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화
“혹시 ‘은하수 3-2’에 관해 여응수 전 총리님과 얘기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도윤의 물음에 민창복이 코웃음을 쳤다.
“왜? 내가 총리님 의중도 살피지도 않고 이러는 것 같아서? 솔직히 말해줄까? 여 전 총리님과는 이 일에 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없어. 하지만 그 분이 몹시 불쾌해하고 있다는 건 잘 알지. 다만 그 분 정도 되시는 분이 이런 문제를 가지고 직접 나서서 왈가왈부하시는 건 아무래도 체면 문제가 있어. 그래서 내가 이렇게 나선 거네.”
“그 분이 ‘은하수 3-2’를 틀림없는 진작이라고 생각하고 계신 게 맞습니까?”
“이 친구가 진짜…! 그걸 말이라고 하나? 그러니까 자네도 당장 총리님께 사과, … 아니지? 이런 문제는 자네 같은 일개 감정가가 사과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민창복이 도윤의 옆에 앉아 있던 구상춘 관장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구 관장님. 당장 저 젊은 친구를 자르고 여 전 총리님께 전화를 드리든가 직접 찾아뵙고 사과를 드리세요. 감정에 실수가 있었다는 걸 인정하고 도록을 다시 발간하겠다고 말씀드리란 말입니다.”
이왕 얼굴을 보고 문제가 뭔지를 파악했으니 도윤은 가급적 이 문제를 자신이 직접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미처 대꾸를 하기도 전에 지금까지 애써 차분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던 구상춘 관장이 결국 눈살을 찌푸리며 얼굴을 허물어트렸다.
“저 보고 여응수 전 총리께 사과를 하라는 말씀입니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제가 국회에서 문화체육관광 상임위 소속이라는 거 아시죠? 만약 당장 사죄하고 잘못을 수정하지 않으면 국정 감사장에 불려나와 제 얼굴을 보시게 될 겁니다. 이번 도록 발간 작업에 소요된 경비 전체를 놓고 한 번 조목조목 따져볼까요?”
민창복 의원의 말 속에는 명백한 협박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구상춘 관장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가 잠시 호흡을 고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번에 작업이 끝난 김환기 화백뿐만이 아니라 다른 대가들에 대해서도 계속해서 전작 도록을 발간해 나갈 겁니다. 이미 그걸 위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고요.”
“저도 알아요.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실수를 바로잡으면서 일을 해나가시라는 말입니다.”
“실수를 바로 잡는다라…. 물론 그래야지요. 앞으로도 도록을 만드는 과정에서 기존에 저희가 소장하고 있던 작품들의 상당수가 위작으로 밝혀지는 일이 생길 겁니다. 그건 앞서 작품을 감정했던 누군가가 실수를 했다는 뜻이지요. 그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예전의 실수를 솔직히 인정하고 그 작품이 위작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겁니다.”
민충복이 비록 싸가지가 없고 권력에 아부하는 성향이 강하지만 바보는 아니다.
그는 구상춘 관장의 말이 의미하는 것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민충복의 얼굴이 더욱 사납게 변했다.
“사과를 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도록을 회수하지 못하겠다는 뜻이에요?”
구상춘 관장이 허탈하게 웃었다.
“사과는 하겠습니다. 과거에 저희 국립미술관이 저지른 실수라고는 하지만 현재 그곳을 대표하는 사람은 바로 저이니까요. 제가 여응수 전 총리님께 따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안 되면 직접 찾아뵙고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하지요.”
“사과 전화는 드리겠지만 도록은 회수하지 못하겠다는 말로 들리는군요?”
“그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옳은 일도 아닙니다. 감정을 잘못한 건 과거지 지금이 아니니까요. 이미 발간된 김환기 화백의 도록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구 관장님! 대학 교수로 계실 때부터 성품이 원만하시기로 유명하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소문이 잘못 난 모양입니다. 이렇게 앞뒤가 꽉 막힌 분이실 줄은 미처 몰랐군요.”
민창복은 구상춘 관장보다 최소한 열 살 이상 어린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어른이 아이를 나무라듯이 눈을 똑바로 뜨고 으르딱딱거렸다.
구상춘이 피식 웃더니 자신을 노려보는 그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민 의원님. 조금 전에 저더러 여기 앉아 있는 이도윤 박사를 당장 자르라고 하셨지요? 이건 궁금해서 묻는 건데 이 박사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속으로 계속해서 혀를 차고 있던 도윤은 느닷없이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바람에 움찔했다.
그런 그를 힐끗 쳐다본 민창복이 코웃음을 쳤다.
“그야 저 친구가 오기 전에 구 관장님 입으로 소개를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버드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미국에서 TV 프로그램 경연에서 우승까지 한 재능 있는 친구라면서요?”
구상춘 관장이 다시 한 번 실소를 터트렸다.
“여기 오시기 전에 전화를 주셨을 때 ‘은하수 3-2’를 감정한 사람이 이도윤 박사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지도 않고 오신 것 같군요.”
“물론 저 나이에 하버드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면 똑똑하고 재능 있는 젊은이겠지요. 하지만 감정가로서는 아직 너무 어려요. 제가 미술품 감정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건 오랜 경험과 경력이 쌓여야 비로소 빛을 볼 수 있는 직업이 아닌가요? 관장님께서 감정가를 채용할 때 너무 성급하셨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하버드 출신이라도 그렇지….”
“글쎄요. 제가 볼 때는 민 의원님이 오히려 너무 성급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보세요, 구상춘 관장님! 지금 도대체….”
“이 박사는 전 세계의 유명한 경매 회사나 미술관, 박물관 등에서 어려운 감정이 있을 때마다 서로 초빙하려고 애쓰는 분입니다. 한 번 감정할 때마다 받는 감정료도 엄청나지요. 그런 분을 저와 장예주 과장이 개인적인 친분을 내세워 거의 자원봉사나 다름없는 조건으로 감정을 부탁드렸습니다. 성급하게 채용했다고요? 채용이 아니라 모신 겁니다.”
구상춘 관장의 얘기에 민창복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구 관장과 도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허’ 하고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딱 봐도 이게 겨우 이십대 후반이나 되었을 것 같은 젊은이를 놓고 무슨 세계적인 감정가 운운하시는 겁니까? 미술 시장도 코딱지만 한 우리나라에 정말 세계적인 감정가가 있기나 합니까? 저 나이에 박사 학위를 받은 걸로 봐서는 머리가 나쁘지 않다는 건 인정해요. 그렇더라도 관장님답지 않게 과장이 너무 심하시군요.”
“이 박사는 올해 서른둘입니다. 그리고 저는 과장한 게 전혀 없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민 의원님이 이 박사의 감정 결과에 대해 토를 다는 건 호구하고 축 밖에 모르는 아마추어가 프로 기사에게 훈수를 두겠다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구 관장님. 말씀이 너무 지나치신 것 아닙니까?”
“처음 이곳을 찾아오셨을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말이 지나쳤던 사람은 제가 아니라 민 의원이셨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여응수 전 총리께는 제가 따로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제 생각이 맞는다면 ‘은하수 3-2’를 감정한 사람이 이도윤 박사라는 말을 들으면 그 분도 감정결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실 겁니다.”
“허, 이 양반 진짜. 어르신께서 어떻게 일개 젊은 감정가의 이름을 알겠어요?”
“일반인이야 감정가의 이름 따위에는 관심이 없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미술품 수집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박사의 이름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사실 아까 전화를 주셨을 때 이도윤 박사가 감정을 맡았다는 걸 알려드린 것만으로도 더 이상 진위 문제에 대한 시비가 없을 거라 생각했었습니다. 이렇게 직접 찾아오실 줄은 전혀 예상을 못했지요.”
구상춘 관장의 목소리는 계속 조용하고 차분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그의 목소리에서 묘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민창복도 그걸 느꼈는지 입을 다문 채 구 관장을 노려보기만 했다.
잠시 후, 그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저 젊은 친구가 세상에 다시없는 대단한 감정가인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아니면 구 관장이 기를 쓰고 보호해야 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요?”
“세상에 다시없는 감정가 맞습니다. 그리고 저뿐만이 아니라 미술계 인사라면 누구라도 기를 쓰고 보호해야 되는 사람이기도 하지요.”
민창복이 이를 악물더니 구상춘 관장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하지만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구 관장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결국 민창복이 이를 갈며 말을 뱉었다.
“어디 두고 봅시다. 다음 국정감사 때 반드시 국회에서 날 보게 될 거예요.”
“그렇습니까? 그럼 그때 뵙지요. 안녕히 가십시오.”
민창복은 관장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더니 도윤을 슬쩍 흘기고는 몸을 돌렸다. 그가 문을 쾅 닫고 나가자 도윤이 약간 걱정되는 얼굴로 구상춘을 쳐다봤다.
“그래도 명색이 국회의원인데 너무 고자세로 대하신 것 아닙니까?”
그러자 구상춘 관장이 피식 웃었다.
“왜? 내가 험한 꼴이라도 당할까봐 걱정 되는가?”
“국정 감사 때 관장님을 부르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정말 그렇게 되면 보나마나 이것저것 트집을 잡으면서 망신을 주려고 할 것 같은데….”
“그건 걱정할 필요 없네. 정 귀찮을 것 같으면 이까짓 관장 자리 그만 두면 되지. 아무리 국회라고 해도 현직 관장도 아닌 사람을 멋대로 오라 가라 하지는 못할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 임기도 많이 남아 있는데 그만 두시다니요?”
“왜? 내가 먹고 살기 힘들까 봐? 걱정하지 마. 나 대학에서 오래 근무했어. 거기서 나오는 연금만 받아도 굶어죽을 일은 없을 거야.”
도윤은 구 관장이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해 줄지는 몰랐다.
고맙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난감한 일이기도 했다. 그때 구 관장이 갑자기 전화기를 들더니 비서실에 차 두 잔을 부탁했다.
순간, 도윤은 그가 자신에게 더 할 말이 있음을 깨달았다.
아니나 다를까, 비서가 들어와 찻잔을 놓고 나가자 구 관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네가 굳이 이름을 언급하지 말라고 부탁한 탓에 일반인들은 아직도 잘 몰라. 하지만 미술계나 박물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도윤이 오구라 컬렉션을 반환받을 수 있게 만든 일등 공신이라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지. 해방 이후로 수많은 사람들이 문화재 반환을 요구했지만 그 꿈같은 일을 현실로 만든 사람은 자네뿐이야.”
구상춘 관장이 갑자기 오구라 컬렉션 일을 꺼내자 도윤은 공연히 머쓱해졌다.
“그거야 그냥 운이 좋고 때가 맞아서 그럴 수 있었던 거죠.”
“그 운과 때가 저절로 왔나? 다 자네가 발로 뛰고 돈을 써서 만든 거 아닌가? 오구라 컬렉션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고로 들어간 날, 민경훈 관장하고 함께 술을 마셨네. 그 친구가 자네 얘기를 하다가 고맙고 부끄럽다며 펑펑 울더군. 나도 그 일을 평생 잊지 못할 거야.”
구상춘 관장이 기특하고 흐뭇해하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도윤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자네가 ‘은하수 3-2’를 위작이라고 감정하는 바람에 여러 사람이 곤란해지기는 했네. 특히 여응수 전 총리 같은 경우에는 여러 가지로 난감한 입장일 거야.”
갑작스러운 말에 도윤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특별한 사정이라도 있는 그림입니까?”
구 관장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십오 년 전에 당시 재계 서열 10위 안에 들던 창현 그룹이 부도가 났지. 그 때문에 회장 일가가 탈세와 횡령, 배임 등의 혐의로 줄줄이 고소를 당했는데 혹시 알고 있나?”
“글쎄요. 그건 제가 너무 어릴 때 일이라 그런 사건이 있었다는 얘기 말고는….”
“당시 창현 그룹은 결국 조각조각 잘려서 팔렸어. 그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직원들이 정리해고를 당했지. 하지만 정작 회장 일가 중에 교도소에 갔던 사람은 아무도 없어.”
“혐의가 제대로 입증이 안 됐었습니까?”
“다들 무죄 판결을 받거나 유죄 판결이 내려진 경우에도 집행 유예로 풀려났지. 당시 검찰의 기소 내용 자체가 워낙 부실했기 때문에 재벌 그룹에 대한 봐주기 수사라는 얘기가 많았어. 그때 검찰에서 사건을 맡았던 지검의 지검장이 바로 여응수 전 총리야.”
얘기를 듣던 도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머릿속을 문득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표정을 슬쩍 살핀 구상춘 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건 이후 검찰을 그만 두고 변호사 생활을 하던 여응수 전 총리가 몇 년 뒤에 정계에 뛰어들었지. 그러면서 이번에 문제가 된 ‘은하수 3-2’를 우리 현대미술관에 기증했어. 그런데 그 그림은 원래 창현 그룹 회장이 소장하고 있던 거야.”
“창현 그룹에서 사건을 잘 봐 달라고 뇌물을 줬다는 말입니까?”
“그럼 설마 그런 상황에서 돈을 받고 팔았겠나? 당시 그림을 잘 아는 문화부 기자 몇 명이 그 일을 기사화하려고 취재했지만 결국 신문에는 한 줄도 나가지 않았어. 그래서 다들 잊고 지내고 있었는데, 이번에 하필 자네가 그 그림을 위작이라고 감정한 거야. 게다가 이번에는 신문사 몇 곳에서 그걸 기어코 기사로 게재했어.”
“그런 사정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본의 아니게 여응수 전 총리를 곤란하게 만들었네요.”
도윤이 입맛을 다시자 구상춘 관장도 씁쓸하게 웃었다.
“자기 딴에는 정치판에 뛰어들면서 문제가 될 만한 물건을 깨끗하게 처리했다며 안심하고 있었을 거야. 나름대로 명분까지 세워가면서.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 고가의 뇌물이 사실은 몇 만원도 안 되는 가짜로 판명되었으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겠지.”
“여 전 총리로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불쾌했겠군요.”
“당시 그 사람이 받은 뇌물이 고작 그림 한 점뿐이었겠나? 하지만 확실히 기분이 더럽기는 할 거야. 더구나 새삼스럽게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것도 부담스러웠을 테고.”
마음이 착잡했다.
고가의 그림이 기업의 비자금 조성이나 정치판의 뇌물로 쓰이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익히 알고 있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한 번씩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여전히 입맛이 쓰고는 했다.
도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민 의원이 이렇게 직접 찾아와 경우 없이 군 것도 모두 여 전 총리의 지시를 받고 한 짓이었을까요?”
“그건 아닐 거야. 여 전 총리쯤 되는 사람이 이도윤이라는 이름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을 테니까. 자네가 위작 판정을 내렸다는 말을 들었으면 아마 불만이 있어도 감히 이의를 제기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거야. 그런데 공천에 눈이 어두워진 민 의원이 여 전 총리가 뭘 불쾌해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천둥벌거숭이처럼 나선 거지.”
“공천에 눈이 어둡다니요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민 의원이 비례 대표잖아? 지역구가 없으니 정치를 계속하려면 다음 선거에서 새로 지역구 공천을 받아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지.”
“현재의 국회의원이나 지역 위원장 가운데 누군가를 밀어내야 한다는 뜻이군요.”
“그래. 그런데 여 전 총리는 아직도 여당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당 대표와도 절친한 사이야. 민창복으로서는 기회만 노리고 있던 차에 이번 일이 터지니까 이때다 싶어서 총대를 메고 나선 거겠지. 결국은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판 꼴이지만.”
그때만 해도 도윤은 민창복이 자기 무덤을 판 꼴이라는 구상춘 관장의 말을 대충 흘려들었다.
구 관장이 갑자기 화제를 그에게로 돌렸기 때문이다.
“앞으로 정치권에서 자네 이름이 거론되는 일이 자주 생길 거야. 처신을 잘 해야 하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정치권에서 왜 저한테 관심을 가진단 말입니까?”
“왜기는? 이제 겨우 삼십대 초반의 젊은 나이인데 벌써부터 세계적인 감정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수천억의 자산을 소유한 미술 재단의 이사장에다 미래 전자 사장의 하나뿐인 사위이기도 하고. 자네가 최대 주주로 있는 그 데바 인스트루먼트라는 회사도 주가가 계속 오르고 있다면서?”
도윤은 순간적으로 할 말이 없어졌다.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이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민망한 표정을 짓자 구 관장이 풀썩 웃었다.
“가지가 많으면 바람 잘 날이 없다지 않은가? 아마 갈수록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자네를 건드리려는 사람들이 많아질 거야. 아마 정치 자금을 부탁하는 사람들도 나올 거야. 그럴 때마다 지나치게 날카롭게 반응하지 말고 의연하고 겸손하게 대응하게.”
“명심하겠습니다.”
“미술계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나처럼 자네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아. 자칫 자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미술계로서는 큰 손실이 될 게 뻔하니까. 하지만 반대로 자네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 역시 적지 않을 거야. 다소 거친 파도가 몰아칠 때도 있겠지만 힘들더라도 중심을 꽉 잡고 계속 앞으로 나가게. 나도 최대한 도울 테니까.”
자신을 배려하는 구상춘 관장의 믿음과 애정이 피부에 느껴지는 듯했다.
도윤은 아무 말도 않고 그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고마운 분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