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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254화 (254/300)

254화

뒤브아가 찾아낸 뇌물 수수 기록은 이미 죽은 전직 프랑스 관료가 남긴 것이었다. 그는 도윤에게 보여준 명단에 적힌 사람들은 물론, 그 자녀들의 주소까지 일일이 확인하고 직접 그들의 집을 방문하기까지 했다. 그런 집요한 취재 끝에 고인이 남긴 여러 가지 책과 문서 더미 속에서 마침내 수뢰의 증거가 될 수 있는 기록을 찾아낸 것이다.

“당시 프랑스 정치인과 관료들에게 금품을 전달하는 일을 맡은 곳이 바로 일본의 모리타라는 기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중간에 다리를 놓아준 중개인이 있었죠. 조르주 브렐이라는 인물이었는데, 한때 주일 프랑스 대사관에서 제1서기관으로 근무했었어요. 귀국해서 공직을 그만 두고 무역 회사에서 일하다가 1959년 당시에는 로비스트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주일 프랑스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동안 일본 정부의 각료들과 두루 안면을 튼 브렐은 꼼꼼하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한다는 평판을 얻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에 있을 때부터 술을 좋아하고 여자를 밝히는 것으로도 유명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씀씀이가 헤프다보니 언제나 돈이 궁했다는 것이다.

“일본 대사관의 입장에서는 이용하기 딱 좋은 안성맞춤의 인물이었죠. 일본을 위한 로비스트로 활동하는 게 회사를 다니는 것보다 더 짭짤하다는 것을 깨달은 브렐은 꽤 오랫동안 프랑스 정관계를 누비고 다녔던 모양입니다. 문제는 그가 자신이 소개하거나 전달해준 뇌물의 액수와 날짜, 그리고 수뢰자의 이름을 일일이 적어서 기록으로 남겨두었다는 거죠.”

뒤브아의 말에 도윤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군요. 보통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증거를 없애려고 애쓰지 않습니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많은 로비스트들이 나중에 토사구팽 당하는 걸 피하기 위해 비장의 카드를 만들어두고는 하니까요. 누군가를 배신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거꾸로 배신당할 때를 대비하기 마련입니다.”

뒤브아의 말을 듣다 보니 왠지 인간의 추악한 일면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서 입맛이 씁쓸했다. 하긴 일제 강점기 때만 하더라도 외국 유학까지 다녀온 유복한 지식인들 가운데 다수가 친일파로 전향했다. 그들은 대부분 조국이나 일본이 아닌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궁색한 논리와 명분을 만들어내기까지 했었다.

“그가 남긴 기록을 제가 볼 수 있겠습니까?”

도윤의 물음에 뒤브아가 씩 웃더니 USB와 태블릿을 건넸다. 태블릿에 USB를 꽂은 도윤은 카페에 앉은 채로 빠르게 이미지 파일로 정리된 브렐의 기록을 살펴봤다. 한참 동안 화면을 스크롤하며 내용을 살피던 그가 문득 고개를 들고 다시 물었다.

“이걸 공개하실 생각입니까? 만약 이 기록이 공개되면 적지 않은 전직 정치인과 관료들의 명예가 크게 실추될 텐데요? 프랑스 정부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은 일일 테고요.”

뒤브아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기사는 쓸 겁니다. 명색이 기자니까요. 하지만 기록 자체를 공개하는 건 상황을 봐 가면서 나중에 결정할 생각이에요. 그보다는 제가 이 박사님께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습니다. 드골의 사인이 위조라는 걸 밝혀서 얻고자 하시는 게 뭡니까? 마쓰가타 컬렉션을 일본에 기증한다는 행정명령서에 적힌 것 말입니다.”

도윤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저는 프랑스 정부가 마쓰가타 컬렉션을 돌려달라고 나서기를 원합니다.”

뒤브아가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글쎄요…. 제 짐작이 맞는다면 설사 드골의 사인이 위조로 밝혀진다고 해도 프랑스 정부가 이제 와서 미술품의 반환을 요구하기는 힘들 겁니다. 이미 오래 전의 일이고 일본 정부 또한 순순히 그걸 내놓을 리도 없을 테니까요. 오히려 불필요한 외교적 마찰만 야기할 우려가 크지 않을까요? 프랑스 정부는 그냥 덮고 싶어 할 겁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도 마쓰가타 컬렉션이 다시 프랑스로 돌아올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소한 프랑스 정부가 반환을 요구할 낌새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제 입장에서는 충분히 도움이 됩니다.”

“따로 노리는 게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아무리 상대가 나를 때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고 해도, 일단 우락부락한 사람이 인상을 쓰면서 주먹을 치켜들면 누구나 움찔하기 마련이니까요.”

“하긴 마쓰가타 컬렉션은 금전적인 가치를 따지기 이전에 도쿄의 국립서양미술관이 존재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나 마찬가지죠. 일본 정부로서는 그걸 뺏기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초조해질 수밖에 없겠군요.”

“제가 노리는 게 바로 그겁니다.”

그러자 뒤브아가 씩 웃으며 태블릿에서 USB를 뺀 다음 그걸 도윤에게 넘겨주었다.

“일본 정부를 조금 더 초조하게 만들려면 프랑스가 아니라 그들을 직접 압박할 수 있는 다른 증거가 필요할 겁니다. 나중에 이 안에서 도모토라는 폴더를 열어보십시오. 별 건 아니지만 이름과 주소가 적힌 메모 파일이 하나 있을 겁니다.”

“그 메모가 일본 정부에게 불리한 증거와 연관이 있습니까?”

“모른 로비에는 파트너가 존재하지요. 브렐에게도 도모토 유키히로라는 일본 측 파트너가 있었습니다. 당시 주 프랑스 일본 대사관의 서기관이었지요. 그 사람이 바로 조르주 브렐에게 전해지는 돈을 관리하고 기록한 사람입니다.”

도윤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아직 살아있습니까? 도모토 유키히로라는 인물 말입니다.”

“아닙니다. 유키히로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지요. 하지만 도모토 쇼타는 그의 아들이 아직도 아버지가 남긴 집에서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일본 고베입니다.”

고베라고? 도윤은 순간적으로 인연이라는 게 참으로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베는 정선의 그림을 한국에 기증한 재일교포 권춘강과 그의 친구인 아오키 고스케가 사는 곳이다. 아오키는 고흐의 해바라기를 가지고 있던 골동품 가게 주인이었다.

“고베에 가면 유키히로가 남긴 기록을 얻을 수 있다는 겁니까?”

그의 말에 뒤브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까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가능성은 있지 않겠습니까? 제가 브렐의 가족에게서 그의 유품을 얻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제가 직접 고베에 가고 싶지만 솔직히 거기는 파리에서 너무 멀어요. 저는 일본어를 전혀 못하기도 하고 말이지요.”

도윤은 뒤브아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을 금세 알아들었다.

“알겠습니다. 고베는 제가 직접 가서 확인하지요. 귀한 정보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박사님이 기뻐해주시니 이렇게 만난 보람이 있네요. 만나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뒤브아와 헤어진 도윤은 입맛을 다셨다. 기껏 서울에서 파리까지 날아왔는데 오던 길을 되짚다시피 해서 다시 일본 고베로 가야하게 생겼다. 그거야 비행기만 타면 되는 일이기는 했지만 그 전에 먼저 이곳에서 마무리 지어야 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 * *

말레 회장이 미리 필적 전문가들에게 드골의 서명을 감정시켰다고는 하지만 그건 공식적인 결과를 얻기 위한 아닌 사전 검증작업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은 이상, 계획의 다음 단계를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바로 그 공식 감정서가 필요했다.

문제는 그걸 위해서 먼저 행정명령서 원본을 손에 넣어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도윤은 뒤브아를 만난 다음날, 말레 회장을 만나 다음 단계를 추진해 줄 것을 요구했다. 말레 회장 역시 일이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내가 유력한 친구들을 많이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정부가 발행한 행정명령서의 원본을 감정하는 건 뒷거래를 통해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일을 추진하려면 무엇보다 법원의 명령을 받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당장은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까?”

“법원의 명령을 받는 것 자체는 아마 가능할 겁니다. 지금까지 여론 몰이에 힘을 쓴 것도 처음부터 그걸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였으니까요. 다만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아무리 저라도 해도 법적인 절차마저 무시할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일을 시작하죠. 죄송하지만 저에게는 여유를 부릴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무리한 얘기인 줄은 알지만 최대한 서둘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말레 회장은 도윤의 부탁대로 그 다음날 바로 움직였다. 그는 일단 정부가 행정명령서의 원본을 공개하고 거기에 적힌 드골 사인의 위조 여부를 감정해 줄 것을 요구하는 신청서를 법원에 접수시켰다. 아울러 마쓰가타 컬렉션을 일본에 기증한 행위가 원천적으로 무효이니 프랑스 정부가 나서서 작품들을 돌려받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진정서도 제출했다.

말레 회장은 소더비 후원회의 이름으로 그 일을 진행시켰다. 게다가 다른 프랑스 민간단체들도 설득해서 그들의 연대 서명을 받아냈다. 그 모든 게 지금까지 그가 프랑스 사회에서 쌓아온 명성과 인맥을 총동원해서 진행시킨 일이었다.

말레 회장은 자신이 요구서와 진정서를 접수시켰다는 사실을 언론을 통해 발표했다. 그 바람에 잠시 수그러들 듯하던 여론이 다시 불같이 일어났다. 도윤은 말레 회장의 개인 소장품들에 대한 감정을 해주면서 그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요구서와 진정서를 접수시킨 며칠 후, 말레 회장이 약간 화색이 도는 얼굴로 도윤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그는 자신 있는 태도로 법원 내부의 동향에 관한 소식을 전했다.

“늦어도 한 달 이내에는 법원의 결정이 날 겁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공식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행정명령서 원본에 대한 필적 감정이 필수라는 걸 판사들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정부의 입장에서는 난감한 일이겠지만 법원에서는 아마 원본에 대한 공개와 감정을 명령하게 될 겁니다.”

“그럼 프랑스 정부가 마쓰가타 컬렉션에 대한 반환 요청을 하게 될까요? 드골의 서명이 위조라면 애초에 프랑스 정부로서는 기증 의사가 없었다는 게 되니까 말이에요.”

도윤의 얘기에 말레 회장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아마 행정명령서 원본의 공개와 감정까지는 별 문제 없이 진행될 겁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결론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어요. 제 개인적인 견해를 말씀드리자면 그래도 미술품 반환 요구는 하지 않으려 들 겁니다. 정부로서는 무척 부담이 되는 일이니까요.”

“뒤브아 기자도 비슷한 얘기를 하더군요. 하지만 그래도 일단 원본에 대한 감정은 진행되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도 많은 신세를 졌지만 조금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뭐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법원의 결정이 빨리 나지 않는 것도 좋을 겁니다. 그래야 일본 정부도 오랫동안 초조해 하게 될 테니까요.”

말레 회장의 말이 맞았다. 이미 프랑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일본에서도 큰 관심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고, 몇몇 주요 일간지를 통해서도 대서특필되었다. 도윤은 이제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일본을 공략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 * *

파리에서 열흘 가량 머물던 도윤은 그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자 이번에는 오사카로 향했다. 그는 오사카에서 차를 타고 고베로 간 다음에 뒤브아가 준 메모지에 있는 주소로 찾아갔다. 도모토 유키히로라는 과거 일본 외교관의 집, 지금은 그 아들인 도모토 쇼타라는 사람이 사는 곳이었다.

도모토 쇼타의 집은 꽤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단층 주택이었다. 한 때는 제법 괜찮은 집이었을 게 분명했지만 지금은 한 눈에 봐도 어딘가 너무 오래 되고 낡은 티가 물씬 풍겼다. 거기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황당한 소식이었다.

아무리 초인종을 눌러도 아무도 나오지 않자, 도윤은 실례를 무릅쓰고 옆집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모습을 나타낸 노인 한 분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비보를 전했다.

“도모토 쇼타 씨가 돌아가셨다고요?”

“네. 장례를 치른 지 한 달가량 됐습니다.”

“저기, 죄송하지만 그럼 남은 가족 분들은 어디…?”

“부인은 몇 해 전에 죽었고, 딸이 하나 있어요. 그런데 그 딸도 지금은 미국에 거주한다고 들었습니다. 장례를 치르느라 잠깐 귀국하기는 했는데, 이미 미국으로 돌아갔어요.”

파리에서 여기까지 일부러 날아왔는데…. 맥이 쭉 빠졌다. 그때 허탈하게 돌아서려던 도윤의 머리를 번뜩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럼 도모토 씨의 집은 어떻게 됩니까? 가족이 아무도 살지 않으면 지금 텅 비어 있다는 얘기 아닌가요?”

그의 물음에 옆집 할아버지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혀를 쯧쯧 찼다.

“그렇잖아도 히로코, 아, 쇼타 씨의 딸 말이에요. 아무튼 걔도 이 집을 팔고 싶어 해요. 하지만 워낙 오래된 집인데다 쇼타 씨가 앓아누운 뒤로는 관리가 잘 되지 않아서 고칠 곳이 많습니다. 집안과 창고 여기저기에 쓰레기하고 잡동사니들도 잔뜩 잔뜩 쌓여 있고. 일단 팔아달라고 부탁하고 돌아가기는 했지만 쉽게 나갈 것 같지 않아서 골치 아파하고 있습니다.”

일본 역시 한국처럼 출산율의 저하와 급격한 고령화 현상으로 인해 전국 곳곳에 빈 집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일본 총무성의 발표에 따르면 일본 전역의 빈집은 약 820만 채로, 전체 주택의 13.5%에 달하는 지경이었다.

고베의 경우에는 그래도 제법 규모가 있는 도시라서 폐가가 급격히 늘어나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렇더라도 지금처럼 주인이 없는 낡은 집은 쉽게 팔리지 않는 게 사실이었다.

“팔려고 내놓은 집이라면 잠깐 안에 들어가서 살펴봐도 될까요? 혹시 누가 열쇠를 가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의 물음에 옆집 노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열쇠라면 내가 가지고 있기는 한데, 정말 사시려고요?”

“전체적으로 수리를 다시 해야겠지만 그래도 위치하고 면적이 마음에 들어서요. 그래도 일단은 집을 둘러봐야 결정을 할 수 있으니까 죄송하지만 문을 열어주십시오.”

노인은 도윤의 위아래를 슬쩍 살펴보더니 그가 나이는 젊지만 제법 돈이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잠시 후, 자기 집에 들어가 맡겨놓은 열쇠를 들고 나온 그가 도윤을 도모토의 집 안으로 안내했다. 방 여기저기에 버려진 채로 놓여 있는 가구들의 서랍을 일일이 열어보고 창고까지 살펴본 그가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집이 지금 얼마에 나왔습니까?”

도윤의 물음에 슬쩍 그의 눈치를 살핀 노인이 손가락 다섯 개를 폈다.

“이 집이 비록 오래되고 낡기는 했지만 그쪽 말마따나 위치가 좋고 면적이 넓어서 아주 싸지는 않아요. 정말 살 마음이 있다면 5천만 엔은 내야 할 거요.”

5천만 엔이면 원화로 5억 원이 넘는 돈이다. 하지만 도윤에게는 큰 부담이 되지 않는 액수였다. 그는 당장 집을 구입할 수도 있었지만 일단 노인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시하고는 그곳을 떠났다. 그런 다음에 곧바로 예전에 인연을 맺었던 권춘강을 찾아갔다.

“이게 누구야? 자네가 고베에는 어쩐 일인가? 연락도 없이 온 걸 보니 나를 보려고 일부러 들른 건 아닐 테고 여기서 또 뭔가를 감정할 일이라도 생긴 거야?”

정말 오랜만에 보는 권춘강은 전보다 약간 기운이 빠진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정정했다. 도윤은 그에게 간단히 인사를 한 뒤 그를 앞세워 아오키 고스케의 골동품 가게를 찾아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의 가게에는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를 묻는 그를 향해 권춘강이 혀를 찼다.

“고스케 녀석이 가게를 그만 뒀어. 자네가 이곳에서 고흐의 해바라기를 발견했다는 소문이 퍼진 뒤로 기자들은 물론이고 별별 양아치 같은 녀석들까지 몽땅 몰려들어서 시도 때도 없이 가게를 기웃거리기 시작했거든. 장사도 되지 않는데 불청객들만 자꾸 오니까 결국 가게를 접기로 했어. 아오키도 자네 덕분에 먹고 살기 위해 장사를 할 필요는 없어졌잖아?”

결국 그로 인해 아오키 노인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가게를 접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속으로 미안함을 느낀 그는 권춘강과 함께 가게에 딸린 그의 집 문을 직접 두드렸다. 잠시 후 문을 열고 나온 아오키 노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누군가? 이 박사 그동안 잘 지냈어? 만나서 정말 반갑네.”

자신으로 인해 가게까지 접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오키 노인은 그를 진심으로 반겨주었다. 혹시나 은근히 자신을 원망하지 않을까 걱정하던 도윤의 얼굴도 밝아졌다. 그는 이 외로운 노인에게 선물을 하나 더 주기로 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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