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헉, 헉.”
아심은 심장에 칼을 꽂은 채 널브러진 볼프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볼프 말고도 주변에는 십여 구의 시신이 아무렇게나 나자빠져 있었다. 전투는 끝났고 생존자는 아심 한 사람뿐이었다. 근데 내가 과연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을까? 바닥에 대자로 들어 누운 그는 무심결에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고작해야 십여 분에 불과한 짧은 전투였다. 하지만 총도 없이 원시시대의 야만 전사들처럼 칼과 도끼를 휘둘러야 했던 처절한 싸움은 차마 승리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비참한 결과만을 남긴 채 끝나고 말았다. 피와 땀으로 온통 범벅이 된 아심의 몸은 마치 탈수기에 넣고 쥐어짠 것처럼 기운이 완전히 바닥난 상태였다.
거친 고함소리와 찢어질 듯한 비명으로 가득 찼던 산속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적이 찾아왔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산 뒤로 넘어가버린 시베리아의 태양이 남긴 것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그는 땅바닥에 등을 댄 채 누워 밤하늘을 쳐다보다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크, 크크큭. 으하하하하하.”
미친놈이 된 것 같았다. 아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진짜로 미쳐서 날뛰었었다. 다만 그때 나간 정신이 아직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을 뿐이다. 군대에 있을 때도 다른 동료들과 훈련을 겸한 칼싸움을 벌인 적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실전에서 총도 없이 이토록 미친듯이 상대를 죽이려고 발버둥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광기가 남긴 것은 또 다른 광기였다.
날이 어두워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모습을 드러어 반짝이는 별들 때문에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밤공기를 헤치며 굴러가는 듯한 개울물 소리가 들렸다. 몸을 씻어야 할 텐데. 피도 닦아내야 하고. 하지만 당장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었다. 옆구리에 벌어진 상처 사이로 피가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이러다가는 진짜로 죽겠지?
이를 악물고 간신히 몸을 일으키자 희미한 달빛 아래로 여기저기 널려 있는 시체들이 검은 실루엣처럼 눈에 들어왔다. 다 죽었다. 이보다 완벽한 양패구상이 또 있을까?
아심은 마지막에 상대의 가슴에 칼을 박아 넣음으로써 간신히 살아남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볼프 역시 죽기 직전에 그의 옆구리를 길게 찢어놓았다. 싸움을 마치자마자 상의를 벗어 대충 묶어 놓기는 했지만 완전히 지혈이 되지 못해 지금도 조금씩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있으면 결국 자신도 출혈과 탈진으로 인해 부하들의 뒤를 따라가고 말 것이다.
“독한 놈들.”
우리 편 네 편 할 것 없이 하나같이 치가 떨릴 정도로 독한 놈들이었다. 그 독한 놈들은 서로의 몸에 칼을 찌르고 도끼를 박아 넣는 그 순간까지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웃기는 것은 그토록 치열한 싸움에 아무런 명분이나 정의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누군가에 의해 키워진 존재들이었고, 결국 그 누군가를 위해 싸우다 죽었다.
“하지만 이미 싸움이 끝났으니 지금은 죽을 때가 아니야.”
아심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이곳까지 타고 왔던 차가 있는 곳으로 갔다. 차 트렁크에서 구급상자를 껴낸 그는 거의 기어가다시피 하면서 물소리가 들리는 곳까지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맨몸을 드러낸 바위와 자갈에 여기저기 부딪치며 흐르는 물줄기가 달빛에 희뿌옇게 부서지는 게 보였다. 아심은 상처를 묶었던 옷을 풀어낸 뒤 개울에 몸을 담갔다. 상처 주위에 엉겨 붙었던 핏덩어리들이 짜릿한 통증과 함께 흐르는 물에 떨어져 나갔다. 그러자 금세 다시 핏물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고 흐르는 물에 상처를 씻어낸 그는 진땀을 흘리면서 소독을 하고 지혈제를 발랐다. 그런 다음 봉합용 바늘과 실로 벌어진 자리를 꿰맸다. 항생제 성분이 든 연고를 상처 위에 덕지덕지 바르고 붕대를 감자 간신히 응급조치가 끝났다.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온 그는 차에 시동을 걸고 헤드라이트를 켰다. 아무리 밤이 늦었다지만 가능한 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더 중요했다. 심지어 지금은 이도윤이라는 미술사 박사를 만나는 것조차 두려웠다. 이 몸으로는 누굴 납치하기는커녕 잘못하면 평범한 민간인 하나 상대하는 게 불가능했다.
지혈제를 바르고 상처를 봉합했지만 차가 비탈길을 덜컹거리며 움직이자 기껏 감은 붕대가 금세 빨갛게 젖어들었다. 상처가 워낙 크다 보니까 지혈이 제대로 안 됐다는 뜻이다. 이도윤이고 뭐고 이대로 여기서 머뭇거리다가는 결국 출혈로 죽을 것이다. 그는 헤드라이트를 켠 채 미친 듯이 밤길을 달렸다.
“결국 살아서는 누군가의 개 노릇을 하다가 죽은 뒤에는 짐승 밥이 되는 신세로군.”
죽은 부하들을 땅에 묻어주는 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일단 가까운 마을을 향해 차를 몰았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이십여 호 정도의 인가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을 봤던 것이다. 일단 어떻게 하든 거기까지만 가면 조금이라도 살 방도가 나올 것이다. 그는 가물거리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으며 엑셀을 세게 밟았다.
* * *
벌써 6월이라고는 하지만 분지를 흐르는 냇물의 온도는 여전히 차가웠다. 모르기는 해도손끝으로 전해지는 차가움으로 볼 때 수온이 20도를 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 물속에 속옷만 입은 채 들어가려는 도윤을 쳐다보는 최서라의 눈빛에 걱정이 가득 했다.
“도윤 씨. 정말 꼭 들어가야 하겠어요? 잘못하면 저체온증이나 심장마비에 걸릴지도 몰라요. 이번에는 그냥 돌아가고 다음에 제대로 준비해서 다시 오는 게 어때요?”
하지만 그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도윤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잠수를 포기하는 대신에 한쪽에 지펴놓은 모닥불을 가리키며 부탁했다.
“미안하지만 여기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어. 서라는 내가 나올 때까지 저 모닥불이 꺼지지 않도록 불을 잘 살려놔 줘. 물에서 나오면 바로 몸을 녹여야 할 거야. 나도 위험할 정도까지 오래 있지는 않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 말과 함께 숨을 가득 들이마신 그가 물속으로 몸을 담갔다. 끊임없이 물이 흘러들어왔다가 다시 흘러나가기 때문에 연못이 아니라 웅덩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가 들어가려는 곳은 넓은 곳의 폭이 족히 수십 미터는 족히 될 정도로 넓은 웅덩이였다. 더구나 깊이마저 깊어서 절대로 평지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질 수 있는 형태는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라니. 깊어도 너무 깊어.’
그는 물속에 들어가자마자 천천히 손과 발을 놀리며 바닥을 향해 잠수했다. 위에서 볼 때는 수심이 대략 10미터 정도 될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막상 잠수를 해서 내려가자 그보다 더 깊은 것 같았다. 도윤은 호흡과 체온에 신경을 쓰면서 예리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곳곳에 바위가 갈라진 틈이 아귀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게 보였다.
웅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깊고 크다보니 한 번에 주변을 모두 살피는 건 불가능했다. 도윤은 사람의 몸이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큰 틈이 보일 때마다 되도록 가까이 가서 그 안을 들여다보려고 애썼다. 그러다 마침내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할 지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물 위를 향해 발을 놀렸다.
“푸핫.”
물속으로 들어간 지 2분이 훨씬 넘었는데도 그가 나오지 않자 최서라는 물가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러다 도윤이 물 밖으로 몸을 내밀자마자 얼른 큰 수건과 패딩을 들고 그를 향해 뛰어갔다. 도윤은 그녀가 건네준 수건으로 재빨리 몸의 물기를 닦은 뒤 그 위에 패딩을 걸쳤다. 모닥불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다가가는 그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옷을 입고 불을 쬐자 비로소 몸이 노곤해지면서 가쁘던 숨이 잦아들었다. 최서라가 그에게 큰 컵 가득 따른 뜨거운 차를 건넸다. 그녀는 웅덩이 바닥이 어땠느냐는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도윤이 차가운 물 밑으로 다시 내려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바닥이 생각보다 깊어. 여기저기 자잘하게 갈라진 틈도 많고. 다음에 잠수할 때는 아무래도 회중전등을 가지고 가야할 것 같아. 그래야 틈이 얼마나 깊은지 확인할 수 있거든.”
그의 말에 최서라가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또 내려가겠다고요? 자꾸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한데 그냥 포기하면 안 돼요?”
“아직은 견딜 만 해. 이렇게 잠깐 들어갔다 나와서 몸을 덥히는 식으로 반복하면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이보다 더 차가운 물속에도 들어간 적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괜찮다는 말만 믿고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었으면 애초에 그를 말리지도 않았을 거다. 최서라가 자신을 원망스럽게 쳐다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윤은 배낭 속에서 막대형 회중전등을 꺼냈다. 방수 기능이 있는 물건이었다. 그는 최서라가 준 차를 마시며 한동안 몸을 녹이더니 결국 또 다시 전등까지 들고 웅덩이 속으로 들어갔다.
두 시간에 걸쳐 서너 번을 잠수했다 올라오는 일을 반복하자 어지간한 도윤도 슬슬 체력에 무리가 가는 것을 느꼈다. 비록 한 번에 1~2 분에 정도 잠수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사실 그것은 숨을 쉬지 않은 채 같은 시간 동안 달리기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지간히 폐활량이 크고 훈련이 잘 된 사람이 아니라면 함부로 시도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도윤은 웅덩이의 바닥 가운데 유물의 존재가 느껴지는 곳과 가까운 부분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그러던 중 다섯 번째 잠수했을 때 드디어 사람 몸 하나가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는 크랙, 즉 바위와 바위 사이에 벌어진 틈을 발견했다. 그 안으로 회중전등을 비쳐봤지만 끝이 보이지 않았다. 틈이 상당히 깊다는 뜻이었다.
“푸하.”
틈의 크기와 위치만 확인하고 다시 물 위로 올라온 그는 그날의 잠수를 마무리 지었다. 추위와 체력의 방전 때문에 더 이상 무리를 하면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지만 그는 다음날까지 편히 쉬면서 체력을 보충하기로 했다.
다음날 오전에는 최서라와 함께 분지 주변을 살피면서 시간을 보냈다. 간간히 작은 톱으로 굵은 나뭇가지들을 잘라 모닥불을 피우는데 쓸 땔감도 잔뜩 만들어두었다. 뜻밖에도 분지에서 키 작은 진달래나무를 발견한 건 행운이었다. 진달래나무는 비록 굵기가 가늘고 길이도 짧지만 연기가 나지 않으면서도 화력이 막강한 좋은 땔감이었다.
점심을 먹고 난 뒤 오후 한 시 정도가 되자 그는 다시 물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최서라도 더 이상 그를 말리는 것을 포기하고 큰 수건과 패딩을 준비한 채로 모닥불의 불꽃을 키우는 데만 열중했다. 그런 그녀를 힐끗 쳐다본 도윤이 미안함이 가득한 웃음을 매단 채 다시금 물속으로 몸을 담갔다.
그는 물에 들어가자마자 어제 보아둔 웅덩이 바닥의 틈을 향해 직선으로 헤엄을 쳤다. 회중전등을 켠 채 그곳을 빠져나간 그가 이십여 미터를 전진했을 때 바위로 이루어진 벽이 나타났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는 없게 된 그는 방향을 위로 바꿨다. 틈이 위를 향해 거의 직각으로 뻗어 있었던 것이다.
30초 정도만 위로 움직이다가 별로 달라지는 게 없으면 더 이상 무모한 모험을 시도하지 않고 곧바로 돌아 나올 작정이었다. 그런데 회중전등에서 뻗어나간 빛이 위에서 아른거리면서 흔들리는 게 보였다. 위쪽에 물과 공기가 만나는 표면이 있다는 뜻이다. 그는 이을 악물고 돌고래처럼 몸을 위아래로 흔들면서 속도를 높였다.
“푸하!”
물 밖으로 얼굴을 내미는 순간, 도윤은 직감적으로 자신이 드디어 칭기즈칸의 묘실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바닥으로 부서져 떨어진 돌조각과 목재들 사이로 어두침침한 통로가 이어진 게 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무려 8백년을 잠들어 있던 칭기즈칸의 묘실로 이어지는 통로, 위대한 전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 * *
도윤이 다시 웅덩이 위로 고개를 내밀자 최서라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구르듯이 달려왔다. 그녀는 도윤에게 수건과 패딩을 건네주더니 그가 옷을 걸치자마자 두 팔로 꼭 껴안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가 무려 2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자 물에 빠져 그대로 죽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에 머리가 하얗게 비어버렸던 것이다.
“너무 무서웠어요. 정말로 너무 무서웠단 말이에요.”
최서라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기어코 흐느끼기 시작했다. 미안해진 도윤은 두 팔로 그녀를 꼭 안은 채로 모닥불 쪽으로 움직였다. 등 뒤로 따뜻한 불기운 느껴지자 최서라도 간신히 울음을 삼키고는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러고는 곧바로 큰 컵에 한 가득 차를 따라주었다. 입으로 호호 불어가며 차를 한 모금 마신 도윤이 눈물 자욱이 가득한 최서라의 얼굴 앞에 무언가를 쓱 들이밀었다.
“이게 뭐예요? 금팔찌 같은데요? 밑에서 꺼내온 거예요?”
도윤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게 바로 능력을 담은 유물이야. 팔찌에 새겨진 문양의 종류로 볼 때 아마 유럽 쪽에서 건너온 물건이 아닌가 싶어. 내 생각에는 로마 시대의 물건인 것 같아.”
그제야 팔찌를 세심히 뜯어본 최서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중세 이전의 물건 같기는 하네요. 그런데 이게 어떻게 칭기즈칸의 무덤 속에 있는 거죠? 더구나 능력을 담고 있는 물건이면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게 아닐까요?”
“십중팔구 그럴 가능성이 높아. 일단 여기에 담긴 잔류 기억을 통해 최대한 어떤 물건인지 알아봐야지. 잠재된 능력도 은막대로 옮겨야 하고.”
그래야 간단한 신고만으로 별 어려움 없이 공항의 검색대를 통과할 수 있다. 골동품이 분명한 황금 팔찌를 가지고 나가는 것보다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은 막대를 통과시키는 게 훨씬 간단하고 편했다.
“근데 이걸 어디서 발견한 거예요? 칭기즈칸의 관이 안치된 묘실까지 들어갔었어요?”
조금 마음이 진정되자 최서라도 비로소 밑에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묘실에 관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도윤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중간에 지진 때문에 반쯤 무너진 곳이 많아서 관이 안치된 묘실까지는 들어가지 못했어. 대충 통로를 치워놓고 오기는 했으니까 다음에 들어갈 때 더 안쪽까지 들어가 봐야지. 이건 부속실에 놓여 있던 장신구들 가운데 하나야. 능력을 담고 있는 유물이기도 하고.”
“능력을 담은 유물이 이것 하나뿐이에요?”
“아냐. 밑에 내려가 보니까 조금 더 선명하게 느껴지더라고. 이것 말고도 두 개가 더 있어. 하지만 거기까지 가려면 통로를 좀 치워야 할 것 같아. 시간이 걸릴 거야.”
“묘실 말고도 부속실이 상당히 많은 모양이죠?”
“아직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규모를 짐작하기는 어려워. 하지만 생각보다 크지는 않은 것 같아. 규모만 따지면 오히려 측천무후가 묻혀 있던 건릉보다도 작을 것 같아. 하지만 부속실에 있는 장신구에 몽골 문자가 음각된 것들도 있는 걸로 봐서는 칭기즈칸의 무덤은 분명한 것 같아.”
중국인들은 한자 문화가 주변국들을 완전히 복종시켰다고 주장하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주변국에서는 일찍부터 각자의 문자를 개발해서 사용했다. 우리나라가 이두와 한글을 만들어 쓰고 일본이 가나를 사용했던 것처럼 만주족과 몽골족 역시 각각 만주 문자와 몽골 문자를 사용했다.
몽골 문자는 칭기즈칸이 위구르를 정복한 뒤 기존의 위구르 문자를 개량해서 만든 것이다. 지금도 내몽고에서는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몽골 문자는 원래 세로쓰기를 하는 방식이었다. 도윤은 이곳에 오기 일 년 전부터 틈틈이 몽골 문자를 공부했다. 칭기즈칸의 무덤이라면 한자가 아닌 몽골 문자 기록된 비석이나 책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다시 물속으로 들어갈 거예요?”
최서라의 물음에 도윤이 미안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지금 당장 묘실을 완전히 탐사하는 건 불가능해. 거기는 밀폐된 공간이기 때문에 공기도 충분치 않고. 하지만 적어도 능력을 담고 있는 유물들은 이곳에 온 김에 모두 가지고 나오고 싶어. 물건을 꺼내기가 어려우면 은 막대에 능력만 담아서 가지고 나오기라도 해야지. 그래야 여기까지 고생하면서 온 보람이 있을 것 아니야.”
그는 남들 모르게 칭기즈칸의 무덤을 독차지해서 보물을 빼돌릴 생각이 없었다. 이곳에 묻힌 유물은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증명하는 귀중한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적당한 때에 무덤의 위치를 알려서 공개적으로 발굴할 수 있도록 할 작정이었다.
다만 이곳까지 온 김에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몇 가지를 챙기고 싶은 것도 솔직한 심정이었다. 시간이 많지 않고 묘실에 갇힌 공기의 양도 충분치 않으니 탐사 시간 자체도 한정되어 있었다. 일정 때문에 분지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