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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232화 (232/300)

232화

18세기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화가나 조각가들은 예술가라기보다는 일종의 장인으로 간주되었다. 그들은 귀족이나 성직자, 혹은 왕실과 양반들의 의뢰를 받아 작품을 ‘제작’했으며, 대상의 선정과 작품의 주제, 심지어는 화풍에 이르기까지 의뢰자의 요구에서 벗어나는 일을 하기가 어려웠다. 예술은 그런 이중 삼중의 바위틈을 어렵게 뚫고 나온 가녀린 꽃이었다.

그 때문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일부 대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사회적으로 대우받기는커녕 먹고 살기도 벅찬 힘든 생활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 루벤스나 렘브란트의 작품들 가운데 상당수는 공장을 방불케 하는 그의 공방에서 일하던 도제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작품에 자신의 서명을 남길 수 있었던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중국이나 한국 같은 아시아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선 시대의 경우 화가로서의 실력을 인정받아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려면 도화원 같은 곳에 소속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른바 그림 그리기를 업으로 삼아 먹고 사는 이들은 대개 장터에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서 파는 환쟁이 취급을 받았고, 어쩌다 양반 집에 불려가 솜씨를 발휘할 기회를 만나야 그나마 뱃속에 기름칠을 하는 게 가능했다.

문인화가 예술성을 크게 인정받는 이유는 오직 사대부들만이 품격을 알고 예술을 이해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차라리 생활에 여유가 있어서 밥을 먹기 위해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한가하게 붓끝에 마음과 도를 싣기가 어려웠다고 보는 게 맞다. 배가 고픈 이들에게 있어서 예술은 빵 한 조각보다 쓸모없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처음 한국 땅에 수입된 서양식 회화 역시 결과가 아닌 토대로써 경제적 여유를 필요로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사정은 21세기에 들어와서 더욱 악화되었다. 그림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은 대개 화가가 아니라 이미 돈이 많은 부자들이나 미술 중개상들뿐이었다. 당연히 시간이 갈수록 순수 미술을 전공하는 이들의 수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그 때문에 도윤은 처음 ‘고학 미술 대회’의 개최를 발표했을 때만 하더라도 응모 작품 수가 별로 안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작품을 접수받기 시작하자 아직도 그 배고프고 돈 안 되는 일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걸 새삼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재단 수장고에 차곡차곡 쌓이는 수많은 작품들을 보고 기가 질렸다.

“그러니까 애초에 상 주고 돈까지 주는 대회를 왜 그렇게 열심히 광고한 거예요? 이러다가 잘 하면 비어있는 사무실마다 온통 응모 작품으로 채워야 하겠어요."

조금 과장이 섞이기는 했지만 석훈이 그렇게 말하며 혀를 찰 정도로 응모 작품 수가 많기는 했다. 직접 작품을 들고 재단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응모자들은 우편이나 택배를 이용해서 작품을 부쳤다. 덕분에 전국의 택배 회사는 물론이고 우체국 직원들마저 ‘서윤 문화 재단’을 흘겨보고는 했다. 특히 조각 작품을 운송할 때는 더 심했다.

응모 작품 수가 예상을 훌쩍 벗어날 정도로 많다 보니 그것들을 일일이 심사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재단에서는 이번 미술 대회를 위해 분야 별로 다섯 명씩, 모두 열다섯 명의 심사 위원들을 위촉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 많은 작품들을 일일이 심사하고 평가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고 심사 알바를 고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도윤은 분야별로 열 명씩 모두 서른 명의 심사위원들을 새로 위촉해야 했다. 그나마 그동안 아버지인 이세준이 툭하면 그를 여기저기로 출장 보낸 덕분에 전국 각지의 유명 작가나 대학 교수들과 두루두루 안면을 터놓았던 게 다행이었다. 게다가 언론에서 대회를 크게 언급해준 터라 접촉하는 사람들마다 비교적 쉽게 심사위원직을 수락해주었다.

새로 위촉된 심사위원들이 눈이 빠져라 작품들을 보고 또 보며 고른 끝에 4월 초가 되었을 때는 어느 정도 예선 심사가 완료되었다. 그 결과 회화, 조소, 디자인 분야별로 각각 서른 점씩의 작품들이 최종 심사 대상으로 올라왔다. 그때부터 미리 위촉해 놓았던 최종 심사위원들이 거의 날마다 재단 건물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예비 심사위원들은 물론이고 최종 심사위원들을 위촉하는 과정에서도 어쩔 수 없이 도윤의 개인적인 선호와 인연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그가 처음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로 지금까지 인연을 맺었던 화가와 조각가, 그리고 대학 교수들이 주로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심사위원이 된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장예주 박사였다.

장예주 박사는 회화 부문의 심사위원을 맡아달라는 도윤의 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최근 국립 현대 미술관에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녀가 선뜻 심사위원직을 받아들인 이유는 ‘고학 미술 대회’가 앞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대회가 될 거라는 예측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그녀에게는 또 다른 이유가 더 있었다.

“나는 사실 처음에는 좀 망설였다. 요즘 미술관 일이 너무 바쁘거든. 그런데 구상춘 관장님이 그 얘기를 듣더니 먼저 나를 찾아와서 심사위원직을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셨어.”

구상춘 관장이라면 장예주가 근무하는 국립 현대 미술관의 신임 관장을 가리킨다. 그녀의 말을 들은 도윤은 문득 불안한 느낌을 받았다.

“구 관장남이 직접 그렇게 말씀하셨다고요?”

“응. 왜 그러셨는지는 이 박사도 대충 짐작이 가지?”

“설마…….”

“그 설마가 맞아. 이번 대회가 끝나면 이 박사도 우리 일을 도와달라는 거지.”

장예주가 예전에 밝혔듯이 구상춘 관장은 과거 도윤이 박은비 화백의 전작 도록을 만든 일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관장으로 취임한 이후, 국립 현대 미술관이 자체적으로 해방 이후 활동한 국내 대가들의 전작 도록을 발간하는 일을 추진해 왔다.

도윤이 박은비 화백의 도록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누군가의 전작 도록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기존에 알려진 모든 작품들에 대한 철저한 재감정 작업이 필수다. 눈치를 보아하니 구 관장은 도윤에게 그 일을 부탁하려는 게 분명했다.

“글쎄요. 제가 요즘에는 너무 바빠서 시간을 내기 어려울 같아요. 아시다시피 지금은 고학 미술 대회 때문에 다른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요. 게다가 그 일이 끝나면 곧 결혼도 해야 하기 때문에…….”

도윤이 난감한 표정으로 손을 내젓자 장예주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뭘 미리부터 그렇게 겁을 내고 그래? 걱정하지 마. 우리도 이 박사가 신혼여행에서 돌아오고 난 다음부터 도와달라는 얘기니까. 아무렴 그 정도 경우도 모를 줄 알아?”

하긴 국립 현대 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작업은 아무리 짧게 잡아도 최소 몇 년은 걸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결국 도윤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뒤 일주일에 한 번씩 미술관에 들러 작품 감정을 도와주기로 했다. 어차피 그로서도 대중에게 전시되지 않고 미술관 수장고에 보관 중인 작품들을 살펴볼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 * *

비록 재단 이사장이라는 거창한 직함을 달고 있기는 했지만, 이번 미술 대회에서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만큼 일이 많았다. 그래서 도윤도 재단 일을 보는 한편, 틈틈이 밀려드는 응모 작품을 선별하는 일을 도왔다. 최종 심사는 위촉된 심사위원들이 진행하겠지만 그 전에 수준 이하의 작품들을 골라내는 것은 그가 충분히 도울 수 있는 일이었다.

사실 좋은 작품을 알아보는 데 있어서는 타인의 추종을 불허하는 안목을 가지고 있는 그가 고작 예비 심사에 자신의 능력을 쓰는 것은 일종의 재능 낭비에 속하는 일이었다. 만약 그 자신이 재단 이사장이 아니었다면 도윤도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뜻밖의 그림이 한 점 발견되었다.

“응? 이건 왜 붉은 빛이 나지? 이건 유물도 아니잖아?”

응모된 유화 가운데 한 점에서 능력을 담고 있음을 뜻하는 붉은 아우라가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번에 응모된 작품들 가운데는 걸작임을 뜻하는 흰색 아우라조차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세계적인 대가들의 작품에서도 보지 못하던 붉은 아우라가 흘러나오는 작품이 발견된 것이다. 도윤은 그 사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상하네? 이건 오래된 작품이 아니야. 분명히 그린 지 몇 년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런데 어떻게 그림에 능력이 담겼다는 거지?”

그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능력이 담긴 유물을 수십 여점 보았다. 그가 직접 보고 만진 유물의 수가 엄청나다는 점을 생각할 때 능력을 담은 물건들이 얼마나 희귀한지를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숫자였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그림이 붉은 아우라를 피워 올리는 경우는 고작 두 번밖에 없었다. 그만큼 능력이 담긴 그림은 희귀한 존재라는 얘기였다.

도윤도 그 이유를 정확히 이해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어떤 물건에 능력이 담기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누군가 그 물건을 오랫동안 소장하면서 각별한 애정을 쏟았거나, 아니면 물건의 제작자가 소위 영혼을 갈아 넣을 정도로 정성을 다해 그것을 만들었을 경우다. 당연한 얘기지만 물건의 주인이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기본적인 조건이다.

그림에 특별한 능력이 담기는 경우는 모두 첫 번째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다. 근대 이후로 화가들이 한 작품에 오랜 시간을 투여하는 일이 거의 사라진데다, 오래 전에 완성된 걸작들의 경우에는 설사 어떤 능력이 남아 있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 소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미술대회 응모 작품 중에 그 희귀한 예가 등장한 것이다.

도윤이 발견한 그림은 풍경화였다. 바닷가와 저 멀리 수평선 근처를 오가는 고깃배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었는데, 사실적인 그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선을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단순화 시키되 굉장히 복잡하게 교차시켰기 때문에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쯤에 놓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잘 그린 그림이었지만 독창성이 조금 부족하다는 게 흠이었다.

도윤은 일단 수장고에 있던 작품을 빼어서 자신의 사무실에 가져다 놓았다. 그런 다음 접수처에 전화를 걸어 해당 작품의 출품자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경남 창원의 이혜영이라고? 처음 듣는 이름인 걸 보니까 분명 중견 작가는 아닌데?”

출품자는 현재 경남 창원에 거주하는 스물일곱 살의 여자였다. 이번 대회의 나이 제한이 서른 살이었으니까 기준을 넘어선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림에서 느껴지는 깊이가 상당했기 때문에 혹시 나이가 든 중견 작가나 그 지인이 시험 삼아 출품한 작품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잠시 했었다. 하지만 등록된 출품자는 분명 젊은 여자였다.

게다가 출품자의 학력과 직업을 확인한 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했다. 출품자가 미대를 나오지 않은 일반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꼭 미대를 나와야지만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대가들이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지 않고도 뛰어난 작품을 만든 사례가 얼마든지 있으니까. 하지만 도윤은 출품된 그림에서 분명히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은 흔적을 느꼈다.

“이건 아무래도 한 번 확인해야 하겠는데? 도대체 누가 풍경화 한 점에 자신의 영혼을 갈아 넣은 거야?”

그냥 무시하고 탈락시키면 그만인 일이었지만 그림에서 붉은 아우라가 느껴진다는 게 문제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도윤은 절대로 그런 그림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는 접수처에 전화해서 작가와 연락을 취하라고 지시했다. 출품자가 직접 서울로 올라올 수 없다면 아무리 바빠도 그가 직접 창원까지 내려갈 작정이었다.

* * *

어느덧 4월이 되면서 드디어 평창동 집의 인테리어 공사가 모두 끝났다. 아직은 텅 빈 집에 불과했지만 도윤은 최서라와 함께 앞으로 그들이 살 집을 먼저 둘러보았다.

“이건 정말 제가 꿈꾸던 집 그대로예요. 정말 고마워요, 도윤씨.”

집을 둘러본 최서라는 마음에 쏙 든다는 표정으로 도윤에게 거듭 고마움을 표시햇다.

원래의 집 자체도 상당히 비쌌지만, 집을 구입한 이후로 또 다시 엄청난 돈을 들여 안팎을 완전히 뜯어고쳤다. 그 덕에 인테리어 공사가 끝난 새 집은 도윤이 보기에도 아주 훌륭했다. 더구나 그들이 주로 생활할 1, 2층은 설계 단계에서부터 최서라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그녀의 마음에 쏙 든 게 분명했다.

넓은 잔디밭이 깔린 정원의 한쪽에는 지름 10미터 정도의 작은 연못을 만들고 오래 된 소나무 한 그루를 옮겨 심었다. 돌아가신 최서라의 할머니가 고향에 있던 송연(松淵)이라는 연못을 아주 좋아하셨는데, 어릴 때 그곳에 놀러갔던 추억을 회상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도윤이 특별히 부탁해서 만든 곳이었다. 나중에 연못가에 야외용 테이블을 설치하면 그럴 듯한 휴식 공간이 될 것 같았다.

1층과 2층에는 네 개의 방과 다섯 개의 화장실이 있었는데, 2층의 큰 방은 도윤을 위한 서재로 꾸며졌다. 그곳에는 이미 커다란 금고까지 들여놓았는데, 나중에 그곳에 귀중한 유물이나 작품을 넣어두고 따로 연구를 할 생각이었다.

최서라가 가장 기뻐한 곳은 본채와 따로 떨어진 곳에 마련된 열다섯 평 정도의 별채였다. 간단한 주방 시설과 화장실까지 갖추어진 그곳은 그녀가 틈틈이 금속 공예품을 만들 수 있도록 만든 작업실이었다. 그녀도 청파 갤러리 일 때문에 몹시 바빴지만 도윤으로서는 파베르제의 능력을 물려받은 그녀의 재능을 썩히기가 너무 아까웠다.

밖에서 볼 때는 건물의 지하가 전부 주차장으로 꾸며진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 그곳에는 도윤의 서재에서만 내려갈 수 있는 비밀 공간이 존재했다. 도윤과 최서라의 비밀 수장고가 그곳에 마련된 것이다.

도윤은 집 전체의 인테리어 공사를 맡은 업체와는 별도로 따로 시공자를 선택해서 그 수장고를 만들었다. 현소 화랑 지하에 만들어진 특별 수장고보다 훨씬 뛰어난 첨단 보안 장치가 갖추어진 공간이었다. 두 사람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개인적으로 수집하게 될 특별한 작품들은 모두 그곳에 보관할 생각이djT다.

결혼식까지는 앞으로도 한 달 가량 여유가 있었지만 도윤은 인테리어 공사가 끝나고 안 방에 침대를 비롯한 가구가 들어오자마자 석훈과 함께 살던 집에서 먼저 짐을 뺐다. 어차피 현재의 집은 이미 녀석의 명의로 이전시켜 준 지가 오래였고, 결혼과 동시에 새 집에서 생활하려면 미리 이사를 해두는 편이 나았기 때문이다.

도윤의 짐 가운데 대부분은 그가 서재로 쓸 방으로 옮겨졌다. 그 가운데 몇몇 물건들은 새로 설치한 금고 속으로 들어갔는데 그 가운데 몇 개가 최서라의 관심을 끌었다.

“이건 터키에서 얻었던 황금 술병이잖아요? 그런데 두 개가 더 늘었네요?”

그녀는 도윤이 가지고 있는 세 개의 황금 술병을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 가운데 황금 낙타 술병은 최서라가 도윤과 함께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열렸던 비밀 경매에서 낙찰 받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석훈과 함께 이라크에서 죽을 고생을 하면서 얻었던 늑대와 말 모양의 또 다른 술병들은 그녀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 술병들은 원래 이 세 개가 한 쌍이야. 옛날에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을 점령했던 호라심 왕국에서 만든 거지.”

도윤은 그녀에게 세 개의 술병이 언제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어떻게 해서 몽골로 흘러들어갔다가 다시 우즈베키스탄에서 돌아오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설명했다. 눈을 빛내며 그의 설명을 듣던 최서라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이 손뼉을 짝 하고 쳤다.

“그럼 이 술병들이 사실은 칭기즈칸의 무덤과 연관이 있는 물건이라는 뜻이잖아요? 그럼 우리 신혼여행을 바이칼 호수 쪽으로 가는 건 어때요? 거기서 옛날 기련 산맥으로 추정되는 곳을 찾아보는 거예요. 그럼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기련 산맥은 중국의 사서 가운데 하나인 원사(元史)에 기록된 칭기즈칸의 무덤이 있는 장소다. 다만 거기서 말한 기련 산맥이 오늘날의 어느 곳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만 존재할 뿐 아무도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했다.

최서라의 말을 들은 도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 그건 좀 곤할 것 같은데? 우리 신혼여행은 유럽 일주를 하기로 하고 벌써 비행기하고 호텔까지 다 예약해놨잖아? 이제 와서 그걸 취소하라고?”

“저는 옛날부터 칭기즈칸의 무덤이 어디일지 정말 궁금해 했어요. 어차피 유럽은 도윤 씨나 저나 여러 번 가봤잖아요. 그리고 바이칼 호수 근처도 러시아 영토니까 이왕이면 유럽에 갔다가 그쪽을 들러서 오면 되잖아요.”

바이칼 호수 근처가 러시아 땅이기는 하지만 유럽은 아니지. 우랄 산맥 동쪽은 아시아에 속하니까. 도윤은 결혼식을 불과 한 달 남겨놓고 갑작스럽게 신혼여행 일정을 변경하는 게 솔직히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앞에서 눈을 반짝이며 기대에 찬 표정을 짓고 있는 최서라를 보자 차마 안 된다는 말이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지 뭐. 하지만 진짜로 본격적인 탐사를 하는 건 곤란해. 아무리 일정을 바꿔도 우리가 그 근처를 돌아다닐 수 있는 시간은 최대 닷새에 불과하다고. 그 며칠 동안 뭔가 의미 있는 것을 발견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 그러니까 나중에 더 있자고 하기 없기. 알겠지?”

“약속할게요. 그리고 전 바이칼 호수도 본 적이 없어요. 어차피 신혼여행이니까 이왕이면 우리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요.”

결국 그날부터 도윤은 머리에 쥐가 나도록 머리를 굴리면서 일정을 바꾸고 예약 사항을 변경해야 했다. 공연히 황금 술병을 보여주는 바람에 신혼여행이 신혼탐사로 바뀌고 만 것이다. 새삼 최서라도 흥이 돋으면 묘하게 고집스러워진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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