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경매장에는 이 기회에 호크니의 작품을 한 점이라도 더 사 두면 나중에 큰 이익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때문에 평소라면 반응이 뜨겁지 않았을 작품들에도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응찰용 팻말을 들어올렸다.
최수아는 되도록 실내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청파 갤러리는 투자를 위해 그림을 사들이는 곳이 아니다. 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애초에 구입을 계획했던 그림이 나오기
전까지는 한 번도 팻말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 그러는 가운데 몇 개의 작품들이 누군가의 환호와 함께 새로운 소장자를 만났다.
“다음 작품은 호크니의 ‘겨울나무’입니다. 다들 잘 아시는 사계절 시리즈 가운데 하나죠. ‘겨울나무’의 시작가는 천만 달러고, 호가는 한 번에 십만 달러씩 올라갑니다.”
드디어 최수아가 점찍었던 작품이 등장했다. 그녀가 이 작품에 정해 놓은 호가 상한선은 천오백만 달러. 하지만 분위기로 볼 때 그 가격에 낙찰 받는 건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짐작은 응찰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사실로 드러났다.
“천오백만 달러 나왔습니다. 이런, 저쪽에 계신 신사분이 백만 달러를 한꺼번에 올리셨군요. 천육백만 달러 감사합니다. 천육백오십만 달러 없습니까?”
중간에 몇 차례 상승폭을 바꾼 호가는 어느새 한 번에 오십만 달러까지 올라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찰 액수는 상승을 멈출 생각이 없는 듯했다. 최수아는 입술을 꼭 깨물며 응찰용 팻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더 이상의 도전을 포기한 것이다.
“저, 혹시 돈이 모자라서 그러시는 거라면 제가 좀 빌려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옆 자리에 있던 유세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정면을 주시하고 있던 최수아가 흠칫 놀라 그녀를 쳐다봤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돈을 빌려줄 수 있다고?”
“네. 오늘 아침에 서울에 있는 아빠에게 전화를 드렸어요. 이왕 뉴욕까지 왔는데 혹시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오면 구입비용을 지원해줄 수 있겠느냐고요. 상황을 보니까 제가 호크니의 그림을 사는 건
어렵겠지만 고모님이 부족한 돈을 보태주는 건 가능할 것 같아서요.”
최수아의 얼굴 위로 씁쓸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말은 고맙지만 여기서 일이십억 정도 더하는 정도로는 도움이 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오늘은 아무래도 한 점 정도만 살 수 있어도 다행으로 생각해야 될 것 같구나.”
“그게 아니라…, 제가 천만 달러 정도는 융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글쎄, 그래봤자…, 뭐? 천만 달러라고?”
최수아는 뒤늦게 그녀가 언급한 돈의 액수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이번 경매를 위해 청파 갤러리가 자체적으로 준비한 돈은 이천오백만 달러였다. 만약 거기에 천만 달러가
더해질 경우 어쩌면 호크니의 작품을 두 점까지 구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본 유세희가 다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희 아빠가 건설 회사를 운영하고 있잖아요. 이번에 해외에서 진행했던 공사대금이 입금되었는데, 당장 급한 곳이 없어서 몇 달 정도는 융통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천만 달러면 굉장히 큰돈인데 그걸 몇 달씩 융통하는 게 가능하다고?”
“어차피 저한테 빌려줄 생각을 했던 돈이에요. 그러니까 고모님이 쓰신다고 해도 뭐라고 하지 않으실 거예요. 청파 갤러리도 결국 미래 그룹 계열사 가운데 한 곳이잖아요. 아빠는 평소에도 늘 사돈끼리 서로
도와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전과 달리 한없이 공손한 어투였지만 유세희의 입가에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맺혔다. 그 미소를 들여다보는 최수아의 마음속으로 잠시 갈등이 일었다.
천만 달러면 한화로 백이십 억 가량이다. 상당히 큰돈이지만 청파 갤러리의 실질적인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최인탁 회장의 도움을 받는다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액수이기도 했다. 그 정도 돈이라면
6개월은커녕 며칠도 걸리지 않아 되갚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꾸 그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내가 관장 자리에 앉아 있을 자격이 없지.’
차라리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다면 모를까, 최수아는 가능한 한 자신의 힘으로 돈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던 그녀가 최서라를 흘깃 돌아보았다.
‘네 생각은 어떠니?’
그녀로부터 질문의 뜻이 담긴 눈빛을 받은 최서라도 다른 의미로 고민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도윤의 충고에 의하면 이번 경매에서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호크니의 그림을 낙찰 받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유세희의 눈앞에서 대놓고 그녀의 제안을 반대하면 서로 사이가 틀어질 게 뻔했다.
“제 생각에는….”
그녀는 선뜻 입을 떼지 못한 채 최수아와 유세희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대충 얼버무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결국 그녀의 입을 열게 만들었다.
“호크니는 십 오년 전부터 새로운 그림을 전혀 내놓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최근에는 더 이상 그의 그림이 나오지 않을 거라고 짐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가격이 계속 올랐어요. 현재 그의 그림 시세는
이미 사후에 오를 상승폭이 충분히 반영되어 있다고 봐요.”
“내일 당장 그가 사망하더라도 더 이상 값이 뛰지는 않을 것 같다는 말이냐?”
다짐을 받듯이 묻는 최수아의 얼굴 뒤로 차가운 눈빛을 한 채 자신을 노려보는 유세희의 두 눈이 겹쳐보였다. 최서라는 침을 꿀꺽 삼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경매장의 분위기는 너무 과열되어 있어요. 일단 오른 그림 값이 다시 떨어질 가능성은 적겠지만 그렇더라도 굳이 외부자금까지 끌어들이면서까지 무리하게 응찰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이 정도 가격이라면
향후 십년 안에는 가격이 수평을 유지할 테니까요.”
유세희가 사돈을 운운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천만 달러를 거저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육 개월 안에 갚아야 하는 외부자금이다. 최서라는 오늘의 경매가 굳이 남의 돈을 빌리면서까지 조급하게 응찰할
필요는 없을 거라는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드러냈다.
“아가씨. 그건 저와 제 친정의 성의를 너무 무시하는 말씀 아닌가요? 저는 좋은 뜻으로 아빠를 설득했던 건데 그렇게 말하시니까 막 섭섭해지려고 하네요.”
유세희가 과장되게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최서라는 자신의 말을 바꾸지 않았다. 섭섭한 건 섭섭한 거고, 아닌 건 아닌 거다. 그녀가 그런 생각으로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있을 때, 최수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크니의 그림 시세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확신이 들지 않아. 하지만 서라 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 오늘은 일단 무리하지 않기로 하자.”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에 유세희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사돈어른 돈까지 빌려 쓰기에는 내가 마음이 부담이 너무 크구나. 네 말은 고맙지만 오늘은 그냥 마음만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야겠다.”
유세희는 입술을 꼭 깨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두 사람에게 욕을 한 바가지 퍼붓고 있었다.
천만 달러를 빌려주면 그걸 핑계로 좀 더 떳떳하게 청파 갤러리의 일에 간섭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최수아가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던 자신의 제안을 물리지는 바람에 일이 틀어지고 말았다. 그것도 가장
큰 경쟁자인 최서라의 의견을 바탕으로 해서. 뉴욕에 온 뒤로 그녀의 뜻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 * *
점심시간 직전에 통화를 하는 과정에서 도윤이 최서라에게 은근히 물어본 게 있었다.
“혹시 서라 씨 입장에서 꼭 사고 싶은 호크니 그림이 있어요? 이상하게 눈에 쏙 들어오거나 아니면 은근히 마음이 끌리는 그림 같은 거 말이에요.”
그 말에 불현듯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작품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다 솔직히 속내를 털어놓았다.
“하나 있기는 해요. ‘한가한 여름’이라는 작품이에요.”
“한가한 여름이요?”
“네. 남자 한 명이 수영장 가에 팔을 기댄 채 어딘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그 뒤로 또 다른 남자 하나가 물살을 가르며 헤엄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거예요. 아마 크리스티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사진이
나와 있을 거예요.”
“그래요? 그럼 제가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확인해 볼게요. 기다리세요.”
점심시간 후에 다시 전화를 건 도윤은 먼저 금속공예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뒤 조심스럽게 ‘한가한 여름’에 대해 언급했다.
“뉴욕에 있는 지인들 몇 명에게 전화를 걸어서 물어보니까 그거 이번에 새로 발견된 작품이라고 하더라고요. 예전에 만들어진 도록에는 한 번도 실리지 않았던 작품이에요. 아마 호크니가 LA에서 생활할 때
지인에게 개인적으로 선물했던 그림인 거 같아요.”
“그래요? 그럼 진위 여부가 확실하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사진으로만 봐서는 판단하기 어렵기는 한데, 화풍 자체는 잘 알려진 호크니의 그림들과 아주 흡사해요. 크리스티 쪽에서도 나름대로 신중하게 감정했을 테니까 위작일 가능성은 낮다고 봐야죠.”
“그럼 가격이 적당하면 구입해도 괜찮을까요?”
“제 생각에는 나쁘지 않을 거 같아요. 하지만 이건 사진만 보고 하는 말이니까 결정은 서라 씨가 해야 돼요. 아무래도 현장에서 직접 본 사람의 판단이 더 정확하겠죠.”
도윤은 신중하게 판단하라고 거듭 말했지만 최서라는 그의 말을 가슴 속에 꼭 담아두고 있었다. 그것이 이번 경매에서 작은 변수를 만들었다.
‘겨울나무’를 놓친 이후에도 최수아는 몇 차례 더 적극적으로 응찰에 임했지만 결국 그림을 낙찰 받는데 실패했다. 그녀가 속상한 마음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사이 오후 경매도 어느새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때 드디어 도윤에게 물어봤던 ‘한가한 여름’이 경매에 올라왔다.
“다음 작품은 ‘한가한 여름’입니다. 이 그림은 처음 보시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호크니가 LA에 머물던 시절 친한 지인에게 선물했던 작품이죠. 시작가는 천만 달러이고 호가는 한 번에 이십만 달러씩
올라갑니다.”
경매에 처음 나왔다는 건 아직 제대로 된 검증이나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은 그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크리스티가 권위 있는 경매 회사라고 해도 이런 그림에 대한 경매는 어느 정도 도박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경매가 시작되자마자 힘차게 응찰 팻말을 들어 올리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지만 앞선 작품들에 비해 전체적인 반응은 신중했다.
“고모. 저는 저 그림이 마음에 들어요. 한 번 도전해 보시는 건 어때요?”
최수아가 단상에 올라온 그림을 갈등어린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을 확인한 최서라가 은근히 응찰을 권했다. 그러자 최수아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 네가 보기에도 괜찮은 그림인 것 같지?”
“네. 지금까지 나온 호크니 그림 중에는 가장 마음이 끌리네요.”
“나도 그래. 사실 처음 발굴된 작품이라는 점 때문에 은근히 망설였는데, 네 말을 듣고 나니까 꼭 사고 싶어지네. 어차피 이대로 돌아가기는 너무 억울했어.”
그때부터 최수아는 공격적으로 팻말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이번 경매를 위해 준비했던 이천오백만 달러는 아직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이천만 달러의 상한선을 정한 뒤 응찰 경쟁에
뛰어들었다.
거래 기록이 전혀 없는 작품에 대해서는 적정 가격을 판단하기 어렵다. 이럴 때는 경매 회사가 내건 시작가와 예상가가 기준이 될 수밖에 없는데, 크리스티가 사전에 발표한 예상 가격은 천오백만 달러였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에는 빠르게 올라가던 호가가 천오백만 달러를 넘어서면서 눈에 띄게 주춤하기 시작했다.
“천육백만 달러 한 번입니다, 천육백만 달러 두 번…, 아 전화 응찰로 천육백오십만 달러 나왔네요. 천칠백만 달러 없습니까?”
경매사가 호가를 반복해서 부르는 일이 점점 잦아졌다. 초조해진 최수아가 옆에 앉은 최서라의 얼굴을 흘낏 쳐다봤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최수아는 잠시 망설인 끝에 입술에 힘을 꾹 주었다.
어느새 호가는 한 번 더 갱신되어 천칠백오십만 달러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녀가 다시금 팻말을 들어올렸다.
“천팔백만 달러 나왔습니다. 천팔백오십만 달러 없습니까? 천팔백만 달러 한 번 갑니다. 천팔백만 달러 두 번 갑니다. 천팔백만 달러 세 번. 낙찰됐습니다. 축하합니다.”
실내에 낙찰을 축하하는 박수 소리가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최수아는 기쁨을 억누르지 못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중에는 어떻게 되더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간의 초조함을 모두 떨어낼 수 있을 정도로
가슴이 후련했다.
“어쩌면 좋으니? 몰랐는데 나 아무래도 도박사 기질이 있는가 봐.”
“마음껏 기뻐하셔도 돼요. 오늘 나온 작품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걸 아주 적당한 가격에 낙찰 받으신 거예요. 잘 됐어요.”
최수아와 최서라는 양 손바닥을 마주치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다들 평소에는 점잖은 사람들이지만 경매장에서는 숨겨진 야성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오늘 만큼은 최수아와 최서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최수아는 오후 내내 참고 또 참은 끝에 호크니의 작품을 낙찰 받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예상과는 달리 한 작품을 낙찰 받은 것에 불과하지만 현재의 분위기로서는 그 정도만 해도 나쁘지 않은 결과라고
볼 수 있었다.
“잘 한 거겠지? 이상하게 마음이 끌린 작품이라서 끝까지 손을 들어 올리기는 했는데 막상 낙찰을 받으니까 새삼스럽게 엉뚱한 작품을 산 건 아닐까 걱정이 되네.”
이미 단상 위의 경매사는 또 다른 작품을 소개하고 있었다. 오늘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그러나 최수아는 그 작품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은 채 뒤늦게 걱정이 가시지 않은 미소를 지으며 최서라에게 물었다.
처음에는 무작정 기뻐했지만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새삼스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결국 분위기에 휩쓸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최서라가 그녀의 손을 꼭 쥐며 고개를 저었다.
“잘 하신 거예요. 말씀드렸잖아요. 저도 오늘 나온 작품들 가운데 저 그림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정 불안하면 나중에 실력 있는 미술 비평가들에게 평을 써달라고 해보세요. 눈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분명히 좋은 얘기를 해줄 거예요.”
“그래. 그러자. 아, 이왕이면 이도윤 박사에게 부탁해볼까? 아직 젊기는 하지만 요즘 한창 떠오르는 천재잖아? 이 박사가 쓴 평이라면 일반인들도 관심을 가지고 읽을 것 같아.”
최서라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이라면 분명히 좋은 평을 써줄 것이다. 방금 낙찰 받은 그림은 다름 아닌 그가 추천한 작품이었으니까. 그 때문에 입찰이 시작되자마자 은근히 고모에게 응찰을 권하기도
했었다.
“에이, 그래도 이왕이면 좀 더 경륜 있는 사람에게 평을 부탁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대학 교수나 이름 있는 평론가들도 많잖아요. 이도윤 박사는 아직 너무 젊은데다 후기 인상파가 전공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현대 미술이 아니라.”
지금까지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유세희가 옆에서 은근히 어깃장을 놓았다. 그 바람에 최서라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최수아가 속으로 고소를 삼키면서 말했다.
“아무리 후기 인상파가 전공이라고 해도 이 박사는 다른 여러 사조에 대해서도 두루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어. 트루쓰 앤 밸류에서 우승한 것만 봐도 의심할 여지가 없지. 어차피 여러 사람에게 평을 부탁할
생각이니까 이 박사도 거기에 포함시키자.”
유세희의 입이 또 다시 조개처럼 닫혔다. 그녀는 새삼 이도윤이 미워졌다. 아니,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미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크니의 마지막 작품이 낙찰되자 세 사람은 미련없이 경매장을 나와 호텔로 돌아갔다. 최서라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도윤은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면서 한 가지를 덧붙였다.
“어쩌면 호크니가 아니라 내일 있을 금속 공예품 경매가 더 실속 있을지도 몰라요. 저도 계속 이곳저곳에 전화를 걸고 그 공예품들에 대해 알아보고 있으니까 내일 점심쯤에 다시 한 번 연락하기로 해요.
오늘은 푹 쉬시고 내일 또 좋은 성과가 있기를 기대할게요.”
도윤과의 통화를 끝내고 나자 최서라의 마음이 한껏 느긋해졌다. 그의 말마따나 그녀로서는 개인적으로 내일 있을 경매가 더 기대되었다. 호텔 창문 밖으로 뉴욕의 불빛이 어지럽게 빛나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