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출근 -2- >
“예!”
“대답 하나는 시원시원해서 좋네요. 자, 여기가 수한씨 자리입니다.”
수한의 자리는 입구 바로 앞이었다.
기본적인 물품은 다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최신형 컴퓨터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16:10 모니터가 두 개 나란히 세워져 있고, 그 옆에 소형 홀로그램 상영기도 보였다.
입력 장치도 키보드, 마우스, 동작 감지기, 마이크 모두 갖춰 놓았다. IT로는 최첨단이라 할 만 했다.
강성은 수한을 의자에 앉혀 놓고 말했다.
“일단 처음에는 업무 파악부터 하세요. 컴퓨터에 보면 우리 공격대에서 쓰는 각종 서류 서식 있을 겁니다. 그것부터 숙지를 하세요. 그 다음에는 아무렇게나 각 서식별로 한 장씩 예시 서류를 만들어서 저한테 가져오세요.”
“한꺼번에 드립니까? 아니면 한 장씩 드려야 합니까?”
“완성되는 대로 가져오세요. 한꺼번에 다 하려면 몇 주는 걸려요.”
강성은 잘해보라고 수한의 어깨를 툭툭 쳤다.
수한은 일단 컴퓨터를 켰다.
컴퓨터 안을 뒤적여 보니 별 게 다 있었다.
지원 1과에서 만들었던 사냥 계획, 참가했던 사냥 기록, 알려진 기계 괴수와 유명 변이체에 대한 정보, 그리고 갖가지 서류에 이르기까지.
사냥 계획과 기록에 눈길이 갔지만 지금 그걸 볼 수는 없었다. 사수인 강성이 시킨 예시 서류 작성이 우선이었다.
수한은 서류의 종류부터 살폈다.
비품 신청서, 소모품 신청서, 인수 확인서, 사냥 계획서, 사냥 결과 보고서, 출장 보고서, 시말서 등등.
‘뭐부터 해야 하지?’
그냥 아무 거나 해가면 될까?
아닐 것 같았다. 가장 중요한 서류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서류는 사냥 계획서.
수한은 사냥 계획서 파일들을 열었다.
전문가는 달랐다. 초 단위로 일정이 짜여 있었다. 심지어 투입되는 이능력자와 지원 요원의 이름까지 쓰여 있는 걸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계획서에 들어간 그래픽과 동영상의 질도 상상을 초월했다. 수한 혼자 이런 계획서를 쓰려면 최소 몇 주는 걸릴 터였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사냥 계획서는 지원 17과 전체가 매달려서 만드는 거였다. 아무리 신입사원의 능력을 본다 해도, 이것부터 시키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뭘 먼저 작성해야 할까?
수한은 입장을 바꿔 생각했다.
자신이 강성, 즉 사수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행동할까?
솔직히 처음부터 어렵고 중요한 걸 시키진 않을 것이다. 난이도는 쉽더라도 귀찮은 걸 시키겠지.
쉽지만 귀찮은 서류.
수한은 컴퓨터 안에 즐비한 서류 중 하나를 짚었다.
비품 신청서.
내용을 보니 자질구레한 것들이었다.
A4 용지, 휴지, 전구, 책상, 의자, 볼펜, 컴퓨터, 찻잔, 커피믹스, 티백 등등.
서식은 아주 간단했다. 정확한 물품명과 수량, 그리고 신청인의 부서와 이름만 기입하면 끝이었다.
수한은 그냥 아무렇게나 써넣으려다가, 문득 드는 생각에 강성을 찾아갔다.
“김 주임님, 혹시 비품관리대장 볼 수 있겠습니까?”
“관리대장? 출입구 옆에 걸려 있어요. 그런데 그건 왜요?”
“말씀하신 서류 작성하는 거 비품신청서부터 쓰고 있는데, 참고하려고 합니다.”
“그래요? 잘 해 보세요. 아 참, 오후에 회의 있는데 깜빡 하고 있었네. 이것 좀 사람 수대로 복사해오고 회의 정확히 몇 시부터 시작인지 알아오세요.”
강성은 수한에게 서류 뭉치를 하나 건넸다.
21세기에 웬 서류?
속으로는 의아했지만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서류 뭉치를 받아들고 질문했다.
“몇 부씩 복사하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회의 시간은 어디서 물어봐야 합니까?”
“기초적인 건데…… 하긴 수한씨는 아직 모르겠네요. 오후에 과장님들 회의 있어요. 보통 2시에 시작하는데 부장님 일정 따라서 달라지니까 1과 가서 물어보세요. 참석 인원은 과장님들이랑 부장님이니까 최대 21명인데, 혹시 모르니 2부 정도 더 복사해 놓으세요. 아, 원정 나가신 분들은 빼고요.”
“예, 알겠습니다.”
원정 나간 사람?
수한은 금방 그 뜻을 알아차렸다. 외계 행성에 가서 변이체를 사냥 중인 과장들을 뜻하는 거였다.
그럼 누가 원정 나갔는지 어떻게 알아봐야 하나?
발품을 팔려다가 먼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것저것 사내 업무망을 건드리자, 현재 원정 중인 과장들의 목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8과, 10과, 14과, 20과.”
4명이 자리를 비운 것으로 나왔다.
혹시나 싶어 조금 더 자세히, 각각 어느 행성으로 원정을 나갔는지 확인했다.
부장의 일정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천상 지원 1과에 한 번 가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복사기는 지원 17과 사무실 안에 있었다.
자동 복사기라 간단했다. 그냥 넣고 버튼만 누르면 되었다. 두터운 종이 뭉치가 순식간에 쌓였다.
강성이 가까이 다가왔다.
복사기 옆의 서랍에서 서류철을 꺼냈다. 20개는 단조로운 플라스틱 서류철이고, 하나는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양장 서류철이었다.
“여기에 깨끗하게 철하세요. 종이 각도 절대로 비뚤어지면 안 됩니다. 부사관 출신이라고 했으니까 믿어보겠습니다.”
특히 양장 서류철에는 티끌만큼도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주의를 받았다. 지원부장이 그런 걸 보면 질색한다나.
대충 지원부장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상당히 권위주의적인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사람에겐 꼬투리를 줘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각 맞추는 일이야 익숙했다. 5년 동안 아예 몸에 배이다시피 했다. 서류에 살짝 힘을 줬다가 당겼다 하며 서류철에 꽂아 넣었다.
강성의 말처럼 양장 서류철은 꼼꼼하게 살폈다. 살짝 빠져나온 것도 용납하지 않고 네모반듯하게 완성했다.
점심시간이 되기 30분 전, 지원 1과에 들러 회의 시간을 알아냈다.
정확히 오후 2시.
강성의 말과 일치했다.
수한은 17과로 들어와 강성에게 보고했다.
“김 주임님. 오후 2시에 회의 시작한다고 합니다. 9과, 11과, 14과, 20과 과장님들 외근 중이셔서 오늘 오후 회의에는 17분이 참석하십니다. 복사는 여벌로 2부 더 해놓아서, 총 19부를 했습니다.”
“수고했어요. 잠깐 부장님 서류철만 가져와 볼래요?”
“예, 여기 있습니다.”
양장 서류철을 건네자, 강성은 꼼꼼하게 서류철을 살폈다.
“음…… 좋아요. 이 정도면 되겠어요. 참, 예시 서류는 다 작성했어요?”
“아직 못했습니다.”
“벌써 오전이 다 갔는데…… 알았어요. 최대한 빨리 해서 가져오세요.”
빨리 한다고 했는데 생소한 업무라 늦어진 것이다.
강성은 책망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수한은 일단 출입문 옆에 있는 관리 대장부터 확인했다. 현재 비품이 얼마나 있는지 보고, 어떤 물품을 신청해야 할지 생각했다.
A4 용지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오늘처럼 복사 몇 번만 하면 다 떨어질 것 같았다.
커피믹스와 티백도 부족했다. 소모량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신청은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밥 먹고 합시다!”
아직 서류에는 손도 못 댔는데 점심시간이 되었다.
점심은 1과끼리 모여 2층 식당에서 먹었다. 공격대 사옥 밖에도 식당들이 늘어서 있지만,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안에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혁이 수한을 보고 물었다.
“어때요, 일은 할 만 합니까?”
“아직은 어렵습니다. 처음에 제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것 같고요.”
“그렇지요? 사실 우리 공격대는 설립된 지 얼마 안 돼서 체계가 제대로 안 잡혀 있어요. 지원 1, 2, 3과는 다르지만 그 외의 부서는 본인들이 알아서 해야 하는 게 많죠. 대신 그 만큼 인력을 확충하고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더 좋아질 겁니다. 제가 처음에 입사했을 때는 가관이었어요.”
“그렇습니까?”
“예. 어차피 앞으로 원정 한두 번 나갔다와야 업무에 좀 익숙해질 겁니다. 이게 다 경험이려니 하고 열심히 하세요.”
“알겠습니다.”
식당 음식은 나름대로 괜찮았다. 평소 같았으면 맛있다고 더 가져다 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 입이 깔깔했다. 영 입맛이 없어 그냥 배만 채우고 말았다.
점심을 먹었다고 끝이 아니었다. 그 옆에 있는 사내 카페에 몰려가 커피를 한 잔씩 했다. 수한은 먼저 사무실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눈치가 보여 그럴 수도 없었다.
자리에 앉아 시작하려는데, 강성이 수한을 불렀다.
“수한씨. 회의 준비합시다.”
서류 복사 말고 또 할 게 있나?
알고 보니 오늘은 2, 6, 15, 17과 과장들이 발표를 하는 날이었다. 그러면 해당하는 과의 막내들이 회의실 준비와 정리를 도맡아 한다고 했다.
회의실에 들어가자 동기들이 청소를 하는 게 보였다. 수한도 눈치껏 걸레 하나를 집어 들고 끼어들었다.
처음 보는 비쩍 마른 남자가 이리저리 지시를 했다.
“거기 먼지 안 보여요? 잘 좀 닦아요. 거기 안경 쓰신 분. 발밑 좀 보세요. 쓰레기 굴러다니잖아요. 컵은 다 닦았어요?”
땍땍거리는 말투가 귀에 참 거슬렸다.
동기 하나가 500ml 생수통을 가져왔다. 각 자리마다 올려놓은 후, 깨끗이 닦은 컵을 그 옆에 놓았다.
스크린을 내리고, 다른 전자 기기 작동을 모두 확인했다. 부장과 과장들이 와서 USB만 꽂으면 되게 한 다음 회의실에서 물러나왔다.
강성이 수한에게 말했다.
“오늘은 처음이라 제가 도와줬지만 다음부터는 알아서 하셔야 합니다. 항상 회의가 언제 열리는지, 어떤 과장님이 발표하시는지 확인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일 보세요.”
회의가 끝나면 뒷정리하라고 부를 게 뻔했다. 수한은 눈에 불을 켜고 비품신청서를 작성해 나갔다.
하지만 마음 편히 서류나 작성할 처지는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수한을 불렀다.
“수한씨! 이것 좀 팩스 보내주세요.”
“수한씨! 정보부에 가서 제가 신청한 정보 파일 좀 받아오세요. 보안 걸려서 USB에 담아준대요.”
“수한씨! 저랑 잠깐 창고 좀 다녀오죠.”
“수한씨! 회의 끝났대요. 여기서 뭐하고 있어요?”
하도 불러대서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수한은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팩스를 보내고, 1층 창고에 갔다가 8층으로 돌아왔다. 정보부에도 가고, 구매부에도 가고, 하여간 정신이 없었다.
그러느라 퇴근 직전에 비품 신청서를 끝낼 수 있었다.
그걸 강성에게 가져가자, 강성이 얼굴을 굳혔다.
“음…… 고생했어요. 그런데 수한씨.”
“네?”
“너무 잘 하려고 할 필요 없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수한씨에게 이런 서류 써보라고 지시한 건 어디까지나 서류 서식에 익숙해지라는 의미였어요. 지금 바로 쓸 수 있도록 공부하라는 게 아니고요. 그런데 보세요. 오전에 이미 끝낼 수도 있었던 것을 시간만 괜히 보냈잖아요? 어차피 비품 신청서랑 관리대장 쓰는 건 수한씨 몫이긴 한데, 그건 제가 상황 봐서
가르쳐 줄 거예요. 그 전까진 준표씨가 하는 거고요. 제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네, 죄송합니다.”
“어휴, 회식 나가야 되는데 이 시간에 이게 무슨……”
수한은 그 말을 듣고 자신의 진짜 잘못을 깨달았다.
퇴근 시간에 서류를 가져온 게 문제였다. 차라리 내일 오전 일찍 제출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늦더라도 제 시간에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중요한 일이라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
6시가 되자 사람둘이 하나둘 일어났다.
“아직 안 끝났어요?”
“아, 예. 금방 가겠습니다. 먼저들 가 계세요.”
“좋아요. 회식 자리에서 봅시다.”
과장을 위시해서 다른 사람들이 먼저 사무실을 나섰다.
강성은 투덜대며 수한에게 퇴근 시 해야 할 일을 가르쳤다.
생각 외로 많았다.
소등과 전자 제품 전원 내리는 것은 기본이었다. 자리마다 비치된 휴지통도 비워야 했다. 간단히 청소도 하고, 보안 잠금도 막내의 몫이었다.
“아무리 더러워도 책상 위는 건드리지 마세요. 무슨 말인지 알죠?”
“예, 그건 압니다.”
간단히 청소를 마친 후 강성과 함께 나왔다.
강성이 몇 마디 주의를 주었다.
“회식 장소는 여기서 가까워요. 거기 도착하기 전에 건배사 같은 거 준비해 놓으세요. 잘 부르는 노래 있으면 미리 생각해 두고.”
“건배사요?”
“첫 회식은 신입이 건배사 하는 게 관례에요. 아마 2차는 노래방 갈 건데 거기서도 처음은 신입이 노래하고요. 아, 발라드 같은 거 하지 마세요. 신나는 노래 불러야 됩니다. 1차는 어쩔 수 없었지만 2차부터는 수한씨가 미리 장소 정해서 예약해야 되고요. 아, 직위 순서대로 술 한 잔씩 주시는 것 잊지 말고요.”
그냥 밥 먹고 술 마시면서 즐겁게 놀면 될 것을 뭐 이리 신경 쓸 게 많은지 모르겠다.
회식 장소는 상당히 비싼 한우 전문점이었다. 돈 잘 버는 공격대답게, 회식에도 돈을 아끼지 않는 것 같았다.
수한은 고기가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몰랐다. 생각나는 대로 건배사를 외쳤다. 다른 사람들이 위하여를 외치며 술잔을 비웠다.
잔을 비우기 무섭게 이리저리 다니며 술을 따랐다. 지혁부터 바로 위 준표까지 잔을 내밀었다. 수한이 술을 권하자 금세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회식은 2차, 3차까지 이어졌다. 내일을 생각하지도 않는지, 모두들 무시무시하게 들이마셨다.
“자, 수한씨도 한 잔 받아야지. 쭉 들이켜요.”
“잘 드시네. 수한씨는 주량이 얼마나 돼요?”
“술은 잘 안 마셔봐서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오늘 알아봅시다!”
먹고 마시다 보니 자정이 넘어갔다.
내일도 출근해야 하니 이젠 끝을 내야 할 시간.
지혁이 먼저 비칠비칠 일어났다.
“그럼 내일 봅시다!”
“과장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조 대리도 조심히 들어가요!”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택시를 타거나 대리기사를 불러 귀가하고, 수한만 뒤에 남았다.
“후아!”
수한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피곤한 하루였다.
뭔가 열심히 뛰어다닌 것 같은데, 막상 뭘 했냐고 하면 대답하기가 힘들었다.
불현듯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시간 낭비는 아니었을까?
하루 종일 잡일만 하지 않았나.
쓸 데도 없는 서류를 쓰고, 짐을 나르고, 복사에 팩스에……
‘아주 허탕은 아냐.’
그나마 낙이 있다면 레벨 업 도우미였다.
능력치는 변함이 없었지만 레벨이 1 올랐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경험치가 25%까지 차 있었다.
이런 것도 다 경험이라는 거냐?
수한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