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최서라가 자물쇠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을 무렵, 도윤은 반대로 출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과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견한 라스푸친의 목걸이 때문에 다니엘 로스차일드의 부하들에게 총격을 당했다. 그때의
복수를 하기 위해 가짜 파라켈소스의 검을 만들어 석훈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떠날 생각이었다.
“자물쇠를 가방에 넣어서 직접 가지고 오셨다고요?”
최서라로부터 도와달라는 전화를 받은 그는 곧바로 청파 갤러리로 찾아왔다. 나름대로 바쁜 와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당연한 일을 하듯이 시간을 낸 것이다. 최서라는 반갑게 그를 맞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몹시 미안해했다.
“죄송해요. 이 자물쇠들이 정말로 루이 16세가 만든 진품인지 확인하고 싶어서요. 저희 갤러리에도 분야별로 전문 감정사들이 몇 분 계시기는 하지만 유럽 금속공예품 쪽으로는 다들 경험이 없으세요. 이쪽
분야는 오히려 제가 가장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실정이거든요.”
국립 현대 미술관의 경우 자체적으로 학예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밖의 한국 미술관이나 갤러리들 중에는 다수의 전문 감정사들을 상시 고용하고 있는 곳들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도 금속공예품들에 대한
감정은 모두 한국의 불상이나 장신구 등에 치중되어 있어서 서양의 공예품들에 대한 전문 감정사는 전무하다시피 한 실정이었다.
“저도 솔직히 금속공예품 쪽으로는 아는 게 별로 없어요. 일부러 부탁하셨으니 한 번 보기는 하겠지만 아마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겁니다.”
도윤은 솔직하게 자신의 한계를 밝혔다. 최서라 역시 그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에게는 무한한 믿음이 갔다. 그녀의 입장에서 볼 때 그는 어떤 미술품이든 눈앞에 가져다 놓기만 하면 진위를
척척 가려낼 수 있는 신기한 눈을 지닌 사람이었다.
“잠깐 만져 봐도 되죠? 부서지지 않게 조심해서 살펴볼게요.”
자물쇠들이 놓여 있는 테이블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으며 묻는 그의 말에 최서라의 고개가 자동적으로 끄덕여졌다.
“물론이에요. 얼마든지 마음 편하게 살펴보세요.”
그녀의 허락을 받은 도윤은 한 손을 자물쇠 위에 올려놓고 정신을 집중시켰다. 혹시 잔류 기억이 남아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자기 입으로 밝힌 대로 겉으로 드러난 형태나 문양의 특징만으로 자물쇠의 진위를 가려내는 건 그로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만약 제작자나 소유자의 잔류 기억이 남아 있다면 최소한 물건의 진위를
가려내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일곱 개의 자물쇠 가운데 세 곳에서 잔류 기억이 발견되었다. 눈까지 지그시 감은 채 그것들을 하나씩 살펴보던 도윤의 얼굴이 어느 순간 살짝 굳어졌다. 두 개의 몸통이 하나로 합쳐진 듯한
특이한 모양의 자물쇠에서 기대했던 잔류 기억이 확인된 것이다. 꽃문양이 양각된 두 개의 몸통이 하나처럼 붙어 있는 기묘한 형태의 자물쇠였다.
“흐음….”
한참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잔류 기억의 내용을 더듬어가던 도윤이 이윽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옅은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눈을 떴다. 그는 옆에서 기대에 찬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최서라에게 몇 가지 도구를
가져다 줄 것을 부탁했다.
“죄송하지만 클립 몇 개만 좀 가져다주실래요? 리퍼도 있으면 좋고요.”
최서라는 자기 사무실로 달려가 리퍼와 함게 클립 한 통을 통째로 들고 왔다. 도윤은 그것을 모두 편 뒤 원하는 형태로 구부려서 간단하게 자물쇠를 딸 수 있는 도구를 만들었다.
그는 그걸 이용해서 아주 손쉽게 자물쇠를 땄다. 솜씨가 워낙 능숙해서 마치 도둑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는 자물쇠를 딴 뒤에도 클립을 이용해 몸통에 나 있던 몇 개의 구멍을 순서대로 찌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원래부터 하나인 것처럼 붙어 있던 두 개의 몸통이 반으로 갈라져 떨어졌다.
“그게 뭐죠? 그 자물쇠가 원래 두 개를 합쳐놓은 거였나요?”
“네. 저도 모양만 그렇게 흉내 낸 것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처음부터 이렇게 두 개로 떨어질 수 있도록 제작된 것 같아요. 잠깐만요.”
그는 최서라를 잠시 기다리게 한 후, 떨어져나간 두 개의 몸통 가운데 한 곳에 클립을 집어넣어 돌돌 말린 종이를 하나 꺼냈다. 종이의 재질이나 색깔로 볼 때 꽤 오래된 것이었는데, 접히고 말렸던 부분을
모두 펴자 손바닥 하나 정도 넓이였다. 그 내용을 유심히 살피던 도윤이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지도와 함께 라틴어로 된 설명이 적혀 있네요. 장담할 수는 없지만 종이의 재질이나 잉크의 종류로 볼 때 아무래도 19세기 이전에 작성된 걸로 보여요.”
그의 설명을 들은 최서라가 테이블 위에 펼쳐진 메모지 위로 얼굴을 가까이 댔다.
“지도는 뭔지 잘 모르겠고, 여기 라틴어로 쓰인 건 무슨 내용이에요?”
“글쎄요. 정확한 건 연구를 좀 해봐야 할 것 같은데, 일단 지도는 어떤 큰 저택의 일부를 그린 것으로 보여요. 라틴어로 된 설명에 의하면 자물쇠의 주인이 저택의 어딘가에 뭔가를 숨겨둔 모양입니다.”
“뭔가를 숨겨뒀다고요? 보물이 묻힌 장소라는 말씀인가요?”
눈을 반짝이며 묻는 최서라의 말에 도윤이 실소를 터트렸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진짜 이곳에 보물이 숨겨져 있으면 재미있겠네요.”
잔류 기억에는 자물쇠의 주인이 몸통 안에 메모지를 숨기는 장면만 나와 있었다. 그 때문에 도윤으로서도 당장은 그 메모에 표시된 장소가 어디이며 거기에 어떤 물건을 숨겼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지도로 표시된 저택이 어디인지는 알 것 같았다.
‘내 기억이 틀림없다면 자물쇠 안에 메모지를 숨긴 사람은 루이 16세일 거야. 잔류 기억에 나타난 그의 얼굴이 현재까지 초상화로 남아 있는 루이 16세의 얼굴하고 아주 비슷해. 그렇다면 이 그림에 표시된
장소는 베르사유 궁전일 가능성이 높아.’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와 마리 앙트와네트 왕비는 성난 민중들을 피해 파리 근교에 위치한 베르사유 궁전에서 몰래 탈출했다. 그 이후로 그의 삶은 말 그대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잔류 기억
속에 나타난 루이 16세의 표정이 비교적 평안했다. 그가 자물쇠 안에 메모지를 숨긴 때가 혁명 이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그래도 보물을 숨긴 장소를 확인하려면 베르사유 궁전에 직접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아쉽게도 그에게는 지금 당장 파리에 갈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오스트리아에 가서 해야될 일이 언제 끝날지도 정확하지 않았다.
결국 도윤은 며칠동안 청파 갤러리를 드나들면서 자물쇠를 살펴보는 척 하다가 한국을 떠나기 직전이 되어서야 최서라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아무래도 메모지에 표시된 장소가 베르사유 궁전인 것 같다는 얘기를
한 것이다.
그의 말을 들은 최서라는 깜짝 놀랐지만 그녀로서도 당장은 한국을 떠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게 시간이 보름가량 흘렀을 때, 프랑스 파리에서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 * *
“그러니까 전에 우리를 찾아왔던 조제프 달통이라는 사람이 사실은 파리 크리스티의 직원이었다는 말씀이죠? 그 사람이 사고 싶어 했던 물건도 우리가 낙찰 받았던 금속 공예품 전부가 아니라 오직
자물쇠들뿐이었고요?”
청파 갤러리를 방문한 부앵 사장을 맞이한 사람은 최수아 관장이었다. 상대가 떳떳하지 않게 일을 꾸민 것은 괘씸했지만 어쨌든 부앵은 파리 크리스티를 책임지는 사장이었다. 격을 맞추려면 청파 갤러리 관장인
그녀가 나서는 게 좋았다. 최서라도 자리를 함께 하기는 했지만 당분간은 입을 다문 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켜만 보기로 했다.
부앵 사장이 뒤늦게나마 솔직히 사정을 털어놓은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최수아의 기분이 좋아지기는 어려웠다. 어쨌든 사기나 다름없는 짓을 시도했었다는 것 아닌가? 마치 심문하듯 묻는 그녀의
말에 부앵 사장의 얼굴에 진땀이 흘렀다.
“그렇습니다. 다시 한 번 결례를 범한 것에 대해 정중히 사과드리겠습니다. 해당 직원은 이미 해고 조치했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한동안 아무 말도 그를 쳐다보기만 하던 최수아가 마침내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좋아요. 불쾌하기는 하지만 사장님이 이렇게 직접 찾아와서까지 사과를 하시니까 그 일은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겠어요. 다행히 우리가 특별히 손해를 입은 건 없기도 하고요.”
“감사합니다. 저기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
“역시 자물쇠를 사고 싶다는 말씀이세요?”
미리부터 말을 자르며 치고 들어오는 최수아의 대응에 부앵 사장이 잠시 움찔했다.
“그, 그렇습니다. 확인해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프랑스 역사학회의 회원이기도 합니다. 대학원에서 경영학과 미술사를 함께 공부했거든요. 그래서 말씀드리는 건데 청파 갤러리에서 소장하고 있는 그 자물쇠는
프랑스 혁명사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부디 양보해주십시오.”
최수아가 옆에 앉아 있던 최서라를 힐끔 쳐다보더니 말했다.
“자물쇠를 낙찰 받기로 결정한 사람은 제 옆에 있는 최서라 실장이에요. 입찰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도 그녀이고요. 그러니까 그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아니라 우리 최 실장과 얘기를 나눠보세요. 저는
그녀의 의견대로 할 테니까요.”
부앵 사장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을 느낀 최서라가 헛기침을 한 뒤 입을 열었다.
“거래 여부를 결정하기 전에 먼저 부앵 사장님이 그 자물쇠들을 원하시는 정확한 이유를 알고 싶네요. 그 자물쇠들이 프랑스 혁명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왜,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중요하다는 거죠?”
상대가 자물쇠를 쉽게 넘겨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깨달은 부앵 사장이 잠시 머뭇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입술을 한 차례 꼭 깨물더니 입을 열었다.
“루이 16세가 시계와 자물쇠를 제작하는 취미를 가졌었다는 얘기는 아마 들어보셨을 겁니다. 당시 그는 베르사유 궁전 안에 개인 대장간을 만들기도 했을 정도로 그 일에 심취했었지요. 그가 만든 자물쇠
가운데 몇 개가 남아 있는데 파리 크리스티의 학예사들은 그걸 바탕으로 청파에서 매입한 자물쇠들을 만든 사람이 바로 루이 16세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뉴욕 크리스티에서 낙찰받은 그 자물쇠들이 바로 부르봉 왕가의 마지막 왕이 남긴 유품이라는 말씀인가요?”
“그렇습니다. 사실 루이 16세의 유품은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혁명 당시에 왕궁이 집단적으로 약탈되는 과정에서 왕가의 물건들이 많이 파손되거나 도난당했거든요. 루이 16세 역시 베르사유에서
급히 도주하는 바람에 개인 물품을 많이 챙기지 못했고요.”
“그래서 그 자물쇠들이 루이 16세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엄밀히 말해 자물쇠가 지닌 공예품으로서의 가치는 그리 높지 않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인 가치는 대단히 크죠. 청파 갤러리는 미술관이지 역사박물관이 아니지 않습니까? 프랑스의 귀중한 역사
문화재가 모국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값은 제대로 치르겠습니다.”
부앵 사장이 자물쇠를 거론하며 역사 문화재를 운운하자 최서라는 순간적으로 밸이 뒤틀렸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조선 땅에서 약탈해 간 귀중한 문화재들이 아직도 루브르 박물관에 잔뜩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굳이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사장님의 뜻은 잘 알았어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대답을 드리기 어려울 것 같네요. 저희도 그 문제를 가지고 내부적으로 논의를 해볼 테니까 며칠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며칠이라면…, 얼마나 기다리면 될까요?”
“사장님도 바쁜 분이시니까 서울에 오래 머무르실 수는 없겠지요? 사흘 뒤로 다시 약속을 잡기로 해요. 오전 열 시쯤이면 어떨까요? 그때까지 자물쇠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서 대답을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사흘 뒤 오전 열 시에 다시 뵙겠습니다.”
부앵 사장이 약간은 안도한 듯한 표정으로 떠나자 최수아 관장이 최서라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려고? 정말 그 자물쇠를 팔 거니?”
“사실 제가 꼭 사고 싶었던 것은 그 자물쇠가 아니라 다른 공예품들이었어요. 부앵 사장 말마따나 자물쇠 자체는 예술적 가치가 그다지 뛰어나지 않으니까 우리가 꼭 쥐고 있을 필요도 없고요. 상대가 굳이
비싼 돈을 지불하고 매입하겠다면 팔지 못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그 안에서 이상한 메모지가 나왔다면서? 그건 어떡하려고?”
“부앵 사장이 원하는 건 자물쇠뿐이잖아요. 메모지가 아니라. 안 그런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최서라는 사실 그 메모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놓고 적지 않게 고민 중이었다. 보물이 숨겨진 장소가 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 국제적인 관광지이자 프랑스를 대표하는 건축물 가운데
하나인 베르사유 궁전이었다. 그런 곳에 들어가서 남들 몰래 비밀 장소를 파헤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 * *
최서라는 자물쇠를 되파는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에 있는 도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애초에 자물쇠에 관심을 가지도록 충고한 사람이 그였기 때문에 의견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도윤의
대답은 간단했다.
“메시지든 자물쇠든 청파에서 그걸 쥐고 있을 필요는 없을 거 같아요.”
“자물쇠뿐만이 아니라 메시지까지 내놓으라고요?”
“쓸모가 없잖아요. 설사 베르사유 궁전에 진짜로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해도, 그걸 찾으려면 프랑스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해요. 그런데 솔직히 프랑스 정부가 그걸 허락해 줄 리가 없잖아요. 그렇다고 거기
있는 물건을 몰래 들고 나오면 그건 범죄가 되고요.”
사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피의 사원에서 라스푸친의 목걸이를 몰래 찾아냈던 그가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목걸이 때문에 납치를 당하고 몸에 총을 맞기까지 했다. 도윤은 최서라가 혹시라도 비슷한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이때만 해도 나중에 그 자신이 또 다시 에스코바르의 동굴을 탐사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사흘 뒤, 부앵 사장이 다시 청파 갤러리를 찾아왔다. 이번에는 최수아 관장이 아니라 최서라가 그와의 협상을 주도했다.
“결론부터 말씀드릴게요. 저희는 가격만 적당하면 자물쇠를 팔기로 했어요.”
부앵 사장이 반색을 하더니 조심스럽게 가격을 물었다.
“얼마를 원하십니까? 뉴욕 크리스티에서 자물쇠 일곱 개의 낙찰가로 만 사천 달러를 지불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 두 배보다 많은 삼만 달러를 내겠습니다.”
그는 자신이 제법 높은 가격을 제시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서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차가운 코웃음이었다.
“물건의 역사적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은가 보군요. 저희도 전문 감정사를 동원해서 그 자물쇠들이 루이 16세가 직접 제작한 진품이라는 걸 확인했어요. 진위가
의심스러울 때의 가격과 진품임이 밝혀진 뒤의 가격은 크게 다를 수밖에 없어요. 파리 크리스티의 사장님이라면 그걸 모르지 않으실 텐데요?”
이것 봐라? 부앵 사장은 저도 모르게 혀끝으로 입술을 축였다.
“……그럼 얼마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백사십만 달러를 내세요. 그럼 저희도 자물쇠들을 넘기겠어요.”
부앵 사장의 입에서 헉 하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건 너무 비쌉니다. 무려 매입가의 백배가 아닙니까? 그 자물쇠들은 파리 크리스티에서 사는 게 아닙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사비를 털어서 구입하는 거예요.”
“돈이 누구에게서 나오는지는 저희들한테 중요하지 않아요. 이번에 팔지 못할 경우 저희는 내년쯤에 그 자물쇠들을 다시 경매에 올릴 생각이에요. 물론 전문가의 감정서까지 첨부해서요. 백사십만 달러가
터무니없는 가격인지 어쩐지는 그때 가면 알 수 있겠죠.”
최서라의 단호한 말에도 불구하고 부앵 사장은 길고 긴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끈질긴 줄다리기를 한 보람도 없이 그는 결국 백만 달러에 자물쇠 일곱 개를 구입하기로 했다.
비록 자물쇠들을 손에 넣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것들은 불과 며칠 전 뉴욕 크리스티에서 고작 만 사천 달러에 낙찰되었던 물건이었다. 속이 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해고된 달통이 지금 당장 눈앞에 있다면
패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앵 사정이 돌아간 며칠 뒤, 최수아 관장이 프랑스 대사관을 방문했다. 대사와 독대한 그녀는 상세한 설명이 담긴 증거 자료와 함께 자물쇠에서 나온 메모지를 전달했다.
“나중에 오르세나 루브르에서 소장하고 있는 작품의 일부를 저희 청파 갤러리가 대여해서 전시하고 싶습니다. 그걸 약속해주시면 이 메모지를 드리겠어요. 물론 작품의 대여는 제가 말씀드린 대로 베르사유
궁전에서 보물이 발견된 뒤에 확정짓는 걸로 하죠.”
프랑스 대사는 정중하지만 미심쩍어하는 태도로 메모를 접수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채 며칠이 지나지 않아 베르사유 궁전에서 루이 16세가 감추어두었던 보물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매일같이 수많은
관광객들이 드나드는 관광지에 보물이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한동안 프랑스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해 가을, 청파 갤러리는 세간의 관심을 받으며 루브르에 소장 중인 작품을 대여 받아 전시했다. 석 달 동안 계속된 그 전시회 덕분에 청파 갤러리의 명성과 위상이 한껏 높아졌다. 물론 미래 그룹 내에서의
최서라의 지위 역시 그만큼 확고해졌다. 이제는 누구도 그녀가 갤러리를 물려받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 내놓고 시비를 걸기 어렵게 된 것이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