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논문 디펜스를 위한 프레젠테이션과 질의응답 과정은 한시간만에 무난하게 끝났다. 참석했던 일반 청중들이 모두 빠져나간 뒤 이어진 심사위원들의 질문 역시 특별히 까다롭거나 대답하기 어렵지 않았다.
심사위원들의 얼굴 위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흘렀다.
“축하하네, 이 박사.”
심사의원들이 만장일치로 논문을 통과시키기로 결론을 내리자 지도교수인 타일러 교수가 제일 먼저 다가와 도윤에게 악수를 청했다. 도윤은 얼떨결에 그의 손을 잡은 채 허리를 깊이 숙였다. 가슴 속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감사합니다. 그동안 교수님께 너무나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의 말에서 진심을 느낀 타일러 교수가 껄껄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오히려 자네 논문 덕분에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더 큰 도움을 받았지. 앞으로도 계속 연구해서 지금보다 더 큰 성과를 내주기 바라네. 박사학위는 공부의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는 거
알지? 나뿐만이 아니라 심사위원들 모두 기대가 커.”
“명심하고 앞으로도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타일러 교수의 축하인사가 끝나자 다른 교수들 역시 차례로 그에게 다가와 악수를 청하거나 어깨를 두드리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부심 가운데 한 명인 슈미츠 교수가 그의 손을 잡은 채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곳 워싱턴에서 콜린 비츠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거 알지? 시간 되면 나하고 같이 한 번 들르지 않겠나? 사흘 뒤쯤이면 시간을 낼 수 있는데.”
“물론입니다. 그렇잖아도 반드시 참석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래. 비츠 부인도 자네가 오기를 많이 기다리고 있어. 사흘 뒤에 함께 가세.”
“알겠습니다. 시간 비워놓겠습니다.”
교수들의 축하 인사를 끝으로 모든 심사가 끝나자 도윤은 가방을 챙겨 강의실을 나왔다. 그러자 그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클라우디아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통과했다면서? 축하해. 그럼 이제부터 이 박사라고 불러야겠네?”
“그거야 정식으로 학위증을 받은 다음이지. 아무튼 고맙다.”
두 사람은 학교 안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시킨 뒤 마주앉았다. 내년에 논문 심사를 받아야 하는 클라우디아는 심사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러더니 어느 정도 궁금증이 풀렸다 싶은지
갑자기 불쑥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이번 학기에 취업을 위한 인터뷰를 하나도 하지 않았다면서? 정말 학위를 받으면 한국으로 바로 돌아갈 거야? 여기서 자리 안 잡고?”
미국 학생들은 보통 졸업 학기에 여러 회사에 원서를 내고 취업을 위한 인터뷰를 받는다. 그래야 졸업과 동시에 직장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윤은 어느 곳에도 취업을 위한 원서 자체를 제출하지
않았다. 졸업하면 일단 군대를 다녀와야 할 뿐 아니라 전역 후에도 당분간은 서울에 있는 현소 화랑에서 부모님을 도울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도윤의 설명을 들은 클라우디아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교수님들이 얼마든지 추천서를 써주실 것 같던데. 특히 대학에 강의 자리나 연구직을 구한다고 하면 아마 쌍수를 들어 환영하실 걸?”
“배우는 거라면 몰라도 아직 누굴 가르치는 일에는 별로 흥미가 없어. 조금 더 나이가 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누굴 가르치기에는 내가 너무 어리잖아. 교수보다는 전문 감정가로 살아가고 싶기도 하고.”
“그럼 이번 여름부터는 못 보겠네? 아쉽다. 한국에 돌아가도 전화나 이메일을 통해서 가끔씩 서로 연락하자. 논문 쓰다가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도움을 부탁할게.”
“너는 고대 미술사 전공이잖아? 나하고는 전공이 다른데 뭘 도와?”
도윤이 슬쩍 한 발을 뒤로 빼자 클라우디아가 코웃음을 흥 하고 쳤다.
“우리 천재께서 왜 이러시나? 하버드에 네가 동서양의 미술사를 두루 꿰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그러지 말고 이메일 보내면 꼭 답장해라? 안 그러면 받을 때까지 계속 국제전화 때릴
테니까.”
“알았다. 대신 나도 부탁할 일이 있으면 연락할게. 아참, 사흘 뒤에 슈미츠 교수님하고 함께 콜린 비츠 전시회 구경 가기로 했어. 너도 그때 시간 되면 올래?”
“정말? 알았어. 그날 나도 갈 테니까 거기서 교수님이랑 같이 점심이나 먹자.”
클라우디아와 헤어져 기숙사로 돌아오자 그제야 긴장이 모두 풀리면서 몸이 축 늘어졌다. 드디어 누구에게나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는 생각에 가슴 깊은 고스로부터 벅찬 희열이 솟구쳐
올라왔다.
중국에서 사년. 그리고 미국에서 육 년. 열다섯 살에 처음 중국으로 유학을 가서 학부과정을 시작한 뒤로부터 어느 덧 꼬박 십년에 지났다. 나이도 벌써 스물다섯이었다. 그는 일단 샤워를 마치고 나서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엄마. 오늘 논문 심사 통과했어요.”
서연희는 펄쩍 뛰듯이 기뻐했다.
“정말? 그럼 우리 아들이 이제 박사가 된 거야?”
“네. 졸업식 때 아빠하고 같이 오세요. 함께 사진도 찍고 관광도 하게요. 그런 다음에 다 같이 한국으로 돌아가요.”
“알았다. 아빠한테도 그렇게 말할게. 장하다 우리 아들. 축하해.”
기쁜 소식을 가족에게 전하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어느 새 창밖이 어둑어둑해지더니 드문드문 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윤은 창가에 의자를 놓고 앉아 한참동안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오늘은 누구 말마따나
참으로 아름다운 밤이었다.
* * *
사흘 뒤, 도윤은 슈미츠 교수와 클라우디아를 만나 함께 콜린 비츠의 전시회장을 찾았다. 그들을 본 비츠 부인이 다가와 도윤을 가볍게 포옹하며 축하인사를 건넸다.
“이 박사. 논문 심사에 통과했다는 얘기 들었어요. 슈미츠 교수가 논문 내용이 좋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더라고요. 정말 축하해요.”
“감사합니다. 다 교수님들 덕분이에요.”
비츠 부인은 지난번에 직접 집으로 찾아가서 감정을 해준 뒤로는 처음 만나는 사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치 아들 친구처럼 도윤을 친근하게 반겨주었다.
“뉴욕에서의 전시회가 성황리에 끝났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저도 축하합니다.”
도윤이 전시장을 오가는 사람들을 슬쩍 둘러보며 말하자 비츠 부인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맺혔다.
“이번 전시회는 뉴욕에서 열었을 때보다 반응이 더 좋은 것 같아. 기자들도 취재를 하기 위해 많이 몰려들었고. 슈미츠 교수님의 충고에 따라 지난번보다 그림 가격을 대폭 올렸는데도 벌써 대부분이
팔려나갔어. 이젠 처음부터 팔지 않기로 한 것들을 제외하면 남은 게 몇 점 없을 정도야.”
그러자 슈미츠 교수가 그녀에게 더욱 기쁜 소식을 전했다.
“MOMA 측과 통화를 했는데 전보다 반응이 훨씬 호의적으로 변했습니다. 이번 전시회가 끝나면 그쪽에 콜린의 그림을 기증하는 문제를 놓고 직접 만나 논의하기로 했어요. 지금 예상으로는 콜린의 그림을
그곳에 상설전시하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정말이요?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죽은 남편도 기뻐할 거예요. 그이는 돈 때문에 달려드는 사람들을 괘씸해했던 거지 일반 관객들마저 싫어하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하시니 저도 기쁩니다. 좋은 소식을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때마침 비츠 부인을 찾는 사람이 왔기에 도윤과 일행은 천천히 전시장을 돌면서 그림들을 구경했다. 도윤과 슈미츠 교수는 모두 예전에 본 그림들이었지만 그의 작품을 처음 대하는 클라우디아를 위한
배려였다.
전시장을 한 바퀴 둘러본 세 사람은 바로 떠나지 않고 전시회장에 딸린 휴게실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을 찾는 귀빈들을 위해 간단히 다과를 즐기며 쉴 수 있도록 특별히 마련한 공간이었다. 세 사람이 그곳에
앉아 이런저런 담소를 나눴다.
“전시회 덕분에 비츠 부인도 더 이상 남의 집 일을 할 필요가 없게 됐네. 명분은 콜린의 그림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고는 해도 그림이 팔린 덕분에 수입이 적지 않았어. 덕분도 나도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고.”
슈미츠 교수가 전시회를 통해 얻은 성과를 언급할 때 마침 비츠 부인이 휴게실로 들어왔다. 그녀를 보는 순간 도윤은 문득 잠시 잊고 있던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비츠 부인. 괜찮으시면 함께 차나 한 잔 하고 가시지요?”
그가 비츠 부인을 부르자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빈자리에 앉았다.
“그림은 다 둘러보셨어요? 바쁘실 텐데 일부러 찾아와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그녀의 말에 도윤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비츠 씨의 그림이라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봐도 언제나 좋지요. 그건 그렇고 제가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일이 있는데 혹시 불편하시면 대답을 안 하셔도 됩니다.”
도윤이 미리부터 한 발을 빼는 듯한 태도로 말을 꺼내자 비츠 부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불편한 질문이라고요? 어떤 건데요?”
“예전에 제가 워싱턴 국립미술관에 갔다가 우연히 부인께서 이젤을 세워놓고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고흐의 자화상을 모사하고 계시더군요.”
“어머 그걸 보셨어요? 그거 요에는 그만 둔지 한참 됐는데.”
비츠 부인은 얼굴을 붉히며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도윤은 여기서 그만 둘까 하다가 이왕 말을 꺼낸 김에 한 번 더 물었다.
“그런데 그때 왜 그 그림을 모사하고 계셨던 거예요? 제 느낌이기는 하지만 고흐의 그림은 그다지 부인의 취향과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그러자 비츠 부인이 다소 복잡한 의미가 담긴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직접 봤다면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고흐뿐만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그림에는 영 소질이 없어요. 그건 그저 남편과 함께 보냈던 옛 추억을 되새기고 싶어서 했던 일이에요. 기분이 울적해질 때마다 그러고 앉아
있으면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지거든요. 그래서 한동안 쉬는 날마다 미술관 측의 허락을 받아서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고는 했어요.”
“비츠 씨와의 추억이요?”
“네. 남편은 저와 뉴욕에서 연애를 하던 시절부터 틈만 나면 MOMA에 가서 고흐의 그림을 모사하고는 했어요. 특히 ‘별이 빛나는 밤’ 앞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죠. 그 사람은 그 그림을 정말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본격적으로 자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로도 유난히 별을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도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츠 부인의 투박한 그림 솜씨를 비웃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그날 상대의 감상을 공연히 방해하면서 마음을 괴롭힌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바로 도윤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제야 비로소 콜린 비츠의 그림에서 왜 고흐와 유사한 느낌이 겹쳐보였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짐작대로 비츠는 고흐의 그림으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던 게 분명했다. 도윤은 사과의 마음을
담아 비츠의 그림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어쩐지 채색 기법을 비롯해서 비츠 씨의 그림에서 고흐의 흔적을 적지 않게 느꼈습니다. 그분이 생전에 고흐를 많이 좋아하셨던 모양이군요.”
“엄청나게 좋아했죠. 원래부터도 남편은 천체나 우주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그러던 차에 ‘별이 빛나는 밤’을 보고 바로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바로 이거라니, 그게 정확히 어떤 뜻인가요?”
“고흐는 별이 있는 풍경을 그렸지만 자신은 별 그 자체를 그리겠다고 했어요. 고흐는 땅에서 별을 올려다봤지만 자신은 별들의 바다 한 가운데로 들어가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화가가 되고 싶다고도 했고요.
그래서 그런지 그이의 그림에는 사람이 없어요. 별들과 함께 있을 때는 사람이 굳이 자신을 주장할 필요가 없다나요?”
비츠 부인의 말을 듣는 동안 도윤은 문득 콜린 비츠의 예술 세계를 어떻게 평하면 좋을지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의 눈이 한 곳에 고정된 채 깊은 생각에 빠져드는 것을 본 슈미츠 교수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 박사에게 뭔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른 모양이군. 혹시 비츠에 관한 것인가?”
그제야 도윤이 흠칫하며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 네. 처음 비츠 씨의 작품들을 봤을 때부터 계속해서 뭔가 머릿속을 간질간질 자극하는 게 있었는데 그걸 어떻게 풀어내면 좋을지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그럼 자네가 한 번 콜린에 대한 비평을 써보면 어떨까? 마침 논문 심사도 다 끝났으니까 졸업식 때까지 특별히 할 일도 없을 것 아닌가?”
“제가요? 글쎄요. 그래도 될까요? 비츠 부인 생각은 어떠세요?”
도윤이 자신을 보며 묻자 비츠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라면 굳이 저한테 허락을 구할 필요가 없어요. 화가가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비평가 역시 자기 생각대로 작품을 평하면 그만이죠. 하지만 원고가 완성되면 저도 한 번 보여주세요. 오랜만에
다른 사람이 남편의 그림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하는 걸 한 번 듣고 싶거든요.”
“그러죠. 얼마나 좋은 글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완성되면 꼭 보내드리겠습니다.”
도윤은 그 길로 기숙사로 돌아가 며칠 동안 콜린 비츠의 예술 세계를 평하는 글을 작성했다. 그는 약속대로 완성된 글을 비츠 부인에게 보낸 뒤 슈미츠 교수와 클라우디아에게도 이메일로 전송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슈미츠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네 글 읽어봤네. 원래 천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번 글도 정말 괜찮아. 특히 ‘별은 고흐를 통해 잠시 땅으로 내려왔다가 비츠의 손에 의해 다시 하늘의 은하수가 되었다’는 대목이 아주 마음에 들어.
자네만 좋다면 내가 아는 미술 잡지에 기고했으면 싶네.”
“미술 잡지요? 하지만 그건 그냥 특별한 고증 없이 제 감상을 적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요? 전문 잡지에 투고하기에는….”
“특별한 고증이 없기는? 글 곳곳에 미술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그대로 녹아 있던데. 자네만 반대하지 않는다면 내가 받은 글을 편집장에게 보내겠네.”
결국 이세준과 서연희가 아들의 박사 과정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에 도착했을 때 도윤은 자신의 이름이 저자로 표시된 칼럼이 실린 미술잡지를 받아들 수 있었다. 제목은 ‘우리 곁에 머물다 간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도윤이 박사학위를 받은 뒤 처음으로 외부에 기고한 공식 칼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