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콘스티노스는 알렉산드로 수도원장과는 대조적으로 살집이 넉넉하고 호인 같은 인상을 지닌 중년의 수도사였다. 그는 안경을 쓴 채 책상 앞에 앉아 고문서를 들여다보다 인기척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근무하는 문서 보관실은 건물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 공간 자체는 넓은 편이 아니었지만 천정 근처까지 높은 서가들이 빽빽하게 늘어선 곳이었다.
“이 답답하고 곰팡이 냄새 나는 곳을 일부러 보고 싶다는 분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콘스티노스는 사람 좋은 미소를 입에 문 채 도윤과 최서라의 방문을 환영했다. 그는 남자치고는 약간 높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중년임에도 불구하고 동글동글한 양쪽 볼 위에 어린아이처럼 불그레한 기운이 맺혀 있었다.
“일 하시는데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원래 고문서나 미술품들에 관심이 많아서요. 여기까지 온 김에 귀한 기회를 버리기 아까워서 실례를 무릅썼습니다.”
도윤이 정중하게 사과하자 콘스티노스가 천만의 말씀이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일부러 이곳까지 찾아오는 손님은 처음 보는 터라 그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원하시는 대로 마음껏 구경하세요.”
평소라면 도윤도 상대의 말마따나 마음껏 시간을 들여 보관실을 살펴봤을 것이다. 바람 수도원의 문서 보관실은 오래 전에 만들어진 곳답게 양피지 문서부터 손으로 쓴 수고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괜한 소리가 아니라 모두 그가 평소에 큰 관심을 가져온 것들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신혼여행 중이었다. 연구를 하기 위해 이곳을 온 게 아니니 콘스티노스의 호의와는 달리 오랜 시간을 머무를 만한 여유는 없었다.
콘스티노스의 안내를 받아 좁은 골목길을 걷는 것처럼 서가 사이를 돌아다니던 그의 눈이 문득 한 곳에 멈췄다. 손으로는 닿지도 않을 만큼 높은 곳에 위지한 문서 더미에서 붉은 아우라가 언뜻 내비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죄송하지만 저기 있는 문서를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도윤이 밑에서는 내용을 확인할 수도 없는 종이 뭉치를 손으로 가리키자 콘스티누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어깨를 으쓱하고는 사다리를 하나 가져왔다. 그가 육중한 몸을 이끌고 사다리를 올라가려하자 도윤이 얼른 나서서 말렸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직접 올라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어쩌면 제가 알고 있던 문서가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그는 콘스티노스의 허락을 받자마자 곧바로 사다리를 올랐다. 바람 수도원의 문서 보관실은 비록 군데군데 오래 된 먼지가 쌓여 있기는 했지만 가지고 있는 책과 기록들을 잘 분류해서 보관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타폴차(Tapolca) 동굴에서 보낸 시간’이라는 제목의 문서는 일종의 여행기로 분류되어 있었는데 거기서 붉은 아우라가 느껴졌다.
도윤은 왼손을 주머니에 넣어 은 막대를 잡았다. 그런 뒤 다른 손을 문서 위에 올린 뒤 얼른 정신을 집중시켰다. 오래지 않아 문서에서 붉은 빛이 확 피어오르더니 주머니에 든 은 막대로 능력이 옮겨지는 게 느껴졌다. 잠시 후 그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혀를 차더니 도로 사다리를 내려왔다.
“종이의 재질이 미국에서 공부할 때 보았던 고문서와 비슷한 것 같아서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제가 착각한 것 같군요. 사다리를 제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장이라도 뭔가를 들고 내려올 것처럼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던 도윤이 빈손으로 그냥 내려오자 콘스티노스도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그는 별다른 얘기 없이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콘스티노스는 쉬지 않고 방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문서들을 설명하고 이곳을 스쳐 지나갔던 옛 수도사들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도윤과 최서라는 묵묵히 그의 뒤를 쫓으며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공연한 욕심을 부려서 번거롭게 해 드렸습니다. 덕분에 옛 수도원의 고문서들을 겉으로나마 둘러볼 수 있게 되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에게는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도윤이 그 말과 함께 들고 있던 가방 안에서 와인 한 병을 꺼내 콘스티노스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산토리니에서 일부러 사 가지고 온 고급 와인이었다. 순식간에 얼굴에 화색이 돈 콘스티노스에게 슬쩍 웃어 보인 그는 다시 한 번 감사를 표시하고 그곳을 떠났다.
도윤과 최서라가 수도원장실에 들러 알렉산드로에게 작별 인사를 했을 때는 어느 새 해가 중천을 지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 다시 길고 긴 돌계단을 걸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문서 보관실에서 또 다시 능력을 옮기신 거예요?”
주변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 되어서야 최서라가 궁금한 듯 물었다. 그 말에 도윤이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은색 막대를 꺼내서 보여주고는 다시 집어넣었다.
“무사히 옮겼어. 확실히 은이 능력을 옮기는 데는 가장 좋은 것 같아.”
“어떤 능력인지는 짐작이 가지 않고요?”
“응. 그건 능력을 전해 받은 사람만 알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나와 서라는 이 능력의 주인이 아니야. 현재로서는 언제 유물의 주인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유물에 담긴 능력을 언제든지 은 막대에 옮겨서 가지고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은 도윤에게도 크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지금까지는 사실 능력이 담긴 유물을 만나더라도 그것의 주인을 찾는 것을 오로지 요행에 기대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굳이 유물을 사들이거나 주인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언제든 은 막대 하나만 가지고 다니면 발견된 유물의 능력을 그곳으로 옮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능력이 담겨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기가 어려워 그냥 포기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날 저녁을 칼람바카의 호텔에서 보낸 뒤 다음날 곧바로 아테네로 돌아왔다. 마음 같아서는 이왕 간 김에 다른 수도원들도 모두 돌아보고 싶었지만 일정이 빠듯했다. 게다가 끝도 없는 돌계단을 밟으며 수도원까지 올라가는 것도 최서라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원래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 이상 이곳에서 미련을 부릴 필요는 없었다.
그들은 아테네에 도착한 다음날 곧바로 이탈리아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 *
도윤과 석훈은 이탈리아에서 여느 신혼부부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일정을 소화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연연하지 않고, 시내를 걷거나 맛집을 찾아다니고 저녁에는 공연을 보러 다니며 자유를 마음껏 누렸던 것이다. 그들이 로마에서 일부러 찾아간 곳은 기껏해야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 정도가 전부였다.
이틀 만에 로마를 떠난 두 사람은 피렌체를 거쳐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피린체에서도 우피치 미술관을 들르기는 했지만 거기서 두 사람이 머문 시간은 반나절에 불과했다. 그들은 심지어 아카데미아에 전시 중인 다비드 상마저 건너뛰었다. 그보다는 피린체의 옛 건물 사이로 이어진 거리를 걷고 사진을 찍는데 더 열중했다.
그리스에서는 한국 관광객들을 제외하고는 전혀 그런 사람들이 없었는데 이태리에서는 간혹 도윤을 알아보는 현지인들이 있었다. 서양 사람들은 얼굴만 보고 동양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만큼 그가 유럽에서도 매스컴을 많이 탔다는 뜻이었다.
피렌체를 거쳐 베네치아로 이동한 두 사람은 거기서 산마르코 광장을 거닐고 브루노 섬에 들러 유리 공예품을 쇼핑하면서 마음껏 신혼여행을 즐겼다. 그리고 베네치아에서 비행기를 타고 곧바로 프랑스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곳에서 오르세 미술관에서 근무 중인 옛 트루쓰 앤 밸류의 참가자 파비앵 말레를 만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본래 도윤이 짰던 일정에 의하면 이태리에서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를 거친 다음에 프랑스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걸 위해 항공편과 호텔도 모두 예약해 둔 상태였다. 그러나 나중에 최서라가 갑자기 바이칼 호수를 구경하면서 칭기즈칸의 무덤을 찾아보고 싶다고 하는 바람에 부랴부랴 새로운 비행기 표와 호텔을 예약해야 했다.
하지만 도윤은 그러면서도 한국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기존에 했던 예약들을 하나도 취소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의 신혼 일정을 입수한 뒤 주기적으로 예약 사항을 확인하던 몇몇 사람들이 큰 혼란에 빠졌다. 중간에 일정을 바꾼 흔적이 없는데도 사람이 중간에 사라진 것이다.
도윤과 최서라가 파리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에게 보고가 올라왔다. 바르셀로나에 미리 파견나가 있던 요원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이도윤과 최서라 부부가 갑자기 일정을 변경한 것 같습니다. 예약한 비행기가 도착한 지가 한참 지났는데도 두 사람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항공사에 연락해 확인했더니 몇 시간 전에 예약을 취소했답니다. 호텔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압둘은 순간적으로 머리에 열이 확 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일정을 변경해? 그들을 놓쳤다는 말이야?”
“죄송합니다. 저희가 입수한 일정에 의하면 그들은 이탈리아에서 이곳으로 곧장 이동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바르셀로나 일정을 취소한 모양입니다. 그리스에서 베네치아에 이르는 동안 한 번도 예약을 취소한 적이 없어서 저희가 조금 방심했습니다.”
“그럼 그들이 어디로 갔다는 말이야? 신혼부부가 뜬금없이 종적을 감다는 게 말이 돼? 혹시 자네들이 미행한다는 걸 눈치 챈 건 아니야?”
“가능성이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리스와 이태리에서는 미행을 눈치 챈 낌새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건 확실합니다.”
보고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건 확실한 일이 아니었다. 도윤은 사실 이탈리아에서도 누군가 자신을 뒤쫓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심지어 미행 팀이 두 개로 늘어난 것 같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는 미행을 눈치 채지 못한 게 아니라 그런 척 하고 있었을 뿐이다.
“일단은 마드리드와 파리에 있는 요원들에게도 연락을 취해 놨습니다. 이 박사 부부의 다음 목적지가 그곳이었으니까 혹시 중간에 일정을 건너뛴 거라면 거기서 종적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이 예약했던 호텔들의 체크인 상황을 확인 중이니까 곧 위치를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보고자의 말이 압둘에게는 한 없이 태연한 소리로 들렸다. 그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만약 그들이 마드리드나 프랑스에서의 일정도 취소했으면?”
“그럼 영국과 네덜란드, 러시아 순으로 그들의 일정에 따라 차례대로 호텔과 비행기 예약 사항을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현재로서는 그게 제일 빠른 방법입니다.”
제일 빠른 방법이 아니라 너희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인 거겠지. 압둘은 화가 울컥 치밀어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아무리 이브라힘의 명령에 따라 내키지 않는 일을 벌이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임무 자체를 이런 식으로 흐지부지 무산시키는 건 곤란했다.
“내일까지 두 사람이 어디 있는지 확인해서 보고해. 정신들 똑바로 차리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화를 끊은 압둘은 문득 차라리 이대로 두 사람을 놓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왕세제로부터 엄한 문책을 받겠지만 그렇게 되는 편이 나중을 위해서는 더 좋을 수도 있었다. 친구가 되고 싶은 자에게는 먼저 호의를 베풀어라. 오래된 이슬람 속담이 이번 경우에는 딱 들어맞을 거라는 그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비슷한 시간, 독일의 리히터 회장 역시 전화기에 대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멍청한 녀석들. 전 세계에 깔린 게 우리 그룹 지점들인데 고작 여행자 두 명의 행적을 놓친다는 게 말이 돼? 당장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찾아내.”
파리에서의 비행기 표와 호텔은 오르세의 파비앵 말레에게 부탁해 그의 이름으로 예약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중에 호텔에 투숙하거나 비행기를 탈 때만 이름을 바꾸기로 한 것이다. 처음에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했지만 여행을 하는 도중 역시 그렇게 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최서라에게는 무슨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계속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녀는 진즉에 일정이 바뀌었으므로 이게 정상적인 여행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공연히 불안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물론 그의 그런 행동으로 인해 이탈리아까지 비교적 느긋하게 그를 뒤쫓던 사람들만 갑자기 바빠졌다.
* * *
파비앵 말레는 공항까지 직접 차를 몰고 와서 두 사람을 마중했다. 도윤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면서 극구 사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막무가내였다.
“청첩장을 받고도 결혼식에 참석하지도 못했잖아. 이렇게라도 해야지 내가 마음이 편할 것 같아. 마음 같아서는 휴가라도 내고 싶지만 요즘 미술관 일이 바빠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게 오히려 미안하다.”
전에도 느꼈지만 파비앵은 성격이 명랑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호텔과 비행기를 예약해 달라는 도윤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준 것도 모자라 두 사람이 파리에 머무는 동안 가이드를 자처하고 나섰다.
“우리 둘 다 파리에는 전에도 몇 번 온 적이 있어. 다니는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익숙한 도시니까 너까지 일부러 수고할 필요는 없어.”
도윤은 그의 마음을 고맙게 받아들이면서도 시내 관광을 안내받는 건 사양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이왕 신혼여행을 왔으니 가급적 두 사람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대신 현직 오르세 미술관 큐레이터이기도 한 그에게 미술관 안내를 받는 것까지는 사양하지 않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두 사람은 이번 여행에서 원래 루브르나 오르세 미술관에 들를 계획이 전혀 없었다. 더구나 그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에펠탑 삼층에 있는 레스토랑에서의 저녁 식사에 파비앵을 초대하기까지 했다.
“아참. 파리 소더비에서 네덜란드 특별 경매가 열린다는 얘기 들었어?”
에펠탑에서 파리의 야경을 구경하며 와인을 음미하던 파비앵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도윤과 최서라는 서로를 쳐다보다 어깨를 으쓱했다.
“요즘 내가 한국에서 몹시 바빴거든. 그래서 외국의 경매에는 한 동안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어. 그런데 네덜란드 특별전이라니? 시대 구분 없이 작품이 나오는 거야?”
도윤의 질문에 파비앵이 입에 머금고 있던 와인을 꿀꺽 삼켰다.
“응. 루벤스와 렘브란트, 베르메르와 얀 판 에이크는 물론이고 몬드리안의 그림까지 두루 나오는가 봐. 소더비 회장이 작심하고 소장자들을 설득한 것 같아.”
원래 영국에서 설립되었던 소더비는 2019년에 프랑스의 재벌인 파트리크 드라히에게 37억 달러에 매각됐다. 영국의 전통 있는 경매 회사의 주인이 프랑스 인으로 바뀐 거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뉴욕과 런던의 소더비 지점이 전 세계 소더비 경매장 가운데에서 가장 큰 곳이었다.
“드라히 회장이 파리 소더비를 크게 키우려고 작심한 것 같아. 나도 프리뷰 전시회에 가 봤는데, 그동안 개인 소장가들이 자기 금고 속에 꼭꼭 감추어두었던 작품들이 꽤 많이 쏟아져 나왔더라고. 한 번 구경하러 가 볼래? 프리뷰가 내일까지거든.”
도윤은 원래 단번에 고개를 저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면서 자신을 쳐다보는 파비앵의 눈빛이 어딘지 심상치 않았다. 그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차분하게 물었다.
“이번 경매에 나온 작품들 가운데 소더비에서 관심을 두는 게 있는 거야?”
그러자 파비앵이 허를 찔렸다는 듯이 움찔하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루브르처럼 우리도 소더비를 후원하는 모임이라는 단체를 가지고 있거든. 그런데 거기서 이번에 경매에 나올 작품들 가운데 고흐의 그림을 하나 구입해서 미술관에 기증할 생각이라는 계획이라고 알려왔어.”
“그건 고마운 일이네. 그런데 거기에 뭔가 문제가 있는 거야?”
파비앵은 선뜻 말을 하지 않고 우물쭈물했다. 그러나 도윤의 재촉을 받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게 아무래도 위작인 것 같아. 미술관에도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우리 실장이 내 말을 듣지 않더라고. 그 사람은 그 작품이 틀림없이 고흐의 진품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내가 직접 프리뷰에 가서 그 그림이 진작인지의 여부를 확인해 달라는 거야?”
“이 박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고흐의 권위자잖아. 일본에서 골동품 상점에 처박혀 있던 해바라기를 발견해서 경매에 붙인 장본인이기도 하고. 그냥 잠깐 구경한다 생각하고 한 번만 직접 보고 확인해 주면 안 될까? 대신 오늘 음식 값은 내가 낼게.”
이 친구 보게? 도윤은 기가 막혀서 실소를 내뱉었다. 예약을 변경하는 문제를 놓고 흔쾌히 도와준 건 고맙지만 이런 식으로 들이밀면 좀 곤란한데?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