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이르쿠츠크로 돌아가는 길에 날이 저물었다. 휴대폰은 여전히 먹통이었고 주변에 호텔은커녕 인가마저 보이지 않았다. 도윤과 최서라는 할 수 없이 도로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차를 빼서 하루 더 야영을 했다.
도윤은 텐트를 치기 전에 먼저 SUV 내부를 샅샅이 뒤졌다. 그가 처음 차를 숨겼던 장소는 물론이고, 그곳을 한참 벗어나서도 누군가 자신을 정확하게 뒤쫓아 왔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이상했던 것이다. 결과는 짐작대로였다.
“역시 그랬군. 이 빌어먹을 자식.”
도윤은 차 트렁크 안쪽에 잘 보이지 않도록 숨겨진 GPS 발신기를 찾아내고 혀를 찼다. 러시아의 치안 상태를 감안할 때, 손님들이 차를 빌린 다음에 반납하지 않을 가능성을 염려하는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자신의 뒤를 쫓아온 놈들이 있다는 것은 렌터카 회사가 그들에게 수신기를 팔거나 빌려줬다는 걸 의미했다.
그건 용서하기 어려웠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회사를 찾아가서 사장이라는 놈의 주리를 틀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목격한 최서라가 아직 그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최대한 그녀를 안전하고 빠르게 한국으로 데려가는 일이 더 급했다.
다음날, 텐트를 걷고 일찍 출발한 두 사람은 휴대폰 신호가 잡히기 시작하자마자 가장 가까운 모텔 근처에 차를 버렸다. 모텔 방을 빌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그들은 거기서 전화로 택시를 불러서 공항으로 직행했다. 그들이 빌렸던 SUV는 여기저기 찌그러지고 산탄총에 맞은 자국까지 선명했다. 그런 차를 몰고 시내까지 들어가기는 곤란했던 것이다.
“근데 그 렌터카 회사 사장은 정말 괘씸하네요. 어떻게 손님을 팔아넘길 수가 있죠? 마음 같아서는 찾아가서 단단히 혼을 내줬으면 좋겠어요.”
공항에 도착해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은 뒤에야 최서라가 비로소 화를 냈다. 도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에게 화를 낸다는 것은 그녀가 충격과 공포로 인한 패닉 상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놈이 한 짓을 생각하면 혼을 내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박살을 내고 싶지. 하지만 지금은 문제를 일으킬 때가 아니야. 일단 최대한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더 중요해.”
렌터카 회사 사장이 GPS 수신기를 주고 얼마를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 대가로 정작 회사가 도윤에게 빌려준 차가 완전히 박살이 난 채 버려지고 말았다.
만약 자신을 쫓아온 놈들도 그 회사에서 차를 빌렸다면 이번 일로 사장은 여러 대의 차를 한꺼번에 잃은 셈이다. 자업자득인 셈이었지만 도윤은 그 정도로 사장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와 최서라는 하마터면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을 뻔했던 것이다.
“우리를 노렸던 그 사람들이 한국까지 사람을 보내지는 않을까요?”
사장에 대한 분노도 잠시, 최서라는 또 다시 습격을 당할 것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도윤은 속으로 탄식을 토하면서도 일단 고개를 저었다.
“아마 그러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당분간은 귀국해서도 조심해야겠지.”
“돌아가면 경찰에 신변보호 요청이라도 할까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솔직히 경찰한테 왜 신변보호가 필요한지를 설명하기도 난감한 일이고. 그래도 상대는 일국의 왕세제에 세계적인 기업의 회장이잖아. 그 사람들도 막 나가지는 않을 거야. 다니엘 로스차일드 같은 미친놈은 그렇게 흔한 게 아니니까.”
“하지만 우리 뒤를 쫓았던 놈들은 저희들끼리도 서로 죽고 죽일 정도로 폭력적인 사람들이었어요. 마지막에는 도윤 씨하고 저에게도 총을 쐈고요. 그런 사람들을 보낸 작자가 미치지 않았다면 도대체 누가 미쳤단 말이에요.”
뒤로 갈수록 최서라의 목소리가 높아지더니 나중에는 말 사이로 울음기까지 섞여 나오기 시작했다. 도윤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면서 그녀를 껴안고 부드럽게 등을 토닥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거칠었던 그녀의 숨소리가 간신히 가라앉았다. 그가 최서라의 귀에 속삭였다.
“이브라힘 왕세제나 리히터 회장이 아무리 미쳤더라도 나를 죽이라고 지시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들에게 있어서 나는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꼭 필요한 사람이니까.”
“그럼 우릴 쫓아왔던 그 사람들은 도대체 왜…?”
“우리를 쫓던 과정에서 서로 간에 충돌이 생긴 게 분명해. 그들이야말로 서로가 서로에게 장애물이자 경쟁자였을 테니까. 마지막에 우리를 쫓아온 놈은 동료들이 죽자 악에 받쳐서 이성을 잃었던 거겠지. 끔찍한 결과가 초래됐지만 놈들도 애초에 의도한 건 아니었을 거야.”
“정말 괜찮을까요? 저는 또 다시 이런 일이 생길까봐 걱정이 돼서 죽겠어요.”
“괜찮아. 서라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른 일이 생기지 않도록 내가 알아서 할게.”
도윤은 억지로 웃으며 그녀를 달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그는 최서라를 껴안은 상태에서 들키지 않게 이를 갈았다.
이브라힘과 리히터 회장이 정말 이대로 자신을 포기할까? 당연히 그럴 리가 없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그들의 습격이 무서워 전전긍긍하며 산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런 식의 불안한 삶은 그가 원하는 게 아닐 뿐더러 성미에도 맞지 않았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한 번 실패했으면 정신을 차리고 타협이나 협상을 요청했어야지. 감히 나는 물론이고 내 아내까지 죽이려 들어?’
다니엘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브라힘 왕세제나 리히터 회장은 그가 정면으로 맞서기에는 너무 힘이 센 인간들이었다. 만약 그들이 처음부터 후한 보상을 내걸고 유물에 담긴 능력을 전해달라고 부탁했으면, 도윤도 못이기는 척 거래에 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젠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다. 놈들은 이미 넘어서면 안 될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자신들은 다이아몬드고 나는 기껏해야 반짝이는 돌멩이 정도로 보이는 거지.’
놈들은 즐거운 추억으로만 가득해야 마땅할 신혼여행을 공포와 죽음으로 더럽혔다. 그렇다면 놈들에게도 그들의 방식대로 응해주는 수밖에 없다. 돌멩이는 다이아몬드를 깨트릴 수 없다. 그러나 다이아몬드의 적은 또 다른 다이아몬드인 법이다.
* * *
마지막에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험악한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도윤과 최서라는 어쨌든 무사히 신혼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최서라의 짐 속에 넣어두었던 황금 장신구들은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고 이르쿠츠크 공항 검색대를 통과했다. 다만 인천 공항에서는 절차에 따라 미리 신고하고 세금을 납부해야 됐다.
미리 연락을 받은 석훈과 조민아가 공항까지 마중을 나왔다. 석훈이 모는 차를 타고 무사히 평창동 새집에 도착한 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고 샤워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잠에 떨어져 다음날 아침 늦게야 일어났다. 며칠 동안 피로가 누적 된데다 그동안 마음의 긴장을 풀지 못해 비행기 안에서조차 편하게 잠을 자지 못했던 것이다.
귀국한 다음날은 또 하루 종일 바빴다. 두 사람은 양가 부모님과 최인탁 회장을 비롯한 여러 지인들에게 귀국 인사를 드리러 다녔다. 파리에서 미리 보내 둔 트렁크들이 이미 서윤문화재단에 도착한 상태였기 때문에 두루두루 선물도 했다. 다만 최인탁 회장은 급격히 병세가 악화돼 귀국 인사를 병원에서 해야 됐다.
“할아버지가 아무래도 오래 못사실 거 같아요.”
최인탁의 병문안을 마치고 나온 최서라가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도윤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에서 치료의 기운을 사용해본 결과, 그가 쏟아 부운 능력이 최 회장의 몸에서 속절없이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올해를 넘기기 힘들 것 같았다.
도윤이 귀국했을 때는 이미 현소 화랑에서 젊은 화가들을 위한 합동 전시회인 ‘비전(Vision)’이 진행되고 있었다. 도윤이 최서라와 함게 화랑을 찾아가자 서연희가 직접 나서서 전시회장을 안내하며 사람들의 반응을 설명해주었다.
“이혜은이라는 그 화가 말이다. 고객들 반응이 아주 좋아. 네 말대로 그림 값을 꽤 높게 책정했는데도 벌써 절반 이상이 팔려나갔어. 이 상태대로라면 전시회가 종료될 때까지 전부 매진될 것 같다. 네가 쓴 평이 꽤 도움이 됐어.”
도윤은 이번 전시회를 위해 만들어진 도록에 직접 이혜은의 그림 세계에 대한 평을 실었다. 그는 세계적인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미술사 박사였으며,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드물게 대중적인 지명도까지 가지고 있는 감정가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그의 호평이 적지 않은 관객들의 관심을 끌었다는 게 서연희의 얘기였다.
“이혜정이라는 그 화가 동생이 전시장에 직접 왔어. 자기 언니 그림이 다른 화가들의 작품들과 함께 당당히 전시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는 눈물을 펑펑 흘리더라. 보고 있던 내가 다 가슴이 뭉클해져서 울음을 참느라 혼났다.”
서연희는 그 말을 하면서 흐뭇한 표정으로 아들을 쳐다봤다. 마술 중개상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좋은 화가나 작품들을 발굴해서 사람들에게 소개시켜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도윤이 참으로 기특하고 대견한 일을 했다고 여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혜은의 그림이 잘 팔린다는 얘기에 도윤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계약에 따라 현소 화랑이 수수료를 떼기는 하겠지만 그렇더라도 이번 전시회로 인해 이혜정은 적지 않은 수입을 얻을 수 있게 됐다. 이혜은이 남긴 그림에 대한 전적인 소유권이 유일한 혈육인 그녀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아가씨가 그리는 웹툰이 얼마나 인기를 얻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몇 년은 돈 걱정 없이 자기 일에 몰두할 수 있을 거야. 그 정도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준 셈이지.’
서연희의 말에 따르면 성형 수술도 성공적으로 끝나서 얼핏 봐서는 화상의 흔적을 거의 눈치 챌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 그녀도 당당히 얼굴을 내놓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잘 된 일이었다.
기쁜 소식은 또 있었다. 그가 신혼여행을 떠난 사이 대만에서 컴퓨덱스가 열렸다. 주로 컴퓨터와 관련된 장비와 신제품들이 대거 선을 보이는 그 전시회에서 데바 인스트루먼트의 새 CPU인 ‘싸이레이노’가 폭발적인 관심을 모았다. ‘싸이레이노’는 데바에서 원래 인공지능용 TPU로 개발했던 ‘싸이레인’의 성능을 일부 다운 그레이드 시킨 데스크 탑용 CPU였다.
“기존의 메인보드들과 호환될 수 있도록 설계를 조정한 덕에 반응이 아주 뜨거웠습니다. 아직 본격적인 대량 생산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선주문 신청이 밀려들고 있습니다. 연산 처리 속도가 기존의 CPU들보다 빠르고 발열도 적으니 당연한 결과지요.”
인도에 있는 오광표가 직접 전화를 걸어 흥분된 목소리로 희소식을 전했다. 데바에서는 내년 초의 CES까지 지금보다 코어와 쓰레드 수를 늘리는 것은 물론이고, 노트북용 CPU까지 내놓을 계획으로 연구진들을 갈아 넣고 있는 중이었다.
“싸이레이노는 낮은 전압에서 작동하고 발열까지 적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노트북용 CPU로는 이상적인 셈이지요. 아마 출시되면 현재로서는 경쟁상대가 없을 겁니다.”
컴퓨덱스 이후로 데바 인스트루먼트의 주가는 가파르게 상승 중이었다. 아울러 TPU인 ‘싸이레인’과 그것의 CPU 버전인 ‘싸이레이노’의 생산을 도맡은 미래 전자의 주가 역시 큰 폭으로 올랐다. 아마 오광표의 말대로 되면 내년에는 두 회사 모두 주가의 상승 폭이 더욱 더 커질 것이다.
“내년에는 상황을 봐서 데바 주식의 일부를 서윤문화재단 명의로 돌려야겠네.”
아마 그렇게 되면 재단의 자금 문제는 완벽하게 해결될 것이다.
* * *
도윤이 신혼여행을 떠난 동안, 그가 귀국하기를 목을 빼고 기다린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바로 국립 현대미술관의 장예주 박사였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주 월요일, 도윤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현대미술관을 찾아갔다.
“이 박사, 어서 와. 신혼여행은 재미있었어? 하긴 물어보나마나 좋았겠지. 다시 한 번 결혼 축하해.”
장예주는 환한 미소로 도윤을 맞아주었다. 그의 신혼여행은 재미있었다기보다는 스릴이 넘치는 것이었기는 하지만 도윤은 그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잖아도 관장님이 이 박사 언제 오냐고 여러 번 물어보셨어. 같이 인사드리러 가자.”
장 예주는 도윤을 관장실로 데리고 갔다. 반백의 머리를 한 구상춘 관장은 육십이 넘은 나이에 어울리는 도인 풍의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관장실에는 그와는 대조적인 외모를 지닌 손님이 한 명 더 있었다. 약간 작은 키와는 반대로 넉넉한 몸집을 가진 동안의 노인. 국립박물관의 민경훈 관장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이도윤입니다. 말씀은 많이 들었지만 직접 얼굴을 뵙는 건 처음이네요.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구상춘 교수, 아니 구상춘 관장님. 그리고 민경훈 관장님도 오랜만에 뵙네요. 여기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도윤의 인사에 구상춘 관장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아직까지는 교수라는 말이 관장이라는 말보다 더 익숙합니다. 관장보다는 교수로 지낸 시간이 훨씬 많아서 그런가 봐요.”
“말씀 낮추십시오. 제 부모님보다 연세가 많으신데다, 학계의 원로이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될까? 내가 웬만해서는 젊은 사람들한테도 말을 잘 놓지 않는데, 이 박사하고는 조금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그래. 괜찮겠어?”
“그 편이 저도 편합니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근데 민 관장하고는 구면이던가? 아까 오랜만에 뵙는다고 한 것 같은데.”
그 말에 잠자코 있던 민경훈 관장이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박사가 어릴 때부터 몇 번 봤었지. 저 친구 스승이 고서 감정에도 일가견이 있는 조태석 교수잖아. 어린 천재가 있다고 해서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어. 천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주 훌륭하게 컸어. 기특해.”
민경훈 관장은 조태석 교수의 선배였다. 그는 역사학자인 동시에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토기 및 도자기 전문가이기도 했는데, 조태석은 몇 차례에 걸쳐 그에게 도윤을 인사시킨 일이 있었다. 덕분에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낯이 익었다.
구상춘 관장과의 첫 대면은 부드러운 대화로 시작되었다. 간단한 인삿말 뒤에 이어진 일정 조정 끝에 도윤은 다음 주부터 매주 수요일에 한 번씩 미술관에 들러 소장 중인 그림들을 감정하는 일을 돕기로 했다. 그런데 얘기를 듣고 있던 민경훈이 문득 불만을 토했다.
“자네는 서양화보다는 원래 우리나라하고 중국의 고대 미술품 감정이 전공 아니었나? 그동안 현소 화랑 일을 한다고 하기에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왕 시간을 낼 수 있는 거였으면 우리 박물관 일도 좀 도와주지 그러나? 이거 은근히 섭섭하네?”
농담이 아니라는 듯 슬쩍 흘겨보기까지 하는 그의 말에 도윤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우리나라하고 중국 쪽 미술품들을 주로 보고 배운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학위는 유럽 후기 인상파 연구로 받았지 않습니까? 좋게 봐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박물관 물건까지 감정하겠다고 나서면 남들이 뭐라고 할 겁니다.”
그러자 민경훈이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내가 어릴 때부터 자네를 봐왔는데 무슨 씨도 안 먹힐 소리를 하고 그래? 작년에 전 세계 미술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붉은 항아리 홍도관을 발굴한 사람이 바로 자네잖아? 일본까지 가서 정선의 그림을 감정한 적도 있고. 시간이 없다면 모를까 설마 능력이 없겠어? 내가 조태석이 이 친구하고 자네 부친한테 한 번 전화를 해야겠군.”
결국 도윤은 정기적으로 일을 돕는 건 어려워도 나중에 꼭 필요한 일이 생길 경우 시간을 내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그의 눈총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했던 그 말이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씨가 되어 돌아올 줄은 그와 민경훈 모두 예상하지 못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