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이르쿠츠크를 빠져나온 석훈과 조민아는 이틀을 달려서 과거 도윤이 SUV를 숨겼던 곳 근처에 도착했다. 도윤으로부터 현장에 시체가 있을 거라는 경고를 들었던 터라 두 사람은 컨테이너 트럭을 그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웠다. 그러고 나서 산악용 바이크를 이용해서 일단 산속으로 진입한 뒤 적당한 장소에 텐트를 치고 야영했다.
바이크에 짐을 실을 공간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차에 비해 짐을 실을 공간이 훨씬 작았다. 반면에 옮겨야 할 장비 중에는 압축공기통을 비롯한 스쿠버 장비가 포함되어 있었고, 소형이기는 하지만 발전기와 굴착기까지 옮겨야 했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은 며칠 동안 무려 세 차례에 걸쳐 컨테이너 차량과 칭기즈칸의 무덤이 있는 분지를 왕복해야 했다.
트럭에 있던 장비들을 칭기즈칸의 무덤으로 통하는 물웅덩이 옆에 모두 옮기고 나자 벌써부터 진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아직 무덤 속에는 들어가지도 않은 상태였다. 두 사람은 웅덩이 옆에 커다란 텐트를 설치해서 그곳에 짐을 모두 집어넣었다. 그러고 나서 자신들의 텐트 앞에 조그만 모닥불을 피우고는 식사를 준비했다. 먼 산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사장님은 정말로 그 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리고 올 생각이래요?”
식사 후에 나란히 붙어 앉아 커피를 끓여 마시던 조민아가 문득 물었다.
“데리고 올 생각이니까 우리더러 이렇게 공들여 준비를 하라고 시켰겠지. 안 그러면 구태여 이 고생을 할 이유가 뭐 있겠어?”
심드렁한 석훈의 대답이 못마땅했는지 조민아의 입술이 뾰족 튀어나왔다.
“뭐 예쁜 사람들이라고 애써 발견한 곳으로 데리고 와요? 그냥 모른 척 하면 되지. 이 안에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보물들도 많다면서요?”
“도윤이 형 말에 의하면 어차피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보물이 아니야. 섣불리 욕심을 냈다가는 탈이 날게 분명한 물건들이라고.”
콜롬비아에서 발견한 에스코바르의 동굴 속에 남아 있던 물건들만 해도 그 일부를 몰래 빼돌리기 위해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작전을 써야 했다. 칭기즈칸의 무덤을 혼자서 독차지하려고 덤벼들었다가는 분명히 탈이 날 거라는 게 도윤의 생각이었고, 석훈 역시 그 생각에 전적으로 동원했다. 이건 함부로 욕심을 낼 물건이 아니었다.
“그럼 러시아든 몽골이든 아무 쪽에나 무덤의 발견 사실을 통보하고 손 떼는 게 가장 편하지 않아요? 왜 이렇게 귀찮은 일까지 벌여가면서 그 사람들을 불러들이려는 거예요?”
조민아의 질문은 타당했다. 그게 가장 편하고 깨끗한 방법이다. 심지어 칭찬까지 들을 수 있는 일이다. 석훈은 그녀의 말을 듣고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는 도윤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민아에게 그걸 속속들이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아직 에스코바르의 동굴에서 있었던 일조차 조민아에게 얘기한 적이 없었다. 이번 일 역시 모든 게 끝날 때까지는 자세한 내용을 밝힐 수 없을 것이다. 명색이 결혼을 약속한 사람인데도 자꾸만 비밀이 늘어나는 것 같아 조민아에게 미안했다.
“이브라힘이나 리히터 회장은 물론이고 중국 공산당 상무위원이라는 그 작자도 굉장히 위험한 인간들이야. 동지인지 적인지 색깔을 분명히 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뜻이지.”
“회색으로만 남겨두면 언젠가는 큰 화가 될 사람들이라는 뜻이에요?”
“그래. 그래서 도윤이 형도 이번 일을 통해 그 점을 분명히 할 생각일 거야.”
“그럼 그 사람들은 적이 될 거 같아요, 아니면 동지가 될 거 같아요?”
“그거야 저쪽에서 하기 나름이지. 우리는 그에 따라 대응할 수 있을 뿐이야.”
사실을 솔직히 말하면 도윤의 태도와 생각은 이미 정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차마 지금 얘기하기가 곤란했다.
“그만 자자. 내일부터는 좀 바빠질 거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해.”
석훈은 사방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서둘러 주변을 정리하고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한 여름인데도 시베리아 한 복판에서 맞이하는 밤은 여전히 쌀쌀했다.
* * *
“도쿄 국립박물관의 야마모토 관장님도 자리를 함께 하실 겁니다. 다만 저희들이 만난다는 사실은 가급적 다른 사람들에게 밝히지 말아주십시오.”
도쿄로 떠나기 전, 다부세 유키라는 총리 비서가 전화로 알려온 말이었다. 전화를 받은 도윤은 고개를 갸웃했다. 야마모토 관장이 참석한다고?
“그럼 저도 국립 박물관의 민경훈 관장님을 모시고 가야 하겠군요. 제가 잘 판단이 서지 않아서 묻는 건데, 다부세 비서께서는 어느 정도의 권한을 가지고 나오시는 겁니까?”
“저는 아무런 공식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차피 오구라 컬렉션 반환 문제는 두 관장님들이 논의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제가 이 박사께서 하시는 말씀을 수상님께 전해드릴 수는 있겠죠.”
그렇단 말이지? 이 친구들 아직 여유가 있네?
전화를 끊은 도윤은 국립 박물관의 민경훈 관장을 찾아갔다. 그가 사정을 전하고 일본으로 함께 가자고 부탁하자 민경훈은 흔쾌히 동행을 수락했다. 저쪽에서 국립박물관장이 나온다고 하니 이쪽에서도 격을 맞춰주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도윤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틀 후, 도윤과 민경훈은 도쿄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양쪽이 무릎을 맞대고 마주앉은 곳은 정부 청사나 도쿄 국립박물관이 아닌 호텔의 객실이었다. 일본 쪽에서 처음부터 이 자리를 공식적인 만남으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도윤은 그들의 속셈이 손에 잡히는 듯해서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다부세 유키입니다. 현재 총리 비서실에서 근부하고 있죠. 이쪽은 도쿄 국립박물관의 야마모토 관장이십니다. 한국의 국립 박물관장님과 세계적인 감정가를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서윤 문화재단의 이도윤입니다. 이 분은 한국의 국립박물관의 민경훈 관장님이시고요. 저도 두 분을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첫 인사는 건조하고 의례적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네 사람이 서로 인사를 나눈 뒤 자리에 앉자마자 민경훈이 제일 먼저 말을 꺼냈다.
“제가 일본 정부와 도쿄 국립 박물관 측에 오구라 컬렉션의 반환을 요청한 게 이번으로 세 번째입니다. 하지만 총리실에 계신 분의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군요. 드디어 일본 정부에서도 공식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봐도 될까요?”
그는 도윤이 프랑스로 가기 전에 국립 박물관의 이름을 내걸고 정식으로 문화재의 반환을 요구하는 서신을 도쿄 국립박물관으로 보냈다. 그들의 대답은 예전처럼 ‘고려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태도를 바꿔 만남을 요청하자 그 이유를 물은 것이다.
그의 질문에 야마모토 관장이 대답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다부세 비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 쪽의 공식적인 답변은 예전과 동일합니다. 일본 정부에서는 그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의견 자체가 없지만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도쿄 국립박물관 측은 절대불가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요. 다만 총리께서 이번에 개인적으로 약간의 관심을 표명하셨습니다.”
“개인적인 관심이라…. 그래서 만나는 장소도 호텔 밀실로 잡은 겁니까?”
“아무래도 기자들 눈에 띄기라도 하면 불필요한 오해를 살 우려가 있으니까요.”
민경훈은 나지막하게 코웃음을 쳤다. 상대의 대답으로부터 그들이 어떤 생각으로 이 자리에 나왔는지 대충 눈치를 챈 것이다. 그는 도윤이 물밑에서 정확하게 어떤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도쿄 국립박물관 측의 태도에 변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총리 비서가 나섰다는 것은 도윤이 뭔가 저들의 약점을 쥐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는 오늘 이 자리에서 되도록 말을 삼가기로 결심했다. 도윤이 들고 있는 패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가 미리 자신에 귀띔을 하지 않은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도윤을 믿었다. 따라서 오늘 대화는 자신이 아니라 도윤이 주도하게 내버려두는 게 나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런데 그런 그의 결심이 하마터면 초장부터 무너질 뻔 했다. 양쪽의 대화가 잠시 끊어진 틈을 타서 야마모토 관장이 재빨리 끼어든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든 자신들이 점령하거나 지배했던 나라로부터 가져온 문화재를 돌려준 경우는 없습니다. 더구나 오구라 컬렉션은 약탈 문화재가 아닙니다. 정당하게 돈을 주고 구입해서 소장하던 것이니까요. 그걸 자꾸 반환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국제적인 관례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우리 박물관에서는 정당한 개인 수집품을 한국에 돌려줄 수 없습니다.”
민경훈이 발끈해서 하마터면 고함을 지를 뻔 했다. 그가 막 입을 열려는 찰나, 도윤이 테이블 밑으로 민경훈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러고는 자신이 먼저 야마모토의 말을 반박했다.
“약탈 문화재를 돌려준 사례가 없다는 건 잘못 알고 계신 것 같군요.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고고학 박물관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파르테논 신전의 소벽 일부를 2006년에 그리스로 반환했습니다. 이탈리아 역시 1937년에 약탈했던 악숨 제국의 오벨리스크를 2005년에 에티오피아로 반환했고요. 멀리 갈 것도 없이 일본 역시 1864년에 시모노세키 전쟁으로 빼앗겼던 조슈 번의 대포 1문을 1984년에 프랑스로부터 돌려받지 않았습니까?”
그의 날카로운 지적에 야마모토가 얼굴을 붉히면서 헛기침을 했다. 야마모토는 상대가 연도와 물품까지 일일이 거론하며 반격을 가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건 말 그대로 남의 나라에 침략해서 문화재를 약탈한 사건이 아닙니까? 하지만 오구라 컬렉션은 아까 말씀드렸듯이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고 수집한 개인 소장품입니다. 저희 박물관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그걸 기증받은 것일 뿐입니다.”
도윤은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야마모토 관장의 말은 구차한 변명에 불과했다.
“오구라는 자신의 컬렉션 하나하나에 대해 일일이 소장 경위를 기록해 두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오구라 목록이지요. 그에 따르면 조선대원수 투구와 갑옷, 주칠12각상 등은 명백하게 경복궁에 난입해서 함부로 밀반출한 것일 텐데요? 도쿄 박물관에서는 그 목록의 존재를 알면서도 구태여 새로운 목록을 작성하는 방식으로 출처를 지운 것 아닙니까?”
사실이었다. 가령 오구라 목록에는 주칠12각상의 출처가 ‘민비가 살해된 곳에서 입수’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현재 도쿄 국립박물관의 소장 목록에서는 그 부분에 대한 기록을 아예 누락시켰다. 그 밖에도 도굴이 명백한 금관총 유물 등에 대해서도 고의적으로 출처를 변경하거나 누락시키는 등의 얄팍한 술수를 부렸다.
말문이 막힌 야마모토 관장이 입을 다물자 도윤의 시선이 다부세 비서에게로 향했다.
“사실 언론에 대고 떠들게 아니라면 이 자리에서 구차하게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변명을 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서로 무엇이 진실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것보다는 총리 비서께서 이 자리에 나오신 이유가 더 궁금합니다. 왜 저를 보자고 하신 거죠?”
그의 말에 다부세가 짐짓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현재 프랑스에서 마쓰가타 컬렉션에 대해 불순한 여론이 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총리께서도 그 일 때문에 몹시 불편해 하고 계시지요. 그런데 얼마 전에 야마모토 관장님으로부터 이 박사께서도 그에 관한 자료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불순한 여론이라고? 도윤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맞습니다. 어쩌다 보니까 우연히 손에 넣게 되었지요.”
“우연히 손에 넣었다라…. 죄송하지만 그걸 어떻게 입수하게 됐는지 알 수 있을까요?”
“말 그대로 우연이었습니다. 제가 고베에서 고흐의 해바라기를 발견해서 소더비 경매에 올렸던 일은 혹시 알고 계십니까?”
“워낙 유명한 사건이라 저도 들었습니다. 저희로서는 일본 땅에 있던 명작이 외국으로 반출된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라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건 반출이라고 하지 않고 판매라고 하죠. 오구라 컬렉션이 일본 땅으로 들어간 게 바로 밀반출이고요. 아무튼 원래 해바라기를 가지고 계셨던 분에게 귀한 작품을 넘겨주신 보답으로 고베에 있는 집을 한 채 사드렸습니다.”
“집을 선물로 드렸단 말입니까?”
“네. 근데 하필 그 집이 과거 주 프랑스 일본 대사관에서 서기관으로 근무하던 도모토 유키히로라는 분이 살던 곳이었습니다. 집을 사서 리모델링을 하기 위해 내부를 정리하다 보니까 생각지도 못했던 문서가 나오더군요. 내용을 확인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리 집을 사셨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있는 원주인의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시면….”
“그 부분에 대해 일본 변호사로부터 법률적인 자문은 받았습니다. 일본 법에 따르면 그 문서는 전적으로 집을 산 사람의 소유라고 하더군요. 어차피 매매 계약서에도 집에 있던 가구를 비롯한 일체의 물품에 대한 소유권을 함께 넘긴다는 조항을 넣기도 했고요.”
다부세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야마모토 관장을 통해서 전달된 문서를 이미 확인했다. 그 결과 거기에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밝히고 싶지 않은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 불법 점유나 절취를 문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찔러봤는데, 상대는 미리 그 부분에 대한 조치를 취해 놓고 있었다.
“제가 이번에 얻은 문서 가운데 일부를 사진 찍어서 야마모토 관장님에게 보내드렸습니다.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 다부세 비서께서도 그 자료를 보신 모양이군요. 혹시 총리께서도 그 자료를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뭐라고 하셨을지 궁금하네요.”
도윤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맺혔다. 그것을 힐끗 살핀 다부세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총리께서는 아직 자료를 보지 못하셨습니다. 진위 여부가 확실하지 않은 자료까지 검토하기에는 너무 바쁘신 분이라서….”
거짓말! 눈치를 딱 보니 이미 봤는데 뭘.
“사실 야마모토 관장님께 보내드린 자료는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의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자료들 중에는 아무한테나 함부로 보여주기에는 좀 곤란하다 싶은 것들이 있어서요. 그래서 그 가운데 몇 개를 따로 가지고 왔습니다. 한 번 보시죠.”
도윤이 씩 웃으며 가방에서 몇 장의 종이를 꺼냈다. 원본을 스캔해서 프린트 한 것들인데 그 위에 다부세로서는 절대로 모른 척 할 수 없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종이를 받아들어 살펴본 그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이, 이건?”
“아마 익숙한 이름일 겁니다. 기무라 시로. 당시 주 프랑스 대사로 파견 나가 있던 일본의 외교관이지요. 동시에 현재의 수상이신 기무라 츠요시 총리의 할아버지이기도 하고요.”
다부세의 눈이 재빨리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야마모토 관장을 살폈다. 야마모토 역시 자신이 곤란한 일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안색이 좋지 않게 변한 상태였다. 다시 한 번 서류의 내용을 꼼꼼히 살펴본 다부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무라 시로님이 마쓰가타 컬렉션의 반환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시는 겁니까?”
“반환이 아니라 기증이지요. 당시 행정명령서 상의 내용으로도 그렇고 프랑스 정부 역시 시종일관 그렇게 주장하니까요. 그걸 굳이 기증이 아닌 반환이라고 우기는 것은 일본 정부밖에 없습니다. 아무튼 1959년, 마쓰가타 컬렉션이 기증될 당시에 프랑스 대사로 계셨던 분이라면 그 일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요?”
“이, 이건 모함입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그 분은 청렴하고 강직한 외교관으로 유명했던 분이에요. 그런 분이 뇌물을…, 아니 떳떳하지 못한 일을 저질렀을 리가 없습니다.”
뒤로 갈수로 다부세의 어조가 강경해졌다. 하지만 도윤은 피식 실소를 내뱉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전쟁을 일으켰던 주요 인물들 가운데 상당수가 법정에서 자신은 도덕적으로 깨끗하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모든 게 나라를 위해서였을 뿐 다른 뜻은 없었다고 말했지요. 하지만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사실은 전쟁 중에 막대한 재산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지요. 전쟁 중의 떳떳함이란 대체로 죄책감의 상실을 의미하지요.”
도윤은 잠시 차가운 눈빛으로 다부세를 쳐다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알기로 기무라 시로 전 대사께서는 당시에 이미 수억 엔의 재산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게 모두 물려받은 재산이 아니라는 건 아주 쉽게 증명할 수 있지요. 그 만한 재산을 가지고 엄청난 액수의 뇌물을 프랑스 정계에 뿌려대던 분을 과연 청렴하고 강직했다고 얘기하는 게 가능할지 모르겠군요.”
다부세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본 정부는 마쓰가타 컬렉션 반환과 관련해서 프랑스에 뇌물을 준 적이 없어요. 설사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기무라 대사께서도 그걸 주도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다부세는 자못 비분강개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도윤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어쩌면 당시 그 분은 한갓 주 프랑스 일본 대사에 불과하고 뇌물은 그보다 윗선에서 주도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일본 대사에게 뇌물을 주라고 지시했던 윗선은 도대체 누구였을까요? 적어도 문서상으로는 모든 지시를 그 분이 직접 내리신 것으로 되어 있던데 말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자료를 가지고 계신 겁니까??”
“글쎄요? 그건 차차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협상을 할 때 패를 한 번에 까는 법은 없으니까요. 제가 어떤 걸 손에 쥐고 있는지 궁금하시다면 다음에 만날 때는 조금 다른 태도로 다른 말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도윤이 민경훈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등을 돌려 나가는 뒤로 마치 만년 넘은 빙하처럼 단단히 얼어붙은 얼굴을 한 야마모토와 다부세가 서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