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3화 (4/254)

< 레벨 업 도우미 -2- >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안 나왔다.

수한은 잠시 의문을 묻어두기로 했다.

나중에 천천히 알아봐도 될 일이었다. 경험치를 쌓아 레벨을 올리면 뭔가 변화가 있지 않겠나.

일단 평양에 도착하자, 서울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때는 두 도시를 오가는데 수십 년이 걸렸지만, 고속철도가 개통된 지금은 1시간이면 충분했다.

개성을 거쳐 서울 용산역에 도착한 다음, 지하철을 탔다.

수한의 집은 서울 외곽, 지하철역에서도 꽤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허름한 다세대 주택.

집에 들어서자 동생들이 뛰어나왔다.

“형!”

“하하하, 잘 있었어?”

수한은 걸핏하면 휴가를 반납하고 수당을 타먹었다. 대전쟁 이후 대한민국 국군에 많은 일이 있었고, 수한의 근무지가 개마고원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몇 달 만에 보는 동생들.

수한은 둘을 격하게 끌어안았다.

저녁에는 삼겹살 파티를 벌였다.

오랜만에 봤더니 할 말이 많고도 많았다.

“공부는 잘 되고 있니?”

“응. 이번 모의고사에서 11111 나왔어.”

“11111? 그게 뭐야?”

“형은 그것도 몰라? 5개 과목 전부 1등급이라구.”

수한은 막내 기한의 말에 허허 웃었다.

“그게 그런 말이었어? 언제 수능을 본 적이 있어야 알지. 그러고 보니까 예전에 명한이가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가족은 다 머리가 좋나 봐. 명한이도 그렇고, 너도 공부 잘 하는 거 보면.”

“형도 공부 했으면 좋았을 텐데.”

명한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상황이 아니었잖아? 뭐, 나도 이제부턴 공부할 거야. 대학교는 안 가도 세라프 어는 필요하겠더라. 이번 달 SPT도 접수해놨어.”

“SPT? 세라프 어는 언제 공부했어?”

“그냥 틈틈이 했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났다.

밤이 늦자 자리를 치웠다. 셋이서 먹은 단출한 차림이라 금방 치울 수 있었다.

수한은 거실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기한이 같이 자자고 했지만 수한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험생이니 잠을 잘 자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명한이 자기 방에서 자라고 했지만 됐다고 잘 자고 등교나 하라고 했다.

다음날.

수한은 몸에 밴 대로 6시에 칼 같이 일어났다.

동생들은 모두 꿈나라에 빠져 있었다. 수한은 냉장고와 창고를 뒤져 아침식사를 준비했다.

군대 가기 전만 해도 삼시세끼 다 준비했던 수한이었다. 구수한 된장찌개를 끓이고, 어제 먹고 남은 삼겹살을 고추장에 버무려 볶았다. 냉장고에 있던 밑반찬들을 깔자 맛깔나 보이는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다.

“어? 형. 벌써 일어났어?”

“군대에선 항상 6시에 일어나잖아. 그래서 빨리 일어났지.”

“내가 아침 차리려고 했는데……”

수험생인 기한까지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왔다.

둘 다 입맛이 없는지 깨작깨작 밥을 비웠다. 수한이 밥을 먹성 좋게 퍼먹다시피 하는 것과는 참 대조적이었다.

기한이 먼저 일어났다.

“형, 나 먼저 가볼게.”

“그래, 열심히 해라.”

“형, 다 먹었어? 설거지는 내가 할게.”

“너 학교까지 가려면 시간 오래 걸린다며. 그냥 먼저 가. 가서 강의 들을 준비해야지.”

수한은 억지로 명한의 등을 떠밀었다.

셋이 사는 집은 너무 외곽에 있었다. 명한이 학교까지 가는 데만 시간이 꽤 걸렸다.

둘을 내보낸 후 청소를 시작했다.

치운다고 치운 것 같긴 한데 여기저기 좀 미진한 구석이 있었다. 수한은 쓸고 닦는 것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후, 좀 깨끗해졌다.”

대청소를 하고 났더니 벌써 점심시간.

수한은 김치와 김에다 간단히 밥을 먹었다. 그리고 적당한 가방 하나를 골라 책을 몇 권 넣었다.

세라프 어와 문자에 대한 책들.

스마트폰과 이어폰을 호주머니에 넣고 길을 나섰다. 다세대 주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공용 도서관이 하나 있어서, 거기 가서 공부할 생각이었다.

집에서 공부하기에는 별로 좋지 않았다. 방음이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밤에는 그나마 조용하지만, 낮에는 온갖 소음이 집 안으로 파고들었다.

주중인데도 도서관은 가득 차 있었다. 열람실 좌석마다 사람들이 앉아 공부 중이었다. 대충 살펴보니 수한처럼 세라프 어를 공부하는 사람도 있고 공무원 시험이나 다른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도 많았다.

‘다들 열심이네.’

수한은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소리가 안 나게 조심조심 가방을 내려놓은 뒤 책을 꺼냈다.

그리고 공부.

군대 있을 때도 틈틈이 공부를 했던 수한이었다. 아예 멍석까지 깔아 놓았으니 집중하는 일만 남았다.

수한은 엉덩이 한 번 들지 않고 책을 들여다보았다. 글자를 익히고, 단어를 외우고, 이어폰을 이용해 발음을 들었다.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해가 저물어 있었다.

수험생인 기한은 늦게 들어오겠지만, 명한은 슬슬 들어올 때가 됐다. 대학생이라 강의가 빨리 끝날 테고, 중간고사는 진즉 끝났으니까.

집에 돌아왔는데 아무도 없었다. 수한은 얼른 저녁을 차렸다. 냉장고에 있던 돼지고기 목살과 묵은지로 명한이 좋아하는 돼지김치찌개를 끓였다.

하지만 밤이 늦도록 명한이 귀가하지 않았다.

수한은 속으로 걱정을 하며 먼저 밥을 먹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거실에 앉아 세라프 어 단어집을 꺼내들었다.

명한은 11시가 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무심코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앉아 있던 수한과 딱 눈이 마주쳤다.

명한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스쳤다.

“아, 형? 안 자고 있었어?”

“아직 11시밖에 안 됐잖아. 잘 놀다 왔니?”

“놀기는 무슨? 도서관 갔다 왔어.”

명한은 얼버무리려고 들었지만, 수한은 코끝에 스치는 옅은 알코올 향을 놓치지 않았다.

픽 웃어버렸다.

“야, 술 마셨으면 술 마셨다고 하면 되지 뭘 거짓말까지 하고 그러냐?”

“그게…… 형한테 미안해서……”

“미안할 게 뭐가 있어? 공부할 때 열심히 하면 되지. 중간고사 얼마 전에 끝났다면서.”

“으응. 난 들어갈게.”

명한은 잽싸게 자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민망했는지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뭔가 부스럭 거리고, 누군가와 전화하는지 작은 말소리가 나오다 그것도 끊어졌다.

수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명한의 태도가 어째 이상했다.

사실 어제부터 그랬다. 예전과는 다르게, 조금 거리를 두는 느낌이라고 할까.

수한은 10년째 아빠처럼 엄마처럼 명한을 키웠다. 왜 그런 것인지 대번에 눈치 챘다.

‘여자 친구 생겼나?’

괜히 넘겨짚는 걸까?

하지만 수한은 어딜 가나 눈치가 빠르기로 유명했다. 남들의 감정이 변하는 것을 귀신 같이 알아차리곤 했다. 하물며 동생의 변화를 모를 리 없었다.

시간이 지나 기한이 돌아오자, 같이 방으로 들어가 슬쩍 떠보았다.

기한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라, 형이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알게 됐어. 누구야?”

“형이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차피 시간 지나면 알게 될 건데? 뭐하는 사람이야?”

“에이, 그냥 형한테 직접 들어. 내가 말하는 것도 이상하잖아.”

“이 녀석이……”

수한은 눈을 부라렸다.

어쩌겠나. 자기가 말하기 싫다고 하는데.

사실 이런 얘기는 본인에게 직접 듣는 게 낫다. 그런 생각에 수한도 굳이 닦달하진 않았다.

간섭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사실 이건 축하할 일이지, 꾸중할 일은 아니었으니까.

갑자기 결혼하겠다고 임신한 여자 친구를 데려오지만 않는다면,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둘 생각이었다.

명한도 이미 성인.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할 때였다.

다음날.

어김없이 도서관을 찾았다.

공부하는 사람들의 열기가 뜨끈했다. 수한도 그들 틈에 섞여 책을 들여다보았다.

오늘은 아침부터 나선 참이었다. 점심은 도서관 매점에서 김밥 한 줄만 사먹었다. 군대에서 마음껏 퍼먹던 위장이라 배가 좀 고팠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으아아, 어렵다!”

수한은 도서관 밖으로 나와 기지개를 폈다.

외계 종족의 언어라 무척 어려웠다. 하루 종일 붙잡고 있지만, 도무지 실력이 늘지 않고 있었다.

머리도 식힐 겸 자판기 커피를 한 잔 빼먹었다.

복도에는 수한처럼 잠시 쉬러 나온 사람들이 꽤 많았다. 여기저기서 담소를 나누고, 스마트폰을 가지고 가벼운 게임을 했다.

‘레벨 업 도우미라고 했었지?’

그걸 보니 생각나는 게 있었다.

집으로 들어오는 기차 안에서 본 레벨 업 도우미.

공부를 한다고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난 김에 레벨 업 도우미를 실행했다. 왼쪽 손목이 환하게 빛나며, 수한의 눈앞에 빼곡히 글자들이 나타났다.

별 기대하지 않고 실행한 참이었다.

글자들을 훑어본 수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레벨이 올랐다!’

그제는 분명 1이었는데, 지금은 2가 되었다. 경험치도 0%가 아니라 15%를 가리키고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능력, 기술, 초능 이렇게 3개의 창에 여유 점수가 1씩 생겼다. 초능창은 여전히 여유 점수 말고는 아무 항목이 없지만, 능력과 기술창의 갖가지 항목들이 자신을 선택해 달라는 듯 밝게 반짝이고 있었다.

수한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글자들을 보았다.

이걸 누르면 정말로 능력치가 올라가고, 그게 수한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까?

알 수 없는 일.

수한은 한 번 도전해 보기로 했다.

가장 필요한 것을 골랐다.

세라프 문자.

세라프 문자는 기본적으로 37개의 표음 문자와 1만 개의 표의 문자를 익혀야 한다. 여기에 더해 49개의 조합 문자를 자유자재로 써야 제대로 쓰는 것이기 때문에 배우기 힘들었던 것이다.

기술 점수가 1개 더 있다면 세라프 어까지 올렸겠지만, 일단 문자부터 올려보기로 했다.

세라프 문자가 3에서 4로 올라갔다.

하지만 수한이 실감할 수 있는 변화는 없었다.

“그럼 그렇지.”

픽 웃으며,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쉴 만큼 쉬었겠다,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휴식을 취해서 그런지 책이 너무 쉬웠다. 세라프 문자 초급편이 그냥 술술 넘어갔다. 흡사 한글을 다시 공부하는 것 같았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한은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 책 한 권을 완전히 끝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이 책 한 권을 가지고 끙끙 앓았는데, 도저히 믿기지 않는 속도였다.

다른 책들도 그랬다.

난이도가 비슷한 책들은 단숨에 해치울 수 있었다. 딱 1권 가져온 중급 책을 펼치니 눈앞이 캄캄해지긴 했지만.

[붸↗이르↘쿠↓시안→쟈↑졔아∽]

듣기는 바뀐 게 없었다.

여전히 새들이 지저귀는 것처럼 괴상하게 들렸다.

세라프 어는 중국어처럼 성조가 있었다. 지구인의 신체 구조 상 발음이 거의 불가능한 음도 다수 존재했다. 덕분에 익히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수한은 인내심을 가지고 공부를 했다.

며칠 뒤, 끝내 3레벨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하하……”

수한은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들리기 시작한다.

그저 소리만 듣는 게 아니라, 조금씩 의미가 파악된다.

입을 벌려 아는 단어를 내뱉었다.

[붸↗이르↘쿠↓쟈↑]

안녕하세요.

[샤르↘비↑호∽셍귀↗]

좋은 아침입니다.

발음이 된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와 →, ↓가 혀 안에서 꼬이기만 할 뿐 발음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세라프 어를 4레벨로 올리자 기다렸다는 듯 입이 터진 것이다.

우연이 아니다.

수한은 그 이유를 똑똑히 알고 있었다.

레벨 업 도우미.

이건…… 진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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