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기 시험 -2- >
3개의 환경을 모두 돌파했다.
녹색 수풀들이 영화관 영상 꺼지듯 픽 사라졌다. 나무가 있던 자리에는 콘크리트 기둥이, 풀이 우거져 있던 곳에는 로프 무더기가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수한은 출구로 나와 한숨을 돌렸다.
시험 감독관이 수한에게 다가왔다.
“수고하셨습니다. 기록이 굉장히 좋네요?”
“그렇습니까?”
“격투 시험에서 실수만 안 하시면 좋은 결과를 기대하셔도 좋겠습니다.”
“하하, 말씀 감사합니다.”
수한은 단검을 반납했다.
생존 시험장 출구 바로 앞에 커다란 체육관 같은 시설이 있었다. 바로 격투 시험장이었다.
사실 변이체를 상대할 때 격투술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주먹 날릴 시간에 권총을 뽑아 쏘는 게 훨씬 나았다. 그러나 지원 요원의 업무가 변이체 상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보니 격투술도 꽤 중시되고 있었다.
시험장 안으로 들어가자, 요원 몇 명이 응시자들과 대련을 하는 것이 보였다.
한 손에 저마다 단검을 들고 있었다. 손도끼나 망치도 비치되어 있지만, 단검을 든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단검은 여러 기능을 부여하기도 용이하고, 소총에 착검도 가능하기 때문에 인기가 높았다.
조금 기다리자 요원들이 수한을 불렀다. 수한은 살짝 긴장이 되는 것을 느끼며 그들에게 걸어갔다.
“그걸 쓸 겁니까?”
요원이 수한이 든 룬 문자 단검을 쳐다보았다.
확실히 이런 곳에서 쓰기엔 무리가 있었다. 자칫하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으니까.
수한은 단검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근접 격투 시험장에 비치된 것 중 군용 대검을 하나 들었다.
“이게 낫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시작할까요?”
요원은 몸을 낮추고 단검을 수한에게 겨누었다.
수한도 특공무술 자세를 취했다.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자 매서운 기세가 풍겼다.
한 동안 대치 구도가 이어졌다.
다른 응시자들은 이미 결판이 났다. 다들 분전했지만, 닳고 닳은 요원들을 상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요원들은 채점을 한 후 수한을 향해 시선을 모았다.
‘이 녀석……’
수한 앞에 선 요원은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깡마른 생김새도 그렇고, 번뜩이는 눈도 그렇고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실전으로 단련된 감이 자칫 잘못했다간 크게 당할 거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수한은 투명한 눈으로 요원을 노려보았다.
이렇게 대치만 하고 있는 것은 수한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슬쩍 발을 놀려 반의 반 걸음 다가갔다.
“하!”
경쾌한 기합 소리와 함께, 요원이 발길질을 날렸다.
탐색용 발차기.
수한은 다시 몸을 뺐다.
요원이 기회를 잡았다는 듯 수한을 덮쳤다. 연속으로 발길질을 하고, 단검을 쥔 손을 움츠리며 기회를 살폈다.
몇 번의 공방이 오갔다.
수한은 요원이 자신보다 한 수 정도 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 년 간 실전을 겪으며 몸을 단련한 요원의 실력이 상당했던 것이다.
지리산에서 근력과 체력을 높이지 않았다면 진작 당했을 터.
어차피 수한은 도전자의 입장이었다. 굳이 무리하지 않았다. 빙빙 돌며 대치하다가, 예리한 일격을 날렸다.
몇 번은 발차기를 적중시키는 쾌거를 올렸다. 그때마다 기분이 나쁜지 요원이 얼굴을 굳혔다. 날카롭게 날아든 공격에 수한도 좀 얻어맞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견딜 만 했다.
단기간에 결판이 날 것 같지 않자, 감독관이 손을 들었다.
“그만! 157번 응시자의 시험은 여기서 종료한다. 157분 응시자분, 이름이 뭡니까?”
“이수한이라고 합니다.”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기술을 조금만 더 연마하면 우리 회사 정식 요원들을 쓰러뜨리고도 남을 것 같습니다. 훌륭합니다.”
수한은 인사를 꾸벅 하고 나갔다.
응시자들이 나가자 수한과 대적했던 요원이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봐, 괜찮아?”
“말도 마. 로우킥이 이렇게 센 놈은 처음 봤다. 아이고, 벌써 멍 든 것 좀 봐.”
“맙소사. 골절된 거 아냐?”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병원은 가봐야겠어.”
요원은 바지를 걷어 얻어맞은 부위를 보여주었다.
벌써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생기기는 해골처럼 비쩍 말라가지고는 발차기 한 번에 이 정도 위력이라니……
근접 격투를 끝으로, 모든 시험이 끝났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 가지 특기를 이야기하는 것이 보였다.
수한은 잠깐 고민했다.
기술 점수 15점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걸 세라프 어와 문자에 투자하면 10 이상으로 올라간다. 그 정도면 수한의 한국어와 비슷한 점수이니 세라프 어 특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될 것 같았다.
곧 고개를 저어 버렸다.
가산점은 못 받아도 실기 시험에서 최상위권을 자신하는 참이었다. 언제 필요한 기술이 등장할지 모르니, 일단은 보류하는 게 좋을 듯했다.
“결과는 언제 발표됩니까?”
“2주 정도 뒤에 발표될 거예요.”
“알겠습니다.”
눈에 띄는 직원에게 묻자, 직원은 사무적인 태도로 말했다.
수한은 시험장을 빠져나왔다.
명찰은 경비 사무실에서 반납했다. 지하철을 타고 여의도로 향했다.
여의도에는 고층 건물들이 즐비했다. 햇빛이 유리에 반사되어 현란한 빛을 뿌렸다. 눈이 따가워서 수한은 왼손으로 눈을 가리고 건물들을 올려다보았다.
수호자 연맹의 대한민국 지부가 있는 곳.
그 덕에 공격대 건물과, 각종 고층 건물들이 밀집해 있었다. 수한은 동경 어린 눈으로 상위권 공격대 사옥들을 쳐다보았다.
세 개의 고층 건물이 나란히 올라간 타이탄, 백금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백호, 활처럼 굽어진 미려한 곡선을 자랑하는 해모수, 칼 손잡이처럼 건물 윗부분이 양쪽으로 돌출된 워소드, 새의 날개 모양을 형상화한 알바트로스 등등.
수한도 언젠가는 저곳에 들어갈 일이 있겠지.
당장 실기 시험에 합격하고 보게 될 면접만 해도 각 공격대 사옥에서 치러지니까.
수한은 발길을 돌렸다.
여의도 북서쪽, 옛 국회의사당 자리에 있는 수호자 연맹 지부를 방문했다.
지부는 운동장을 방불케 했다. 그 규모가 엄청났다.
가끔 외계 종족도 보이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이능력자들이 곳곳을 드나들었다.
수한은 잠시 멈춰 서서, 쌍검을 찬 이능력자 하나가 미끄러지듯 허공을 날아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D급 수호자 강혁입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짧은 검을 찬 남자가 수한에게 다가왔다.
수호자.
다름 아니라 수호자 연맹 소속의 이능력자를 달리 부르는 말이었다.
대전쟁 때는 이능력자를 모두 수호자라고 불렀다. 그 이후 이능력자 범죄자도 나타나고, 수호자 연맹과는 관련 없는 이능력자도 생기면서 그들만 달리 부르는 것이다.
“아, 이능 적성 검사 해보려고 왔습니다.”
“이능 적성 검사요? 그건 아무 지부에서나 가능한데, 굳이 여기로 오신 이유가 있습니까?”
“공격대 지원 요원에 지원했는데, 오늘 실기 시험을 본 김에 검사를 하려고요.”
“아하, 공격대에서 제출하라고 했나 보네요?”
수호자는 자기 좋을 대로 수한의 말을 해석했다.
수한을 지부 한쪽으로 데려갔다. 검은 유리로 가려져 있어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는 곳이었다.
수호자가 수한에게 당부했다.
“여기 지부는 이능력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입니다. 일반인이 오래 있으면 몇몇 성질 더러운 것들이 시비를 걸 수도 있으니까 검사만 해보고 빨리 돌아가세요.”
“말씀 감사합니다.”
수한은 검사실 안으로 들어갔다.
연맹에 등록된 이능력자가 아니기 때문에 상당한 비용을 물어야 했다. 10년 전에 받았던 검사는 무료였지만, 재검사까지 국가에서 보조해 주지는 않는 것이다.
검사실 직원이 간단히 절차를 설명해 주었다.
“보시면 15 종류의 기계가 있을 거예요. 여기 IC칩을 드릴 테니까 이걸 각 기계에 댄 후, 잠깐 앉아 계시면 됩니다. 한 번 할 때마다 오심이나 구토, 어지럼증, 두통 같은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으니까 검사 하나를 한 다음에는 꼭 10분 정도 쉬셔야 돼요. 아셨죠?”
“알겠습니다.”
이미 아는 사항이었다.
직원의 말처럼, 검사실 안에는 15 종류의 기계가 늘어서 있었다. 그 중 12 종류는 의자처럼 생겼고, 3 종류는 MRI 찍을 때 들어가는 원통형 기구를 닮았다.
수한은 원통형으로 생긴 기계부터 시작했다.
종합 적성, 잠재 적성, 발현 적성.
그 다음은 의자 형태의 기계.
총 12가지로 나누는 이능 계열별로 적성을 검사하는 기계였다. 수한은 충분히 쉬어가면서 모든 검사를 마쳤다.
그쯤 되자 진이 다 빠졌다.
머리는 어지럽고, 속은 메슥거렸다. 누군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바로 토할 것 같았다.
직원이 수한을 불렀다.
“이수한씨! 검사 결과 나왔어요!”
수한이 가까이 오자, 직원은 자기 앞의 홀로그램을 한 번 보았다.
직원의 얼굴에 놀랍다는 표정을 떠올랐다.
“10년 전에는 각성 확률이 최악이었는데, 굉장히 좋아지셨네요. 가끔 이런 분이 있다곤 들었는데, 제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에요.”
그 말을 대충 흘려 넘기며, 결과지를 확인했다.
[이능 적성 검사 결과]
이름 : 이수한 나이 : 24 성별 : 남
신장 : 185cm 체중 : 79kg
주민등록번호 : 910315-1284953
거력 12% 강체 12% 신속 10% 감각 12%
정신 9% 의지 10% 구현 7% 외능 6%
소환 6% 변조 11% 투시 8% 영혼 6%
종합 적성 10% 발현 적성 0.2% 잠재 적성 E
수한은 결과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10년 전에는 종합 적성이 0.000001%에 불과했다. 각성 확률이 1억 분의 1이었다는 소리다. 그리고 12 계열 모두가 0.01%를 가리켰다.
지금은 종합 적성이 천만 배가 높아졌다. 아예 0%였던 발현 적성은 0.2%가 되었다. Z였던 잠재 적성도 E로 올라섰고.
여기서 종합 적성은 힘의 결정을 사용했을 때 각성할 가능성을 가리킨다. 발현 적성은 외부 도움 없이 자연 각성하는 것으로, 지구인에겐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잠재 적성은 각성했을 때 얻을 확률이 높은 이능의 등급을 나타냈고.
초능 1과 20이 이렇게 차이가 컸나 보다.
여기서 30, 40, 50 이렇게 올리면 적성이 더 올라가겠지. 나중에 돈을 모아 힘의 결정을 구하기만 하면 꿈에 그리던 이능력자가 되는 것이다.
수한은 숨을 죽여 환호성을 질렀다.
이것으로 여기서 볼 일은 다 봤다.
결과지를 곱게 접어 전투복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직원에게 수고하라는 말을 남기고 지부를 나섰다.
점심을 걸렀더니 배가 무척 고팠다. 그렇다고 지금 밥을 먹자니 벌써 4시가 가까워져서 시간이 애매했다. 내일 오전에 워소드, 모레 오전에는 알바트로스의 실기 시험이 있으니 집에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명한이 빨리 귀가해서 같이 밥을 먹었다.
“형, 시험은 잘 봤어?”
“당연히 잘 봤지. 내가 아마 10등 정도는 했을 걸?”
“우와, 진짜? 몇 명이나 뽑는데?”
“이건 절대 평가라서 기준 이상이면 모두 합격시켜. 진짜는 면접이니까. 그때 잘 해야지.”
“그럼 지금부터 준비해야겠다. 지원 요원이면 연줄 타고 들어가는 사람도 있을 텐데.”
“아, 그 생각을 못 했다.”
수한은 슬며시 걱정이 되었다.
실기야 걱정할 게 없지만, 면접에선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자신은 세 공격대 모두 아는 사람 하나 없으니, 잘못하면 불합격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 내일부터 바로 면접 준비해야겠다.”
“내용은 뭐래?”
“사냥 계획 짜는 거야. 지원 요원 업무 중에 하나가 그거더라. 해당 공격대 전력으로 잡을 수 있는 기계 괴수나 변이체 한 마리를 선정해서 계획을 짜서 발표해야 돼.”
“어렵겠다.”
“말단 요원이면 상관없는데 승진하려면 꼭 필요한 거니까……”
수한은 입맛을 다셨다.
면접을 준비하는 한편, 워소드와 알바트로스 공격대의 실기 시험을 치렀다.
둘 다 해모수 공격대와 비슷했다. 대기하고 있다가 부르면 들어가서 사격, 생존, 격투 시험을 보았다.
수한은 워소드와 알바트로스에서도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었다. 두 군데 모두 소총 사격은 만점을 받았다. 다른 사격도 빼어난 성적을 기록하고, 생존 시험을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돌파했다. 근접 격투에서는 상대 요원과 막상막하로 싸웠다.
솔직히 알바트로스에서는 상대 요원을 이길 기회가 있었다. 확 질러버리려다가 겨우 참았다. 당장 점수는 높게 받겠지만, 정말 알바트로스에 취직하게 되면 그 요원과 껄끄러운 사이가 될 테니까.
이로써 시험은 다 끝났다.
남은 것은 2주 뒤를 기다리면서, 3차 면접을 대비하는 일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