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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268화 (268/300)

268화

<40.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

이르쿠츠크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도윤을 가장 초조하게 기다린 사람은 최서라였다.

그녀는 남편이 예정보다 며칠 일찍, 그것도 멀쩡한 몸으로 돌아온 것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를 납치하고 감금하고, 심지어는 죽이려고까지 했던 작자들과 함께 했던 일정이었다.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노심초사 그의 무사귀국을 기다린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할아버지가 위독해요. 아무래도 얼마 못 버티실 것 같아요.”

“벌써? 아직은 조금 더 괜찮으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억지로 버티고 계세요. 담당 의사도 가족들한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어요.”

의사가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것은 치료를 중단할 경우 당장 오늘이라도 돌아가실 수 있다는 뜻이다.

워낙 돈이 많은 집안이다 보니 갖은 수단을 써서 생명을 연장시키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과학이 자연을 이길 수는 없다.

도윤은 석훈에게 짐을 부탁하고는 공항에서 곧바로 최인탁이 입원한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에 도착한 도윤은 온갖 의료장비에 둘러싸인 채 병상에 누워있는 최인탁의 모습을 보고 울컥했다.

간호사의 제지로 병실 안에는 들어가지도 못했지만 문 옆에 난 커다란 창을 통해 죽음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노인의 야윈 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의식을 차리는 시간이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밖에 안 됩니다. 어차피 지금은 병실에 들어가 봐야 대화를 나누실 수도 없을 겁니다.”

도윤과 최서라가 왔다는 얘기를 듣고 급히 달려온 담당의가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회복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겁니까?”

“죄송하지만 노환에 의한 질병은 치료가 무의미합니다. 의사로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저도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될 거 같습니다.”

어차피 가야 할 사람은 편히 보내주는 게 낫다.

의사는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최서라와 함께 병원을 떠난 도윤은 그제야 비로소 평창동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석훈이 그의 집에 들러 캐리어를 비롯한 짐을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맡겨놓은 뒤였다.

입주는 아니지만 도윤과 최서라는 결혼 이후 매일 출퇴근하는 도우미 아주머니를 쓰고 있었다.

“장인어른에게 회장님 장례 준비를 하라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도윤은 최서라가 끓인 커피를 놓고 마주앉자마자 그 말부터 꺼냈다.

그러자 최서라가 쓸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례 준비는 이미 하고 있어요. 영안실은 미래 병원에 마련할 거고 아빠하고 큰아버지가 이미 장지까지 다 봐 놓은 상태에요. 다들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세요.”

“집 안에 우환이 있는데 나만 바쁜 척하고 밖으로 돌아다닌 꼴이군. 미안해.”

도윤의 말에 최서라가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 소리 하지 마세요. 편치 않았던 일정이었던 거 다 알아요. 하지만 이제 돌아왔으니까 당분간은 도윤 씨도 할아버지 곁을 지켜주셨으면 좋겠어요. 잠깐씩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많이 찾으셨어요.”

자신을 찾았다는 말을 듣자 최인탁 회장에게 더욱 미안했다. 일본의 NK 생명보험이 가지고 있던 고흐의 가짜 해바라기 감정 건으로 인연을 맺은 이후로 도윤은 여러모로 최인탁 회장을 많이 도와주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상하게 그보다는 최인탁이 뒤에서 그를 더 많이 도와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주변을 다 정리하셨으니 마음 불편하게 눈을 감으실 것 같지는 않아 다행이군.’

아무리 좋은 죽음도 결국은 슬픈 죽음일 수밖에 없다.

마음이 착잡했다.

* * *

다음날부터 도윤은 아침부터 병원에 나가 최인탁 회장의 병실을 지켰다.

담당 의사의 말에 의하면 최 회장은 하루에 두세 번, 그것도 기껏해야 한 번에 몇 십 분 정도 잠깐 의식을 회복하는 게 고작이라고 했다.

그런 그가 정신을 차릴 때마다 계속해서 자신을 찾았다. 도윤도 최 회장이 돌아가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사실 도윤은 지금 이렇게 한가하게 병실을 지킬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얼마 안 있으면 ‘현소 미술상’ 수상자를 선정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게다가 청파 갤러리와 현소 화랑 역시 두 달 뒤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기획 전시회 일정이 잡힌 상태였다.

지난봄에 신인 화가와 조각가들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고학 미술 대회’와는 달리 가을에 열리는 ‘현소 미술상’ 시상식은 기성 작가들이 대상자였다.

한 명의 수상자에게 평생 동안 창작 장려금을 지원하는 큰 상이었기 때문에 서윤 문화재단으로서도 신중을 기해 수상자를 선발해야 했다.

도윤은 재단 이사장으로서 전체 과정을 지휘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서윤문화재단의 이사장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여전히 현소 화랑의 팀장 직을 맡고 있었다.

언젠가는 어차피 그가 물려받아야 하는 곳이었으므로 손을 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당연히 다가오는 기획 전시회를 위해 그가 해야 하는 역할이 있었다. 아내인 최서라가 있는 청파 갤러리의 기획 전시회도 모른 척 하기가 곤란했다.

‘몸이 둘이나 셋이었으면 좋겠네. 그래도 지금은 이 일이 더 중요해.’

아침부터 병실 밖을 지키던 도윤은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담당 의사가 환자와 간단한 문답을 나누고 필요한 치료를 진행하는 동안, 연락을 받은 최서라가 부리나케 뛰어왔다. 두 사람은 의사와 간호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최 회장과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고맙다.”

도윤을 본 최 회장이 제일 처음 한 말이었다. 목소리가 워낙 거칠어 찢어진 대롱 사이로 바람이 새는 듯 했다. 퀭한 그의 눈을 들여다보는 순간 느닷없이 코끝이 찡해왔다. 도윤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았다. 원래부터 살집이 두툼한 양반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팔이 아니라 마른 나뭇가지를 잡는 듯한 기분이었다.

“저도 고맙습니다. 어르신.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이렇게 누워만 계시지 말고 얼른 일어나세요. 저한테 신세를 갚을 기회를 주셔야지요.”

허탈하게 웃던 최 회장이 밭은기침을 내뱉었다.

“나한테 신세 진 게 많이 있는 것 같으냐?”

“그럼요.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한테 진 신세는 산 사람한테 갚으면 된다. 나 죽으면 서라한테 갚아.”

“그렇게 하겠습니다. 평생 사랑하고 아끼면서 갚겠습니다.”

“그럼 됐어. 그런데 내가 너한테 진 신세는 다 못 갚고 죽을 것 같아. 미안하다.”

“서라를 저한테 주셨지 않습니까? 그걸로 이미 다 갚으셨습니다.”

몸이 워낙 쇠약하다보니 잠깐 얘기한 것만으로도 피로가 밀려오는 듯 했다.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던 최 회장이 도윤을 잡은 손에 슬며시 힘을 주었다.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 그동안 미안해서 계속 망설였는데 결국에는 너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을 것 같아. 꼭 들어줬으면 좋겠구나.”

“뭡니까? 서라하고 이혼하라는 얘기만 아니면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 말씀하세요.”

최 회장이 피식 웃더니 잠시 숨을 고른 뒤에 입을 열었다.

“우리 집에 가면 안방에 큰 액자에 넣어 걸어둔 사진이 있을 거다. 마누라가 죽기 전에 나랑 같이 찍은 사진이야. 그걸 가지고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초상화를 하나 그려줄 수 있겠냐? 아무한테나 맡기지 말고 네가 보기에 진짜 솜씨가 좋은 화가에 부탁해야 해.”

“당연히 할 수 있지요. 그런 화가라면 딱 맞는 화가가 하나 있습니다.”

어려운 부탁이 아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던 뜻밖의 부탁이기도 했다.

그가 약간 의아해 하는 표정을 짓자 최 회장이 애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청파 갤러리가 우리 마누라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만든 거라고 했지? 그 여자 소원이 하나 더 있었어. 자기하고 나하고 나란히 있는 근사한 초상화를 하나 만들고 싶어 했거든.”

“그럼 진즉에 좋은 화가에게 부탁하지 그러셨어요?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텐데.”

“그 못된 할망구가 그 얘기를 자기 죽기 직전에 했지 뭐냐? 미술관을 세워달라는 말과 함께. 미술관이야 얼마든지 세워줄 수 있지만 초상화는 그게 안 되잖아? 다 죽어가는 여자를 옆에 세우고 포즈를 취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나도 지금까지 계속 미루기만 했지.”

“사진이 남아 있다면요? 그럼 저한테 부탁할 필요 없이 그걸 쓰면 됐잖습니까?”

최 회장이 씁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어떤 일은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해야지만 의미가 있는 거야. 마누라가 죽었는데 나만 멀쩡히 살아서 둘의 초상화를 만든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 그런데 이제 내가 죽으면 피장파장이 되니까 사진으로 초상화를 그려도 돼. 그래서 자네한테 부탁하는 거야.”

돌아가신 부인을 무척이나 사랑하셨구나. 도윤은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이 최 회장이 마지막까지 남기고 싶어 했던 진정한 유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누가 봐도 최고의 초상화라는 생각이 들도록 멋진 작품을 그리게 할 테니까요. 근데 유화로 할까요, 아니면 한국화로 그릴까요?”

“유화로 해. 마누라가 유화를 좋아했거든.”

최 회장이 호흡이 갑자기 가빠졌다. 뒤에 있던 담당 의사가 도윤의 팔을 살며시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리라는 뜻이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나려는데 잠시 눈을 감았던 최 회장이 다시 도윤을 불렀다.

“뭐든지 살아 있을 때 잘 해라. 서라 저 녀석이 보기보다 숫기가 별로 없어. 평소에 뭘 원하는지 자주 물어서 웬만한 건 들어주도록 해. 나처럼 죽고 난 다음에 뒷북만 치지 말고.”

“알겠습니다. 꼭 그렇게 할게요.”

그 말을 끝으로 최 회장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도윤은 두 사람의 대화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옆에서 눈물만 글썽이고 있던 최서라를 데리고 병실을 나왔다.

그녀는 병실을 나오자마자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울었다. 도윤이 할 수 있는 일은 말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는 것뿐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최인탁 미래 그룹 회장은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뒀다.

향년 81세.

호상이라고 할 만한 나이이기는 했지만 도윤의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죽음일 수밖에 없었다.

* * *

최 회장의 장례는 미래 그룹 전체 차원의 회사장으로 치러졌다.

미래 건설과 미래 전자를 비롯한 수많은 계열사의 고위 임원들은 물론이고 정재계를 망라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조문을 오는 바람에 장례식장은 몹시 복잡했다.

미래 병원은 몇 개의 장례실을 통째로 비우는 방식으로 그들을 모두 수용하기 위해 애를 썼다.

상주는 장남인 미래 건설의 최병준 사장. 도윤 역시 최서라와 함께 상복을 입고 빈소를 지켰다.

그로서는 일가친척 가운데 누군가의 장례를 치루는 게 처음이었다.

최 회장은 먼저 간 아내의 옆에 묻혔다. 일가의 무덤이 있는 선산에 묘를 마련했는데, 대부분 화장을 권하는 요즘의 추세에는 맞지 않는 매장 방식이었다.

그러나 돌아가신 부인을 이미 화장하지 않고 매장했던 터라 최 회장만 따로 화장을 하는 것도 어색한 일이었다.

도윤과 최서라는 장례를 치르자마자 곧바로 업무에 복귀해야 했다. 두 사람 모두 장기 휴가를 낸다고 한들 누가 뭐라 할 사람은 없었지만 당장 목전에 닥친 일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도윤은 그 바쁜 와중에도 또 다시 어렵게 시간을 내서 미국에 다녀와야 했다.

최 회장의 유언대로 그와 부인의 초상화를 그릴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처음 최 회장으로부터 사진을 바탕으로 초상화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부터 도윤의 머릿속에 떠오른 화가는 오직 한 사람이었다.

뉴욕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장은서를 만났다. 한국에서 미리 전화를 해둔 상태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사장님 부탁이니까 당연히 제가 해드려야죠. 그런데 사실 조금 걱정이 돼요. 최 회장님이라면 대단하신 분인데 그런 분의 초상화를 제가 그려도 될까요?”

그녀는 도윤으로부터 최 회장과 그의 부인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처음에는 몹시 난감해 했다.

최인탁은 한국에서 재계 서열 2위에 해당하는 대기업의 전직 회장이었다.

그런 사람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라면 굳이 그녀가 아니라도 선뜻 의뢰를 받아들일 유명화가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게 오히려 그녀를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당연히 네가 그릴 수 있지. 왜? 걱정되는 거라도 있어?”

“전 사실 이제 겨우 전시회를 한 번 한 신인에 불과하잖아요. 괜히 어설픈 작품을 그렸다가 고인에게 누를 끼치게 되지는 않을까 싶어서요.”

도윤은 피식 웃었다. 의뢰를 받아 그린 초상화는 대개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초상화는 비평가나 다른 화가가 아니라 오직 의뢰자에 마음에 들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도윤은 그녀에게 분명히 ‘작품’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그렇다면 장은서가 그린 최 회장 부부의 초상화가 언젠가는 전시회에 내걸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다른 건 몰라도 사진을 보고 그리는 초상화라면 너보다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사람이 없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야. 이번 초상화는 무조건 네가 그려야 해.”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당장 윤수 선배만 하더라도….”

“오윤수는 당연히 좋은 화가지. 하지만 좋은 초상화 화가는 아니야. 더구나 걔는 뿌리가 한국화잖아. 고인의 부탁은 초상화를 유화로 그려달라는 거였어. 분야가 달라.”

뿐만 아니라 오윤수는 내년 초로 잡힌 개인 전시회 때문에 지금 다른 일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작년에는 장은서와 함께 가드너 미술관에서 공동 전시회를 열었지만 이번에는 준비하는 것은 단독 전시회였다.

그것도 미국에서만도 뉴욕과 워싱턴, 시카고와 LA의 네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순회 전시회를 열 작정이었다.

도윤은 현재 파리와 런던을 비롯한 유럽의 몇몇 도시와도 그의 전시회 일정을 협의 중이었다.

그는 내년에 있을 오윤수의 단독 전시회를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인맥을 총동원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겨우 미대에 입학해서 한창 공부중인 오주현에게 초상화를 맡긴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물론 기존에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다른 화가들에게 부탁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래봤자 그들이 장은서보다 더 좋은 초상화를 그릴 수는 없을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장은서만의 독특한 작업 방식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남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초상화 작업에 익숙하다는 뜻이다.

게다가 원본이 있을 경우 그것을 그대로 베껴내는 게 가능했다. 캔버스 위의 물감을 자유자대로 조종할 수 있는 독특한 능력 덕분이다.

그리고 아빠를 따라 여러 아트 페어에 부스를 여는 과정에서 복제화에 자신의 독창성을 가미하는 훈련을 쌓아왔다.

“아트 페어에서 네가 했던 일은 이미 만들어진 껍질 위를 예쁘게 다시 칠하는 것에 불과했어. 하지만 이제는 그 껍질을 깨고 나와 너 자신의 세계를 만들 수 있게 되었잖아. 이번 초상화는 장은서 네가 한 명의 화가로 성장해 온 모든 과정을 담아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거듭 말하지만 이 일을 맡을 사람은 너밖에 없어.”

작년의 공동 전시회 이후로, 장은서는 그녀의 독특한 예술 세계로 미국 화단에서 제법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오윤수가 어느새 자신의 이름을 내건 단독 전시회를 열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데 반해 그녀는 여전히 꽃을 활짝 피우지 못하고 있었다. 도윤은 최 회장 부부의 초상화를 그리는 게 그녀를 완전히 개화시키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도윤의 거듭된 설득을 받은 장은서가 마침내 입술을 꼭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최선을 다해서 해 볼게요. 근데 이거 언제까지 완성해야 돼요?”

“곧 새해다. 마음 같아서는 죽기 전에 평생의 걸작을 만들어보라고 하고 싶지만, 네가 지금 모나리자를 그리는 다빈치는 아니잖아? 내년 한 해 동안 시간을 주면 되겠니?”

“알았어요. 저도 제 자신을 다시 돌아본다는 생각으로 한 번 도전해 볼게요.”

결국 최회장의 유언을 받들 사람은 장은서로 결정됐다. 그제야 도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장은서는 현존하는 최고의 초상화가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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