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창원에서 이혜영을 만난 도윤과 석훈은 다시 부산으로 갔다. 이혜영에게 받은 번호로 전화를 건 결과, 박지현이 현재 부산에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다. 도윤이 전화로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박지현은 영문도 모른 채 깜짝 놀라며 반가워했다.
“어머, 그럼 혹시 부산에 들를 일 없으세요? 제가 그곳에서 전시회를 하고 있거든요.”
“전시회요? 무슨 전시회입니까?”
“라이징 선스(Rising Suns)라고 부산과 경남 일대에서 활동하는 신진 화가들을 위한 합동 전시회에요. 이 박사님이 방문해주시면 다들 영광으로 생각할 거예요.”
글쎄…? 말은 고맙지만 다른 동료 화가들과 함께 나를 만나는 게 과연 당신에게도 영광이 될까? 도윤은 짐짓 밝은 목소리로 그녀의 초대를 흔쾌히 수락했다. 그러고는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전자 상가에 들러 32인치짜리 대형 태블릿을 하나 구입했다. 보통 유럽 여행지 등에서 미술관을 안내하는 가이드들이 즐겨 사용하는 것이었다.
전시장은 부산의 커다란 백화점 내에 마련된 부속 전시실이었다. 백화점에서도 가끔 문화 행사의 일환으로 여러 가지 공연이나 전시회를 여는 경우가 있었는데, ‘라이징 선스’ 역시 그런 유형으로 기획된 전시회였다. 백화점 자체가 일대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곳 가운데 하나라서 그런지 전시장에는 제법 많은 관람객들이 서성이며 그림을 감상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가격이 그렇게 세지는 않은데요?”
석훈이 전시장을 둘러보다 각각의 그림들 옆에 붙어있는 가격표를 가리켰다. 전시회마다 성격이 다르기는 하지만 어떤 곳에서는 전시된 그림 옆에 화가가 원하는 가격을 붙여 놓는 경우가 있다. 그 가격을 지불하면 현장에서 바로 그림을 구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장소가 백화점이니까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들보다는 우연히 들른 사람들이 더 많을 거야. 그런 사람들이 그림 값을 물을 때마다 일일이 대답해 주느니 차라리 저렇게 해 놓는 게 더 낫겠지. 대신 가격이 너무 높으면 곤란하겠지만.”
전시된 그림들 옆에 붙어 있는 가격은 비싼 게 천오백만 원 수준이었다. 그것도 그나마 호수가 큰 대형그림들에나 해당되는 얘기였고, 작은 것은 수십만 원짜리도 있었다. 전시회 제목 그대로 작품들 대부분이 아직은 유명화가들 것이 아니기 때문인 듯 했다.
전시장을 쭉 둘러보던 도윤은 그 가운데서 박지현이라는 여자가 출품한 그림들을 여러 점 발견했다. 그가 그녀의 그림들을 유심히 살펴보자 석훈이 옆에서 슬쩍 물었다.
“형, 어때요? 이거 모두 박지현이 아니라 이혜은 씨가 그린 그림들이에요?”
도윤이 이마를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박지현 이름으로 된 게 전부 열한 점인데, 그 가운데 네 점만 이혜은 씨가 그린 그림이야. 나머지는 전부 그걸 흉내 내서 그린 모작이고. 옆에서 오래 지켜봐서 그런지 비교적 흉내를 잘 내기는 했어. 하지만 역시 근본적으로 솜씨에서 차이가 나네.”
심지어 박지현 본인도 그걸 아는지 이혜은의 그림만 유난히 가격이 높았다. 전시회 구경을 마친 도윤은 판매를 담당하는 직원에게 다가가 박지현의 그림에 대해 몇 가지를 물었다. 그가 직원에게서 설명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이도윤 박사님! 정말 오셨네요? 그렇잖아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누가 이렇게 반가워하나 싶어 뒤를 돌아봤더니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그를 향해 활짝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물어보나마나 박지현이겠지만 도윤은 짐짓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이도윤이 맞기는 한데, 실례지만 누구신지…….”
“정말 반가워요. 박지현이에요. 저하고 통화하셨죠? 와 달라고 부탁하기는 했지만 정말 저희들 그림을 보러 서울에서 여기까지 오실 줄은 몰랐어요. 너무너무 감사해요.”
당신들이 아니라 당신 그림을 보러 왔지. 도윤은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그녀의 뒤로 몇 사람이 더 서 있었는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번 전시회에 함께 참가한 동료 화가들인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의 뒤를 빤히 쳐다보자 박지현이 얼른 그들을 소개했다.
“여기 이분은 라이징 선스를 기획한 도재만 화백이에요. 지금 동호 대학교에 출강하고 계세요. 그 옆에 있는 미인은 채하영이라고 부산에서는 유명한 여류 화가고요, ……….”
박지현이 한 명씩 소개를 할 때마다 도윤은 그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청하며 인사했다. 석훈 역시 도윤에 의해 재단의 지원 팀장으로 소개되었기 때문에 일행들로부터 굉장히 우호적인 눈빛을 받을 수 있었다.
라이징 선즈에 참가한 화가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다들 나이가 이미 서른이 넘었다. ‘고학 미술 대회’에 작품을 출품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소개된 ‘김영택’이라는 남자 화가는 도윤을 쳐다보는 눈빛 자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나이를 보니 아직 이십대 후반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작품을 냈나 보군.’
아니나 다를까, 김영택은 도윤이 내민 손을 두 손으로 꼭 붙잡으며 허리를 넙죽 숙였다.
“서윤 문화 재단에서 좋은 미술 대회를 열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 같은 젊은 화가들에게는 예전에 없었던 좋은 기회거든요. 주변에 있는 친구들도 기대가 아주 큽니다.”
“좋게 봐 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혹시 김 화백도 그림을 내셨습니까?”
“네. 저도 출품했습니다. 좋은 평가를 부탁드립니다.”
“평가야 제가 아니라 심사위원들이 하는 거죠.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서로 간의 인사가 대충 끝나자 박지현이 먼저 나서서 그를 저녁 회식 자리에 초대했다.
“그렇잖아도 이 박사님이 온다는 얘기를 듣고 저희가 조촐한 자리를 마련했어요. 혹시 시간이 괜찮으시면 함께 가시겠어요? 근처에 물회가 아주 맛있는 집이 있거든요.”
“그거 좋죠. 덕분에 저도 부산에서 맛집 탐방을 하게 됐네요, 하하.”
그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일행은 곧바로 백화점을 나가 근처의 제법 커다란 횟집으로 이동했다. 박지현은 뜻밖에 좋은 기회를 잡았다는 생각이 드는지 얼굴이 계속 싱글벙글이었다. 저기, 당신이 지금 그렇게 웃을 때가 아닐 텐데?
* * *
박지현이 데리고 간 음식점은 물회가 명물인 곳이었지만 다른 메뉴들도 전반적으로 맛이 좋고 양이 풍족했다. 도윤과 석훈은 회식 자리에 어울린 화가들과 소주잔을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자리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때, 박지현이 은근슬쩍 도윤의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 전시회를 보니까 어떠셨어요?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던가요?”
속셈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질문이었지만 도윤은 짐짓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다들 자기 예술관이 확고한 분들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독창적이기도 하고요. 새삼 부산이 예술의 고장이라는 사실이 느껴지더군요.”
“어머, 저는 부산 사람이 아닌데. 창원에서 태어나서 거기서 대학을 나왔어요.”
저런. 그걸 강조하면 오히려 곤란할 텐데? 도윤은 속으로 씩 웃었다.
“아, 그러셨군요. 몰랐습니다. 창원에서 대학을 나오셨다면 혹시 어느 대학이신지…….”
“경서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어요. 진중일 화백이 저희 대학 선배님이세요.”
“그렇습니까? 진중일 화백이라면 저도 좋아하는 분인데. 굉장히 창의적인 그림을 그리시는 분이죠. 그래서 그런가요? 오늘 처음 박 화백님 그림을 봤는데도 어딘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경서대 회화과가 고유한 화풍을 가지고 있나 보군요.”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고요? 다른 곳에서도 저하고 비슷한 그림을 보신 적이 있으세요?”
박지현의 표정이 살짝 어색해졌다. 장르적 흐름의 유사성 정도라면 모를까, 대학 자체가 고유한 화풍을 가지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좌중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화가들이었으므로 도윤이 한 말이 어딘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고개를 갸웃했다. 미술에 문외한이라면 모를까, 명색이 세계적인 감정가라는 사람이 왜 저런 소리를 하지?
그들의 시선이 자신에 집중되는 걸 느낀 도윤이 일부러 무릎을 치며 탄성을 질렀다.
“아, 그러고 보니 같은 대학 출신이라 어쩌면 아실지도 모르겠네요. 이번에 저희 ‘고학 미술 대회’에 창원의 이혜은이라는 분이 작품을 응모했습니다. 거칠고 과감한 선을 반복적으로 사용해서 그린 멋진 풍경화예요. 그림이 워낙 눈에 띄어서 저도 유심히 봤는데, 심사위원들 사이에서도 최종 심사 대상으로 올려 보내자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평이 좋았습니다.”
그의 입에서 이혜은이라는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박지현의 안색이 확 변했다.
“혜은이가 고학 미술 대회에 그림을 출품했다고요? 그럴 리가……. 그건 말도 안 돼요.”
“말이 안 된다고요?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혜은이는 제 대학 동기라서 잘 알아요. 걔는 벌써 이 년 전에 죽었어요. 죽은 사람이 어떻게 미술 대회에 작품을 응모할 수 있었겠어요?”
“네? 이혜은 씨가 죽었다고요? 정말입니까?”
“그럼요. 혜은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제가 운영하는 미술 학원에서 몇 년 동안 강사로 근무하기까지 했어요. 그래서 잘 알죠.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하지만 그 분은 분명히 저희 재단에 ‘창원 앞바다’라는 그림을 출품했습니다.”
“창원 앞바다라고요? 아니 그럼 설마 혜영이 그 계집애가…….”
박지현은 자기도 모르게 욕을 내뱉으려다가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도윤은 그녀가 침묵을 지키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아하, 박 화백님이 이혜은 씨와 대학 동기였군요. 그런데 헤영이라는 분은 또 누굽니까?”
박지현은 엉겁결에 이혜은 자매와의 관계를 실토한 꼴이 되었다는 걸 깨닫고 아차 싶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주변의 시선이 온통 자신에게 쏠리자 그녀의 표정이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차례 변했다. 몹시 난감해하던 그녀는 결국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자신과 이혜은의 관계를 상세히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도윤이 원했던 것은 박지현이 자신과 이혜은 자매와의 관계를 사람들 앞에서 인정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상황은 그의 뜻대로 흘러갔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회식에 동석했던 이들은 도윤이 왜 굳이 그런 얘기들을 유도했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박지현의 내키지 않는 고백, 혹은 설명이 끝나자 그가 보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원 앞바다가 화풍이나 붓 터치, 색깔을 쓰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독창성이 돋보여서 내심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와서 보니까 박지현 화백의 그림도 분위기가 아주 흡사하더라고요. 보통은 화가들끼리 화풍까지 비슷하기는 힘든데 참 특이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두 분이 대학 동창이라는 말을 듣고 비로소 이해가 됐습니다.”
여기저기서 불편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박지현은 얼굴이 빨갛게 변한 채 노골적으로 도윤을 노려보기까지 했다. 자리에 있는 이들이 죄다 화가이다 보니 도윤의 말이 무슨 뜻인지 금세 알아들은 것이다.
비록 나이가 젊기는 하지만 도윤은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감정가였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고 저런 소리를 할 리가 없었다. 한 마디로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그림을 베꼈다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도윤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그가 눈짓을 주자 석훈이 기다렸다는 듯이 들고 있던 가방 속에서 32인치짜리 대형 태블릿을 꺼냈다. 도윤는 그것을 직접 조작해서 여러 장의 사진들을 띄운 뒤 손가락으로 그것들을 하나하나 짚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제야 사람들은 그가 오늘 아주 작정을 하고 이 자리에 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도윤은 이미 얼굴이 돌처럼 굳어버린 박지현의 앞에 그 태블릿을 들이밀었다. 태블릿이 워낙 크기도 했거니와, 일부러 바닥과 평평하게 뉘어놓은 상태라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화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여기 좀 보십시오. 그렇잖아도 저희가 심사에 도움을 얻기 위해 응모자에게 혹시 다른 작품이 더 있으면 사진을 찍어서 보내달라고 부탁했거든요. 그렇게 해서 받은 사진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들고 보니 사진을 보낸 사람이 돌아가신 이혜은 씨가 아니라 동생인 이혜영 씨였던 것 같군요.”
대형 태블릿 화면 가득히 이혜은이 그린 그림들의 사진이 차례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사실은 모두 다 이혜정의 집에서 도윤이 직접 휴대폰으로 찍어온 것들이었다. 그러나 보라는 박지현은 오히려 눈을 꼭 감은 채 몸만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다른 화가들만 태블릿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으흠, 으흠. 쯧쯧쯧.”
여기저기서 헛기침과 함께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화가일 뿐 아니라 전시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박지현의 그림을 수도 없이 봤다. 그 때문에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녀의 그림 가운데 최소한 몇 점은 태블릿 화면 속에 나타난 것들을 그대로 모방해서 그린 모작이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한 도윤은 태블릿을 도로 집어넣으며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오늘 라이징 선스를 보고 느낀 거지만 제가 실장으로 있는 현소 화랑에서도 앞으로는 젊은 신진들의 전시회를 좀 더 자주 열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확실히 중견 화가들의 전시회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개인적 역동성이 느껴지거든요.”
젊은 신진들의 전시회라는 말에 이 자리의 막내에 해당하는 김영택이 관심을 보였다.
“개인적인 역동성이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젊은 화가들의 경우 한 전시회에서도 발전의 흔적이 뚜렷하게 느껴집니다. 특히 여기 계신 박지현 화백은 전시된 그림들의 화풍이 아예 두 가지로 확연하게 나뉘더라고요.”
그가 하려는 말의 의미를 깨달은 몇몇이 다시금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도윤은 멈추지 않았다.
“전시된 작품 가운데 ‘기다림’과 ‘골목 풍경’ 등도 좋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습작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아직 자기 틀을 완성하지 못했다고나 할까요? 반면에 ‘언덕 위 파란 대문’하고 ‘낡은 운동화 회상’, 그리고 ‘노을 진 웃음’은 확실히 한 단계 도약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마치 화가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진화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이미 봄이 온 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식당 안은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것처럼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몸을 바들바들 떨던 박지현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밖으로 뛰쳐나갔다. 회식 자리는 이미 파장이 난 거나 마찬가지였으므로 도윤도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본의 아니게 좋은 자리를 망치게 되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여기 계신 분들의 그림은 정말 좋았습니다. 오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이건 인사치레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입니다. 다음에 다른 장소에서 더 좋은 모습으로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도윤과 석훈은 그 길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틀 후, 김영택이 전화를 했다. 박지현이 ‘라이징 선즈’에 전시했던 그림을 모두 철수시켰다는 얘기였다. 아울러 적어도 부산과 경남 일대에서는 앞으로 어떤 전시회에도 초대받기 어려울 거라는 말도 전했다.
도윤은 박지현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한참 동안 신호가 간 끝에 결국 그녀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도윤은 오래 실랑이를 하지 않았다.
“굳이 친구에 대한 우정을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애초에 그런 게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으니까요. 하지만 고인의 작품은 모두 유족에게 돌려주십시오. 일주일 내에 반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제가 직접 나서서 법적인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사흘 뒤, 이혜영이 전화를 걸었다. 그녀의 언니가 남긴 작품이 모두 돌려받았다는 소식이었다. 그제야 도윤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혜은이 남긴 작품을 고학 미술 대회 최종 심사에 올릴 수는 없다. 그러나 이로써 최소한 죽은 화가의 살아 있는 그림을 사람들에게 선보일 수 있는 토대는 마련된 것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