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도윤이 고베에서 고흐의 해바라기를 구입해서 그보다 훨씬 비싼 값에 되팔았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그 때문에 그림의 원 주인이 몹시 억울해 할 거라는 얘기가 잠시 입소문을 타기도 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그는 아오키에게서 그림을 사기 전에 경매에 붙일 경우 훨씬 비싼 값에 팔릴 거라는 점을 여러 차례 일러주었다. 아오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그림을 넘기는 쪽을 택했다.
그는 그림을 사고 파는 과정에서 시종일관 도윤에게 아무런 불만이 없었고, 도윤은 나중에 잘츠부르크의 조카에 관련된 일을 해결해줌으로써 또 한 번 그에게 보답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제 다시 한 번 작지 않은 선물을 안겨주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았다.
“사실 그때 어르신이 아니라 조카 분을 위해 집을 사준 게 조금 마음에 걸렸습니다. 정작 보답을 받아야 할 분은 어르신인데도 말이죠. 그래서 이번에는 제가 고베에 있는 집을 하나 사서 선물하고 싶습니다. 해바라기가 너무 비싼 값에 팔려서 계속 마음에 걸렸거든요.”
도윤의 난데없는 제안에 아오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펄쩍 뛰며 그럴 필요 없다고 극구 사양했다. 하지만 옆에 있던 권춘강이 그냥 호의를 받아들일 것을 강권했다.
“그렇잖아도 가게도 닫은 김에 아예 새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고 전부터 노래를 불렀잖아? 저 친구가 새 집을 사서 자네 마음에 들도록 싹 뜯어고치겠다고 했으니까 그냥 고맙게 받아들여. 그래야 이 박사도 마음이 편할 거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집을 선물로 받는 건 너무 과해. 내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이 박사 돈 많아. 자네한테는 과할지 몰라도 저 친구한테는 과한 게 아니야.”
권춘강이 그렇게 자꾸 권하는 것은 도윤으로부터 미리 들은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도모토의 집을 반드시 사들여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걸 자신의 명의로 하는 건 곤란했다. 나중에라도 일본 정부에서 이상하게 생각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도윤의 거듭된 권유와 권충강의 부추김 덕분에 아오키는 몹시 미안해하면서도 그의 선물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무려 5천만 엔이 넘는 선물이었으니 확실히 과하기는 했다.
아오키가 감사의 마음이 듬뿍 담긴 결심을 하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중간에 권춘강이 나서서 미국에 산다는 도모토 히로꼬와 여러 차례 전화를 했고, 임자가 나섰다는 소식에 급거 귀국한 그녀는 별다른 흥정을 할 생각도 없이 선선히 계약에 임하는 아오키의 태도에 살짝 놀라기까지 했다.
미리 전화를 통해 가격과 조건을 모두 조율해 놓았기 때문에 계약은 빠르게 끝났다. 불과 일주일도 안 되는 사이에 그녀의 집이 아오키의 소유가 된 것이다. 그리고 계약이 끝나자마자 도윤은 본격적으로 도모토의 집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게 이쪽에 있었지?”
그는 계약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수리를 위해 견적을 뽑아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옆집 노인으로부터 미리 열쇠를 넘겨받았다. 덕분에 계약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모토 유키히로가 남긴 자료의 일부를 찾아 둔 상태였다. 이제는 좀 더 철저한 수색을 하는 것과 동시에 이미 발견한 자료의 내용을 상세히 파악해야 할 차례였다.
도모토의 집에는 오래된 책과 여러 가지 문서를 담은 상자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무슨 일이든 꼼꼼하게 기록을 남기는 일본인들의 버릇과 여간해서는 물건을 버리지 않는 예전 세대의 습관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도윤은 그 안에서 오래 된 금전출납부에 기록된 뇌물 수수 장부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문서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이건 진짜 엄청나네. 일본 사람들이 다 이런 건가, 아니면 이 사람만 특이한 건가?”
문서들을 살피던 도윤은 생각보다 엄청난 자료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혀를 내둘렀다. 그 중에는 반드시 비밀문서로 분류되어 따로 보관하거나 진즉에 폐기되었어야 할 것들도 적지 않았다. 아마 본래의 주인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미처 처리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일본 사람들은 속마음과 겉마음이 서로 다르다더니 진짜 조심해야 할 사람들이네.”
그게 문서를 검토한 도윤의 감상이었다. 문서의 내용에 의하면 프랑스 정부에 대한 일본 측의 로비는 예상했던 것보다 오래 전부터 끈질기게 지속되었다. 당시의 일본 정부는 국가 통치 기구가 아니라 무슨 마피아 조직이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만큼 엄청난 금액이 로비 자금으로 사용됐다는 사실이 장부에 똑똑히 적혀 있었던 것이다.
도윤이 발견한 금전출납부에는 일본 정부가 언제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돈과 선물을 건넸는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도모토 유키히로는 일본 대사를 통해 전달받은 지시들이 적힌 메모는 물론이고 프랑스 정부 인사들이 건넨 편지들까지도 모조리 모아두었다. 이 정도면 거의 직업적인 스파이가 아니었을까 의심이 될 정도였다.
일본에 머물면서 며칠 동안 자료를 검토하고 스캔 작업까지 완료한 도윤은 먼저 파리에 있는 뒤브아에게 연락을 취했다.
“도모토 유키히로가 남긴 자료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내용을 살펴보니까 이거 다 발표하는 건 곤란하겠는데요? 저는 일단 내일 한국으로 돌아갈 겁니다. 그 전에 스캔을 한 이미지 파일을 보내드릴 테니까 검토가 끝나면 공개하기 전에 먼저 연락을 주십시오.”
아오키가 원하는 대로 새집을 완전히 수리하고 리모델링 할 업체까지 구해준 도윤은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그를 뒤로 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이르쿠츠크로 간 석훈과 연락을 취하며 다시 업무에 복귀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뒤브아가 전화를 걸었다.
“말씀대로입니다. 보내주신 자료의 내용이 제가 가지고 있는 조르주 브렐의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나던데요? 당장 드는 생각으로는 혹시 공개하더라도 마쓰가타 컬렉션에 관한 것으로 한정시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자료를 모두 살펴본 뒤브아는 그걸 그대로 공개했다가는 프랑스와 일본 양국 모두가 관련된 엄청난 스캔들로 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기자의 입장에서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마땅히 공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경우 감당해야 할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게 뻔했다.
“저도 저지만, 스캔들이 너무 커지면 이 박사가 추진하고 계신 일에도 오히려 악영향을 끼칠 소지가 다분합니다. 나중이라면 몰라도 당장은 조율을 좀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도윤도 뒤브아의 견해에 동의했다. 마음 같아서는 나중이 어떻게 되는 크게 한 방을 먹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협상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어느 정도는 빠져나갈 구멍을 열어두어야 한다. 궁지에 물린 쥐는 고양이도 물어뜯는다고 하지 않는가? 더구나 일본은 너무 큰 쥐였다.
결국 말레 회장과 민경훈 관장하고도 은밀하게 논의를 주고받은 끝에 자료 공개의 범위와 일을 진행시킬 순서를 세세하게 결정하고 나서야 전체적인 계획을 완성할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말레 회장이 파리의 법원으로부터 드골 대통령의 서명이 적힌 행정명령서의 원본을 공개적인 감정에 붙이라는 명령을 얻어냈다. 미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던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권위 있는 필적 감정가들을 동원시켜 원본의 감정에 들어갔고, 오래지 않아 명령서에 적힌 드골의 사인이 가짜라는 감정의견서를 얻어냈다.
각 언론들은 그 사실을 대서특필했고, 잊을 만하면 다시금 세간의 화제로 떠오르는 이슈로 인해 프랑스 정부도 골치가 아파졌다.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자니 여론이 너무 뜨거웠고, 그렇다고 구체적인 액션을 취했다가는 일이 너무 커질 우려가 컸다. 일본 정부 역시 되도록 공개적인 언급을 회피하면서 상황이 진정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분위기가 그렇에 다소 애매모호하게 흘러가고 있을 무렵, 도윤이 다시 일본 땅을 밟았다. 그는 공항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도쿄 국립박물관을 찾아갔다. 전화를 통해 그곳의 관장과 약속을 잡아두었던 것이다.
야마모토 다카히로 관장은 도쿄대 출신의 역사학자였는데, 지금까지 십 년 가까이 관장 직을 지켜온 저명 인사였다. 그 역시 도윤의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왜 갑자기 그가 자신을 보자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얼굴을 맞대는 그 순간까지도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도윤이 청천벽력 같은 폭탄을 떨어트렸다.
“야먀모토 다카히로 관장님. 오구라 컬렉션을 한국에 반환해 주십시오. 반환이 아니면 기증이라도 좋습니다. 그럼 제가 책임지고 마쓰가타 컬렉션을 프랑스에 돌려줘야 하는 문제를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난데없는 얘기에 한참 동안 그의 눈을 멀뚱멀뚱 쳐다보던 야마모토 관장이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오구라 컬렉션을 한국에 기증해 달라고요? 그건 개인 재산인데 이제 와서 왜 무작정 달라는 겁니까? 그리고 마쓰가타 컬렉션을 프랑스에 돌려준다는 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군요.”
“오구라 컬렉션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소장하고 있는 곳이 도쿄 국립 박물관이이기 때문에 이곳을 방문한 겁니다. 개인 재산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가운데는 사실 정당한 방법으로 수집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훔쳐간 것도 적지 않죠. 양국 관계를 위해서라도 훔쳐간 것은 주인에게 돌려줄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제 생각과는 많이 다르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이 박사에게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젊지만 꽤 현명한 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보니 무례하기 짝이 없으시네요. 방금 한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할 테니까 돌아가십시오.”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지? 사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도윤은 씩 웃으면서 그에게 USB 하나를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뒤브아가 고르고 골라서 추려낸 문서 자료의 일부가 담긴 USB였다.
“며칠 뒤에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이 자료를 충분히 검토해 보시고 그 전에라도 혹시 생각이 바뀌시면 먼저 연락을 주셔도 좋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자면 관장님 혼자 보지 마시고 정부 관료를 비롯한 관계자들과 함께 검토하시기 바랍니다.”
야마모토 관장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붉어졌지만 도윤은 곧바로 등을 돌려 그의 방을 나왔다. 일본 측의 반응은 생각보다 빨리 나타났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발신인이 표시되지 않은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휴대폰을 켜자마자 일본어가 들렸다.
“이도윤 이사장님이시죠? 총리실 비서인 다부세 유키라고 합니다. 잠깐 뵀으면 하는데 혹시 일본에 들르실 시간이 없겠습니까? 일정이 어려우시다고 하면 제가 한국으로 직접 가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럼 그런 말을 하기 전에 먼저 한국에 와서 전화를 걸던가? 도윤은 자신이 도쿄로 가겠다고 얘기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직은 여유를 부린단 말이지? 그 여유가 언제까지 가나 한 번 두고 보자.
* * *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석훈은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조민아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몇 시간이나 밖에 나갔다가 돌아왔다.
“말도 없이 어디 갔었어요? 선배는 러시아어를 하나도 할 줄 모르잖아요? 혼자 돌아다니다가 괜히 길이라도 잃으면 어떡하려고 그랬어요?”
조민아가 약간 잔소리가 섞인 질문을 했지만 그는 씩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날 하루를 호텔에서 보낸 두 사람은 이튿날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무사히 트럭을 인수받았다. 모스크바에서부터 이르쿠츠크까지 무려 일주일에 걸쳐 대형 컨테이너 트럭을 몰고 온 사람은 경험 많은 러시아 운전수와 미래전자 모스크바 지사의 직원이었다.
차를 몰고 온 미래전자 직원이 석훈에게 컨테이너 트럭을 넘기면서 슬쩍 물었다.
“도대체 안에 든 게 뭡니까? 설마 위험한 물건이 들어있는 건 아니죠?”
컨테이너의 문은 비밀번호를 눌러야 열 수 있게 되어 있었는데, 정작 차를 몰고 온 직원은 그 번호를 몰랐다. 컨테이너의 비밀 번호는 모스크바 지사의 지사장과 서울에서 미리 연락을 받은 석훈과 조민아 세 사람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안에 든 내용물이 뭔지 차를 몰고 오는 내내 몹시 궁금했던 모양이다.
“러시아에서 요즘 핵폭탄을 싸게 판다고 해서요. 쌀 때 하나 사두기로 했습니다.”
태연하게 대답하는 석훈의 말에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짓던 직원이 피식 웃었다.
“알겠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묻지 않은 걸로 해주세요. 그럼 수고하십시오.”
이르쿠츠크까지 차를 몰고 온 러시아 운전사와 미래 전자 직원은 비행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그들로 부터 켄터이너 트럭을 인수받은 석훈은 한적한 곳까지 차를 몰고 간 후 안에 있는 내용물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하지만 필요한 물건들이 빠짐없이 도착했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도 그는 그날 해가 저물 때까지 이르쿠츠크를 떠나지 않았다.
“트럭을 받고 나서 바로 출발하는 거 아니었어요? 왜 출발 안 해요?”
조민아가 약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그제야 석훈이 입을 열었다.
“원래는 그래야 하는데, 여길 떠나기 전에 한 가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
“이르쿠츠크에서요? 이사장님한테 따로 지시받은 거라도 있어요?”
“아니. 하지만 이곳에 도윤이 형하고 형수님한테 아주 큰 빚을 진 놈이 있거든. 내가 몰랐으면 몰라도 결국 알았잖아.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빚은 갚고 가야지. 형은 그냥 잊어버리려고 하는 모양이지만 내가 잊지를 못하겠어.”
“그러니까 그 빚이 뭐냐고요.”
석훈의 얘기를 들은 조민아는 크게 놀라며 이를 갈았지만 그래도 그를 말렸다. 그러나 석훈의 고집은 완강했고, 결국 그녀도 작전에 동참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석훈은 이르쿠츠크에 위치한 렌터 카 회사의 야외 주차장으로 몰래 숨어들었다. 어제 트럭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면밀하게 사전답사를 해두었던 곳이다.
도윤이 과거 차를 빌렸던 렌터카 회사는 이르쿠츠크에서도 비교적 큰 곳이었다. 그래서 야외 주차장에 수십 대의 차를 항상 주차시켜놓고 있었는데, 편의를 위해 자체 급유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혹시 모를 도둑을 감시하기 위해 주차장 곳곳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해 놓았지만, 석훈은 그 카메라들을 피해 먼저 경비실에 먼저 잠입했다.
렌터카 회사의 경비실에는 야간 근무조 한 명 만이 졸다 깨다 하면서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었다. 석훈은 그의 눈이 완전히 감기는 것을 확인한 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경비원의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쳤다.
“컥!”
눈을 감고 졸고 있던 경비원은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그대로 정신을 잃고 책상 위에 엎어졌다. 그의 호흡을 확인한 석훈은 경비실의 스위치를 조작해서 주차장을 비추던 감시 카메라를 모조리 껐다. 그런 다음 어두운 주차장으로 접근했다.
주차장에 있던 급유기는 제법 성능이 좋은 것이었다. 석훈이 노즐을 들고 급유기를 켜자 마치 소방호스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듯이 어두운 허공을 가른 휘발유 줄기가 주차장 곳곳에 뿌려지기 시작했다. 주차 중인 차에 휘발유가 골고루 뿌려진 것을 확인한 그는 미리 준비한 두루마리 화장지를 꺼내 중앙의 심에 돌멩이를 박아 넣었다.
“당신은 도윤이 형하고 형수를 그런 식으로 팔아넘기면 안 됐던 거야.”
장갑을 낀 석훈이 화장지를 손에 들고 불을 붙인 뒤 그것을 멀리 던졌다. 안에 박아 넣은 돌멩이 때문에 멀리 날아간 화장지가 땅에 닿자마자 사방에 불길이 확 일었다. 그는 순식간에 불바다가 된 주차장을 뒤로 하고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그런 다음 미리 트럭에 시동을 걸어놓고 기다리고 있던 조민아와 합류했다.
“그 사장이라는 사람은 이제 완전히 망했네요.”
조민아가 불바다가 된 주차장을 쳐다보며 혀를 찼다. 그런 그녀를 향해 피식 웃어준 석훈이 핸들을 꺾어 그 자리를 떠났다.
“주차장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어. 경비실도 주차장의 불길이 미치기에는 너무 멀고. 어쨌든 사람이 다치지는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마음 같아서는 잡아서 반쯤 죽여 놓고 싶은 걸 그나마 이 정도로 참아준 거야. 병신이 되는 것보다는 재산을 잃는 게 낫잖아.”
정작 렌터카 회사 사장이 들으면 뭐라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석훈 나름대로 사정을 봐 준거라는 데에는 조민아도 동의했다. 그가 정말 마음먹고 손을 썼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대충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도윤이 형한테는 말하지 마. 굳이 알릴 필요 없을 테니까.”
멀리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방차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석훈이 툭 내뱉었다. 조민아도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이 과거 이곳에서 겪은 일 때문에 가장 화를 냈던 부분은 바로 최서라까지 죽을 뻔 했다는 사실이었다. 석훈으로서는 그 보복을 한 셈이지만 사실 그가 한 짓은 명백한 불법이고 범죄였다. 그런 걸 굳이 도윤에게까지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나도 평소에는 법 잘 지켜. 하지만 사람 목숨이 위험해지는 순간부터는 법보다 주먹이 먼저인 거야.”
그에게 있어서 러시아의 법보다는 도윤의 안전과 행복이 우선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