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민창복 의원이 스스로 판 무덤이 무엇인지는 오래지 않아 밝혀졌다.
다음날 오전, 구상춘 관장은 먼저 여응수 전 총리에게 전화를 걸어 심려를 끼친 점에 대해 사과했다.
그런 뒤 오후에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의 전체적인 내용은 평이했다.
그는 김환기 화백의 ‘은하수 3-2’가 이도윤 박사에 의해 위작으로 감정되었으며, 다른 다수의 전문 감정가들도 그의 감정 결과를 수긍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아울러 과거 ‘은하수 3-2’를 기증받을 때 국립현대미술관이 잘못된 감정을 했다는 사실을 수긍하고 그에 대해 유감과 사과의 뜻을 표시했다.
처음에는 회견장에 모인 기자들의 반응도 시큰둥했다.
“이 정도면 이메일로 보도 자료만 보내면 되지 굳이 기자회견까지 열 필요는 없잖아? 그게 언제 있었던 일인데 이제 와서 사과를 해?”
“감정을 맡은 사람이 이도윤 박사였다고 하잖아. 그걸 밝히고 싶었나 보지.”
“그건 확실히 기사거리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기자회견까지 열 만한 일은 아니지 않나?”
“내 생각에는 누가 ‘은하수 3-2’의 감정 결과에 대해 시비를 걸은 것 같은데? 그래서 감정가가 이 박사라는 사실을 밝혀서 쓸 데 없는 논란을 잠재우려는 거 아닐까?”
기자들의 짐작은 사실에 근접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번 기자회견에 대한 그들의 관심이 크게 높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구상춘 관장의 말이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는 단계에 접어들자 약간 느슨하던 그들의 자세가 확연히 달라졌다.
구 관장이 느닷없이 이십오 년 전에 발생했던 창현 그룹 일가의 횡령, 배임 사건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사실 저희로서는 여응수 전 총리께서도 ‘은하수 3-2’가 위작임을 전혀 알지 못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 그림은 원래 지금은 없어진 창현 그룹의 박성태 회장이 소장하고 있던 겁니다. 그게 어떻게 해서 여응수 전 총리의 손에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분이 ‘은하수 3-2’를 저희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할 당시에는 이미 위작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기레기라고 욕을 먹는 기자들이 넘쳐나는 세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기자들이 다 바보인 것은 아니다.
몇몇 기자들이 구상춘 관장의 말에서 특종의 냄새를 맡았다.
그가 회견 발표문을 모두 읽고 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몇몇 기자들이 손을 들어 올렸다.
“창현 그룹 해체 당시에 회장 일가가 횡령과 배임 등의 혐의로 남부지검으로부터 수사를 받았습니다. 당시 남부지검장이 여응수 전 총리였는데, 관장님 말씀대로라면 박성태 회장이 여 전 총리에게 위작을 뇌물로 줬다는 얘기입니까?”
기자의 질문에 구상춘 관장은 노골적으로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뇌물이라뇨?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이 아닙니다. 사실 이번에 김환기 화백의 전작 도록을 발간한 직후 여당의 민창복 의원을 비롯한 몇몇 분들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았습니다. ‘은하수 3-2’가 도록에서 빠진 것은 기증자의 선의를 모독하는 짓이라는 얘기였지요. 저희로서는 그에 대해 오해를 피할 수 있도록 해명을 드리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결국 창현 그룹에서 당시 횡령과 배임 사건을 수사 중이던 여응수 남부지검장에서 고가의 그림을 뇌물로 줬다는 뜻 아닙니까?”
“죄송하지만 그건 제가 한 말을 너무 곡해하신 것 같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단지 ‘은하수 3-2’를 기증할 당시, 여응수 전 총리께서는 그게 위작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셨을 거라는 점입니다. 박성태 회장께서 그 그림이 위작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 혹은 그게 어떻게 해서 여 전 총리께 넘어갔는지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기자들은 구 관장의 속셈을 눈치 챘다.
여기서 그를 계속 몰아세워봤자 더 이상 구체적인 얘기가 나오지 않을 것을 짐작한 몇몇 기자들이 질문의 방향을 바꿨다.
“은하수 3-2가 김환기 화백 전작 도록에서 빠졌다는 걸 항의한 사람이 민창복 의원이라고 하셨죠? 여응수 전 총리는 그에 대해 뭐라고 하시던가요?”
“여 전 총리께서는 저희가 이번에 발간한 도록에 대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저희로서는 민창복 의원의 항의를 통해 자칫하면 이번 일이 선의의 기증자에게 피해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여러분에게 사실을 알려드리고자 기자회견을 갖기로 한 겁니다.”
“그래도 민 의원이 그렇게 항의를 할 정도라면 은 당 소속인 여 전 총리와 사전에 무슨 얘기를 나눴을 거 아닙니까?”
“그것까지는 제가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회견장의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그 뒤로도 이십 분 이상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지만 구상춘 관장은 계속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서둘러 기자 회견을 마무리하고 물러났다.
회견장 한 구석에 서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도윤은 속으로 혀를 찼다.
‘저 양반이 저렇게 독한 분이 아닌데, 어지간히 기분이 상하셨던 모양이네.’
도윤은 어수룩한 학자를 연기하는 구상춘 관장으로부터 노회한 능구렁이의 모습을 발견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제 관장실에서 민창복을 봤을 때, 도윤도 그의 안하무인격인 태도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기는 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기자들을 모아놓은 상태에서 대놓고 칼을 휘두를 생각까지 하지는 못했다.
구 관장은 대단한 양반이었다.
‘민창복이 오늘 저녁에 올라올 기사를 읽은 뒤에 어떤 얼굴을 할지 기대되네.’
예상했듯이 그날 저녁에 올라온 인터넷 판 기사를 시작으로 각 언론사마다 구상춘 관장의 기자회견 내용이 대서특필되었다.
기사의 핵심은 ‘은하수 3-2’가 위작이라거나 그걸 감정한 사람이 이도윤이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과거에 그 그림이 정말로 검찰 수사를 무마하기 위한 뇌물로 쓰였느냐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자네 도대체 제 정신이야?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멋대로 해서 평지풍파를 일으켜? 자네가 내 대변인이야? 도대체 무슨 의도를 가지고 그런 짓을 한 거야?”
기사를 접한 여응수 전 총리가 펄펄 뛰며 대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깜짝 놀란 민창복은 기자회견이 있은 후 몇 번이나 구상춘 관장에게 전화를 하고 심지어 직접 찾아가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때마다 구 관장은 그를 피했다.
그를 더욱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여당 내부에서는 떠도는 뒷담화의 내용이었다.
“민 의원이 이도윤 박사를 경험이 없는 젊은 놈이라고 마구 몰아붙였다면서? 아니, 명색이 문화관광 상임위에 몸을 담고 있다는 사람이 어떻게 이도윤 박사를 모를 수가 있어?”
“이 박사가 미래 전자 최 사장의 사위잖아? 다음 선거 때 미래 전자에서 선거 자금을 후원받기는 틀린 거 아냐? 자식이라고는 달랑 딸 하나인데 그 딸의 남편이 그렇게 무시당했다는 얘기를 들으면 최 사장이 가만있겠어? 민 의원은 도대체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 벌집을 쑤신 거야, 쯧쯧?”
“미래 전자 사위가 아니더라도 이 박사 자신이 갑부야. 그 사람 데바 인스트루먼트 최대 주주잖아? 그 회사 주가가 요즘 어마어마하게 오르고 있는 거 알지? 아마 이대로 가면 조만간 미래 전자 주식보다 주가 총액이 더 커질 걸? 도대체 민 의원은 누굴 건드린 거야?”
도윤은 감정가로서는 드물 정도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젊고 잘 생긴 천재에다 TV 쇼에서 우승한 하버드 출신의 박사.
사실 민창복도 평범한 일반인이었다면 거기까지만 알고 있으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문화체육관광 상임위에 소속된 국회의원이었다.
도윤에 대해 마땅히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있어야 했다는 뜻이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민창복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그런 노력이 채 효과를 발휘할 여지도 없이 여당 수뇌부는 보기 드물 정도로 신속하게 조치를 취했다.
그들이 적극 노력한 끝에 여응수 전 총리의 과거사에 대한 논란은 금방 가라앉았다.
그러나 기자회견이 있은 지 불과 일주일 후, 민창복은 문화체육관광 상임위에서 물러나야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맡았던 일을 끝내던 마지막 날, 도윤은 구상춘 과장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구 관장이 넌지시 여당 속사정을 전했다.
“민창복 의원은 아마 다음 선거 때 지역구 공천을 받지 못할 거야. 평생 정치 좀 해보겠다고 발버둥 치며 살아온 사람인데 괜히 오지랖을 떨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진 셈이지.”
구 관장의 말을 들은 도윤이 피식 웃었다.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 없습니다. 다만 이번 일로 인해서 관장님께 여러모로 수고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 있나? 자네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전에도 말했듯이 앞으로도 이런 일은 심심치 않게 생길 거야. 그럴 때마다 혼자서 해결할 생각하지 말고 주변에 도움을 청해. 자네는 남들의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어.”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일은 도윤에게도 여러 가지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사실 그는 애초에 자신이 직접 나서서 민창복 의원 건을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구상춘 관장이 먼저 나섰고, 그게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효과를 냈다.
미술 감정은 몰라도 사람을 대하는 일은 확실히 경험과 경륜을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 * *
10월 말에 도윤이 맡았던 감정 작업이 모두 끝났다.
미술관 측의 도록 발간 작업은 앞으로도 몇 년 이상 계속 될 테지만 적어도 도윤이 도와야 하는 일은 일단 마무리된 것이다.
“이게 마지막이라고는 생각하지 마. 미안하지만 일이 있을 때마다 가끔씩 부탁할게.”
마지막 감정 작업을 끝내던 날, 도윤은 구상춘 관장과 장예주 박사를 비롯한 미술관 측 직원들과 간단하게 회식을 했다.
그 자리에서 장 박사가 간곡한 표정으로 그렇게 부탁했다. 도윤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지만 대놓고 거절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감정은 그의 평생 직업이고, 구 관장이나 장 박사와는 앞으로도 계속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었다.
현대 미술관을 돕던 일이 마무리 되자 도윤은 그때부터 다시 코앞으로 다가온 현소 미술관의 기획 전시회와 내년에 있을 오윤수의 개인 전시회 일로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11월 달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느닷없이 이브라힘 왕세제가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저는 당분간 일선에서 물러나서 긴 휴가를 갖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내년 상반기 쯤 나일라 미술관 관장으로 자리를 옮길 거예요. 그 때까지 이곳저곳 여행을 다닐 계획인데 언제 시간이 되면 한 번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왕세제의 사망 소식을 전한 압둘의 전화였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의 강력한 차기 후계자로 지목되던 이브라힘 왕세제의 최측근이었다.
왕세제가 살아 있을 때는 나라 안에서 손꼽히는 실권자였지만, 왕세제가 죽자마자 순식간에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 것이다.
나일라 미술관 관장 자리는 그의 마지막 공직이 될 게 분명했다.
이브라힘 왕세제가 죽은 뒤 한달 가량 지났을 때, 이번에는 다시 프랑크푸르트의 크리스틴 리히터로부터 연락이 왔다.
리히터 회장이 스포츠카를 운전하던 도중에 교통사고를 당해 숨졌다는 소식이었다. 여러 가지로 마음이 착잡해지는 비보였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도윤은 프랑스행 비행기를 탔다. 연말이 지나기 전에 미국 순회 전시회가 끝난 이후 이어질 오윤수의 유럽 전시회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전시장을 확정짓고 구체적인 일정을 조율하는 등 사람을 직접 만나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파리에서 오랜만에 알랭 말레 오르세 후원 회장을 만났다. 그가 적극적으로 도와준 덕분에 일은 순조롭게 처리되었고, 그는 곧바로 런던으로 움직였다.
그곳에서 다시 여러 지인의 도움으로 전시회에 관한 협의를 끝내가던 중 압둘로부터 전화가 왔다.
“런던에 계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도 마침 이곳에 있는데 잠깐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서로 반갑게 마주앉을 사이가 아니라는 건 잘 알지만 차나 한 잔 같이 하지요.”
도윤은 약간 망설인 끝에 대영박물관 중앙의 그레이트 코트 노천카페에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
사방이 탁 트인 공간인데다 늘 주변을 오가는 관람객들로 붐비는 장소이니 설마 그곳에서 압둘이 자신에게 해코지를 하기는 어려울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방이 오래된 유물과 걸작들로 둘러싸인 곳이라···. 이 박사를 만나기에는 이보다 더 걸맞은 장소가 없을 것 같군요. 늘 이런 분위기에서 이 박사와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긴장감 없이, 느긋하고 편안하게 말입니다.”
다시 만난 압둘의 얼굴은 전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모시던 사람이 죽고 자신은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 버린 신세였다.
그 점을 생각할 때 도윤으로서는 그에게서 풍기는 편안한 분위기가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여전히 긴장을 완전히 놓지 못하는 듯한 그의 얼굴을 살핀 압둘이 씩 웃었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면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왕세제께서 살아 계실 때부터 늘 이 박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고 조언을 드렸습니다. 도움을 받고 싶은 사람을 윽박질러서 굴복시키기보다는 친구로 만드는 게 훨씬 좋은 방법이니까요. 안타깝게도 왕세제께서는 끝내 제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셨지요.”
도윤은 압둘의 눈을 보고 그가 진심을 털어놓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뜸 그를 믿고 긴장을 풀기에는 그동안 쌓인 악연이 너무 깊었다.
“압둘 실장님께서는 제가 링커라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능력이 담긴 유물을 발견하면 제 생각이 나지 않으시겠습니까? 모른 척 하기 어려우실 텐데요?”
도윤의 목소리는 여전히 딱딱했다. 하지만 압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링커를 찾는 사람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절대적인 권력이나 불로장생 같은 겁니다. 아니면 엄청난 돈이죠.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상황에서 그 세 가지는 모두 제가 원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다 곱게 늙어죽고 싶어요. 링커가 필요하지 않을 뿐더러 사실 능력이 담긴 유물을 가려낼 만한 안목도 없지 않습니까? 하하.”
“욕심을 모두 버렸다는 말씀입니까?”
“욕심을 버렸다라···. 저는 리더가 아니라 참모입니다. 참모는 리더가 사라지면 한량이 될 수밖에 없어요. 이브라힘 왕세제께서 떠난 이상 앞으로 제가 뭔가를 위해 애를 쓰며 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도 않을 테고요. 말씀 드렸듯이 이젠 좀 편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굳이 만나자고 했습니다.”
도윤은 아무 말도 않고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진심일까? 아니면 또 다른 기만책?
하지만 그의 말마따나 이브라힘 왕세제가 죽은 지금, 이제 와서 압둘이 뭘 위해 또 다시 자신을 속인다 말인가?
그때,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적신 압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이 박사가 링커라는 걸 아는 사람은 저와 압둘 왕세제 둘뿐이었습니다. 이제 왕세제께서 돌아가셨으니 비밀을 아는 사람은 저 한 명만 남은 셈이지요. 하지만 저는 죽을 때까지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 않을 겁니다.”
“그건 고마운 말씀이군요. 하지만 왜 그렇게 하시···.”
도윤이 이유를 물으려는데 압둘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었다.
그는 찻잔에 조금 남아 있던 차를 마저 마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티오피아의 성 게오르기오스 성당에서 마주쳤을 때, 총알이 난무하는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에게 총을 겨누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박사를 친구라면 모를까 적으로 대하고 싶지 않습니다. 한때 서로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이미 끝났지요. 제가 원하는 인생이 그러하듯이 앞으로 남은 이 박사의 인생에도 평안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더니 홀연히 노천카페를 떠났다.
그가 떠난 빈 의자 위로 박물관을 구경하기 위해 분주히 오가는 관람객들의 발걸음 소리가 잠시 머물다 사라졌다.
약간 쌀쌀한 런던의 늦가을 바람 사이로 고즈넉한 햇빛이 내리비치고 있었다.
런던에서의 일을 끝낸 도윤은 다시 뮌헨으로 향했다. 오윤수의 작품을 한국으로 가져오기 전에 그곳에서 마지막 유럽 전시회를 할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의 짧은 일정을 마친 그는 망설임 끝에 프랑크푸르트 행 비행기를 탔다. 이왕 독일까지 왔으니 전에 했던 약속대로 리히터 회장의 묘에 헌화를 하기 위해서였다.
“일부러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해요.”
공항에는 압둘과는 달리 얼굴이 초췌해진 크리스틴이 직접 마중을 나왔다. 도윤은 그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공항에서 곧바로 리히터 회장이 묻힌 곳으로 향했다. 그가 공항에서 산 꽃을 리히터 회장의 비석 앞에 놓고 잠시 묵념을 한 뒤 고개를 들자 크리스틴이 대뜸 사과를 했다.
“죄송해요. 아빠가 이 박사에게 했던 일에 대해서는 제가 대신 사과를 드릴게요.”
도윤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쳐다봤다. 이럴 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