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299화 (299/300)

299화

오윤수가 갑자기 귀국을 고려하고 있다는 말을 꺼내는 바람에 분위기가 다소 무거워지고 말았다. 그 때문인지 아직 밤 아홉시도 되지 않았는데 장은서가 너무 늦었다면서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이 일요일이잖아요. 아빠가 매주 주말마다 센트럴 파크에 가서 사람들 초상화를 그려주신다는 거 아시죠? 오늘은 박사님도 오시고 해서 하루 쉬었는데 아마 내일은 또 거기 가실 것 같아요. 혹시 시간

있으면 공원에서 산책도 할 겸 구경하러 가지 않으실래요?”

그녀의 제안에 잠시 생각하던 도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야 상관없지만 그러면 아빠가 불편해하지 않으실까? 그림 그리는데 방해되잖아?”

“특별히 불편해하지는 않으실 거예요. 야외에서 초상화를 그린다는 게 늘 사람들이 오가는 한복판에서 하는 일인데요, 뭐. 그리고 사실은 아빠가 예전부터 박사님 초상화를 한 장 그려드리고 싶어

하셨어요.”

“내 초상화를? 그럼 나야 고맙지. 그런 생각이 있었으면 진작 얘기하셨으면 좋았을걸.”

“박사님은 워낙 그림 보는 눈이 높으신 분이잖아요. 그에 비해 아빠는 그냥 길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분이시고. 아마 선뜻 권하기가 어려우셨을 거예요.”

“무슨 소리야? 장 선생님이 내 얼굴을 그려준다면 오히려 영광이지. 알았어. 윤수 전시회는 모레부터니까 내일은 어차피 특별한 스케줄도 없어. 점심 때 센트럴 파크로 가면 되나?”

“제가 차를 가지고 모시러 올게요. 아빠는 대개 열 시쯤 공원에 나가시니까 저희도 열한 시쯤 도착하면 될 거예요. 박사님 초상화를 그리고 나서 함께 점심이나 먹으면 되겠네요. 아참 그리고 내일 가면

거기에 지미도 있을 거예요?”

“지미? 아까 윤수 옆에서 그림을 그리던 그 남자아이 말이야?”

“네. 지미가 이상하게 아빠 옆에 앉아서 함께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걔네 부모님이 주말에 하루 정도는 차에 태워서 공원에 데려다 줬다가 나중에 다시 데리고 가고는 해요. 아까 아빠 가시기

전에 내일 자기도 센트럴 파크에 가겠다고 말하더라고요.”

도윤이 오윤수를 힐끗 돌아봤다. 네 제자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그러자 그가 피식 웃으며 뒷머리를 긁었다.

“그 녀석이 말로는 나한테 그림을 배우겠다며 우리 집에 드나들지만 그건 그냥 이웃에 유명한 화가가 산다니까 신기해서 그러는 것 같아요. 사실은 은서 아버님을 더 따라요.”

“걔 나이가 올해 몇 살이지? 열 살쯤 되어 보이던데 그런 아이가 하루 종일 공원에 나가서 그림을 그린다는 거야? 아무리 그림이 좋아도 그럼 질릴 텐데?”

“열한 살이에요. 그게 저도 신기하기는 한데 아무튼 거의 하루 종일 은서 아버님 옆에 붙어 앉아서 공원의 풍경이나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을 그리더라고요. 뭐 요즘 아이들답게 연필하고 도화지를 쓰지 않고

주로 태블릿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태블릿? 컴퓨터로 그림을 그린단 말이야?”

“네. 디자이너나 웹툰 만화가들이 쓰는 대형 태블릿이 있어요. 저한테 그림을 배울 때는 절대로 쓰지 못하게 하지만 지미는 종이보다 그게 더 익숙한가 보더라고요. 그게 은근히 조작하기가 쉽지 않은

물건인데도 아주 잘 쓰더라고요. 태블릿 화면 위에 스타일러스 펜으로 그림을 쓱쓱 그려나가는데 보고 있으면 저도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을 정도예요.”

아까 오윤수의 집에 도착했을 때, 지미라는 아이가 그리다 만 그림을 얼핏 본 적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아이 치고는 솜씨가 제법이라는 정도의 느낌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윤수가 말하는 걸 들으니 태블릿

위에 그리는 그림은 또 다른 모양이었다.

“알았어. 겸사겸사해서 내일 꼭 센트럴 파크에 가봐야겠네? 그럼 내일 보자.”

장은서가 떠난 뒤에 도윤과 석훈은 오윤수와 함께 늦게까지 맥주를 마셨다. 도윤은 오윤수의 귀국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얘기를 나누고 싶어 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가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리고는 했다. 밤이

제법 늦은 시각에 오윤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집안으로 들어가더니 여러 장의 도화지를 들고 나왔다.

“이게 전부 지미가 그린 거예요. 보시기에 좀 어떠세요?”

그림을 쓱 훑어본 도윤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그렸네. 아이치고는.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신동이나 천재라는 생각은 안 들어. 그런데 네 눈치를 보면 얘한테 이 그림들로는 알 수 없는 뭔가 특별한 게 있는 것 같은데?”

그의 말에 오윤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피아니스트로서 천재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는 아이가 하필이면 피아노가 아닌 바이올린 을 배우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주 어릴 때부터 말이에요.”

“글쎄? 천재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거라고 보장하기는 어려워도 어느 정도는 성과를 거둘 수 있지 않을까? 피아니스트로서 뛰어나다는 것은 어쨌든 그 바탕이 되는 음악적 소질이 좋다는 뜻일 테니까.”

“아마 그렇겠죠. 그래도 저는 역시 차이가 생길 것 같아요.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명필마다 자신에게 맞는 붓은 따로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지미는 그림에 천재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어요.

그게 도화지에 그리는 그림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요.”

“그런데 태블릿에 그리는 그림에서는 아이의 천재성이 잘 드러난다는 말이지?”

“태블릿은 잘못 그린 부분을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잖아요. 마치 유화처럼요. 고흐가 르네상스 시대 화가들처럼 프레스코 벽화를 아주 멋있게 그릴 수 있었을까요? 그건 수정하기가 무척 까다롭잖아요. 저는

고흐가 성당 벽화를 그리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기가 어려워요.”

“하긴 태블릿으로 그림을 그리면 선 처리라든가 색을 칠하는 문제도 쉽게 해결할 수 있겠네. 그건 예술성 말고도 손재주가 필요한 일이니까.”

“맞아요. 제가 보기에 지미는 손보다는 머리가 더 섬세해요. 지금은 태블릿 그림을 통해서만 녀석의 창의성을 확인할 수 있지만 이대로 잘 자라준다면 앞으로 도화지나 캔버스 위에도 뛰어난 작품을 완성할 수

있게 될 거예요.”

“그러니까 나더러 내일 공원에 가서 직접 눈으로 그걸 확인해 보라는 거구나?”

“네. 그리고 은서 아버님에게 꼭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하세요. 아까 은서도 말했지만 예전부터 형 초상화를 그려주고 싶어 하셨어요.”

“알았다. 나야 그래 주면 고맙지 뭐.”

아마 형이 허락하면 은서 아버님이 더 고마워하실 거예요. 오윤수는 그 말은 굳이 입 밖에 내지 않고 그냥 속으로 삼켰다. 그날의 자리가 그렇게 파한 다음날 오전 10시, 장은서가 약속대로 차를 몰고 도윤을

데리러 왔다.

* * *

뉴욕 한가운데 자리 잡은 센트럴 파크 입구에는 주말마다 많은 무명 화가들이 몰려든다. 뉴욕 시민이나 관광객들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주고 돈을 벌기 위해서다.

주말마다 이십여 명이 넘게 몰려드는 그들의 대부분은 중국이나 한국에서 온 아시아인들이다. 그들은 15분에서 30분 정도 공을 들여 초상화를 한 장 그려주고 수십 달러를 받는다. 운이 좋아 손님을 많이

받는 날에는 하루에 천 달러 가까운 돈을 손에 넣기도 한다. 그 때문에 평일에는 직장을 다니다가 주말에만 화가로 변하는 이들도 많았다.

챙이 없는 베레모를 쓰고 앉은 장찬수 역시 그런 화가들 사이에 끼어있었다. 도윤과 석훈이 장은서와 함께 센트럴 파크에 도착했을 때, 장찬수는 마침 손님에게 초상화를 그려주고 있었다. 간이 의자에 앉은

채로 키가 작은 이젤을 앞에 세워놓은 그의 앞에는 중년의 백인 남자 한 명이 앉아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굉장히 즐거워 보이시네?”

장찬수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맺혀 있는 것을 본 도윤의 말에 장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에게는 여기서 남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게 저게 삶의 낙인 것 같아요.”

“삶의 낙이라고? 돈을 벌려고 여기 나오시는 게 아니라?”

“물론 돈도 벌죠. 많지는 않지만 여기서 초상화를 그려주고 받은 돈이 아빠의 생활비니까요. 요즘은저도 화가로서 이름을 알리게 된 덕분에 큰돈을 벌고 있잖아요. 하지만 아빠는 지금까지 저에게 한 번도 손을

벌리신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남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그 돈으로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한다는 거지? 어찌 보면 그야말로 성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겠네?”

도윤의 말에 장은서가 풀썩 웃더니 문득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는 서울에 계실 때도 늘 초상화를 그렸어요. 원래가 초상화가였으니까요. 하지만 그때는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그림을 그리셨어요. 제 기억에 아빠가 저렇게 미소를 띤 채 그림을 그리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때나 지금이나 남의 얼굴을 그려주는 건 똑같지만 적어도 서울에서는 그 일이 즐겁지 않았던 거죠.”

장은서의 목소리에 물기가 촉촉해졌다. 도윤은 공연히 가슴이 울컥해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러자 장찬수의 옆에 지미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녀석은 자기 키에 맞는 작은 이젤 위에 커다란 태블릿을

올려놓고 스타일러스 펜으로 열심히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저 꼬마는 그림 그리는 게 즐겁지 않은 건가? 표정이 엄청 심각하네?”

중얼거리듯이 내뱉은 그의 말에 장은서가 풋 하고 웃었다.

“쟤는 평소에는 그냥 산만한 개구쟁이인데, 그림만 그리면 집중력이 굉장히 좋아지더라고요. 일단 그림을 시작하면 옆에서 누가 건드려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몰입해서 그려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도윤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어제 오윤수가 말했던 대로 지미의 그림이 도화지에 그렸던 것과는 많이 달라보였던 것이다.

“도화지에 연필로 그린 그림에 비해 모양과 색채, 터치가 모두 확연히 다르네? 그냥 만화처럼 반듯반듯하게 그리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효과를 많이 넣는데? 아무리 소프트웨어가 도와준다고 해도 어린 아이가

저런 식의 구도와 형태를 생각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

장은서도 도윤의 평가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박사님이 보시기에도 그렇죠? 윤수 오빠나 제가 보기에 지미는 머릿속 구조 자체가 특이한 것 같아요. 사물을 보고 느끼는 감각 자체가 보통 사람들하고는 다른가 봐요.”

“연필이나 물감으로는 그게 제대로 표현되지 못하는데 태블릿으로는 가능해진다는 거군. 윤수 말마따나 쟤는 손보다 머리가 앞서가는 게 분명해.”

도윤과 장은서는 일부러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가지 않고 멀리 떨어진 채 그들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구경했다. 작업을 방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새 열두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장찬수가 완성된 그림을 손님에게 건네주는 것을 본 두 사람이 그에게 다가갔다. 함께 점심을 먹자는 얘기를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초상화를 받아든 손님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떨떠름했다.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장찬수가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영어로 조심스럽게 묻자 초상화를 부탁했던 중년의 백인 남자가 소리 나게 혀를 찼다.

“이건 아무리 봐도 내 얼굴하고는 너무 다른데? 이게 오십 달러짜리 그림이라고?”

이미 장찬수와 가까운 곳에 다다른 도윤이 남자의 손에 들린 초상화를 다시 한 번 들여다봤다. 얼굴하고 다르긴? 특징을 정확하게 잡아냈는데.

비록 남들과는 다른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는 하지만 장은서의 재능은 아무래도 아버지인 장찬수로부터 물려받은 부분도 적지 않은 게 분명했다. 사물의 특징을 사진으로 찍듯이 잡아내는 그녀의 솜씨가 장찬수가

그린 초상화에서도 얼핏 보였던 것이다. 아무리 돈의 가치가 상대적이라고 해도 최소한 오십 달러가 아깝지 않은 그림이었다.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원하신다면 수정을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언짢은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찬수의 얼굴에 맺힌 옅은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에게는 오히려 그게 더 불쾌했던 모양이다.

“어느 부분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마음에 안 들어요. 여긴 그림 공부하는 무명 화가들이 많이 온다고 해서 은근히 기대했는데 아무래도 제대로 배운 솜씨는 아닌 것 같군. 나이 때문에 경험이 많을 것 같아서

부탁했는데 역시 젊은 화가들에게 맡겼어야 하나?”

장찬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림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어릴 때 집안이 가난했던 탓에 장찬수는 대학을 가지 못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평생 삼각지의 작은 화방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림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남자의 말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후벼 팠다.

“죄송합니다. 그럼 이 그림은 돈을 받지 않고 그냥 제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하지요. 공연히 즐거운 시간을 뺏어서 죄송합니다.”

장찬수가 정중하게 사과하며 초상화를 돌려받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남자가 그림을 슬쩍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나름대로 열심히 그린 건데 그러면 나도 미안하지. 그렇다고 오십 달러를 다 주기는 어렵고 그냥 삼십 달러로 합시다. 그래도 내 얼굴이라고 그린 건데 괜히 어디 구석에 처박혀서 나뒹굴 거라고 생각하면

나도 기분이 좋지는 않으니까.”

저런 양아치 같은 자식이! 옆에서 듣고 있던 석훈이 발끈해서 나서려는 걸 도윤이 얼른 붙잡았다. 장찬수가 웃으면서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본 것이다.

“저런 사람들이 가끔씩 있어요. 분명히 사전에 가격을 확인하고 자리에 앉았으면서도 정작 초상화가 완성되면 꼭 트집을 잡으면서 값을 깎으려 들거든요.”

장은서가 인상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 역시 기분이 나쁠 게 분명한데도 석훈처럼 발끈하지는 않았다. 한두 번 목격한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장찬수에게 삼십 달러를 건네고 그림을 손에 넣은

남자가 돌아서면서 히죽 웃는 게 보였다.

“쫌생이.”

옆에 앉아 상황을 모두 지켜본 지미가 남자의 등 뒤에 대고 작게 중얼거렸다. 웃으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도윤이 남자가 떠난 의자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이왕 여기에 왔으니 제 초상화도 한 장만 그려주시겠습니까? 잘 그려주시면 돈을 드리는 건 물론이고 제가 오늘 점심을 사겠습니다.”

도윤이 장찬수에게 눈을 찡긋하자 약간 놀란 표정을 짓던 그의 얼굴이 이내 환해졌다.

“돈을 받다니요? 이 박사님 초상화라면 제가 부탁해서라도 그리고 싶습니다. 나중에 그림이 마음에 들면 말씀대로 저하고 지미한테 점심이나 사 주십시오. 이 녀석이 덩치는 쪼그만데 보기보다 많이 먹거든요.

제법 쓰셔야 할 겁니다, 하하하.”

“저 많이 안 먹어요! 그리고 나도 저 아저씨 얼굴 그릴래요.”

장찬수가 너털웃음을 터트리자 옆에 있던 지미가 발끈했다. 그 모습에 서울에 있는 아이들이 생각난 도윤이 짐짓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도? 아저씨 얼굴 잘 그릴 자신 있어?”

“당연하죠. 장 화백 아저씨도 그렇고 우리 선생님도 제가 잘 그린다고 했어요.”

우리 선생님이라는 건 역시 오윤수를 말하는 것이겠지. 도윤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나도 이 기회에 네 솜씨를 한 번 보고 싶네. 잘 그려주면 맛있는 걸 사주마.”

“정말요? 약속이에요?”

“약속하마. 그리고 장 화백님. 잘 아시겠지만 초상화는 공짜로 그려주거나 받는 게 아닙니다. 누가 뭐래도 자기 얼굴 아닙니까? 점심은 어차피 사드리려고 온 거니까 편하게 그려주세요. 돈은 꼭 받으시고요.

그럼 잘 부탁합니다.”

장찬서는 도윤이 돈을 내겠다는 말에 극구 사양했지만 그가 자세를 잡자 일단 연필을 들었다. 그 옆에서 지미도 태블릿과 도윤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스타일러스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면 나도 그냥 있을 수 없겠는데요? 아빠, 여분의 이젤 가져온 거 있으시죠? 그거하고 도화지 한 장만 주세요.”

장찬수와 지미가 경쟁을 하듯 도윤을 그리기 시작하자 옆에 서 있던 장은서마저 여분의 이젤을 펴고 그 위에 도화지를 올려놓았다. 그녀는 연필 대신 품에서 만년필을 꺼내 도윤의 얼굴을 그렸다. 졸지에 도윤

한 사람을 놓고 세 장의 초상화가 경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날씨가 맑은 날이었다. 공원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웃음 띤 얼굴과 웃통을 벗은 채 조깅하는 누군가의 가벼운 뜀박질 소리. 한가롭게 노니는 구름 아래로 시원한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어대면서 한낮의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참 좋은 어느 날 오후, 두 장의 도화지와 하나의 태블릿 화면 위에서 도윤의 얼굴이 조금씩 형태를 갖춰가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