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리히터 회장님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그 분과 미처 풀지 못한 악연이 남아 있는 건 사실이지만 돌아가신 분을 놓고 과거의 일을 따져서 뭐하겠습니까?”
도윤의 말에 크리스틴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 사과를 받아주시겠다는 뜻인가요?”
“애초에 크리스틴 씨가 사과할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원하신다면 그 사과를 받아들이죠.”
그제야 내내 어두웠던 그녀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다행이네요. 저는 앞으로도 이 박사님과 계속해서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 싶었거든요.”
크리스틴이 기대와 희망이 담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순간 도윤은 그녀의 사과가 단순히 의례적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저한테 특별히 바라시는 게 있으십니까?”
“예전에 제가 서울에 갔을 때 하신 말씀 기억하시죠? 유물에 능력이 담겼는지를 감정해주는데 백만 달러, 그리고 그 능력을 주인에게 옮겨주는데 천만 달러라고 하셨잖아요. 그 제안이 아직도 유효한지 묻고 싶어요.”
“앞으로도 계속 유물 감정과 능력 전이를 부탁하고 싶다는 말씀이세요?”
“맞아요. 메시앙도 이미 죽었어요. 그러니 이제 능력을 전해주는 것은 둘째 치고 그 능력이 담긴 유물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 역시 이 박사님뿐이잖아요.”
도윤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확실히 이 아가씨는 아직 젊고 욕심이 많구나.
최서라와 석훈을 제외한다면 이 세상에서 그가 링커임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모두 일곱 사람이었다.
그 가운데 다니엘 로스차일드를 비롯한 네 사람은 이미 목숨을 잃었고, 남은 것은 왕이푸 회장과 압둘, 그리고 크리스틴 세 사람뿐이었다.
우바오량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 왕이푸 회장은 능력이 담긴 유물에 대해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도윤은 그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거나 심지어 두려워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록 연로하기는 하지만 비교적 멀쩡하던 우바오량이 칭기즈칸의 무덤에서 돌아온 뒤 불과 한 달 만에 갑자기 죽었다. 왕이푸 회장은 그 사실을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는 게 분명했다.
‘칭기즈칸의 무덤에서 틀림없이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고 짐작하는 눈치였어.’
압둘 역시 도윤과 거리를 두고 싶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남은 생을 되도록 안락하고 편하게 보내고 싶다는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아마 그걸 위해서라도 도윤이 링커라는 사실 자체를 머릿속에서 지우는 게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힘은 위험한 힘이다.
그는 도윤을 적대시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까이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들과는 달리, 크리스틴 리히터는 링커로서의 도윤의 능력에 대해 여전히 관심을 보였다.
그와 함께 칭기즈칸의 무덤에 다녀온 세 사람이 연달아 목숨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이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던 세 사람의 반응이 각자 다르다는 사실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도윤은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저한테 감정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물건은 어떻게 찾으시려고요? 혹시 메시앙처럼 붉은 아우라를 볼 수 있는 사람을 또 발견하신 겁니까?”
“아뇨. 아빠가 메시앙을 얻은 건 아주 운이 좋았던 일이에요. 하지만 아쉽게도 저에게는 그런 행운이 따르지 않았죠. 이 박사님이 그런 물건을 직접 찾아주시면 안 될까요?”
“누가 물건을 가지고 와서 감정을 부탁한다면 모를까, 제가 직접 나서서 그런 수고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물건을 찾아서 한국으로 가지고 오세요. 그럼 감정은 해드리겠습니다.”
“아쉽네요. 하지만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도윤은 능력이 담겨 있는 유물을 어떻게 찾을 생각이냐고 물으려다 그냥 참았다.
그의 짐작이 사실이라면 크리스틴은 의심되는 유물을 닥치는 대로 사들일 것이다.
엄청난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지만, 그녀에게는 실제로 그만한 돈이 있었다.
“능력이 담겨 있는지와 상관없이 유물 한 점을 감정하는데 무조건 백만 달러입니다. 설사 그렇게 해서 유물에 능력이 담겨 있는 것으로 판명되더라도 크리스틴 씨가 그 유물의 주인일 거라는 보장은 여전히 없어요. 그런데도 굳이 그런 수고를 하시겠다는 겁니까?”
“지난번에 서울에서 이 박사님의 도움으로 도자기에 관한 능력을 전해 받았잖아요. 그 뒤로 도자기의 가치를 척척 알아내고 심지어 만들 수까지 있게 되었어요. 도자기에 관해서는 한 번도 따로 공부한 적이 없는 데도요. 그게 저한테 얼마나 놀라운 즐거움을 주었는지 박사님은 아마 모르실 거예요.”
유물에 담긴 능력은 아무에게나 가는 게 아니다.
아마 능력을 전해 받지 않았더라도 어려서부터 도자기에 관한 공부를 했더라면 크리스틴은 충분히 일정 수준 이상의 안목과 실력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윤은 굳이 그런 사실을 설명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유물을 감정하는 건 일 년에 한 번 정도로 제한하겠습니다. 물론 출장 감정도 사양이에요. 감정 받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한국으로 직접 가지고 오세요. 그렇게 하신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고마워요. 절대로 귀찮게 하지는 않을게요.”
“한 가지 더, 제가 링커라는 사실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마십시오. 만약 크리스틴 씨를 제외한 다른 누군가로부터 비슷한 부탁이 들어올 경우 우리의 인연은 그걸로 끝입니다.”
“절대로, 죽을 때까지 저만의 비밀로 간직하며 살게요.”
글쎄,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도윤은 크리스틴과 헤어진 뒤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연말이 코앞이었다. 현소 미술상 시상식이 며칠 남지 않았던 것이다.
* * *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12월 21일, 서윤문화재단 내의 대강당에서 제1회 ‘현소 미술상’ 시상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국회 문화체육관광 상임위원장, 그
리고 미래 전자의 사장이자 도윤의 장인인 최병호 사장은 물론이고 오성 전기의 손창현 전무를 비롯한 정재계의 유명인사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시상식장에는 그들 외에도 도윤과 인연이 깊은 사람들이 여러 명 초대되었다.
그의 첫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조태석 교수와 그의 아들 조명근 검사, 그리고 얼마 전 결국 그와 결혼한 종로 경찰서의 윤다솔 과장이 모두 한 자리에 모였다.
왕화가 아버지인 왕이푸 회장을 대신해서 굳이 참석한 것은 조금 의외였다.
부산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다 홍도관 덕분에 졸지에 갑부가 된 천상섭은 아예 단상 위로 모셔졌다.
그는 홍도관을 팔아 4천억이 넘는 돈을 벌었는데, 얼마 전 그 가운데 무려 천억을 서윤문화재단에 기부한 것이다.
그로 인해 그는 도윤을 제외하고는 재단에 가장 많은 돈을 기부한 사람이 되었다.
그가 너무 많은 돈을 한꺼번에 기부하는 바람에 도윤은 한편으로는 감사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 걱정이 되었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처럼 그가 갑자기 돈을 물 쓰듯 쓰는 병에 걸린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러자 천상섭이 자기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부산에 제 명의로 된 건물이 무려 다섯 채입니다. 그것만 해도 아마 제 자식과 손자들까지 평생 먹고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거예요. 어차피 홍도관을 팔아서 번 돈 가운데 절반 정도는 기부할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박사님께서 이런 좋은 재단을 만들었다는 얘기를 듣고 어떻게 가만있을 수 있겠습니까?”
도윤은 감사의 표시로 그를 시상식 단상의 귀빈석에 앉게 했다.
그 외에도 국립현대미술관의 구상춘 관장과 국립박물관의 민경훈 관장, 그리고 이세준, 서연희 부부와 도윤이 다른 정재계 거물들과 나란히 단상 위에 자리를 잡았다.
수상자는 한 명뿐인데 축하를 하러 온 유명 인사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쓸 데 없이 ‘축하와 격려의 말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들이 차례로 마이크를 잡는 사이에 시상도 하기 전에 한 시간 가량이 훌쩍 지나가고 말았다.
도윤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구상춘 관장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현소 미술상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아주 뜨거워. 저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런 자리에서 어떻게든 마이크를 잡음으로써 자신을 정치적으로 홍보하고 싶을 거야.”
“미술상 시상식에서 축하 연설을 하는 게 정치적으로 도움이 된다고요?”
“확실히 도움이 되지. 자네하고 서유문화재단은 대중적인 이미지가 아주 좋거든. 이따가 봐. 저 사람들 모두 자네하고 나란히 서서 사진 한 장 찍으려고 난리를 칠거야.”
제1회 ‘현소 미술상’의 수상자는 박지석이라는 사십대 초반의 중견 화가였다.
심사위원들은 다수의 후보자를 놓고 격론을 벌인 끝에, 젊었을 때부터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작품을 연달아 발표했던 그의 예술적 도전 정신을 높이 평가해서 최종 수상자로 선정했다.
시상은 심사위원의 한 사람으로도 참가했던 도윤의 어머니 서연희가 맡았다. 처음부터 이름을 ‘현소 미술상’으로 정하기도 했고, 앞으로 수상자의 개인 전시회를 적극적으로 도와줄 곳 역시 현소 화랑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시상을 맡은 것이다. 상패와 꽃다발을 양손에 잡은 박지석이 수상 소감을 말하기 위해 마이크 앞에 섰다.
“…… 솔직히 지금까지 그림을 그려오면서 저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예술적 목마름이 아니라 현실적인 배고픔이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 이상, 가장으로서 처자식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으니까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제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를 외면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모순적인 갈등이 언제나 저를 갉아먹었습니다.”
그가 약간 목이 잠긴 목소리로 거기까지 얘기했을 때 객석 맨 앞자리에서 누군가 ‘흑’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의 아내였다.
잠깐 말을 멈추고 아내와 아이들이 앉은 자리를 돌아보던 박지석의 눈가에도 눈물이 글썽였다.
“이제 그만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 때쯤 뜻밖에 이 상을 받게 됐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아마 어떤 말로도 당시에 제가 느꼈던 고마움을 다 표현할 수 없을 겁니다. 가족과 예술 모두를 다 갖겠다고 했던 제 욕심 가득한 선택을 더 이상 후회하지 않을 수 있게 해주신 서윤문화재단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박지석이 수상 소감을 마치고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참석자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다른 심사위원들과 함께 객석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장예주 박사가 도윤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미소를 보냈다.
수상자를 결정하기 위한 심사를 진행할 때, 누구보다 열심히 박지석을 밀었던 장본인이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박시석의 그림은 말 그대로 실험적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실험적인 그림들이 그렇듯이 그의 그림 역시 사람들의 눈에 익숙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소위 말하는 팔리는 그림이 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는 석사 이상의 학위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에서 강의 자리를 얻는 것도 불가능했고, 덕분에 자신의 말처럼 오랫동안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다.
당연한 얘기지만 박지석은 유일한 수상 후보가 아니었다.
그러나 장예주 박사는 그의 작품이 지닌 독창적인 예술성을 높이 평가한 것은 물론이고 박지석이 중견 화가로 인정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늘 경제적인 궁핍에 허덕이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 상을 올 한 해만 주고 끝낼 건 아니잖아요? 수상자를 평생 지원하겠다는 현소 미술상의 취지를 생각할 때 화가의 경제적 사정도 당연히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결국 도윤은 물론이고 몇몇 심사위원들도 그녀의 말에 동의를 표시함으로써 박지석이 최종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덕분에 대한민국 미술계는 어쩌면 조만간 붓을 꺾을 수도 있었던 실험적인 화가 하나를 잃지 않게 되었다.
* * *
새해가 밝은 지 며칠 되지 않아 독일에 있는 구한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형! 저 영국으로 가게 될 거 같아요.”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다짜고짜 들려온 얘기였다.
“영국? 놀라간다는 얘기는 아닐 테고, 프리미어리그로 이적한다는 거냐?”
“네. 지금 제 에이전트가 몇몇 구단과 접촉하고 있는데, 아마 리버풀이나 맨체스터시티로 가게 될 확률이 많아요.”
두 구단 모두 프리미어리그의 강자인데다 비교적 돈이 많은 구단이다.
특히 맨체스터시티의 구단주인 아랍에미레이트의 만수르는 세계적인 갑부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넌 어디로 가고 싶은데?”
“글쎄요? 그거야 당연히 조건을 후하게 내거는 곳으로 가야지요. 저 프로잖아요.”
“그래도 당장 주전으로 뛰게 해줄 곳으로 가는 게 낫지 않아? 괜히 돈만 보고 갔다가 시합 때마다 벤치만 달구는 신세가 되면 오히려 안 좋잖아?”
“에이, 형. 저 구한샘이에요, 구한샘. 제 이적료가 얼만데 그 비싼 돈을 주고 데려가서 벤치에 앉히겠어요? 더구나 겨울이적 시장에서 영입한 선수들은 보통 즉시전력감이라고요.”
“자신만만하네? 요즘 필드에서 날아다닌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너무 기고만장한 거 아냐?”
“기고만장까지는 아니고 자신감은 좀 있어요. 저 지난 시즌에 분데스 리가에서 이 달의 선수를 세 번이나 받았잖아요. 게다가 군대도 면제라는 거 아닙니까, 헤헤.”
그러고 보니 그렇다.
한샘은 백혈병을 앓던 당시에 신체검사를 받고 군대를 면제받았다.
백혈병은 혈액 암이다.
그리고 모든 암 환자는 군대를 면제받는다.
도윤 덕분에 기적적으로 낫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군 면제가 취소되지는 않는 것이다.
“형 5월에 전시회 때문에 영국에 온다면서요? 오신 김에 제가 뛰는 경기도 구경하세요. 그때 되면 시즌 막판이니까 표 구하기 힘든 거 아시죠? 제가 VIP석으로 확실히 모실게요. 경기 끝나면 맛있는 거 사드릴 테니까 꼭 연락하셔야 돼요?”
자기 할 말만 하고 툭 끊긴 전화를 보며 도윤은 실소를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프랑크푸르트에 갔을 때는 이 녀석 얼굴도 보지 못하고 왔다.
그럴 상황이나 분위기가 아니기는 했지만 그래도 녀석이 자신에게 각별히 대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미안한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구한샘에게 있어서 도윤은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백혈병에 걸려 다 죽어가던 녀석을 살려준 것은 물론이고, 베토벤의 데스마스크에 담겨 있던 우베 젤러의 능력까지 전해주었다. 본인 자신도 워낙 축구 영재로 날리던 놈이기는 했지만 구한샘이 지금처럼 인정받는 선수로 성장한 데에는 도윤의 도움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구한샘이 영국 프리미어리그로 이적하게 됐다는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은 석훈이었다.
녀석은 원래부터 축구를 좋아하는데다가 구한샘의 팬이기도 했다. 한샘이 도윤을 자신의 경기에 초대했다는 얘기를 석훈이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형, 설마 저를 놔두고 혼자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보러 간다는 말은 아니겠죠?”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외국 여행을 갈 때 석훈을 데리고 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최근에는 재단의 일이 많은데다가 이제부터 녀석도 본격적으로 장학생들을 후원하는 일을 맡아서 처리해야 했기 때문에 쉽게 자리를 비우기 어려운 형편이었던 것이다.
돌아오는 삼월에는 드디어 조민아와 결혼식을 올리기로 예정되어 있기도 했다.
“오월이면 한창 신혼일 텐데 영국까지 축구 경기를 보러 갈 정신이 있겠어?”
도윤의 말에 석훈이 씩 웃으며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렸다.
“형. 제가 형만큼은 아니지만 이 바닥에서 최고의 신랑감으로 불리는 거 모르시죠? 이 나이에 벌써 자기 이름으로 된 집을 가지고 있겠다, 통장에 잔고도 두둑하고 안정적이고 월급 많은 직장까지 있잖아요.”
“야, 무슨 결혼 사이트에 등록할 것도 아니고 이미 임자가 있는 놈한테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조민아 씨가 신혼 초부터 영국까지 축구 보러 간다는 얘기를 듣고 좋아하겠냐?”
“당연하죠. 다른 일도 아니고 재단 이사장을 모시고 출장 간다는데 민아가 그걸 가지고 뭐라 그럴 리가 있겠어요?”
잘 났다, 이 자식아. 도윤은 실소를 터르리고 말았다.
“알았다. 한샘이한테 전화해서 네 표까지 두 장 준비해 달라고 부탁할게.”
결국 내친 김에 다가올 오윤수의 개인전시회에는 석훈도 데리고 가기로 했다.
어차피 미국에 간 김에 장은서와 오주현이 잘 지내는지도 한 번 둘러볼 필요가 있었다.
1월 둘째 주, 도윤은 석훈과 함께 뉴욕으로 날아갔다.
1월부터 시작해서 매달 장소를 바꿔가며 뉴욕, 워싱턴, 시카고와 LA를 거치는 순회 전시회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다른 일 때문에 중간 중간 한국과 미국을 왔다 갔다 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이번 전시회를 최대한 직접 챙길 필요가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