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처음 칭기즈칸의 지하 무덤에 발을 내디뎠을 때, 도윤은 이곳이 과거 발생했던 대규모의 지진에 의해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각각의 방으로 이어지는 통로의 여기저기가 온통 뒤틀린 채 변형되어 있었던 것이다. 벽에 붙여 놓았던 돌과 나무들도 위험할 정도로 갈라지고 깨진 채 어지럽게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몽골 사람들이 예전에 풍수지리를 중시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어쨌든 무덤 터의 운명을 미리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했다. 명색이 제국을 세운 황제의 무덤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중간 중간 천정이 무너져 내리면서 통로가 아예 막혀버린 곳도 존재했다. 그 때문에 전체적인 구조를 살펴보기가 어려웠지만 그래도 대강의 형태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했다.
칭기즈칸의 무덤은 중앙의 묘실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부속실이 방사형으로 뻗어나간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 부속실 전체를 다시 원형의 외부 통로가 뺑 둘러 에워싸고 있었는데, 도윤이 웅덩이의 틈을 통해 빠져나온 곳이 바로 그 원형 통로의 한 부분이었다.
“여기를 다 둘러보려면 먼저 내부를 정리하는 공사가 필요하겠는데?”
당장 도윤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은 몇 개의 부속실이 전부였다. 가장 아쉬운 것은 통로가 막히는 바람에 무덤의 중앙에 위치한 묘실에는 접근조차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그곳에 칭기즈칸의 관이 안치되어 있을 거라는 점을 생각할 때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통로에 들어서는 순간 선명하게 느꼈던 세 개의 유물 가운데 하나의 위치가 바로 그 묘실 안에 있었다. 능력을 담은 유물들이었다.
그나마 통로와 연결된 첫 번째 부속실에서 능력이 담긴 황금 팔찌를 찾아낸 것은 다행이었다. 처음부터 그 팔찌의 위치를 감지했기 때문에 굳이 웅덩이를 통해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찾은 것이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팔찌가 놓여 있는 곳에는 그것 말고도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여러 가지 장신구와 장식물들이 잔뜩 들어차 있었다. 전체적인 형태과 문양의 특징으로 볼 때 아무래도 유럽에서 건너온 게 분명해 보였다. 유물의 시대는 대략 로마 시대부터 중세 시대에 걸쳐 있었다.
“이건 서라한테 주어서 언제 어디에서 만들어진 건지 정확한 연대와 장소를 연구해보게 하는 게 좋겠다. 안에 능력이 담겨 있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팔찌 자체만으로도 뛰어난 예술품이야. 서라한테는 좋은 선물이 되겠어.”
마음 같아서는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천천히 유물들을 살펴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러기에는 여유가 너무 부족했다. 그는 통로를 통해 접근 가능한 다른 부속실들이 몇 개 더 있다는 것만 확인하고 일단 밖으로 빠져나가기로 했다. 그가 오래도록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최서라가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걱정하고 있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늦게 나왔으면 진짜 기절했을지도 몰라요.”
도윤의 설명을 들은 최서라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표정으로 볼 때 기절까지는 하지 않았더라도 직접 도윤을 찾아보겠다며 물속으로 뛰어들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보였다. 도윤은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그녀에게 백배사죄해야 했다.
잠시 휴식을 취하던 도윤은 몸을 추스른 뒤 또 다시 웅덩이를 통과해 무너진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능력이 담긴 유물 가운데 가지고 나올 수 있는 게 하나 더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다른 부속실에 있는 유물들의 종류도 최대한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 * *
무덤 안에 밀폐된 상태로 남아 있던 공기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도윤은 되도록 빠른 속도로 무덤의 전체 구조를 파악하는 데 주의를 집중시켰다. 그렇게 몇 개의 부속실을 빠르게 살펴나가던 그는 문득 이 무덤의 구조가 몽골군의 군사 조직과 연관된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밍칸은 천 명으로 이루어진 몽골군 부대를 말하고 투멘은 만 명으로 이루어진 부대야. 케시크는 칸의 호위 부대고 바토르는 돌격대지? 이건 완전히 정복 전쟁을 위한 군사 조직을 모방한 무덤이잖아? 정복자답게 죽어서도 전쟁을 잊지 않겠다는 건가?”
무덤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칭기즈칸의 호전적인 기백이 수백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생생히 전해지는 듯했다. 도윤은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그러고 보니 부속실을 채우고 있는 부장품들 역시 저마다 지역적 특색을 반영하며 분류되어 있었다.
가령 중동 쪽으로 진격한 부대를 나타내는 방에는 과거 페르시아나 이슬람의 유물들이 방을 채우고 있었다. 중국 쪽으로 진격했던 부대를 상징하는 부속실에는 또 도윤이 익히 알고 있는 여러 가지 중국 문화재들이 즐비했다. 그것들을 하나씩 살피던 도윤은 이곳이야말로 세계 인류 문화유산의 보고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 지역의 문자로 쓰인 문서와 비석, 석판과 동판들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네? 그 기록들을 모두 해석할 경우 자칫하면 중세 이전의 고대사가 새롭게 조명될지도 모르겠는데?”
도윤 역시 미술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학자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곳이 간직하고 있는 문서 자료들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이 기록들이 모두 밖으로 나갈 경우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게 분명했다. 아쉽게도 습기와 세월 때문에 심하게 훼손된 문서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와는 달리 돌로 만든 비석에 새긴 것들은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다.
능력이 담긴 두 번째 유물은 도자기였다. 형태나 문양, 색깔 등을 놓고 볼 때 아무래도 송대에 만들어진 중국 도자기 분명했다. 다만 그의 눈에는 도자기 전체가 붉은 아우라에 휩싸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굳이 붉은 아우라가 아니더라도 도자기 자체가 희대의 명품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건 아무래도 그냥 들고 나가기는 어렵겠다.”
도자기를 들고 살피던 도윤은 한편으로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도 입맛을 다셨다.
여기서 밖으로 나가는 출구는 온통 돌과 바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도자기를 들고 수영을 해서 나가기는 위험하다는 뜻이다. 그는 할 수 없이 가지고 들어온 은 막대를 이용해서 도자기가 가진 능력을 옮겨 담았다. 이로써 언제든지 주인을 만나면 전해줄 수 있는 능력이 세 개나 모였다. 세 개 모두 이번 신혼여행 때 얻은 것들이었다.
출입이 가능한 부속실을 바쁘게 돌아보던 도윤의 발걸음이 어느 한 곳에서 딱 멈춰 섰다. 방을 채우고 있는 유물들의 특징으로 볼 때 하나같이 이슬람 문명이 한창 성행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것들이 분명했다. 그 방에서 발견한 물건 하나가 유독 도윤의 관심을 끌었다.
“이게 내가 아는 그 물건이 맞는다면, 이건 분명히…….”
순간 그의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가능성이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방에서 제법 긴 시간을 보낸 도윤은 일단 물건을 조심스럽게 제자리에 놓아둔 채 방을 빠져나갔다.
“꼭 그럴 필요가 없기를 바라야 하겠지. 하지만 혹시라도 리히터 회장과 이브라힘 왕세제가 끝까지 욕심을 버리지 않는다면 나도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어.”
솔직하게 말하자면 가능하면 조금 전에 봤던 물건을 실제로 사용할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러나 최악의 경우 도윤도 저 물건이 좋은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건 확실했다.
* * *
도윤은 두 번째 잠수에서 무려 40분 이상이 지나서야 웅덩이 밖으로 나왔다. 처음에 비해서는 훨씬 차분해진 모습이기는 했지만, 최서라는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그녀에게 씩 웃어 보인 도윤은 모닥불로 다가가 몸을 녹이다가 허리에 묶어두었던 보자기를 펼쳤다. 그러자 안에서 여러 가지 금속 공예품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각 부속실마다 대표적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드는 물건들을 한두 개씩 집어왔어. 이걸로 고대의 장신구 양식을 공부하면 앞으로 금속 공예품을 만드는데 참고 자료가 될 거야.”
그의 말에 최서라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보자기를 받아들었다.
“참고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이 자체로 모두 훌륭한 공예품들이에요. 이건 모조리 세관에 신고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한국으로 가져가야겠어요.”
“글쎄? 이르쿠츠크는 작은 도시라서 이곳의 세관원들은 작품의 가치에 대해 잘 모를 가능성이 커. 만약 이것들을 제대로 가격을 평가해서 신고하면 세금이 엄청나올 거야. 어쩌면 아예 통관 자체가 허가되지 않을지도 모르고.”
솔직히 그럴 리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벌써 6월이었다. 6월부터 9월까지는 사나흘에 한 번씩 한국 국적기가 인천공항과 이르쿠츠크를 연결하는 직항 노선을 연다. 한시적인 운항이기는 하지만 도윤과 최서라의 입장에서는 딱 시의적절한 노선 연결이 아닐 수 없었다.
분지에서 하루를 더 보낸 도윤과 최서라는 다음날 아침 일찍 짐을 꾸려 자동차를 숨겨놓았던 곳을 향해 출발했다. 도윤은 분지를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웅덩이를 통해 무덤을 다녀왔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몇 가지 조치를 취해놓기 위해서였다.
사실 한 번씩 무덤 안에 들어갈 때마다 그가 머물 수 있는 시간이 빠르게 줄어든다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내부의 공기가 계속 탁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덤 자체는 상당히 큰 편이었지만 그래도 완전히 밀폐된 곳이다 보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따라서 차후의 정식 탐사를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는 숨 쉴 수 있는 공기를 남겨둘 필요가 있었다.
“다음에는 정식으로 발굴 작업을 하게 될 테니까 굳이 웅덩이를 통해서 갈 필요 없이 그냥 땅을 파헤치면 되지 않나요? 그럼 자연스럽게 묘실이 드러날 거 아니에요?”
최서라의 말에 도윤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하면 큰일 나. 지금은 무덤이 밀폐되어 있기 때문에 웅덩이를 통해서 들어온 물이 공기에 막혀서 내부를 침범하지 못하고 있는 거야. 그런데 만약 위에서 부터 땅을 파서 무덤 천장을 드러내 버리면 공기가 빠져나가면서 내부가 순식간에 물에 잠기게 돼. 그럼 다른 건 몰라도 문서 기록들은 확실히 망가지겠지. 그건 발굴이 아니라 재난이야, 하하.”
최소한 웅덩이의 물이 무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조치를 위한 다음에 그것을 발굴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인류 문화의 자산은 발굴과 동시에 망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도윤은 남들 모르게 비밀리에 한 번 더 이곳을 방문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최서라에게도 당장은 말하기 곤란한 일이었다.
* * *
차를 숨겨놓은 곳에 도착한 두 사람은 주변에 펼쳐진 지옥도를 보고 안색이 변하고 말았다.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의 시체가 차를 둘러싸고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던 것이다. 시체가 부패하면서 악취가 사방에 진동했다. 도윤으로서도 적지 않게 충격적인 장면이었지만 최서라는 아예 안색이 하얗게 변한 채 며칠 전에 먹은 것까지 몽땅 토해내고 말았다.
“이건 정말 너무 심하네. 이 자식들이 이젠 물불을 안 가리는구나.”
도윤은 시체들을 보는 순간 그들이 자신의 뒤를 쫓아온 놈들이었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인적조차 없던 곳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면 그 이유가 다른 것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싸움을 벌인 장소가 하필이면 자신이 차를 숨겨둔 곳이었다.
“보나마나 이브라힘 왕세제와 리히터 회장의 부하들일 거야. 총상의 흔적이 있는 시체가 두 구인 것으로 보아 누군가는 총을 쏜 게 분명해. 하지만 나머지는 모두 칼이나 둔기에 의해 죽은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무기가 뒤죽박죽이지?”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느낀 도윤은 곧바로 차에 시동을 걸어 그 장소를 떠났다. 인간의 도리를 생각할 때 시체를 수습해주는 게 마땅하겠지만 돌아가는 상황으로 볼 때 그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더구나 시체의 수가 너무 많은데다 최서라의 상태가 심각해서 이곳에서 더 이상 시간을 끌기도 어려웠다.
도윤은 일단 그 자리에서 한참을 벗어난 뒤에 뒷좌석에서 휘발유 통을 꺼내 SUV에 기름을 넉넉하게 채웠다. 며칠 동안 차를 세워두기만 했는데도 배터리 상태 역시 비교적 양호했다. 하지만 그들이 바이칼 호 쪽을 향해 반나절 가량 이동했을 때 또 다시 문제가 생겼다. 지프 한 대가 덮개를 벗긴 채로 그들의 뒤를 맹렬히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지? 나를 쫓던 놈들 중에 아직도 남은 놈들이 있었어?”
그의 짐작대로 SUV를 뒤쫓는 지프를 운전하는 사람은 이브라힘 왕세제의 부하인 아심이었다. 사실 그는 지금처럼 거칠게 차를 몰아서는 안 되는 몸이었다. 옆구리에 중상을 입은 그는 간신히 조그만 마을을 찾은 덕분에 거기서 치료를 받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는 일단 거기서 며칠 간 머무르면서 몸을 추스르는 한편 도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는지 그가 마을에 머문 지 사흘째가 됐을 때, 갑자기 GPS 수신기에 신호가 들어왔다. 도윤이 탄 차가 그가 있는 곳으로부터 100킬로미터 안으로 들어왔다는 뜻이었다. 그는 여전히 아물지 않은 옆구리의 상처를 무시하고 마을에 맡겨두었던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최대한 엑셀을 밟아 도윤의 차를 쫓았다.
“이도윤! 내가 여기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만은 살려서 보내지 않겠다.”
그는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을 떠나면서 볼프의 부하인 막스가 가지고 있던 산탄총과 남은 총알들을 챙겼다. 그것들은 치료를 받는 동안 차 시트 밑에 숨겨두었었는데, 이제 드디어 그것을 꺼내 사용할 때가 된 것이다. 마을을 떠난 지 두 시간 만에 멀찌감치 달리는 도윤의 SUV를 발견한 그는 이를 악물고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탕.”
“꺄악.”
뒤에서 총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도윤이 탄 SUV의 뒷좌석 유리창이 박살이 났다. 깜짝 놀란 최서라가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숙이는 순간, 다시 한 번 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최서라의 어깨에서 핏방울이 튀어 도윤의 얼굴에 묻었다.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옷 위로 금세 핏물이 번지는 게 보였다.
“서라! 괜찮아? 팔을 움직여 봐. 어깨뼈가 나간 것 같지는 않아? 등과 가슴은?”
도윤이 운전대를 잡은 채로 고함을 질러 묻자 최서라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피가 나기는 하지만 어깨를 살짝 스친 것뿐이에요. 뼈나 가슴을 다친 건 아니니까 걱정 말고 운전에만 신경 쓰세요. 저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달려서 떨어트려야 해요.”
어깨를 살짝 스친 것뿐이라고? 그게 아니다. 중요한 건 조금 전의 사격으로 인해 하마터면 최서라가 죽을 뻔 했다는 사실이었다. 도윤의 눈에 새파란 살기가 맺혔다.
“우릴 잡는 게 아니라 아예 죽이려고 작정했구나? 이렇게 되면 막가자는 거지?”
창문이 깨지는 형태나 두 방 쏘고 나서는 잠잠하다는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때 상대가 들고 있는 것은 총열이 두 개 달린 더블샷 산탄총이 분명했다. 녀석이 다시 총알을 장전할 때까지 제법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면서. 더구나 운전을 하면서 산탄총을 장전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도윤은 이를 악물었다.
“서라! 안전벨트 확실히 맸지? 이 차에는 조수석에도 에어백이 설치되어 있으니까 각오 단단히 하고 있어.”
“네? 뭘 어떻게 하시려고요?”
“여긴 그냥 외길 도로야. 피할 곳이 없다고. 이런 상황에서 총 가진 놈을 뒤에 두고 마냥 도망가기만 하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야. 여기서 끝장을 내야 해.”
그들이 타고 있는 차는 자동이 아니라 수동 차량이었다. 그 때문에 운전하기에 불편한 점이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그게 장점이 되었다. 뒤에서 다시 두 발의 총성이 연거푸 들렸다. 백미러를 통해 상대가 총을 겨누는 것을 확인한 그는 차를 지그재그로 몰아 총알을 피했다. 그리고 두 번째 총성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핸들을 확 꺾었다.
전속력으로 차를 달리다가 클러치를 밟는 것과 동시에 한 손으로는 핸드 브레이크를 잡아당긴다. 그와 동시에 핸들을 확 틀면 차가 미끄러지면서 방향을 홱 틀기 마련이다. 그렇게 곡예를 부리듯이 차의 방향을 바꾼 도윤은 또 다시 총알을 장전하려고 바쁜 상대의 차 옆을 그대로 박아버렸다.
아심이 탄 차가 도윤의 SUV에 부딪친 충격으로 인해 달리던 속도 그대로 팽그르르 돌았다. 그러더니 결국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길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위아래가 바뀐 채로 흙먼지를 일으키며 미끄러지던 지프가 도로를 벗어나면서 커다란 바위를 들이받고 말았다. 잠시 후 기름이 타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던 지프가 그대로 폭발하고 말았다.
“저 사람 죽은 거 아니에요?”
깜짝 놀라 소리치는 최서라를 보면서 도윤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상대를 죽게 만든 것에 대해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놈은 자신과 아내를 죽이기 위해 그리스에서부터 이곳까지 집요하게 뒤를 쫓은 인간이었다.
‘이 싸움은 이미 멈출 수 없는 상황이 됐어. 서라를 위해서라도 놈들을 끝장내야 해.’
이를 악문 그는 엑셀을 밟아 현장을 떠났다. 평소에는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시베리아의 어느 한적한 도로 위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