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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252화 (252/300)

252화

“이건 제가 우리나라를 여행하던 도중에 우연히 구한 겁니다. 보시다시피 먹을 갈 때 쓰는 연적이고, 능력을 담고 있는 물건이기도 하지요. 다들 어제 제 사무실에 들르셨는데, 장식장에 이게 놓여 있는 걸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도윤의 말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평소 미술품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라고 해도 중요한 제안을 하기 위해 들른 처지에 남의 사무실 장식장 안까지 들여다볼 정신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도윤 역시 그걸 노리고 꺼낸 말이었다.

사실 도윤에게는 굳이 그들의 동의나 인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가 꺼내든 연적은 실제로 그의 사무실 장식장 안에 다른 물건들과 함께 놓여 있던 것이 맞았고, 오래된 도자기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꽤 잘 만들어진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골동품이 아니라 과거 조태석에게 붓글씨를 배울 때 선물로 받은 것이었다.

어제 크리스틴이 다녀간 후, 도윤은 은 막대에 담아두었던 도자기의 능력을 그 연적에 다시 옮겨놓았다. 칭기즈칸의 무덤 속에 있던 도자기에 어떤 능력이 담겨 있는지는 그도 모른다. 따라서 그걸 크리스틴에게 전해 주기가 조금 아깝기는 했다.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혹시 무병장수나 거부가 되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런 투자도 하지 않고 결과만 얻겠다고 할 수는 없지.’

그는 이번 일의 성공을 위해 과감하게 지르기로 했다. 그는 오늘 모인 사람들의 배후에 있는 이브라힘과 리히터 회장, 그리고 우바오량의 욕심을 한껏 자극할 작정이었다. 그러자면 막연한 추측보다는 명백한 증거를 들이미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

“어제 여러분이 제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한 분에게 이 연적에 담긴 능력이 이어지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왕 회장님께서 제가 링커인지 입증해달라고 하셨죠? 만약 이 물건의 주인이 제가 아까 말씀드린 대가를 지불해 주시면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분에게 연적의 능력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연적에 날아와 꽂혔다. 마치 먹이를 앞에 둔 맹수와 같은 눈빛이었다. 도윤이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는데 왕 회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아까 말씀하신 대가라면…?”

“물건을 감정하는 데 백만 달러, 그걸 원하는 사람에게 전해주는데 천만 달러입니다. 여러분이 모두 동의하시면 먼저 이 연적의 주인이 누군지 밝히겠습니다. 그런 다음 그 분이 도합 천백만 달러를 제가 지정하는 계좌로 입금하시면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연적의 능력을 전해주겠다는 뜻입니다.”

“동의합니다.”

압둘이 망설일 필요도 없다는 듯이 제일 먼저 찬성의 뜻을 표시했다. 이어서 왕 회장과 크리스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한화로 치면 약 130억 원에 달하는 돈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이 너무나 쉽게 이루어졌다. 도윤 역시 남부럽지 않은 갑부의 반열에 올라서기는 했지만 너무나 빠른 그들의 반응에 속으로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먼저 유물의 주인을 말씀드리죠. 이 연적에 담긴 능력의 주인은 바로 크리스틴 리히터 씨입니다. 축하합니다, 크리스틴.”

지명을 받은 크리스틴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녀는 뜻밖의 횡재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저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내질렀고, 압둘과 왕이푸는 부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도윤이 씩 웃으며 메모지 한 장을 그녀에게 건넸다. 계좌 번호가 적힌 메모지였다.

“제가 이사장으로 있는 서윤문화재단의 계좌입니다. 크리스틴 양이 그 계좌로 보낸 돈은 모두 우리 재단의 기부금으로 처리될 거예요.”

메모지를 받아든 크리스틴이 휴대폰을 꺼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잠깐 사정을 설명하더니 메모지에 적힌 계좌번호를 문자로 전송했다. 다들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몇 분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그걸 확인한 크리스틴이 씩 웃었다.

“방금 주신 재단 계좌로 천백만 달러를 송금했어요. 확인해 보시죠.”

도윤은 재단 사무실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입금 사실을 확인했다. 조금 전 드라이바인 그룹 명의로 천백만 달러의 기부금이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은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링커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이 자리에서 능력을 전해주어야 하겠죠? 그런데 유물에 담긴 능력을 전해 받을 경우 그 주인은 한동안 정신을 잃게 됩니다. 사람이나 유물에 따라 시간 차이가 좀 있는데, 짧으면 반나절 길게는 하루 이상 깨어나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 미리 수행원들에게 얘기를 해두세요. 괜한 오해를 사지 않도록 말입니다.”

“위험하지는 않나요?”

크리스틴이 약간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도윤이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까지 저에게서 능력을 전해 받은 사람들 가운데 영영 깨어나지 못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다들 하루가 지나기 전에 멀쩡한 모습으로 의식을 회복하더군요.”

여전히 긴장을 완전히 풀지는 못하는 게 분명했지만 그래도 크리스틴은 강단이 있는 여자였다. 그녀는 잠시 회의실을 나가 자신의 수행원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그런 다음 다시 사무실로 들어온 그녀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준비가 됐어요. 그럼 시작하시죠.”

도윤은 먼저 그녀에게 의자에 등을 기대고 최대한 몸을 편하게 늘어트리도록 부탁했다. 그런 다음 왼손에 연적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다들 두려움과 호기심이 뒤섞인 복잡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는 가운데 도윤은 오른손을 크리스틴의 뒷머리에 가져다댔다. 그가 정신을 집중시키자마자 연적에서 자신만 볼 수 있는 환한 붉은빛이 솟구치더니 그의 몸을 타고 크리스틴에게로 흘러들어갔다. 오래 지나지 않아 크리스틴의 눈이 감기며 고개가 밑으로 툭 떨어졌다.

* * *

대회의실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크리스틴은 곧바로 대기하고 있던 수행원들에 의해 그녀가 묵고 있는 호텔로 옮겨졌다. 그녀가 의식을 회복한 것은 다음날 점심 무렵이었다. 특별히 해 줄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도윤은 일부러 그녀를 찾아가서 마음의 안정을 꾀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조언을 해 주었다.

‘무려 천백만 달러짜리 고객이잖아. 서비스를 잘 해야지.’

물론 그가 돈을 벌기 위해 그녀에게 능력을 전해준 것은 아니었다. 아울러 앞으로도 자신이 찾은 유물의 능력을 누군가에게 돈을 받고 전해줄 생각도 없었다. 본인들이 직접 유물을 찾아내서 초대한다면 모를까. 물론 지금 생각하고 있는 계획이 끝까지 실행에 옮겨질 경우, 저들이 과연 다시 그를 부를 것 같지는 않았다.

크리스틴이 호텔에서 이틀을 쉰 다음날, 압둘과 왕이푸를 비롯한 네 사람이 다시 서윤문화재단에 모였다. 전과는 달리 대회의실이 아니라 약간 커다란 방이었는데, 회의용 테이블 대신 방 중앙에 무언가를 올려놓고 보자기를 씌운 테이블과 도자기를 만들 때 쓰는 회전 틀이 놓여 있었다. 그 밖에는 의자 몇 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도윤이 이제부터 진행될 일을 설명했다.

“오늘 저희가 다시 모인 이유는 크리스틴 씨가 지난번에 얻은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녀는 도자기를 만들고 감정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습니다.”

그의 말에 압둘과 왕이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한편으로는 그녀가 얻은 능력이 특별한 게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는 듯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 실망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그들의 반응을 쓱 둘러본 도윤이 다시 말을 이었다.

“미리 말씀 드리지만 크리스틴 씨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도자기를 만들거나 그에 대해 공부한 적이 없습니다. 제 말이 진실인지는 여러분이 나중에 얼마든지 조사해서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나머지는 직접 보고 판단하시지요.”

말을 마친 도윤이 눈짓을 하자 크리스틴이 중앙의 테이블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그녀가 테이블 위에 씌워놓았던 보자기를 벗기자 미리 메쳐서 다져놓은 도자기용 진흙 덩어리가 나타났다. 그녀는 그것을 한 움큼 떼어낸 다음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손바닥으로 눌러 굴리면서 길쭉한 진흙 띠를 만들기 시작했다.

여러 개의 띠가 완성되자 크리스틴이 그것들을 둥글게 말아 회전 틀 위에 차곡차곡 쌓았다.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이상의 높이가 되었을 때 그녀가 회전 틀의 전동 스위치를 켜더니 손에 물을 묻혀가면서 모양을 만들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럴 듯한 술병이 금세 만들어졌다. 약간 투박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최소한 초보자의 솜씨는 아니었다.

간단한 시연을 마친 크리스틴이 직접 사람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설명했다.

“이 박사님이 말씀하셨듯이 이번에 제가 받은 능력은 도자기를 만들고 감정하는 능력이에요. 어제 서울의 국립 박물관에 가서 전시된 도자기들을 둘러봤어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동양의 도자기에 대해 별다른 안목이 없었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잠시 보는 것만으로도 어느 것이 명품이고 어느 것이 평범한 도자기인지 쉽게 알아볼 수 있더라고요.”

압둘과 왕이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는 별다른 감정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로써 도윤이 링커라는 사실은 확실히 믿게 되었지만 그녀가 받은 능력이 천백만 달러짜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도윤은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도예가나 도자기 감정가로 평생을 살겠다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사람들이 원하는 능력은 아니었겠지. 심지어 크리스틴조차도 크게 기뻐하는 눈치는 아니었으니까.’

사실 도윤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덜 아까운 결과이기도 했다. 진품이나 명품 도자기를 감정하는 능력이라면 그 역시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링커로서 아우라를 볼 수 있는 능력은 각각의 감정 능력을 통합하는 상위 버전이라고 볼 수 있었다.

크리스틴의 설명이 끝나자 그가 손뼉을 짝 하고 쳐서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번 모임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다들 제가 링커라는 사실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그럼 이제 돌아가셔서 다시 연락드릴 때까지 기다려주십시오. 며칠 전에 말씀드렸듯이 칭기즈칸의 무덤 탐사는 오는 9월쯤 이루어질 겁니다.”

“그럼 누가 이박사와 함께 가게 될지는 그 연락을 받고 알려드리면 되는 겁니까?”

압둘의 질문이었다. 도윤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각각 한 분씩만 지정해주십시오. 언제 어디서 모일지는 그 분들이 결정되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일체의 수행원을 동반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무덤의 위치 역시 현장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절대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그것으로 회합은 끝났고 세 사람은 각자의 나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들이 한국을 떠난 며칠 뒤, 이번에는 석훈이 조민아와 함께 이르쿠츠크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 * *

석훈을 혼자 이르쿠츠크로 보내는 건 사실 불안한 측면이 많았다. 요즘 들어 녀석의 영어 실력이 놀라울 정도로 향상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가 가야 하는 곳은 러시아에서도 시베리아 한복판에 위치한 중소도시였다. 게다가 러시아는 설사 모스크바 같은 대도시라고 해도 영어에 익숙한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바로 조민아였다.

“조민아 씨가 영어를 잘 한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지만 러시아어도 할 줄 알았어?”

도윤이 놀라는 표정을 짓자 석훈이 약간 민망하게 웃었다.

“민아가 원래 고등학교 일학년 때까지 미국에서 살았잖아요. 그때 러시아어를 조금 배웠는데 그래서 대학에서도 러시아어를 제2 외국어로 선택했어요. 능숙한 수준은 아니지만 손짓 발짓까지 섞으면 말이 통할 정도는 되는가 봐요.”

게다가 조민아는 체대 출신에 무술 실력도 뛰어났다. 결국 석훈이 가장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점까지 고려한 결과 그녀와 석훈이 함께 이르쿠츠크로 가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필요한 장비는 이미 이르쿠츠크로 보냈어. 너는 평범한 여행객 흉내를 내야 하니까 쓸 데 없는 짐은 가지고 갈 필요 없어.”

두 사람이 서울을 떠나던 날, 공항까지 배웅나간 도윤이 그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사실 이번 일에는 적지 않은 장비들이 필요했다. 문제는 스쿠버 장비까지 포함된 그 장비들이 이르쿠츠크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걸 어떻게 현장까지 보내느냐는 문제를 놓고 도윤도 적지 않게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필요한 장비의 대부분은 사실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에서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스쿠버 장비를 따로 준비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거기서 현장까지 가려면 러시아 국경을 통과해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몽골에서 러시아로 넘어가는 국경 검문소는 다시는 들르고 싶지 않다는 평이 자자할 정도로 일처리가 늦고 부패가 만연하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도윤이 검토한 다음 대안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장비를 실은 트럭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일을 제대로 처리하기 위해서는 결국 누군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야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석훈과 조민아를 이르쿠츠크가 아닌 블라디보스토크로 먼저 보낼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때 최서라가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모스크바에서 출발하더라도 블라디보스토크보다 하루 정도 더 걸리는 것뿐이에요. 대신 거기에는 미래 전자 지사가 있으니까 필요한 일을 맡길 수 있을 거예요.”

결국 그는 최서라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모스크바 지사의 미래 전자 직원에게 필요한 장비를 모두 사서 대형 컨테이너 트럭에 실은 후 육로를 통해 이르쿠츠크까지 보내달라는 부탁한 것이다. 덕분에 석훈과 조민아는 트럭 도착 예정 날짜보다 하루 먼저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뒤 트럭 채로 장비를 인수받을 수 있게 되었다.

“트럭 안에 산악용 바이크 두 대와 위성전화도 싣게 했어. 그래도 바이크에 실을 수 있는 짐의 부피가 크지 않으니까 적어도 두 번은 트럭을 세운 곳과 현장을 왔다 갔다 해야 할 거야. 하루에 한 번씩은 위성전화로 보고하는 것도 잊지 말고.”

워낙 쉽지 않은 일인데다 자칫하면 목숨까지 위험할 수도 있다 보니 평소와는 달리 도윤의 잔소리가 길어졌다. 그러자 석훈이 씩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형은 걱정하지 말고 여기 일이나 잘 끝내세요. 트럭을 인수하면 매일 한 번씩 전화할게요. 위성전화비 엄청 비싸다면서요? 형은 요금이나 잘 내 주세요.”

착잡한 마음으로 그들을 배웅하고 돌아온 도윤은 곧바로 다음 일에 착수했다. 9월이 되기 전에 오구라 컬렉션을 반환받는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 것이다. 성공 여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한 최선을 다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그는 먼저 파리에 있는 말레 회장에게 전화했다.

“다음 주에 제가 파리로 가겠습니다. 그 전에 몇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도윤은 그에게 먼저 드골의 위조 서명이 적힌 행정명령서의 사본을 확보한 뒤 그 사진을 인터넷에 퍼트려달라고 부탁했다. 말레 회장은 마치 질이 안 좋지만 엄청 재미있는 일을 꾸미는 악동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행정명령서 사본은 이미 확보해 뒀습니다. 사진도 찍어놨지요.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인터넷에 퍼트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빠르고 넓게 퍼트리느냐는 거죠.”

“프랑스는 물론이고 미국과 영국, 독일과 중국 사이트에 두루두루 사진과 글을 올려야 합니다. 물론 나라마다 이슈가 확산될 수 있는 속도를 고려해서 순차적으로 시기를 조절해야겠죠. 각 나라 말로 게시물을 올리고 댓글 작업을 할 사람들은 얼마든지 고용하십시오. 필요한 경비는 모두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아마 다음 주에 이 박사가 파리에 도착할 때쯤 되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미 화제가 되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다음 일이라는 거 알죠?”

“물론입니다. 결국 그 서명이 진짜로 위조된 것인지를 전문가들이 확인해 줘야 할 테니까요. 그 일은 제가 파리에 도착한 다음에 직접 추진하겠습니다.”

“이 박사 자신이 유명한 감정가이니까 그게 낫긴 할 겁니다. 대신 최소한 일 년에 한두 번씩은 자네도 내 일을 도와주겠다고 한 약속 잊지 마십시오.”

“물론입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전화를 끊은 도윤은 잠시 심호흡을 했다. 이번 일에 불법적인 요소는 전혀 없었다. 본래 국가 기관이 가지고 있는 자료는 시민들의 요구가 있을 때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열람할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한다. 사본을 제공하는 것 역시 의무사항이었다. 게다가 드골의 사인이 적힌 행정명령서는 프랑스 정부의 입장에서 기밀문서도 아니었다.

“게시 글을 올리고 댓글 알바를 고용하는 것도 그 자체로는 불법이 아니지. 유언비어나 가짜 뉴스를 생산하는 것도 아니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이슈화 시키는 것뿐이니까.”

하지만 앉아서 날벼락을 맞는 거나 다름없는 일을 당하게 될 일본의 입장에서는 적지 않게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도윤은 일이 지나치게 복잡하게 되기 전에 그 틈을 파고들어야 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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