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2. 강변에서의 점심 식사>
레스토랑 르미즈(Remise).
크지 않은 간판에는 화려하지 않지만 나름대로 세련된 글자가 각인되어 있었다. 식당 입구는 두 사람이 나란히 움직이면 꽉 찰 것처럼 비좁았다. 하지만 그것이 샹델리제 거리의 고급 쇼핑몰 1층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게 재미있었다. 그 때문에 입구에서부터 마치 들어올 테면 들어오고 말 테면 말라는 듯한 거만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제레미 르콤트. 너 그동안 별로 변한 게 없는 것 같구나.’
원성훈은 식당 입구 위에 걸린 간판을 흘낏 올려다보고는 피식 실소를 내뱉었다.
르미즈는 지하에 자리 잡은 식당이다. 좁은 통로 형태의 비좁은 입구를 통과하자 갑자기 공간이 확 넓어지면서 밑층의 넓은 홀로 연결되는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에서부터는 홀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도록
사방이 탁 트인 형태라서 입구를 통과하는 것 자체가 마치 식당에 들어오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인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예약하셨습니까?”
그가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깔끔한 유니폼을 차려입은 웨이터가 다가와 물었다. 상대가 동양인임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한 거침없는 프랑스어. 하지만 원성훈의 입에서 나온 대답 역시 능숙한 프랑스어였다.
“아닙니다. 온라인으로는 2인 이상이 아니면 예약이 안 되더군요. 혼자 조용히 점심 한 끼 먹고 갔으면 좋겠는데 자리가 있겠습니까?”
물으면서도 상대가 어설픈 영어를 내뱉으며 당황하는 모습을 보일 거라고 기대했던 모양이다. 웨이터가 살짝 뜻밖이라는 표정을 짓더니 얼른 다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물론입니다. 따라오십시오.”
그가 원성훈을 안내한 곳은 중앙의 주방 주위를 뺑 둘러 감싸고 있는 일종의 스탠드 바 형식의 좌석이었다. 주로 혼자 온 손님들을 위한 자리였지만 동시에 셰프들이 요리를 만드는 모습을 직접 보면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괜찮네.’
그 스스로가 요리사이기도 한 원성훈에게는 일부러라도 앉고 싶은 자리이기도 했다.
웨이터가 가져다 준 메뉴에 적힌 코스 요기를 주문한 원성훈은 식사가 나오기 전까지 셰프들이 분주히 음식을 만드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르미즈는 미슐랭 스타 하나를 받은 좋은 식당이었다. 그런데 몇몇
보조 셰프들의 움직임이 식당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어딘가 어설펐다. 지켜보던 원성훈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신입 셰프들을 여러 명 새로 뽑았나? 저 정도면 아직 손님들이 보고 있는 주방에 세우기에는 조금 이른 것 같은데.’
설거지는 다른 곳에서 하는지 홀 한가운데 자리 잡은 주방에서 일하는 셰프들은 오로지 요리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들 속에서 움직이는 보조 셰프들은 주로 야채를 손질하거나 고기를 자르는 등의 간단한 작업만
소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성훈처럼 경험이 많은 요리사의 눈에는 그 간단한 작업 속에서도 발생하는 실수들이 보였다.
‘르미즈가 어쩌면 미슐랭 스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하더니, 이러면 실망인데….’
그가 속으로 혀를 차는 사이 주문한 요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코스 요리라고는 하지만 점심 식사였기 때문에 식전주나 한입에 먹을 수 있는 아뮤즈 부쉬는 생략되었다. 그래도 제일 먼저 나온 연어로 만든
앙트레, 즉 전채 요리는 제법 신선하고 맛있었다.
‘하지만 특색이 없어. 셰프의 솜씨를 발휘할 수 있는 아뮤즈 부쉬를 생략했으면 앙트레에라도 악센트를 주었어야지. 이건 제레미 답지 않은데….’
이어서 나온 생선 요리와 쇠고기 안심 스테이크 역시 평범했다. 아니, 요리 자체는 상당히 맛있다고 칭찬할 만 했다. 하지만 그것이 미슐랭 스타를 받을 만하냐고 묻는다면 원성훈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슐랭 스타는 단순히 음식의 맛으로만 얻을 수 있는 명예가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요리에서 셰프의 개성과 독창성이 느껴져야 한다.
그가 묵묵히 스테이크를 자르고 있는데 문득 누군가 앞에 다가와 서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요리사용 캡을 쓴 훤칠한 키의 백인 남자가 팔짱을 낀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제레미
콤프트. 레스토랑 르미즈의 주인이자 메인 셰프였다.
“이게 누구야? 원이잖아? 파리에는 어쩐 일이야?”
시비를 거는 듯한 그의 말에 원성훈이 피식 웃으며 입안에 있던 고기를 꿀꺽 삼켰다.
“모처럼 휴가를 얻어서 파리에 왔어. 샹델리제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니까 문득 오랜만에 자네 요리를 먹고 싶어서 말이야. 설마 손님 차별해서 받는 건 아니겠지?”
“자네가 내 요리를 먹고 싶어서 들렀다고? 재미있는 얘기군. 예전에는 내가 만든 요리는 입에 대려고도 하지 않았잖아? 못 보는 사이에 철이 든 건가? 그러고 보니 우리가 만난 게 벌써 이십년 전이군.
그만한 세월이면 자네도 철이 들 만 하지.”
“이십 삼년. 그리고 그 당시 네 요리는 정말 끔찍했어. 도저히 목으로 넘기기 어려울 정도로. 하지만 이제는 제법 먹을 만 해. 그동안 많이 노력했나 봐?”
“노력? 나 같은 천재에게 노력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것 같아? 우리 가게가 미슐랭 스타를 받은 게 벌써 십년 전이야. 내 이름으로 된 가게를 연지 고작 이년 만이었지. 나에게 필요했던 건 그저 내 마음껏
요리를 할 수 있는 자유와 공간뿐이었어.”
“내키는 대로 요리를 하니까 자연스럽게 미슐랭 스타가 따라왔다 이건가?”
“당연하지. 미슐랭 심사위원들은 틀에 박힌 요리를 싫어해. 뻔한 요리에 무한한 상상력을 가미하는 거야 말로 내가 가장 잘 하는 일이고. 그런 걸 사람들은 타고난 재능이라고 하지.”
“그 상상력이 스테이크를 굽는 간단한 일에는 끼어들 여지가 없었나 보군. 자네가 구운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르미즈에서 만든 요리야. 이걸 한 번 먹어보겠나?”
원성훈이 접시 위에 놓인 스테이크를 한 점 썬 뒤 포크에 찍어 제레미에게 내밀었다. 잠시 굳은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던 제레미가 결국 입을 벌려 그것을 받아먹었다. 조심스럽게 고기 맛을 음미하던 그의
표정이 먹기 전보다 더 딱딱해졌다.
“이럴 리가 없는데…. 우리 셰프들이 뭔가 실수를 한 모양이군.”
고기를 꿀꺽 삼킨 제레미가 마지못한 듯 잘못을 인정하는 말을 내뱉자 원성훈도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고기를 자를 때 보니까 심줄을 제대로 살피지 않더군. 불의 세기는 적당해 보였지만 굽는 타이밍에서도 실수가 있었어. 고기의 상태를 살피기보다는 그저 타이머가 알려주는 시간에만 신경을 쓰는
눈치더라고. 그런 식으로 조리를 하는 인간이라면 차라리 패스트푸드 점에서 햄버거용 패티나 뒤집는 게 나을 거야. 최소한 르미즈에는 어울리지 않지.”
원성훈의 신랄한 비판에 그를 무섭게 노려보던 제레미가 손가락을 탁 튀겼다. 그는 보조 셰프에게 원성훈이 주문한 메뉴 목록을 가져오게 하더니 입술을 꾹 깨물었다.
“크렘 브륄레(Creme Brulee)라. 이십삼 년 만에 내 요리를 먹으러 왔으니까 디저트는 직접 만들어주지. 영광으로 생각해야 할 거야.”
“제발 이번에는 먹을 만한 것으로 부탁하네.”
원성훈의 무심한 대꾸에 코웃음을 친 제레미가 조리대로 돌아갔다. 그는 먼저 계란 노른자와 우유를 섞은 뒤 거기에 메이플 시럽을 첨가해서 불에 졸였다. 그 뒤에도 몇 가지 향신료를 넣으면서 젓자 노란
거품이 몽실대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커스터드 크림이 만들어지자 그 위에 캐러멜 녹인 것을 살짝 부은 뒤 다시 오븐에 집어넣었다.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원성훈 앞에 그릇 가장자리에 산딸기가 걸쳐진 크렘 브륄레(Creme Brulee)가 놓였다. 작은 숟가락을 들어 그릇에 담긴 디저트를 한 입 떠먹은 원성훈이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그런대로 먹을 만 하군. 하지만 맛이 너무 익숙해. 나를 감동시키려면 조금 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의 매정한 평가에 제레미가 뿌득 하고 이 가는 소리를 냈다.
“오랜만에 만난 사이라는 걸 생각해서 옛정을 베풀려고 했더니 너무 건방을 떠는군. 르 꼬르동 블루(Le Cordon Bleu)를 졸업한 사람들 가운데 미슐랭 스타를 받은 친구가 몇 명이나 된다고 생각해?
나를 포함시켜도 쉰 명이 간신히 넘는 정도야. 그렇게 주제넘은 얘기를 하려거든 자네도 먼저 자격을 갖춰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자 원성훈이 피식 웃었다.
“얼마 전에 그만두기는 했지만 내가 메인 셰프로 있던 식당도 미슐랭 스타를 받았어. 그것도 두 개나. 한국에서는 유일하지.”
“네 식당이 미슐랭 스타를 받았다고? 거짓말!”
“거짓말이라고?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물론 정확히 말하면 내 식당이 아니야. 호텔 레스토랑이니까. 하지만 그곳의 메뉴를 정하고 레시피를 만드는 사람이 나라는 건 분명하지.”
제레미가 갑자기 원성훈의 앞으로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좋아. 자네가 정말로 내 입을 즐겁게 해줄 자신이 있다면 한 번 도전해 보는 게 어때? 손님인 척은 그만하고 그 잘 난 솜씨를 보여 달란 말이야.”
원성훈이 두 팔을 양쪽으로 벌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봐. 난 지금 요리사가 아니라 관광객 자격으로 온 거야. 요리를 하는 게 아니라 먹기 위해서 왔다고. 그런 나한테 무슨 수로 솜씨를 보이라는 거야?”
제레미가 살벌한 미소를 입에 물면서 손으로 자신의 뒤에 있는 주방을 가리켰다.
“우리 식당은 월요일마다 문을 닫아. 그때 원하는 재료를 준비해서 와라. 네가 얼마나 특별한 도구를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도 필요한 건 다 있을 거야.”
“나한테 네 주방을 빌려주겠다고?”
“그래. 이곳 주방은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지만 네가 특별히 허락하지. 여기서 직접 솜씨를 보여 봐.”
“흐음, 내가 일정이 조금 빡빡하기는 한데…. 다음 주 월요일이면 사흘 뒤인가?”
“그래. 파리에서 좋은 재료를 구하려면 어느 곳을 가야 하는지는 기억하고 있겠지?”
“그거야 당연히 기억하지. 자네를 보는 건 23년 만이지만 그동안 가끔씩 파리에 들르고는 했어. 자네가 그렇게 내가 만든 요리를 먹고 싶다면 특별히 솜씨를 발휘해 보지.”
원성훈은 그 말과 함께 씩 웃으며 테이블 위에 방금 먹은 식사비를 올려놓았다. 몸을 돌려 레스토랑을 떠나려던 그가 문득 주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왜 이렇게 주방을 환하게 열어놓은 거야? 처음에는 일식집에 잘못 들어온 줄 알았잖아?”
“일종의 퓨전이지. 요리든 레스토랑이든 뭐든지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야 하니까.”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다니. 요리사라면 당연히 그걸 앞서가야지. 그러니까 미슐랭 스타를 하나밖에 받지 못한 거야. 사흘 뒤에 다시 올 테니 기대하고 있으라고.”
끝까지 복장을 긁는 듯한 원성훈의 말에 제레미 다시 한 번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아무 말도 않고 원성훈이 계단을 올라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가 입구 너머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갑자기
제레미가 주방을 돌아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알퐁소. 나빌. 아까 스테이크를 굽던 게 너희 둘이었지? 너희들은 당장 내 주방에서 꺼져. 그리고 이 주방에서 타이머를 모두 치워. 한심한 것들 같으니라고.”
잔뜩 움츠러든 보조 셰프들을 노려보는 그의 두 눈에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 *
다음날 오전, 원성훈은 파리 시내에서 약간 북쪽에 위치한 베르내종 벼룩시장에 들렀다. 좁은 골목들마다 나름대로 개성을 지닌 작은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그곳에는 오래된 가구나 서적, 그림들을 파는
곳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오전 내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다니던 그가 문득 고가구들 사이로 오래된 액자를 여러 개 걸어놓은 가게로 불쑥 들어갔다. 벽에 걸린 그림들 가운데 유난히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이 있었던 것이다.
“그림은 몰라도 캔버스와 액자는 꽤 오래된 것이에요. 혹시 관심이 있습니까?”
물끄러미 그림을 보고 있던 그에게 가게 주인인 듯한 삼십대 초반의 남자 하나가 말을 건네며 다가왔다. 원성훈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림이 르노와르하고 비슷하네요. 설마 진작은 아니겠지요?”
“돌아가신 할아버지도 혹시 그러지 않을까 싶어서 사두었었죠. 하지만 아는 화가에게 물어보니까 비슷하게 흉내 낸 가짜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액자하고 캔버스 자체는 최소한 백 년 이상 된 게 분명합니다.
아, 혹시 이걸 가지고….”
위조범들이 즐겨 찾는 게 바로 오래되었지만 가치가 별로 없는 그림들이다. 그런 걸 구해서 전에 그려진 그림을 수정하거나 아예 물감을 모조리 벗겨내고 새 그림을 그려 비싸게 팔아먹기 위해서다. 그가 뭘
걱정하는지 깨달은 원성훈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나는 요리사입니다. 그림을 위조하는 사람이 아니라. 한국에서 새로 가게를 열 생각인데 거기에 걸어놓을 적당한 그림이 없을까 해서 둘러보고 있는 거예요.”
“한국 분이세요? 저는 발음이 워낙 정확해서 프랑스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요즘은 프랑스에 귀화해서 살고 있는 동양인들이 워낙 많아서….”
남자의 말이 쓸데없이 길어지려는 기색을 보이자 원성훈이 손을 저어 그의 말을 끊었다.
“그림이 가짜라도 제 마음에는 드네요. 이거 얼마입니까?”
남자가 그의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손가락 세 개를 들어올렸다.
“못해도 삼백 유로는 주셔야 합니다. 할아버지가 저걸 이백 유로를 샀거든요. 그 뒤로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최소한 그 정도는 받아야 액자하고 캔버스 값이라도 나와요.”
원성훈이 애매한 미소를 지은 채 남자를 똑바로 쳐다봤다.
“차라리 달걀이 오래 되었으니 닭 값을 받겠다고 하시오. 이백 유로에 합시다. 그 이상 받겠다면 다른 사람을 찾아보고.”
남자는 원성훈의 단호한 표정을 보고 그가 호락호락한 호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그는 결국 어깨를 으쓱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액자 위에 종이를 대충 씌우고는 포장용 끈으로 묶어서 건넸다. 생각보다 싸게 팔았다고 생각하는지 포장에 성의가 전혀 없었다. 쓴웃음을 머금은 원성훈은 그림을 들고 벼룩시장 이곳저곳을 조금 더
돌아다니다가 길가의 노천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는지 배가 출출했다.
간단히 요기할 음식을 주문한 뒤 가게 앞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는데 문득 그의 뒤에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하지만 함께 앉아도 될까요?”
고개를 돌려보니 이십대 초반이나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훤칠한 키의 동양 남자가 하나 미안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원성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자리를 손으로 가리키자 그가 냉큼 자리를 돌아와
앉았다.
“감사합니다. 휴가철이라서 그런지 자리가 없어서요. 실례지만 어느 나라 분이세요?”
“한국에서 왔습니다. 남한이요.”
남자의 표정이 환해지더니 대뜸 한국어가 튀어나왔다.
“아, 저도 한국에서 왔습니다. 지금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지만요.”
원성훈은 살짝 놀랐다. 프랑스어가 워낙 능숙해서 아까 벼룩시장에서 만났던 프랑스 남자처럼 자신도 앞에 앉은 젊은이가 이곳에 사는 동양인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림을 사셨나 보네요? 르노와르인가요?”
사내의 눈길이 옆 자리에 걸쳐놓은 액자에 향해 있는 것을 본 원성훈이 그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까부터 포장이 너무 대충 됐다고 생각했었는데 돌아다니던 도중에 종이가 살짝 벗겨졌던 모양이다. 그
바람에 벌어진 종이 사이로 그림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