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북경에 자리 잡은 아리스 온라인의 본사 건물.
중국 최대의 온라인 거래 사이트를 운영하는 아리스 온라인은 북경 시내의 오피스 타운에서도 가장 높은 건물의 삼분의 일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큰 회사였다.
왕이푸는 그 곳의 회장이었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고 대부분의 사무실에 불이 꺼진 늦은 시각, 왕이푸는 자기 방의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로 한창 무언가를 작업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그의 방을 노크했다.
“들어와라. 문 열려 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그의 딸 왕화였다. 이미 오겠다는 연락을 하고 방문한 터라 왕이푸 회장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작업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방안으로 들어서는 그녀의 모습을 힐끗 쳐다본 왕 회장이 그제야 컴퓨터를 끄고 사무실 중앙의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도대체 왜 그러신 거예요?”
서로 얼굴을 맞대고 마주앉자마자 왕화가 평소답지 않게 약간 도전적인 어투로 대뜸 물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왕 회장이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다짜고짜 그게 무슨 소리냐? 뭘 왜 그랬다는 거야?”
“이 박사 말이에요. 홍콩의 소더비와 상해의 홍광 옥션의 주식을 그 사람에게 넘기셨잖아요. 그것도 절반 이하의 가격에. 그 사람한테 왜 그렇게까지 호의를 베푸신 거예요?”
“당연히 그럴 만 하니까 그랬지. 왜? 그게 불만인 거냐?”
“그 사람이 훌륭한 감정가라는 건 저도 잘 알아요.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게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 과하셨어요.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던 거예요?”
“필요가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이 박사는 앞으로 우리 일에 큰 도움을 줄 사람이야.”
“물론 도움이야 되겠지요.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번에는 너무 선심을 베푸셨어요. 우바오량 상무위원이 남긴 주식을 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빠도 잘 아시….”
속사포처럼 빠르게 이어지던 왕화의 말은 왕이푸가 들어 올린 손에 의해 끊겼다.
“이 박사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감정가의 반열에 들어설 만큼 뛰어난 감정실력을 가진 사람이다. 이번에 그에게 넘긴 주식들은 모두 경매 회사들의 것이야. 그걸 통해 우리는 평생 함께 갈 수 있는 좋은 조력자를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지. 그의 나이를 감안할 때 적어도 몇 십 년은 큰 도움이 될 거야.”
“몇 십 년 동안 함께 갈 생각이셨던 거예요? 이 박사랑?”
“그래. 그는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될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한국인이잖아요? 중국에도 얼마든지 젊고 실력 좋은 감정가들이 많아요.”
왕이푸가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더니 애매한 표정으로 자신의 딸을 쳐다봤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이윽고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꽤 똑똑해진 줄 알았더니 아직도 어리석은 소리를 하는구나. 그들 가운데 지금이든 앞으로든 정말로 이 박사를 능가하는 감정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내 생각엔 그래?”
“당장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앞으로 기다리다 보면….”
“눈앞에 있는 다이아몬드를 외면하고 언제 얻을지도 모르는 유리구슬을 찾는 건 바보같은 짓이야. 나는 물론이고 네가 죽을 때까지 이 박사를 능가하는 감정가를 만나는 건 불가능할 거다. 이 박사가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면 모를까. 그는 원 오브 밀리언, 아니 원 오브 빌리언(One of billion)이야.”
왕화의 입이 떡 벌어졌다. 원 오브 빌리언. 수십 억 가운데 가장 뛰어난 한 사람. 그녀도 도윤이 뛰어난 감정가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아빠가 그를 그렇게까지 높이 평가하고 있으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가 그렇게까지 뛰어난 감정가라고요? 대체가 불가능할 만큼?”
“누구도 이 박사를 대체할 수 없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자세히 말해줄 수는 없지만 일단 너도 그렇게 알고 있어. 늘 그를 우리 편에 남겨두려고 애쓰도록 해라.
“그럼 저도 앞으로 그와 돈독한 협조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되겠네요?”
약간은 빈정거림이 섞인 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왕이푸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어차피 내가 늙어서 물러나면 지금까지 평생을 바쳐 일구어낸 회사들을 물려받을 사람은 너 하나밖에 없어. 네가 나중에 이 자리에 앉을 경우 그 자리를 보존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이도윤 박사야. 항상 그걸 잊지 말고 명심해라.”
“이 박사가 당 고위간부나 대기업 사장들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란 말인가요?”
“우리가 미술계에서 돈을 벌려고 하는 한 그럴 거야. 우바오량 상무위원이 하루아침에 가는 걸 못 봤냐? 지금이야 당 고위간부들의 위세가 대단하지만 그들도 결국 조만간 죽어서 사라질 사람들에 불과해. 하지만 이 박사는 적어도 너 만큼은 오래 살 거다. 내가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라고 말했지? 그 말을 절대 가볍게 생각하지 마라.”
왕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아버지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긴 한숨과 함께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앞으로 제가 대하는 모든 사람 가운데 이 박사를 가장 우선시해야 하겠군요. 그와의 관계를 최대한 우호적으로 유지하려고 노력할게요. 그러면 되는 거죠?”
“노력하지 말고 무조건 그렇게 해. 그러다 보면 그가 너한테 좋은 선물을 줄지도 몰라.”
“좋은 선물이라고요? 어떤 선물 말이에요?”
“그거야 나도 모르지. 네 산타클로스가 될 사람은 이 박사야. 내가 아니라.”
“이 박사를 만나 한 번 물어봐야겠네요. 나한테 어떤 선물을 줄지.”
“물어보지 마. 입도 뻥끗하지 마라. 그냥 그가 알아서 줄 테까지 알아서 기다려.”
“그러다가 아무런 선물도 주지 않으면요?”
“그럼 할 수 없는 거지. 그거야 선물을 줄 사람 마음에 달린 게 아니냐?”
왕화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아버지를 쳐다봤다.
이거야 무슨 이도윤을 신으로 섬기는 신흥 종교의 교주 같은 모습이 아닌가?
아빠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그녀는 결국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솔직히 아빠 말은 아직도 납득이 한 가요. 하지만 최대한 그 말을 따르도록 노력할게요.”
그녀가 방을 나가자 어둠이 깃든 사무실 전체가 고요한 침묵에 잠겼다.
딸이 떠난 뒤에서 소파 의자에 앉은 채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던 왕이푸 회장이 문득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이 박사가 링커라는 사실을 알 필요 없어. 그건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거다.”
그는 왕화에게 도윤이 링커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아울러 앞으로 죽을 때까지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언급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도윤이 링커라는 사실을 알고 그의 능력을 함부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어떻게 될 수 있는지는 이미 우바오량이 자신의 죽음을 통해 똑똑히 보여주었다.
딸이 링커에 대해 알게 될 경우 우바오량과 똑같은 시도를 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아무리 나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상무위원은 그렇게 갑자기 갈 사람이 아니었어. 그의 죽음은 칭기즈칸의 무덤을 찾으러 갔던 일과 연관이 있는 게 분명해.”
그는 조문을 온 도윤을 만났을 때 그에 관한 일을 묻고 싶어서 입이 간질거렸다. 그러나 끝까지 꾹 참고 혀끝까지 올라왔던 질문들을 목으로 삼켰다.
대신 우바오량이 남긴 비밀스러운 재산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도윤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다.
애초에 그 재산을 형성시켜 준 사람이 바로 왕이푸 자신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머리가 나쁜 사람이 아니니까 내가 자기에게 왜 그 많은 주식을 떠넘기듯이 주었는지 모르지는 않겠지. 칭기즈칸의 무덤에 관한 일을 한 마디도 꺼내지 않은 이유까지도.”
도윤은 친하게 지낼 사람이지 함부로 이용하려고 덤벼들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그게 우바오량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도윤이 가진 힘은 상식을 넘어선 신비한 것이다.
그것을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그 능력이 언제 보이지 않는 칼날이 되어 자신의 심장을 찌를지도 모른다.
왕이푸는 오래 살고 싶었다.
* * *
국립현대미술관의 장예주 박사는 도윤의 부탁으로 지난봄 서윤문화재단에서 개최했던 제1회 ‘고학미술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녀는 그 대가로 현대미술관에서 진행하는 한국 대표 화가 전작 도록을 만드는 작업에 도윤이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그 때문에 도윤은 지난 몇 달 동안 매주 한 번씩 현대미술관을 방문해서 소장 작품들의 감정을 도왔다.
하지만 중간에 피치 못하게 여러 차례에 걸쳐 자리를 비워야 했던 까닭에 최근에는 일주일에 이틀, 어떤 때는 사나흘을 계속해서 미술관으로 출근하기도 했다.
덕분에 최근에는 맡았던 작품에 대한 감정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도록 작업은 아직도 많이 남았지만 최소한 그의 일은 슬슬 마무리할 때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도윤이 미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김환기 화백의 전작 도록이 발간되었다.
김환기 화백은 한국 화가들 가운데에서는 드물게 외국에서도 크게 관심을 받는 현대 화가였고, 최근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한국 작품의 해외 경매 최고가를 갱신하기도 한 대가였다. 그 때문에 그의 전작 도록 출간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도록에 대한 반응이 좋자 구상춘 관장은 물론이고 작업에 참여했던 연구원을 비롯한 미술관 직원들도 큰 보람을 느꼈다.
도윤 역시 기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자신이 맡은 작품들에 대한 마지막 감정을 끝내기 위해 미술관 소장고에 틀어박혀 있는데, 갑자기 구상춘 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 박사. 미안하지만 잠깐 내 방으로 올라올 수 있겠나?”
미안하지만? 도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그런데 관장실에는 그가 처음 보는 중년의 남자 한 명이 살벌한 표정을 띤 채 앉아 있었다.
얼핏 보기에 구상춘 관장의 얼굴 역시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낯선 방문객이 있을 거라는 얘기를 미처 듣지 못했던 터라 도윤은 약간 어정쩡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바쁜데 오라고 해서 미안하네. 자네를 꼭 봐야 하겠다는 분이 있어서 말이야. 우선 거기 좀 앉지?”
구상춘 관장이 손짓으로 중년 남자의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나를 꼭 보겠다고? 고개를 갸웃한 도윤이 소파에 엉덩이를 걸치자마자 눈앞의 중년 남자가 대뜸 물었다.
“자네가 이도윤인가?”
보자마자 반말이네? 뭐야? 이 자식은?
“네. 제가 이도윤이 맞습니다. 그런데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나 민창복일세. 국회의원일세.”
국회의원 민창복. 그제야 도윤도 그가 누군지 기억이 났다. 오랫동안 전직 여당 거물의 보좌관 노릇을 하다가 청와대에서 잠시 근무했었고, 지난 총선에서는 드디어 비례 대표로 추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된 인물. 그런데 그런 사람이 왜 나를 찾았지?
“민창복 의원님이셨군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절 보자고 하셨는지…?
“이번에 현대미술관에서 낸 김환기 화백 전작 도록 말이야. 거기에 ‘은하수 3-2’가 빠졌더군. 이상하다 싶어 미술관에 전화를 걸어서 물어봤더니 위작이라서 제외시켰다는 거야. 내 참, 기가 막혀서. 그걸 위작이라고 감정한 사람이 바로 자네면서?”
“맞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무슨 문제가 있냐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자네 그 그림이 어떻게 해서 현대미술관이 소장하게 된 건지나 알아? 그게 어떤 그림인데 자네같이 젊은 사람이 함부로 가짜 운운해서 어르신의 얼굴에 먹칠을 해? 나이도 젊은 사람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도대체 왜 아무데나 함부로 나서는 거냔 말이야. 설레발을 쳐도 어느 정도여야지.”
민창복의 목소리가 대뜸 높아졌다. 도윤의 얼굴이 차갑게 굳는 것을 흘낏 살펴본 구상춘 관장이 난감한 표정으로 나섰다.
“아니, 저기 민의원님. 그렇게 역정만 내지 마시고 좀 차분하게 말씀하시죠. 이 박사가 아직 나이가 어리기는 해도 하버드 출신의 미술사 박사에다 실력이 아주 뛰어난 감정가입니다. 이 친구도 함부로 감정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 일단 차분하게 설명을 들어보시죠.”
“차분하게 설명을 듣기는 뭘 듣습니까? 뛰어난 감정가요? 멀쩡한 진품을 위작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어떻게 뛰어난 감정가일 수 있어요? 하버드에서 박사를 받았으면 얌전히 어디 대학이라도 가서 학생들이나 가르치고 있을 것이지 왜 잘 알지도 못하는 그림에 대해 함부로 입을 놀린단 말입니까? 그것 때문에 지금 어르신 입장이 얼마나 난처한지 아세요?”
하, 나 뭐 이런….
구상춘 관장의 얼굴을 보니 그도 떫은 감을 씹은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인 듯했다.
다만 국립미술관 관장의 입장에서 여당의 국회의원에게 차마 싫은 소리는 못하고 억지로 화를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도윤이 짐짓 헛기침을 하고 말을 꺼냈다.
“저기, 실례지만 그럼 의원님께서는 ‘은하수 3-2'가 진품이라고 주장하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그게 진품이 아니면 뭐가 진품이란 말인가? 그러니 잔소리 말고 지금이라도 감정을 잘못했다고 인정하게. 그리고 이미 발간한 도록은 전부 회수하고 그 작품을 집어넣어서 다시 만들어야 할 거야. 그러지 않으면 내가 가만있지 않겠네.”
네가 가만 있지 않으면 도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도윤이 다시 물었다.
“혹시 그 작품이 진작이라고 확신하시는 특별한 근거가 있으십니까?”
“근거는 무슨? 그건 여응수 전 총리께서 직접 미술관에 기증한 작품이야. 그 전까지는 계속 그 양반 집에 걸려 있었던 그림이라고. 그런 그림이 어떻게 가짜일 수 있겠나?”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림의 진위 여부는 그게 누구 집에 걸려 있었느냐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누가 기증했는지도 중요한 게 아니고요. 제가 묻는 건 그게 진작이라고 생각하시는 근거입니다. 누구 집에 있었느냐가 아니라.”
“그럼 자네는 여 총리께서 자기 집에 가짜를 걸어놓고 사셨다는 건가?”
“그거야 제가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상관할 일도 아니고요. 그 전직 총리였다는 분이 혹시 감정가이십니까? 아니면 미술사나 감정과 관련해서 학위를 가지고 계신가요?”
“그게 무슨 헛소리야? 전직 총리라니까! 전직 총리가 감정가였을 리가 있겠나?”
“그럼 그 분도 가짜 그림을 진짜인줄 알고 갖고 계셨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도윤의 말에 민창복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화가 단단히 난 게 분명했다.
”자네도 명색이 감정가라면서? 그런데도 여응수 전 총리께서 얼마나 유명한 수집가인지 몰라? 그 분이 개인적으로 가지고 계신 그림이며 도자기가 전부 몇 점인지나 아나? 그런 분이 설마 가짜를 미술관에 기증했다는 건가? 그럼 그걸 감정해서 받아들인 현대미술관은 뭐야? 그때 그림을 감정한 사람들은 모두 눈 뜬 장님이란 말인가?“
도윤도 슬슬 부아가 치솟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구상춘 관장이 왜 그를 대뜸 내쫓지 않고 자신을 불러올렸는지 대충 이해가 갔다.
여응수 전 총리가 아무리 유명한 수집가라고 해도 결국은 안목이 좋은 아마추어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가 기증한 그림을 덥석 받아들인 미술관 직원은 분명히 전문가다. 감정을 실수하면 안 되는 사람인 것이다.
“만약 끝까지 ‘은하수 3-2’가 위작이라고 우기면 내가 이 사실을 언론에 알릴 걸세. 국립현대미술관이 자신들이 직접 진품이라고 감정한 그림을 이제 와서 가짜라고 우긴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몇 사람은 책임을 져야 할 거야. 여 총리님의 체면을 그렇게 공개적으로 깎아 놓고 자네들만 무사할 줄 알았나?”
이젠 아주 대놓고 협박이네? 도윤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초선 의원, 그것도 비례대표 의원이 그림의 진위 문제를 가지고 미술관장까지 찾아와서 이렇게 펄펄 뛰는 건 사실 상식적인 일이 아니었다. 보통 자신이 기증한 작품이 위작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부끄러워서 그걸 감추려고 하지 함부러 떠벌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건 아무래도 뭔가 있는 것 같은데?’
도윤은 배에 힘을 꽉 주었다. 여러 가지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일단은 당장의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먼저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