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도대체 왜 저를 보자고 하신 겁니까?”
낮게 깔려나오는 도윤의 목소리에 기무라 시로 수상이 움찔했다.
“이상해서 묻는 겁니다. 오구라 컬렉션은 절대로 돌려줄 수 없고 마쓰가타 컬렉션 역시 정당하게 반환받은 거라고 하셨죠? 정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굳이 저를 보자고 하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것도 APEC이라는 국제 행사로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말입니다.”
“으흠….”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은 기무라 수상이 멋쩍게 헛기침을 했다. 도윤의 말이 사실이었다. 기무라 수상이 조금 전에 한 말이 모두 확신에서 나온 것이라면 굳이 도윤을 만나자고 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밤늦은 시각에 남의 눈을 피해가면서까지.
“수상께서는 이 박사가 보낸 자료가 자칫하면 사람들에게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보자고 하신 겁니다.”
다부세 비서가 얼른 나서서 수상을 변호했다. 하지만 도윤은 코웃음을 쳤다.
“오해라고요? 오해라는 건 사실을 잘못 알 거나 진실이 왜곡될 때 생기는 겁니다. 하지만 제가 보내드린 자료의 내용들은 모두 사실입니다. 보셨으니 알 텐데요? 그 자료가 대중에게 공개될 경우 어떤 일이 생길지 정말 모르시겠습니까? 지금 상황을 잘못 판단하고 진실을 왜곡시키려고 하는 건 두 분이에요. 제가 아니라.”
그가 매섭게 몰아치자 기무라 수상의 얼굴이 붉어졌다. 부끄러워서 그런 게 아니다. 자신은 한 나라의 정치적 수장인 수상이다. 그런 그의 기준으로 볼 때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고는 해도 도윤은 아직 새파랗게 젊은 놈에 불과했다. 그런 녀석이 자신의 앞에서 눈을 똑바로 뜨고 마구 몰아세우자 민망한 건 둘째 치고 무엇보다 화가 났다.
“1950년대 당시, 일본 정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부당하게 압류된 일본인의 재산을 반환해달라고 프랑스 정부에 요청했습니다. 드골 대통령은 그 요청을 받아들여 마쓰가타 컬렉션을 돌려주라는 행정명령서에 직접 사인을 했고요. 그렇게 해서 고인이 살아생전 수집했던 걸작들이 무사히 일본 땅에 돌아온 겁니다.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까?”
기무라가 짐짓 엄숙한 목소리를 꾸며내며 말했다. 자기 딴에는 위엄을 갖춘 모습을 연출하려고 애를 쓴 것이었지만, 도윤에게는 그런 상대의 모습이 마치 가부키 배우의 과장된 연기처럼 보였다.
‘놀고 있네. 정치를 하지 말고 차라리 연극배우로 나서지 그러셨어?’
그는 기가 차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쓰가타 컬렉션은 애초에 부당하게 압류된 게 아닙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라 프랑스 정부가 전승국으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행사한 거지요. 수상께서는 일본 내각의 수장이십니다. 그런 분이 지금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부정하시는 겁니까?”
기무라가 뭐라고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얼른 헛기침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스스로도 말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너무 나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행정명령서에 적힌 드골 대통령의 사인은 위조된 것입니다. 프랑스 신문에 보도된 내용을 보셨다면 잘 알겠지만 그 사실은 이미 입증되었어요. 누가 서명을 위조했는지, 그리고 그 사람이 왜 대통령의 서명을 위조하는 황당한 짓을 저질렀는지까지 모두 밝혀졌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아직 공식적으로 그 보도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기무라 수상이 얼른 반박했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미한 저항에 불과했다.
“하지만 부정도 하지 않고 있지요. 정부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공식적으로 부정적인 논평을 내지 않는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는 저보다 수상께서 더 잘 아실 겁니다. 제 짐작이 틀림없다면 프랑스 정부는 조만간 드골 대통령의 사신이 위조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어쩌면 마쓰가타 컬렉션의 반환을 요구할지도 몰라요.”
기무라 수상이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아직 젊은 분이라서 그런지 국제 외교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걸 모르는 것 같군요. 프랑스 정부는 이미 수십 년이나 지난 일을 이제 와서 구태여 번복하려 들지 않을 거요. 또 설사 그런 요구가 있다고 해도 일본은 그런 부당한 요구에 절대로 응하지 않을 거요.”
“물론 그러시겠죠. 하지만 그럴 경우 저는 이미 보내드린 자료를 일본을 비롯해서 전 세계 주요 언론사에 보낼 겁니다. 그럼 일본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이 과거 기무라 시로 주 프랑스 대사가 외교관의 신분으로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알게 되겠지요. 그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가 과연 지금처럼 계속 모른 척 할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그런 경솔한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이건 진심에서 하는 충고요.”
“협박하시는 건가요? 대일본국 수상께서 젊은 감정가에게요? 죄송하지만 전 반드시 할 겁니다. 이건 진심으로 드리는 말입니다.”
도윤과 기무라 수상이 살벌하게 날선 눈빛으로 서로를 노려봤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맴돌았지만 그 사이에도 머릿속으로는 여러 가지 계산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기무라 수상이 천천히 씹어내듯이 말을 뱉었다.
“다른 나라 언론사들이 과연 이 박사가 보내는 자료를 믿을지 모르겠소. 내가 보기에는 그저 여기저기 떠도는 가십 거리에 지나지 않는 걸로 취급될 것 같은데.”
“죄송하지만 믿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프랑스 쪽에서 확보한 자료가 첨부될 예정이거든요. 양쪽 자료를 비교하면 최소한 기무라 시로 대사가 한 짓은 명백하게 입증될 겁니다. 그럼 그건 떠도는 이야기를 모은 가십이 아니라 역사적 사료가 되겠지요.”
“그래서 돌아가신 내 할아버님을 굳이 욕보이겠다는 거요?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오명을 쓸 게 염려되십니까? 그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걱정하셔야 될 텐데요?”
“그게 무슨 뜻이요?”
기무라 수상의 목소리에서 노골적인 살기가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윤은 이를 질끈 깨물었다. 이미 차를 몰고 고속도로로 나선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이제는 목적지까지 유턴 없이 직진할 수밖에 없었다.
“곧 중의원 선거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수상 연임에 성공하시려면 먼저 그 선거부터 이기셔야 하지 않나요? 일본 국민들이 과거사에 관대한 편이기는 해도 서양 언론에는 또 유난히 민감한 경향이 있지요. 과거 일본 정부의 행각이 만천하에 드러날 경우 부패한 외교관의 손자를 또 다시 찍어주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일본 언론에서는 이 박사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보도하지 않을 거요. 신뢰도가 극히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자료들이니까요.”
“글쎄요. 요즘은 인터넷 세상입니다. 아무리 일본이 갈라파고스처럼 다른 나라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산다고 해도 결국 국민들은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중국처럼 SNS나 검색 사이트를 완전히 통제하지 않는 이상에는 말이에요.”
기무라 수상의 낯빛이 살짝 하얘지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그의 입이 더 이상 열리지 않는 것을 확인한 도윤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주일을 기다리겠습니다. 그 전에 혹시 오구라 컬렉션을 반환하기로 마음이 바뀌시면 제가 아니라 국립박물관의 민경훈 관장님에게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연락을 주십시오. 만약 한 달 안에 오구라 컬렉션이 한국으로 반환될 경우 제가 보내드린 자료의 원본을 드리지요. 그리고 프랑스에서도 더 이상 1959년도의 일이 이슈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기무라 수상의 고개가 위로 확 젖혀졌다.
“이 박사가 프랑스의 여론을 잠재울 수 있다는 거요?”
“여론은 계속 이슈화되지 않을 경우 결국 수그러듭니다. 현재 프랑스의 몇몇 민간단체에서 마쓰가타 컬렉션의 반환을 요구하는 공식 청원서를 준비 중입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가 오구라 컬렉션의 반환을 결정할 경우 그 청원서는 프랑스 정부에 제출되지 않을 거예요.”
“그게 사실이요? 이 박사가 꽤 유명한 감정가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 정도까지 영향력이 있을 줄은 몰랐군요. 솔직히 선뜻 믿기 어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언론도 더 이상 드골 대통령의 위조 서명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겁니다. 최소한 그 일을 처음 거론했던 리베라시옹에서는 더 이상 기사를 내지 않을 거예요.”
기무라 수상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 자가 미친 건가? 일개 감정가가 어떻게 자기 나라도 아닌 프랑스에 그만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거지? 그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난 도윤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태연하지만 자신감이 넘치는 얼굴. 저게 모두 연기가 아니라면 진짜로 뭔가 있다는 얘기인데….
“설마 프랑스에서 처음 보도가 나오기 전부터 이번 일에 관여했다는 거요?”
기무라 수상이 말에 도윤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품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건넸다.
“쿠와 통신의 말레 회장님 명함입니다. 프랑스 정부와 언론, 미술계 등에 두루 영향력이 막대하신 분이지요. 드골 대통령의 위조 서명에 관한 일은 그 분이 주도하신 겁니다. 시작을 하셨고, 그걸 멈출 수 있는 힘도 가지신 분이지요. 그 분과 통화하시면 제가 드린 말이 공연한 허풍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실 겁니다.”
말레 회장과는 이미 프랑스를 떠나기 전에 말을 맞춰두었다. 자신의 말에 최소한의 신뢰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레 회장은 워낙 유명인사라 기무라 수상으로서도 모를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도윤은 그의 유명세와 영향력을 빌어 기무라 수상을 설득하기로 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일주일 안에 민경훈 관장님께 연락을 주십시오. 그리고 한 달 안에 오구라 컬렉션에 한국 땅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럼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도윤이 등을 돌리려는 찰나, 다부세 비서가 다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한 달은 너무 짧습니다. 문화재 반환이라는 게 그렇게 빨리 진행될 수가 없어요.”
도윤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한 달이 제가 드릴 수 있는 한계선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되도록 빨리 진행되는 게 좋을 겁니다. 오래 끌면 일본 내에서 불필요한 여론이 형성될 수도 있으니까요. 어차피 총선이 석 달 앞으로 다가오지 않았나요? 국민과 언론의 관심이 총선에 쏠려 있는 틈을 타서 신속하게 처리하는 게 여러분에게도 나을 겁니다. 그럼 이만.”
방을 나서는 도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기무라 수상은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다. 그는 민심을 볼모로 삼아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전형적인 정치인이었고, 그런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권력에 대한 집착이 아주 강했다. 국가와 개인의 이익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그가 어느 쪽을 택할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 * *
석훈과 조민아는 칭기즈칸의 무덤과 연결되는 물웅덩이 옆에서 무려 한 달을 보냈다. 통조림과 라면 등을 비롯한 장기 보관용 식료품을 잔뜩 가지고 왔지만 그것만으로 삼시세끼를 때우는 것은 아무리 야전 생활 경험이 풍부한 석훈이라고 해도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하물며 그런 경험이 전혀 없던 조민아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다.
“서울로 돌아가면 앞으로 통조림하고 라면은 입에도 대지 않을 거예요.”
칭기즈칸의 무덤을 떠나던 날 아침, 다시 한 번 라면을 끓여 먹은 조민아가 거의 토할 것 같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석훈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은 심정이었다.
“난 통조림을 발명한 인간을 만나면 목을 졸라버릴 것 같아.”
“발명가는 모르겠지만 통조림을 처음 군용식량으로 채택한 사람은 나폴레옹이래요.”
“난 옛날부터 나폴레옹이 싫었어.”
마지막으로 짐을 정리하기 위해 설거지를 하던 조민아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설거지 한 그릇을 깨끗이 닦아 배낭에 넣으면서 물었다.
“그런데 저건 정말 여기다 두고 가면 되는 거예요?”
그녀가 손으로 여러 가지 물건들이 쌓여 있는 대형 텐트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잠수할 때 쓰는 공기통과 거기에 압축공기를 채워 넣을 때 쓰는 공기압축기, 소형 발전기와 연료통 등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것들을 모두 다시 가지고 가야 했다면 이번에도 산악용 바이크로 트럭이 있는 곳까지 몇 번은 왕복해야 했을 것이다.
“압축기나 발전기에 쓸 연료야 도윤이 형이 이곳으로 올 때 또 가지고 오겠지만 저것들은 그냥 여기에 둬야 해. 나중에 이곳에 올 사람들은 보나마나 힘 못 쓰는 노인들일 테니까. 그 사람들은 물건을 옮기는 건 고사하고 산악용 바이크를 타는 것도 힘들어 할 걸?”
“그렇게 나이 든 양반들이 뭐 하러 이런 험지까지 꾸역꾸역 오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내 말이. 욕심이 하늘 끝까지 닿은 인간들이니 보물이라면 환장을 하는 거겠지.”
“근데 저 안에 진짜 보물들이 많아요?”
장기간의 야영 생활로 인해 얼굴에 짜증과 피로를 덕지덕지 매달고 있던 조민아도 그 말을 할 때는 호기심을 내비쳤다.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그녀는 한 번도 칭기즈칸의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도윤이 지시한 모든 작업은 오로지 석훈 혼자서 잠수복을 입고 웅덩이 속을 들락날락하면서 처리했던 것이다.
“글쎄? 나야 물건 볼 줄 아는 안목이 없으니 뭐가 보물이고 뭐가 쓰레기인지 알 수 있나? 하지만 금붙이가 많은 건 사실이야.”
“다른 거는요? 명색이 칭기즈칸의 무덤이잖아요? 얼핏 보기에는 쓰레기 같은 것도 사실은 귀한 보물일지 모르잖아요?”
“원래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물웅덩이하고 연결되는 바람에 무덤 전체가 습기로 가득 찼어. 쇠나 구리로 만든 건 녹이 잔뜩 슬었고, 종이나 천으로 된 것들도 곰팡이가 피어서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망가졌더라고.”
“그럼 결국 이사장님도 금으로 된 물건들 말고는 건질 게 별로 없겠네요?”
“그거야 알 수 없지. 내가 보기에는 완전히 망가진 것 같은 것들도 복원을 잘 하면 되살릴 수도 있을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그 문제는 도윤이 형이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꺼.”
말을 하면서도 은근히 미안했다. 그 동안 석훈은 무덤 안에 혼자 들어가 여러 가지 일을 했다. 무엇보다 중앙의 묘실로 들어가는 여러 개의 통로 가운데 하나를 뚫어놓은 게 가장 컸다. 그 일을 하기 위해 곡괭이와 삽으로만 작업을 해야 했기 때문에 튼튼하기로는 남부럽지 않은 몸을 가진 그로서도 무진 고생을 해야 했다.
묘실을 통하는 길을 뚫은 그는 안에다 미리 준비한 가짜 칼을 넣어두었다. 도윤이 정성을 다해 만든 위작이었는데, 이브라힘 왕세제를 비롯해서 앞으로 이곳을 방문할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는 그 칼이 반드시 묘실 안에 놓여 있어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묘실에 있는 능력이 담긴 유물을 빼내고 싶었다. 그러나 도윤 역시 그런 물건이 안에 있다는 것만 감지했을 뿐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그래서 석훈도 묘실의 물건들에는 하나도 손을 대지 않고 그대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저곳은 이제 숨도 쉴 수 없는 지옥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형이 잘 해낼지 모르겠네.’
한 달 내내 작업하는 동안, 석훈이 가장 신경 쓴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무덤 내의 산소가 모두 고갈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그는 산소를 모두 소진시키기 위해 일부러 무덤 안에서 작업할 때 계속 촛불을 켜놓았다. 그런 상태에서 자신은 공기통과 연결된 마스크를 쓴 채 작업한 것이다.
무덤 속의 산소는 작업을 시작한지 보름만에 모두 소진되었다. 석훈은 아무리 애를 써도 더 이상 초에 불이 붙지 않는다는 것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했다. 공기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었으므로 여전히 물이 무덤 안으로 유입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생물이 숨을 쉬며 살 수는 없는 환경이 된 것이다.
그 밖에도 그는 무덤 내의 지도를 상세히 작성했다. 그런 뒤에 도윤이 지시한 몇 가지 물건을 비밀리에 무덤 곳곳에 옮겨두었다. 어떤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에 대해서는 조민아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건 자신과 도윤만 알고 있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만 가자. 지금 출발해도 이르쿠츠크에 도착하려면 다시 한두 차례 정도는 야영을 해야 할 거야.”
석훈의 말에 따라 조민아가 자신의 배낭을 산악용 바이크에 싫었다. 석훈 역시 자신의 배낭을 바이크에 싣고 시동을 걸었다. 올 때는 짐이 많았지만 돌아갈 때는 각자 가지고 있는 배낭 하나가 짐의 전부였다. 분지를 떠나기 전에 석훈은 다시 한 번 웅덩이를 힐끗 돌아보았다.
‘황제든 거지든 죽고 나면 다 썩어 없어지는 건데…. 무슨 미련이 그렇게 많이 남아서 무덤을 저렇게 화려하게 꾸민 거야?’
그게 분지를 떠나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