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링커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300화 (완결) (300/300)

300화

이제까지 수많은 화가들을 만났지만 누군가의 앞에 서서 모델이 되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도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왜 그랬을까? 부탁을 하면 선뜻 초상화를 그려줄 화가들만 해도 한둘이 아닌데. 심지어 오윤수도 처음 만났을 때는 초상화를 그려주는 거리의 화가였잖아?’

특별히 초상화에 대해 거부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스스로도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아저씨. 그림 그리는데 웃으면 어떡해요? 가만히 계세요.”

지미로부터 당장 타박이 날아왔다. 도윤은 얼른 웃음을 거두고 다시 표정을 바로잡았다. 하지만 잠시 그를 째려보았다가 다시 태블릿 위로 고개를 숙이는 아이를 보자 다시금 웃음이 터질 뻔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림을 그릴 때는 확실히 집중이 빠르고 강한 아이였다.

어린 아이는 생각이 복잡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집중할 수 있는 걸까? 화가 역시 강한 집중력이 필요한 직업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어떤 면에서는 어른보다 아이가 더 좋은 화가일지도 모르겠구나. 자신과

태블릿을 번갈아 쳐다보며 열심히 손을 놀리는 지미를 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시선은 어느새 태블릿에 못 박히듯 고정되어 있었다.

‘웃는다고 뭐라 하더니 이젠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네? 벌써 얼굴의 특징을 모조리 머릿속에 담았다는 건가? 그건 형태에 대한 지각력과 기억력이 아주 좋다는 뜻인데….’

그게 사실이라면 화가로서의 재능이 놀라운 아이일 것이다. 하지만 진짜 놀라운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미의 몸으로부터 조금씩 아우라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도윤은 하마터면 자신이

모델이라는 것도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 했다.

‘웃는다고 뭐라 하더니 이젠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네? 벌써 얼굴의 특징을 모조리 머릿속에 담았다는 건가? 그건 형태에 대한 지각력과 기억력이 아주 좋다는 뜻인데….’

지미의 몸에서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는 아우라는 아련한 흰색을 띠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림이 아니라 아이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뭐지? 몸 전체에서 아우라가 흘러나온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한 거야?’

도윤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아우라를 목격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의 몸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것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런 게 가능할 거라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지미야. 아저씨 얼굴 멋있게 그려줘야 한다?”

혹시나 싶어 일부러 소리를 내어서 아이를 불렀다. 하지만 지미의 고개는 들리지 않았다.

“흠흠. 지미야. 아저씨 얼굴 이상하게 그리면 안 돼? 그럼 아저씨 화낼 거다?”

다시 한 번 헛기침까지 하면서 부르자 그제야 아이의 얼굴이 들리며 그를 쳐다봤다.

“걱정하지 마세요. 선생님 초상화도 그려준 적이 있으니까요. 선생님이 제가 그린 초상화가 아주 멋있다고 했어요.”

지미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자 그의 몸에서 배어나오던 아우라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그림에 집중하고 있을 때만 아우라가 나타나는 건가?’

마치 그 생각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지미가 다시 태블릿 위에 고개를 숙이고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자 다시금 그의 몸에서 희미한 아우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머릿속에 박힌

이미지를 끄집어내려고 애쓰는 아이를 보며 도윤은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단한 아이로구나. 짐작이기는 하지만 몸과 마음 전체가 온전히 자신이 그리는 그림 속에 빠져들어야만 아우라가 흘러나온다는 얘기 같은데…. 혹시 다른 화가들도 집중해서 그림을 그릴 때는 다 그런 걸까?

설사 그렇더라도 지미는 저 나이에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그게 사실이라면 저 아이의 재능은 천재라는 표현도 부족하겠어.’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이다. 도윤은 여러 화가들과 두루 친분을 맺어왔지만 그들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옆에서 계속 지켜본 적이 없었다. 예의가 아닐 뿐 아니라 그림 그리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아니야. 설사 옆에서 계속 지켜보지는 않았어도 화가들이 그림 그리는 모습을 잠깐씩 구경한 적은 있잖아? 윤수도 그렇고 은서도 그렇고…. 그때는 아우라가 안 보였는데?’

그는 일부러 시선을 들어 먼 하늘을 쳐다봤다. 한참 동안 지미에 대한 생각을 애써 지웠다가 다시금 아이를 쳐다보자 어느새 아우라가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지미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상태에서 시간이 조금

지나자 다시금 그의 몸에서 아우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군. 화가와 내가 서로를 인식한 상태에서 정신을 집중시켜야지만 아우라가 보이는 모양이야. 이건 나도 전혀 몰랐던 사실이네.’

명화에서는 대개 아우라가 흘러나온다. 다만 아무리 좋은 그림이라도 시간이 오래 지나면 아우라가 사라져버리는데, 그건 작품에 머무는 아우라가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백 년 전의

작품들 중에는 상당히 수준 높은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아우라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그동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고만 여겼는데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네.’

인위적인 물건이 아닌 자연 그 자체에서는 아우라가 흘러나오지 않는다. 오직 사람이 만든 물건, 그것도 아주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작품에서만 아우라가 보이는 것이다. 결국 아우라의 원천은 그것을 만든

사람이라는 얘기다. 즉, 작품에 깃든 아우라는 결국 그것을 만든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온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그런 아우라가 아무에게서나 나오지는 않겠지. 오직 예술성이 뛰어난 사람이 작품 자체에 몰입할 때만 생기는 게 아닐까? 그렇게 보면 저 아이에게 뛰어난 화가의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오윤수의

눈이 아주 정확했다는 뜻이네.’

화가로서의 능력만 본다면 지미의 그것은 장은서는 물론이고 장찬수에게도 비할 바가 못 된다. 아무리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아직은 그게 개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얼굴을 그리고 있는 세 사람을 번갈아 살펴보던 도윤의 얼굴에 문득 미소가 떠올랐다. 지미의 그것보다는 희미하지만 장찬수의 몸에서도 얼핏 아우라가 살짝살짝 배어나왔다가 사라지곤 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반면에 화가로서는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장은서의 몸에서는 초상화가 모두 완성될 때가지 아우라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각자가 가진 재능은 물론이고 지금 그리는 그림에 얼마나 집중하느냐가 관건인 게 분명해. 어쩌면 그림에 담긴 화가의 세계관이나 인생관도 영향을 줄지도 모르지.’

지금까지 좋은 작품에서 아우라가 흘러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걸 볼 수 있는 자신의 능력 또한 단지 천부적이고 특이한 재능으로만 여겨왔다. 그런데 우연찮게 초상화 모델이 되면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을 눈앞에서 관찰할 수 있게 되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발견을 했다. 그건 도윤에게 있어서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 * *

월요일 오전, 도윤과 석훈은 오윤수와 함께 뉴욕 시내에 자리 잡은 커다란 화랑에 들어섰다. 오윤수의 개인 전시회가 열리는 곳이었다. 그동안 급격히 높아진 그의 명성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화랑 입구에는

그의 얼굴과 함께 대표작의 사진이 커다랗게 걸려 있었다.

“형, 이따가 개막식을 겸한 리셉션 파티에서 뵐게요.”

오윤수는 화랑에 도착하자마자 도윤과 석훈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시장을 찾는 지인들을 맞이하느라 자리를 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은서 부녀가 지미를 데리고 전시장으로 들어섰다. 지미가 자기 선생님의

그림을 꼭 보고 싶다고 조르는 바람에 장찬수가 부모님과 학교의 허락을 받아 함께 차에 태우고 온 것이다.

오윤수가 워낙 바빴기 때문에 그들 일행은 따로 화랑 내부를 천천히 돌면서 작품들을 관람하기 시작했다. 비록 도록을 통해 미리 살펴보기는 했지만 도윤으로서도 이번에 전시될 그림을 직접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좋네. 스타일이 계속 변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감각이 죽지 않았어. 윤수다워.”

도윤의 차분한 평에 장은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그래서 더 걱정이에요. 화가들이 생각보다 주변 환경에 예민하거든요. 한국으로 돌아가면 마음의 안정을 찾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혹시라도 감각까지 무뎌지면 어떡하죠? 화가의 마음이 풀어지면 그게

그림에도 드러나잖아요.”

“과연 그럴까? 설사 마음이 풀어지더라도 감각까지 무뎌지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럼 다행이지만 솔직히 불안해요. 윤수 오빠는 데뷔 이후로 지금까지 굉장히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계속해왔잖아요. 한국으로 돌아가서 정착하면 마음이 느긋해지면서 혹시 그 열정이

식어버리지는 않을까요?”

“그게 어때서? 화가가 무슨 그림 생산하는 공장도 아니고 열정이 식으면 좀 쉬면서 충전을 할 수도 있지. 그러다보면 새로운 그림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오를지도 모르고.”

“새로운 그림에 대한 아이디어라면…, 화풍이 변할 수도 있다는 말씀이세요?”

그런 생각은 미처 못했는지 장은서의 얼굴이 급변했다. 그것을 본 도윤이 피식 웃었다.

“왜 그렇게 놀라? 그게 나쁜 일인 것 같아? 설사 화풍이 변하고 작품의 개수가 줄어들더라도 그림 자체가 좋으면 상관없잖아?”

“하지만 그러다 사람들의 평가가 나빠지면요? 평론가나 수집가들은 낯선 그림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아요. 그건 박사님도 잘 아시잖아요.”

“이제 갓 데뷔한 신인이라면 모를까, 윤수 정도 되면 세간의 평에 흔들릴 필요가 없어. 본인이 자기 절제를 못하고 영혼 없는 그림을 남발한다면 모를까, 평론가들도 단순히 화풍이 달라지거나 그림이 낯설게

느껴진다고 해서 쉽게 깎아내리지는 않을 거야. 무엇보다 화가가 자기 그림을 그리려면 먼저 자기 삶을 살 수 있어야 해.”

“알겠어요. 후우~. 윤수 오빠가 갑자기 뉴욕을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서운한 생각이 들었나 봐요. 아시다시피 저하고 아빠는 한국으로 돌아가기가 어렵잖아요.”

도윤은 그 말에 뭔가를 말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장은서와 장찬수의 미국행은 자의반 타의반에 의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한국에서 여러 점의 모작과 위작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팔았다. 나중에 도윤이 그 그림들을 모두 회수해서 불태운 덕에 겉으로 문제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국 미술계에서 얼굴을 똑바로 들고 화가로서 활동하기에는 스스로 부끄러운 점이 있었다.

“저도 그렇고 아빠도 이곳 생활을 마음에 들어 하세요. 어제 윤수 오빠 말을 듣고 저희도 의논을 해봤는데 결국 그냥 이곳에서 계속 살기로 했어요. 국적까지 바꿀 생각은 없지만 영주권이 있으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예요.”

푸념하듯 내뱉는 그녀의 말에 도윤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적으로 남들에게 경제적인 피해는 입히지 않은 셈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은 죄가 완전히 없던 일이 될 수는 없다. 그로서는 다만

과거의 일 때문에 두 사람의 삶이 흔들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장은서도 그렇지만 어제 공원에서 본 장찬수의 모습은 너무도 보기 좋았다.

두 사람의 대화가 거의 끝나갈 때쯤, 잠시 지미의 손을 잡고 다른 전시장을 둘러보러 갔던 석훈이 뭔가를 투덜대면서 다가왔다.

“지미가 자꾸 어떤 그림이 좋은 건지 가르쳐 달라는데 난 아무리 봐도 뭐가 좋고 뭐가 나쁜지 잘 구분이 안 돼요. 윤수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기는 하지만 그걸 사기 위해 몇 억을 낼 거냐고

물으면 절대 아니거든요. 형을 따라다닌 지가 벌써 십 년이 훨씬 넘는데도 눈이 트이지를 않으니까 어떨 때는 좀 민망하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뜬금없는 녀석의 불만에 도윤이 실소를 터트렸다.

“민망하긴 뭐가 민망해? 너한테 예술적인 안목을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에이, 그건 형이 모르는 소리예요. 명색이 세계 최고 감정가의 비서실장이잖아요. 하도 형 옆에 붙어 다니니까 사람들이 저도 당연히 그림을 볼 줄 안다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그거야말로 널 모르고 하는 소리지. 넌 솔직히 반칙이나 다름없는 몸을 가지고 있잖아? 사람들한테 물어봐라. 괴물처럼 튼튼한 몸과 그림 볼 줄 아는 눈 가운데 어떤 걸 더 갖고 싶어 하는지. 백이면 백

모두 너를 더 부러워할 걸?”

“됐네요. 아무튼 나는 이런 머리 아픈 그림들을 보는 것보다는 그냥 만화책이나 뒤적일 때가 더 행복해요. 형을 따라다니면서 전 세계의 유명한 그림들은 거의 다 보고 다녔는데도 이런 걸 보면 그것도 무슨

타고난 체질 같은 건가 봐요.”

그때 장은서가 킥킥대며 웃는 것을 본 지미가 그녀의 팔을 잡아당기더니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물었다. 그녀가 간략하게 석훈의 말을 통역해주자 녀석이 갑자기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아저씨도 만화 좋아해요? 나도 그거 엄청 좋아하는데.”

석훈의 얼굴이 민망함에 확 붉어졌다. 녀석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충 맞장구를 쳤다.

“그, 그렇지? 그림은 누가 뭐래도 역시 만화가 최고야.”

“맞아요. 그래서 전 이 다음에 커서 훌륭한 만화가가 될 거예요.”

순간 석훈의 얼굴이 잠시 얼어붙었다.

“어, 어? 뭐라고? 만화가가 되고 싶어? 화가가 아니라? 너 오윤수 화백의 제자라면서?”

“그게 왜요? 만화가도 그림 그리는 사람이니까 화가 아닌가요? 선생님도 제 생각대로 하라고 말씀하셨어요.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걸 그리는 게 제일 좋은 거라고.”

석훈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도윤과 장은서의 얼굴을 쳐다봤다. 얘가 이래도 되느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그러자 도윤이 피식 웃으며 지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선생님 말이 맞다. 화가라면 모름지기 자기 마음에 드는 걸 그려야지. 네가 좋은 만화가가 되면 선생님도 기뻐하실 거다.”

지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설마 도윤까지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던 석훈은 그저 맥 빠진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때 도윤이 은근한 목소리로 지미에게 물었다.

“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태블릿에 그림을 그릴 거니? 만화가가 되는 거야 상관없지만 네 선생님은 지미가 도화지나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길 바라는 것 같던데.”

그의 질문이 아픈 부분을 건드렸던 모양이다. 지미의 얼굴이 살짝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아이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어른보다 더 주변의 평가에 예민하다. 특히 그 사람이 가족이거나 가까운 사람일 때는 더 그렇다. 장찬수와는 달리 오윤수는 지미가 태블릿에 그림을 그리는 걸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고, 그게 아이의 마음에 부담이 된 듯 했다.

“아저씨는 그림 보는 남자라고 하셨죠?”

뜬금없는 지미의 질문에 도윤이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그림 보는 남자라고? 그거 재미있는 표현이네? 누가 그러디?”

“선생님이요. 아저씨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감정사라고 대답하셨어요. 그래서 또 감정사가 뭐냐고 물었는데, 그러니까 그림 보는 남자라고 하시더라고요.”

도윤은 그 말도 왠지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들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그림 보는 걸 즐겨하는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지만 그걸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도윤은 전문적으로 그림 보는 남자였다.

“네 선생님 말이 맞다. 아저씨는 그림 보는 남자야.”

도윤의 말에 지미가 반색을 하며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림 보는 남자가 보기에는 어때요? 태블릿에 그린 그림은 도화지에 그린 것보다 나빠요? 좋은 그림을 그리려면 역시 도화지나 캔버스에 그려야 하나요?”

그를 쳐다보는 지미의 눈빛이 간절했다. 도윤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냐? 어디다 그림을 그리느냐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 네가 더 편하고 좋은 곳에 그리면 돼. 진짜 중요한 건 지미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한다는 거야.”

“그렇죠? 저는 앞으로도 계속 태블릿에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그게 더 좋아요.”

지미의 얼굴에 아연 활기가 돌았다. 제 딴에는 꽤나 고민스러운 문제였던 모양이다.

문득 태블릿 같은 전자기기에 그린 그림에서도 아우라가 흘러나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아닐 것이다. 처음부터 태블릿에 그린 그림은 이론적으로 무한 복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그런 그림

모두에서 아우라가 흘러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았다.

‘사람들이 모두 전자 기기로 직접 그림을 그리는 시대가 오면 작품에서 아우라를 느끼기는 힘들어지겠군. 그때가 되면 나도 능력이 아니라 순수한 안목으로만 그림을 감정해야 될지도 모르겠네.’

쓴웃음이 절로 나오는 상상이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상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바로 어제, 아우라의 진정한 원천이 작품이 아니라 그것을 그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은 뒤였기 때문이다. 그림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만드는 사람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것을 그리고 있는 순간만큼은.

도윤과 석훈은 뉴욕에 사흘을 더 머물다가 한국으로 떠났다. 윤수의 전시회는 아직 한창이었지만 일정 때문에 그 이상 시간을 내기 어려웠다. 바쁜 와중에도 오윤수와 장찬수 부녀가 모두 공항까지 두 사람을

마중 나왔다.

“지미는 태블릿에 그림 그리는 게 도화지나 캔버스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 좋은가 보더라. 아직 나이도 젊은 주제에 쓸데없이 세대차 느끼게 하지 말고 그냥 애기 하고 싶어 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게 더

나을지도 몰라.”

도윤은 공항 출국장에 들어서기 전에 오윤수에게 그런 말을 던졌다. 어리둥절해 하는 그를 뒤로 하고 검색대를 통과하던 도윤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 그럼 화가도 감정가도 그 바뀐

세상에 적응해야 할 것이다. 왠지 이번 여행에서는 오윤수의 그림을 본 것보다 지미를 만난 게 더 큰 소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링커 : 유물의 주인을 찾아드립니다 완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