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285화 (285/300)

285화

도윤은 뭐라고 한 마디 쏘아붙이려다가 그냥 꾹 참고 물러나기로 했다. 그래봤자 상대방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가능성은 별로 없어보였고, 자칫해서 언쟁이라도 벌이게 되면 소란을 피운 죄로 미술관에서

나란히 쫓겨날 위험까지 있었다.

그는 전시장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부인을 흘낏 살폈다. 면바지에 블라우스를 입고 카디건을 걸친 평범한 옷차림. 깨끗하게 세탁을 했지만 명품 브랜드라고 할 만한 옷은 없었다. 몸에 걸친 장신구도

귀걸이와 목걸이가 전부였는데 보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생활이 넉넉해서 미술관에서 교양을 쌓으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뒤늦게 그림에 취미를 붙였나? 그럼 어디 동호회 같은 곳에 가입해서 기본적인 교습이라도 좀 받지. 대가의 작품을 모사하려면 최소한 비슷하게는 그려야 할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저 부인이 어떻게 고흐의 자화상을 모사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는지도 의아했다. 이곳이 아무리 무료로 드나들 수 있는 국립 미술관이라고 해도 아무에게나 이젤을 세울 수 있도록 허가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미술관에서는 회화나 미술사를 전공하는 사람이 아닐 경우 모사할 수 있는 권리를 쉽게 주지 않는다.

‘미국이 생각처럼 자유와 평등이 잘 보장된 나라는 아닌데…. 여기 직원하고 잘 아나?’

그날은 그런 생각을 끝으로 미술관을 떠났다. 당시만 해도 그는 해가 가기 전에 부인을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다.

가을이 지나고 가끔씩 거리에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할 무렵, 도윤은 드디어 박사 논문의 초고를 완성했다. 어느덧 12월이 되었지만 그때부터는 또 정기적으로 타일러 교수의 연구실을 드나들며 논문의 세세한

부분에 대한 검토와 수정을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도윤과 타일러 교수 모두 크리스마스 휴가가 시작되기 전에 일차적인 검토를 마치고 싶어 했다.

“지금부터 2월 초까지는 혼자서 세부적인 내용을 수정해야 할 거야. 이번 겨울에는 아내와 함께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거든. 그래서 당분간은 자네 논문을 봐 줄 수가 없어. 내용은 거의 정돈된 것 같으니

다음 학기가 시작되면 완성된 논문을 볼 수 있기를 바라겠네.”

타일러 교수는 환한 표정으로 도윤의 손을 꽉 잡았다. 비록 세부적인 내용을 더 수정하라고 말했지만 이미 검토와 수정을 마친 내용만으로도 논문의 질에 만족한다는 뜻이었다.

“여행 잘 다녀오십시오. 내년에 뵙겠습니다.”

도윤도 웃으면서 그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같은 박사과정에 있던 클라우디아라는 동창생으로부터 전화가 온 게 바로 그 무렵이었다. 워싱턴에서도 제법 명망 있는 집안 출신인 그녀는 석사 과정 때부터 도윤과

학교생활을 함께 한 덕분에 상당히 친한 사이였다. 그녀는 전화를 걸자마자 대뜸 도윤의 이번 크리스마스 휴가 일정에 대해 물었다.

“얘기 들었어. 이번 겨울에도 한국에 돌아가지 않을 예정이라면서?”

“다음 학기부터 논문 심사에 들어가잖아. 그래서 이번 겨울에는 기숙사에 머물면서 원고를 수정해야 될 것 같아. 학교 측에도 이미 허가를 받아놨어.”

“힘들겠구나. 하지만 아무리 논문이 중요해도 크리스마스에는 좀 쉬어야 하는 거 아냐?”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친구들도 크리스마스 휴가를 맞아 모두 집으로 돌아갈 텐데 텅 빈 기숙사에서 혼자 뭘 하면서 쉰단 말인가? 그가 입맛만 다시면서 별 대답을 하지 않자 클라이우디아가 전화기 저편에서

혀를 차더니 뜻밖의 제안을 했다.

“다음 주에 워싱턴 국립미술관에서 자선 파티가 있어. 주로 미술계 인사들이 초청 대상인데 특별한 계획이 없으면 거기 함께 갈래?”

“자선 파티? 그런데 가면 기부 같은 것도 하고 그래야 하지 않나? 나 돈 없어.”

도윤의 집도 상당히 부유한 편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부모에게 유학비용을 모두 신세지는 마당에 기부금까지 내고 다닐 수는 없었다. 그 말에 클라우디아가 깔깔대며 웃었다.

“아무도 너한테 기부금을 내라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마. 넌 그냥 미술계 인사로서 참석해서 파티를 즐기기만 하면 돼.”

“내가 미술계 인사라고? 에이, 그건 아니다. 이제 고작 박사 과정 학생일 뿐인데.”

“박사 과정이면 확실히 미술계 인사지. 비록 유명 인사는 아니지만. 그리고 그냥 참석하는 게 미안하면 거기 와서 자원봉사라도 좀 해.”

“자원봉사? 설마 나더러 파티에서 서빙을 하라는 건 아니겠지?”

“서빙은 무슨? 파티 초대자에게 누가 서빙을 부탁해? 괜찮으면 그림이나 몇 점 감정해 달라는 거야. 너 감정 귀신이잖아.”

감정가로서 정식으로 데뷔한 건 아니지만 도윤의 감정 솜씨는 하버드 내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그간 몇 번의 사건을 통해 그림의 진위를 가려내는 그의 안목이 학생은 물론이고 교수들에게도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같은 과의 어떤 교수는 그런 도윤을 가리켜 ‘신들린 눈’을 가졌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자선 파티라면서? 거기서도 그림을 감정할 일이 있는 모양이지?”

“말 그대로 자선 파티니까. 아주 비싼 그림은 아니더라도 참석자 가운데 일부가 기부금 대신 미술품을 기증하기도 하거든. 그걸 팔아서 자선기금을 충당하는 거지.”

“그러니까 기증된 미술품을 감정해 달라는 거지? 하지만 그런 거라면 나 말고도 따로 전문 감정가들을 부르지 않았을까? 아마추어가 함부로 나서면 오히려 민폐가 될 것 같은데?”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하버드 내에서는 네 감정 솜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 여기 교수님들도 몇 분 파티에 참석할 테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네가 감정을 도와준다고 하면 그분들도 좋아할 걸?

솔직히 널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가 아마추어 감정가라고 생각하겠어?”

클라우디아의 거듭된 요청을 받은 도윤은 고민 끝에 결국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미술품 감정이라고는 하지만 결국 미리 초대받은 전문 감정가들을 조금 도와주는 정도일 것이다. 그 정도라면 크게

어려울 게 없을 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어차피 크리스마스에 혼자 기숙사에서 논문이나 만지작거리는 건 그로서도 썩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 * *

자선 파티가 열리는 장소는 워싱턴 국립 미술관에 딸린 연회장이었다. 도윤은 모처럼 턱시도를 차려입고 나들이를 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연회장에 들어가자 입구에서부터 낯익은 얼굴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리가 아닌가? 휴가인데 집에 돌아가지 않고 기숙사에 머물기로 했나 보군?”

그가 클라우디아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누군가 그를 알아보고 반갑게 웃으면서 다가왔다. 허먼 슈미츠. 르네상스 회화가 전공인 하버드 대학교 교수였다. 그는 지역 방송국의 미술사 강좌에도 여러 번

얼굴을 내밀었을 만큼 대중적으로도 꽤 지명도가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더구나 같은 과이기 때문에 도윤과는 서로 낯이 익숙한 사이였다.

“교수님 안녕하세요? 이번 휴가 때는 기숙사에 머물면서 논문을 다듬기로 했습니다. 다음 학기에 학위 논문 심사가 있어서요.”

도윤이 공손히 인사하자 슈미츠 교수가 깜빡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참, 그렇지. 그렇잖아도 타일러 교수에게 얘기 들었네. 완성된 초고의 내용이 좋다면서 칭찬이 대단하더군. 나도 개요를 얼핏 전해 들었는데 꽤 재미있는 논문이 될 것 같아.”

“아직 많이 미흡합니다. 심사 때 혼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자네도 역시 한국인이 분명하군. 겸손이 너무 지나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가 쓴 논문이라면 나도 개인적으로 기대가 커. 그나저나 파티에는 혼자 온 건가? 아무리 논문 때문에 바쁘더라도 이런 날에는

즐길 줄도 알아야지. 함께 온 여자 친구는 없어?”

그 말에 도윤이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데 마침 클라우디아가 연회장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그녀는 옅은 푸른색이 감도는 드레스 위에 긴 모피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클라우디아는 입구에서 코트를

맡기자마자 곧바로 도윤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워싱턴에 본가가 있어서 그런지 몸에 걸친 장신구에서도 반짝이는 빛이 제법 많이 눈에 띄었다.

“오늘의 파트너가 클라우디아였어? 두 사람이 서로 가까운 사이였는지는 몰랐는데?”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본 슈미츠 교수가 눈을 찡긋했다. 도윤이 허탈하게 웃으며 급히 손을 내저었다.

“클라우디아하고는 그냥 같은 과의 친한 친구일 뿐이에요. 서로 사귀는 게 아니라. 그리고 연상은 제 스타일이 아닙니다. 저를 놀리시는 건 상관없지만 괜히 클라우디아까지 곤란하게 만들지 마세요.”

“스타일이야 사람을 사귀다보면 바뀔 수도 있는 거지. 아무튼 클라우디아도 괜찮은 아가씨니까 굳이 거리를 두고 대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어. 그럼 불청객은 이만 자리를 피해주지. 즐거운 밤이 될 수 있기를

바라네.”

도윤이 기가 막혀 입을 떡 벌리는 사이 슈미츠 교수는 그의 어깨를 툭 치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는 허탈하게 웃으면서 다가오는 클라우디아를 향해 손을 들었다.

“옷에 힘 빡 주고 왔네? 이렇게 차려 입으니까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여.”

도윤이 테이블 위에서 샴페인 한 잔을 집어 들어 그녀에게 건네며 칭찬의 말을 건넸다. 클라우디아가 잔을 받아들며 어깨를 으쓱했다.

“내 전공이 고대 미술이잖아. 허구한 날 청바지만 입고 폐허를 뒤적거리다 보면 가끔씩 내가 21세기를 살아가는 문명인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먹는다니까? 이렇게 한 번씩 옷차림에 힘을 줘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해주지 않으면 안 돼.”

클라우디아는 원래 중성적인 매력이 강한 활발한 여자였다. 그런데 오늘은 성장을 하고 화장에도 공을 들였는지 평소와는 달리 몸 전체에서 여성적인 우아함이 물씬 풍겼다. 도윤은 피식 웃으며 그녀와 잔을

부딪쳐 건배를 한 뒤 연회장을 휙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거물들이 꽤 많이 왔네? 장소가 워싱턴 국립 미술관이라는 것도 뜻밖이고.”

“워싱턴은 정치의 중심이니까. 정치인들은 자선 파티에 얼굴을 내미는 걸 좋아 하거든.”

파티에 참석한 손님들의 대부분은 하버드를 비롯한 인근 아이비리그 대학의 교수들과 미술중개인 등의 미술 관계자들이었다. 그 중에는 도윤도 낯이 익은 화가와 조각가들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TV나 신문에 가끔씩 얼굴을 비추고는 하는 상하원 의원들을 비롯한 정치인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클라우디아는 도윤을 데리고 다니면서 여러 사람들에게 인사를 시켜주었다. 그녀의 집안이 워낙 워싱턴에서는 꽤 알려진 가문이어서 그런지 클라우디아는 생각보다 많은 유명인사들과 안면이 있었다. 덕분에 도윤도

적지 않은 예술가나 수집가들과 통성명을 했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는데 새삼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회장 한쪽 구석에서 어딘지 익숙하게 들리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파티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였다. 도윤과 클라우디아는 마침 목소리가 들린 곳과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소란을 피우는

당사자를 금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서 두명의 남녀가 언쟁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내 그림이 어째서 가짜라는 거예요? 다들 눈이 삔 거예요? 이건 우리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와일리에게서 직접 선물 받은 거라고요. 화가 자신이 준 선물이 어째서 가짜라는 거죠?”

오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중년 부인이 허리에 두 손을 얹은 채 삼십대 중반의 남자를 닦달하고 있었다. 남자는 진땀을 흘리며 그녀를 달래려고 앴는 중이었다.

“하지만 비츠 부인. 우리 쪽 감정가의 의견은 부인의 주장과 다릅니다. 이건 와일리의 진작이 아니라 비슷하게 흉내 낸 모작에 불과하다고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와일리는 최근 유명해지면서 모작이 많이 나돌고

있어요.”

“내가 말했잖아요. 이건 와일리가 지금처럼 유명해지기 이전에 그린 작품이라고. 누가 무명의 흑인 화가가 그린 그림을 일부러 흉내 내겠어요?”

“부인이 기증한 그림이 언제 그려졌는지는 작품의 진위와는 무관합니다. 죄송하지만 그 초상화는 기증을 받을 수 없으니까 그냥 가지고 돌아가 주십시오. 자꾸 이렇게 억지를 부리며 소란을 피우시면 저희로서도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경찰? 지금 경찰이라고 했어요? 선의로 그림을 기증하겠다는 사람을 경찰에 신고하겠다고요? 어떻게 나한테 감히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불러요. 당장 경찰을 부르라고요. 나도 경찰이 오면 당신이

얼마나 무례하게 굴었는지 똑똑히 전해주겠어요.”

도윤은 미술관 직원이 분명해 보이는 남자가 중년의 여자와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어? 저 여자의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데? 그가 머릿속에 잠겨 있던 기억의 실마리를 막

끄집어내려는 찰나, 옆에 있던 클라우디아가 가볍게 혀를 차며 말했다.

“마가렛 비츠 부인이네. 몇 년 전에 죽은 콜린 비츠의 부인이야.”

콜린 비츠라면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다고까지 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미국에서는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화가였다. 우주를 테마로 한 유화를 주로 그리는 사람이었는데 몇 년 전에 아쉽게도 병으로 일찍 죽고

말았다.

“저 막무가내인 여자가 콜린 비츠의 부인이라고?”

도윤이 흠칫 하며 묻는 말에 클라우디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말투가 어째 전에 본 적이 있다는 식이네? 비츠 부인을 알아?”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달 전 다름 아닌 이곳 워싱턴 국립미술관에 고흐의 자화상을 보러 왔던 그를 그림도 볼 줄 모르는 문외한 취급을 했던 인물. 클라우디아가 비츠 부인이라고 말한

여자는 그때 자화상 앞에 이젤을 세워놓고 이상한 그림을 그리고 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근데 이상하네? 비츠 부인이 성격이 좀 드세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짜 그림을 진짜라고 우길 사람은 아닌데…. 사기를 치려고 할 정도로 돈을 밝히는 사람도 아니고.”

클라우디아의 말마따나 여러 유명 인사들이 참석하는 파티임에도 불구하고 직원에게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비츠 부인의 옷차림은 비교적 수수했다. 도윤이 미술관에서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보다는 약간 나았지만

그래도 몸에 걸친 드레스나 장신구 어디에서도 화려하다거나 사치스러운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는 비츠 부인이 케힌데 와일리의 그림을 이곳에 기증하기 위해 가지고 왔는데, 감정가가 그걸 가짜라고 감정했다는 애긴데…, 한 번 가볼래?”

클라우디아의 말에 도윤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이곳의 감정가가 해당 그림을 위작이라고 판단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비츠 부인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첫 인상을 가지고 있던 그가 굳이 참견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그가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클라우디아는 이미 두 사람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잠시만요. 혹시 무슨 문제가 있나요?”

그녀가 성큼 다가서며 묻자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미술관 직원이 흠칫 놀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클라우디아의 얼굴을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아, 별 거 아닙니다. 이 부인께서 케힌데 와일리의 위작을 기증하겠다고 우기셔서 미술관 쪽 입장을 설명 드리고 있던 참입니다. 감정가에 의해 가짜라는 감정 결과가 나왔거든요.”

“그러니까 그건 가짜가 아니라고 말했잖아요? 와일리가 남편에게 직접 선물한 거라니까요?”

직원의 말에 비츠 부인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그러자 직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거야 부인의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우리 쪽 감정 결과는 그와 달라요.”

직원이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자 클라우디아가 불쑥 새로운 제안을 했다.

“그럼 그 그림을 저희가 잠시 볼 수 있을까요? 이 부인께서는 아무래도 미술관 측의 감정 결과를 수긍하지 못하시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다른 감정가의 견해도 들어보는 게 어때요? 마침 이 자리에 꽤

괜찮은 감정가가 한 명 있는데.”

그녀는 그러면서 약간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도윤을 슬쩍 쳐다보았다. 순간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리는 바람에 도윤은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런 식으로 사람을 함부로

끌어드리면 곤란하지.

클라우디아가 많이 봐줘야 고작 이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젊은이를 가리키며 괜찮은 감정가라고 소개하자 직원은 물론이고 비츠 부인마저 얼굴을 찌푸렸다. 도윤과는 달리 비츠 부인은 그의 얼굴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저렇게 젊은 사람이 무슨 그림을 감정한다고….”

직원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비츠 부인이 먼저 거절의 뜻을 표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또 다시 새로운 사람이 불쑥 나서면서 도윤의 입장에서는 상황이 급격하게 난처한 방향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 사람의 실력이라면 내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리가 미술품의 진위를 가려내는 안목은 지금까지 내가 본 어떤 사람보다 뛰어나니까.”

허먼 슈미츠 교수였다. 그는 미술관 직원은 물론이고 비츠 부인도 슈미츠 얼굴을 잘 아는 유명인사였다. 도윤이 펄쩍 뛰며 사양의 뜻을 표시했다.

“아, 그래도 이미 감정이 끝난 작품에 대해 제가 굳이 왈가왈부하는 건….”

“절대적인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일세. 그림의 주인이 감정 결과를 수긍할 수 없다면 한 번쯤 감정을 더 해보는 것도 나쁠 건 없지. 나도 도대체 어떤

그림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야.”

도윤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상황이 도대체 왜 이렇게 흘러가는 거야?

(다음 화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