가졌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내가 얼마나 공을 들였냐? 그런데 링커는 기껏해야 한 세기에 한두 명 나올까 말까 할 정도로 희귀한 존재야. 메시앙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고. 그런 자를 다른 승냥이들과 공유한다는 게 가능할 것 같아?”
“그래서 아쉬운 게 없는 사람에게 억지로 아쉬운 걸 만들어주려고 했다는 말씀이세요?”
“원하는 게 없는 사람을 만족시킨다는 건 불가능하다. 사람들에게 총과 칼을 팔려면 먼저 전쟁을 일으켜야 해. 그게 싫으면 처음부터 무기를 팔 생각을 말든가.”
크리스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빠의 말이 맞다. 하지만 동시에 지긋지긋했다. 리히터 회장은 자신의 하나뿐인 딸에게도 언제나 경쟁에서 승리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 아빠를 만족시키기 위해 그녀 또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자들을 쓰러트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경쟁 그 자체를 즐겨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승리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보상의 달콤함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경쟁 그 자체가 즐겁지는 않았던 것이다. 반면에 그녀의 아빠인 리히터 회장은 승리보다 싸우고 부수는 과정에 더 탐닉했다. 사람들은 점잖은 재벌 회장의 이면에 숨겨진 치열한 투사의 모습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갑자기 아빠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더 저렇게 사실 것인가?
“제가 알기로 이도윤 박사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에요. 만약 그 사람이 이번 일의 배후에 아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경우 반드시 반격할 거예요.”
그녀의 말에 리히터 회장이 피식 웃었다.
“그런 걸 무서워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다. 반격을 해 준다면 오히려 고마운 일이지. 아무리 기가 센 친구라도 몇 번 처절하게 얻어맞고 나면 결국 꼬리를 말고 내 밑으로 들어올 거다. 난 그 친구가 반드시 필요해.”
“이브라힘 왕세제는 어떻게 하실 건데요? 메시앙을 잡은 게 그의 부하들이라면서요? 그럼 그 사람도 아빠에 대해 이를 갈고 있지 않을까요?”
“이브라힘이 이도윤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결국 목숨을 포기해야 할 거다.”
크리스틴은 여러 가지 감정이 담긴 눈으로 아빠를 쳐다봤다. 그녀는 뭔가 얘기하려고 몇 번 입술을 달싹였지만 끝내 아무런 말도 없이 등을 돌려 회장실을 나갔다. 그녀가 떠난 넓은 방 안에는 리히터 회장만이 생각을 알 수 없는 눈빛을 한 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