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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233화 (233/300)

233화

미래 전자와 미래 건설, 그리고 청파 갤러리가 서로 주식을 맞교환하면서 완전히 독립적인 기업들이 되었다.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되기 쉬운 대기업 계열사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기자들이 금세 달려들었다. 당연히 경제 전문지를 비롯한 각종 일간지와 방송에서 연일 그 사실을 중심 뉴스로 다루었고, 미래 그룹은 단번에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최인탁 회장이 요즘 오늘 내일 한다더니 죽기 전에 승계 작업을 완료한 건가?

―그래봤자 이쪽 주머니의 돈을 저쪽 주머니로 옮긴 것뿐이잖아? 뭐가 달라진 건데?

―진심이야 훼이크야? 그럼 미래 그룹은 이제 해체되는 거야?

―해체는 무슨? 계열사 간 거래는 계속할 게 뻔하잖아.

―어느 쪽이 가장 이익을 본 거지? 서로 주가가 다르지 않나?

―응. 너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신경 꺼.

외형적인 주식 교환 결과만 놓고 보면 가장 이익을 본 것은 청파 갤러리였고, 반대로 미래 건설은 큰 손해를 입었다. 청파는 상대적으로 주가가 낮은 건설과 전자의 주식을 내놓았고, 반대로 두 회사는 청파의 주식을 넘겨줬기 때문이다. 미래 건설과 미래 전자 사이의 주식 맞교환 역시 더 비싼 자사주를 받은 전자가 이득을 본 셈이었다.

주식 전문가들의 견해 역시 비슷했다. 청파 갤러리의 경우 비상장 주식회사였기 때문에 시세를 정하기가 어려웠지만, 증권가에서는 그곳의 실제 주가가 가장 비쌀 거라고 추정했다. 그 때문에 청파가 조만간 상장을 준비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루머까지 잠시 나돌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사람은 오히려 미래 건설의 사장인 최병준이었다. 그는 도윤으로부터 무려 5%에 이르는 자사주의 명의를 양도받았고, 동생인 최병호로부터도 강남 지역의 건물 한 채를 넘겨받았다. 회사는 손해를 보는 주식 교환을 했지만 그 자신은 개인 재산을 크게 불리는 거래를 한 것이다.

“통 큰 결단을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모든 일이 끝난 뒤 도윤은 다시 한 번 최병호를 찾아가서 깊게 고개를 숙였다. 이제 결혼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이라 그의 입에서는 서슴없이 장인어른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러자 최병호가 껄껄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통 큰 결단을 내린 건 자네지. 내가 형님께 드린 건물의 가치는 고작해야 이백 억 정도밖에 안 돼. 하지만 자네는 시가만 해도 천억에 가까운 주식을 포기했지 않은가?”

“그건 아닙니다. 장인어른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회장님께서…….”

“됐어. 자네가 그 주식을 어디 팔 사람도 아니고 어차피 집안 물건 아닌가?”

세 회사 간의 주식 맞교환이 끝난 뒤, 최인탁은 최병준과 최병호, 그리고 최수아 세 남매를 집안으로 불러 유언장 내용이 변경될 거라는 사실을 알렸다. 나중에 자신이 죽은 뒤에 혹시라도 유산 분배 문제를 놓고 잡음이 나올 것을 우려해 미리 못을 박아둔 것이다. 그 때문 최병준과 최병호도 앞으로 청파 갤러리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게 되었다.

최병준은 도윤이 청파 갤러리 주식의 20%를 받게 될 거라는 사실에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지만, 최병호는 그 문제에 대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물이 흐르고 흘러 어디로 갈 것인지 뻔했기 때문이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사실 도윤은 안전한 금고나 다름없었다. 도윤은 외아들이었고, 그 점은 그의 아버지인 이세준도 마찬가지였다 한 마디로 도윤의 재산은 결국 곧 그의 아내가 될 최서라와 앞으로 둘 사이에 태어날 자식들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점은 지금 그가 사장으로 있는 미래 전자의 운명도 마찬가지였다.

‘청파를 지키겠다고 미래 건설의 주식을 선뜻 내놓기까지 한 친구야. 그런 사람이 새삼스레 청파 주식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지는 않겠지.’

사람 마음이야 알 수 없다지만 그는 곧 사위가 될 도윤을 믿기로 했다. 게다가 도윤 덕분에 데바 인스트루먼트의 TPU를 독점생산 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최근 들어 미래 전자의 주가가 조금씩 상승하는 중이었다.

“데바의 TPU를 장착할 마더 보드의 설계와 생산을 미래 전자가 맡기로 했네. 아마 대만에서 6월에 열리는 컴퓨덱스에 시제품을 선보일 수 있을 거야. 나는 그 날이 바로 컴퓨터 산업의 새 시대가 열리는 날이 될 거라고 믿어.”

그리고 올 가을에 데바가 약속대로 노트북과 휴대폰에 장착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의 개발을 완성한다면 미래 전자는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평생 미래 전자에 몸바쳐온 최병호로서는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그렇게 많게만 보였던 응모작들에 대한 예비 심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도윤에게도 이번 주까지는 최종 심사 대상에 오를 작품들이 모두 선정될 거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사무실 한 쪽에 머물렀다. 거기에는 그가 수장고에서 직접 가지고 올라왔던 그림, 거친 선들로 그려진 독특한 풍경화 한 점이 놓여 있었다.

경남 창원에 산다는 이혜영이라는 여자가 출품한 그 작품은 지금도 선명한 붉은 색 아우라를 흘려내고 있었다. 도윤은 아직도 그 그림을 예비 심사가 진행되는 심사장에 가져다 놓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림을 그린 사람이 응모자 본인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윤은 처음 그림을 가져왔을 때, 혹시나 해서 거기에 남아 있는 잔류 기억을 읽었었다. 기억 속에 나타난 화가는 확실히 젊은 여자였다. 선이 고운 얼굴에 가냘픈 몸매를 한 여인. 그러나 스물일곱이라는 이혜영보다는 나이가 조금 더 들어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아무리 잘 봐 줘도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 정도. 저 여자가 정말로 이혜영일까?

그는 컴퓨터를 이용해 회사 서버에 접속했다. 거기에는 모든 응모자들의 이력과 연락처가 기록되어 있었지만 사진은 보이지 않았다. 재단에서 작품을 응모 받을 때 첨부 서류에 사진을 붙이라고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그럴 필요가 없겠다 싶어서 굳이 요구하지 않았던 것인데, 막상 상황이 이렇게 되자 새삼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대회에 정식으로 응모한 작품인데 계속 내 방에 둘 수는 없잖아. 이번 주까지 심사를 받지 못하면 무조건 탈락될 수밖에 없는데.”

그게 문제였다. 사실 어떤 작품에서 붉은 아우라가 흘러나온다고 해서 그것이 꼭 명작이거나 걸작이라는 보장은 없다. 붉은 아우라는 단지 그 물건에 능력이 잠재되어 있음을 나타낼 뿐이지 백색의 아우라처럼 높은 예술적 가치를 뜻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이혜영이 출품한 풍경화는 그림 자체의 수준도 상당히 뛰어났다.

도윤은 고민 끝에 재단의 평범한 직원인 것처럼 꾸미고 이혜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윤 문화 재단입니다. 이혜영 씨죠? 응모하신 작품 때문에 몇 가지 여쭤볼 게 있어서요. 바쁘시지 않으면 사진을 한 장 보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전화를 받은 그녀는 갑자기 사진을 보내달라는 얘기에 당황한 게 분명했다

“사진은 왜 보내라는 거죠? 응모 요강에는 응모자 사진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없었는데…….”

“죄송합니다. 보내주신 작품이 최종 심사 대상에 올라갈 것 같아서요. 거기에 올라갈 작품을 보내주신 분들은 모두 얼굴을 확인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응모 요강에 그 점을 미리 밝히지 않은 점은 죄송하지만 본인의 사진 파일을 하나만 보내주십시오. 수고스럽겠지만 굳이 증명사진이 아니라도 괜찮으니까 이번 주 내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도윤이 생각하기에도 조금 말이 안 되는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이혜영의 대답 역시 말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죄송하지만 사진은 곤란할 것 같아요. 파일로 가지고 있는 사진이 하나도 없어서요.”

파일로 가지고 있는 사진이 하나도 없다고? 요즘 젊은 아가씨가 휴대폰으로 찍은 셀카 사진 한 장이 없다는 게 말이 돼? 도윤의 의심이 더욱 짙어졌다.

“휴대폰을 가지고 계시면 지금이라도 그걸로 본인 사진을 찍어서 보내시면 됩니다. 얼굴만 확인하면 되니까 굳이 잘 찍으시려고 애쓰실 필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사진 찍는 걸 워낙 싫어해서요. 그게 없으면 예심을 통과하지 못하는 건가요?”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사진은 보내지 않는 걸로 할게요. 죄송합니다.”

전화가 툭 끊겼다. 이것 봐라? 도윤은 일방적으로 끊긴 전화기를 보면서 혀를 찼다. 아니 무슨 엑스레이 사진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셀카 하나 찍어 보내는 게 그렇게 어려워?

“석훈아. 너 나랑 같이 출장 좀 다녀오자.”

결국 그는 석훈을 데리고 직접 창원을 다녀오기로 했다. 한편으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느냐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상대의 반응이 너무 수상했다.

기차를 탈까 하다가 현지에서의 편의를 생각해 직접 차를 끌고 내려가기로 했다. 석훈이 운전대를 잡았는데 녀석은 도윤으로부터 출장 이유를 듣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까 그 이혜영이라는 아가씨가 자기 그림에 능력을 남겼다는 말이죠?”

“아직 몰라. 그걸 확인하러 내려가는 거니까. 어쩌면 남이 그린 그림으로 응모했을지도 몰라. 내 경험에 의하면 그렇게 젊은 사람이 어떤 물건에 능력을 남기기는 쉽지 않거든.”

파베르제 같은 거장조차 능력을 남기는데 성공한 작품은 고작 하나뿐이었다. 그는 평생 수십 개의 달걀 공예품을 만들었는데, 말년에 남긴 마지막 작품에만 그의 안목과 솜씨가 전달 가능한 능력으로 남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고작 스물일곱밖에 되지 않은 여자가 벌써 자신의 그림에 영혼을 갈아 넣었다고?

“전혀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의심스럽다, 뭐 그런 말이에요?”

석훈의 말에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솔직히 사진 한 장 보내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은 아니잖아? 그런데도 굳이 거절하는 게 아무래도 이상해.”

“이상할 게 뭐 있어요? 얼굴이 되게 못생겼나 보죠, 뭐.”

이 자식이 그걸 말이라고. 도윤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석훈도 자신이 말을 너무 함부로 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어깨를 으쓱했다.

“정 이상하면 그냥 탈락시키면 되잖아요? 그리고 나중에 천천히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확인해도 되는 거 아니에요?”

“탈락된 작품은 모두 응모자게 돌려줘야 돼. 미술 대회는 시나리오 응모 같은 것 하고는 달라서 탈락시킨 작품을 임의로 처리할 수가 없거든. 그러니까 그 전에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 그림에 능력을 담을 수 있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어.”

“그럼 일단 최종 심사 대상에 집어넣은 뒤에 확인하시죠? 형이 이사장인데 한 작품 정도 그냥 올린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 거 아니에요? 형 요즘 너무 바쁜 거 알아요?”

“뭐라고 할 사람이 없기는? 당연히 있지. 이사장이라는 놈이 제멋대로 작품을 넣었다 뺐다 하면 애써 모신 심사위원들이 좋아하겠냐? 나한테 직접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만이 없을 거라 생각하면 안 되지.”

점심 무렵에 서울을 출발해서 창원에 도착하니까 어느새 여섯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응모 서류에 나와 있는 이혜영의 집 근처에 도착한 두 사람은 그녀에게 곧바로 전화했다. 전화를 받은 이혜영은 서울에서 창원까지 일부러 사람이 내려왔다는 얘기를 듣고 몹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얼굴을 확인하고 몇 가지 물어보기만 하면 됩니다. 혹시 이혜영 씨가 그린 다른 그림이 더 있습니까? 그럼 그것도 살펴볼 수 있으면 더 좋고요.”

다른 그림을 더 보자는 도윤의 말에 이혜영이 펄쩍 뛰었다.

“그림은 그것 하나밖에 없어요. 그리고 저는 사정이 있어서 집밖으로 나가기가 곤란해요.”

“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가 댁으로 찾아뵙겠습니다.”

전화기에 침묵이 흘렀다. 한참 만에 다시 들린 이혜영의 목소리에는 초조함과 두려움, 짜증의 기색이 짙게 서려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도윤의 방문을 허락했다.

“오시는 건 괜찮은데 제가 몰골이 많이 흉해요. 보고 놀라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뭐야? 석훈이 녀석이 한 말이 사실이었어? 얼굴 때문에 사진을 안 보낸 거야?

십여 분 뒤, 도윤과 석훈은 낡은 빌라 앞에 서 있었다. 주소에 나와 있는 이혜영의 집은 그 빌라의 반 지하 방이었다. 석훈이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슬리퍼를 끄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문이 열렸다. 고개를 살짝 숙은 채 모습을 드러낸 이혜영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이래서 사진을 안 보내려고 했구나.

* * *

이혜영은 뺨에서 턱 아래로 이어지는 얼굴의 절반가량이 흉측한 흉터로 뒤덮여 있었다. 살이 우그러진 모양으로 볼 때 화상을 입은 게 분명했다. 아직 서른도 안 된 젊은 여자에게는 치명적인 상처가 아닐 수 없었다. 도윤은 하마터면 굳을 뻔 얼굴을 재빨리 펴고는 그녀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서윤 문화재단의 이도윤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저희 지원 팀장인 안석훈이고요. 이혜영 씨 맞으시죠?”

그의 명함을 건네 이름을 확인한 이혜영이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도윤 씨라면…, 재단 이사장인 이도윤 박사님 아니신가요?”

최근 들어 미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 가운데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재단 이사장에다 유명 인사이기까지 한 그가 창원까지 자신을 보러 직접 찾아왔다는 사실에 적지 않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네. 맞습니다. 이혜영 씨가 ‘고학 미술대회’에 ‘창원 앞바다’라는 그림을 응모하셨죠? 그 작품 때문에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왔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네? 아, 네. 들어오세요.”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던 이혜영이 그제야 화들짝 놀라면서 문에서 비켜섰다. 그녀가 사는 반 지하는 그리 크지 않은 방 두 개에 거실도 없이 취사만 간단히 할 수 있는 좁은 부엌 하나뿐인 간단한 구조였다. 이혜영은 두 사람을 그 중 비교적 큰 방으로 들어오게 했다. 도윤과 석훈은 그녀가 몹시 민망해하며 내놓은 방석을 깔고 바닥에 앉았다.

“대접할 게 마땅치 않아서……. 커피하고 녹차 가운데 어떤 거 드실래요?”

“커피가 좋습니다.”

두 사람이 앉은뱅이 식탁 앞에 앉자 이혜영이 얼른 부엌에 들어가 커피 세 잔을 내려왔다. 좁고 어둡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름 깔끔하고 단정하게 정돈된 집이었다. 커피 역시 인스턴트가 아니라 원두를 갈아서 내린 것이었다.

“다른 식구 분들은 안 계신가 보죠?”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도윤이 방안을 슬쩍 둘러보며 말했다.

“원래 아빠하고 언니랑 셋이서 살았는데 재작년에 모두 돌아가셨어요. 그 뒤로는 저 혼자 살고 있어요.”

“아, 죄송합니다.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냥 여자 혼자 사는 자취방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식구가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방안을 둘러보던 도윤의 시선이 한쪽에 있는 넓은 책상으로 향했다. 방 크기에 비해 유난히 넓은 책상이었는데 그 위에 모니터를 비롯한 몇 가지 눈에 띄는 장비가 놓여 있었다.

“혹시 평소에는 주로 태블릿을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세요?”

컴퓨터로 그림을 그릴 때 쓰는 태블릿과 디지털 펜을 발견한 도윤이 넌지시 물었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모니터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대형 태블릿을 쓰는데, 이혜영의 책상 위에 놓인 태블릿은 그냥 센서 기능한 하는 것이었다. 집도 그렇고 그리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도윤의 시선이 자신의 책상 위에 머문 것을 확인한 이혜영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작년부터 웹툰을 그려서 여기저기 응모하고 있는데 아직은 별다른 반응이 없어요. 지금은 그냥 연습한다고 생각하고 계속 그리는 중이에요.”

다리가 불편한 사람보다 용모가 일그러진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기가 더 어려운 게 현실이다. 게다가 젊은 여성이 다른 곳도 아닌 얼굴에 화상을 입었으니 밖에 돌아다니기가 편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혜영이 웹툰을 그리기로 한 건 어떤 의미에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볼 수 있었다.

“저희에게 응모하신 그림말입니다. 죄송하지만 이혜영 씨 본인이 그린 게 맞습니까?”

도윤은 말을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이혜영이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그거 제가 그린 그림 아니에요.”

“그럼 누구 그렸습니까??”

“죽은 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그림이에요. 언니가 그린 그림이 많이 있었는데 남은 건 그거 한 점뿐이에요. 다른 건 모두 불에 타서…….”

석훈이 도윤의 얼굴을 흘낏 쳐다봤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대답이 쉽게 나온 건 일단 다행이었다. 하지만 아, 그렇군요 하고 대뜸 일어서기도 조금 난감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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