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출 -2- >
지혁이 박수를 쳤다.
“자, 모두 힘냅시다! 우리는 휘니크로아도 잡지 않았습니까? B급 변이체 두 마리야 휘니크로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맞아요. 지구 가서 보너스 두둑하게 받아야죠!”
“꼭 잡아야 되는 것도 아니고, 이그지트까지만 가도 됩니다. 그리고 벨레즈 협곡에선 놈들이 활동하기도 어려워요. 덩치가 커서 좁은 곳으론 들어오지도 못할 걸요?”
“그러겠네요. 아니, 습격해달라고 고사라도 지내야겠는데요? 이런 지형에서면 우리가 훨씬 유리해요.”
모두들 겨우 냉정을 되찾았다.
듣고 보니 그랬다.
비행 변이체가 활동하기엔 지형이 너무나 안 좋았다. 하급의 변이체는 몸집이 작아 가능하지만, 총을 쏴 갈기면 녹아 스러질 놈들이었다.
“캬아악! 캬악!”
놈들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기성을 질렀다.
그래도 당장 공격해 올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원정대의 머리 위를 빙빙 돌기만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가 늘었다.
방어막이 있는 B, C급은 아니어도 하급의 변이체들이 한 마리 두 마리씩 합류했다. 그때마다 기존의 변이체들이 기세 좋게 울음을 터뜨렸다.
원정대는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아침이 되었을 때, 변이체의 수는 40마리까지 늘어났다. B급 변이체는 2마리에 불과하지만, 그 수만으로도 무척 위협적이었다.
모두 ATV에 시동을 걸었다.
떠나기 전, 진형 조정이 있었다.
지붕이 빈 ATV 5대에 지원 요원과 새미를 올렸다. 기관총이나 유탄발사기를 거치하고, 새미의 원거리 공격 능력을 활용하겠다는 의도였다.
이 정도면 대공 전력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변이체들이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놈들의 몸집이 확연히 커 보였다. 이젠 육안으로도 놈들의 형체를 구분할 수가 있었다.
“캬아아악! 캭캭!”
변이체들이 괴성을 질러댔다.
아무래도 조만간 공격해 올 것 같았다.
충분히 머릿수가 모였다고 생각한 모양.
수한은 기관총을 최대한 하늘을 향해 꺾었다. 옆에서 준표가 얼굴을 굳히는 것이 보였다. 앞의 ATV 위에 앉아 있던 새미가 일어서더니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장 앞에서 달리던 지혁이 천천히 오른손을 들었다.
“정지합시다.”
공격이 임박한 상태.
이대로 달리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방어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수한은 내심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벨레즈 협곡을 벗어난 다음 이그지트의 수호자 연맹 파견대에게 무전을 보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지원을 받을 수 있으니까. 괜히 사람들이 다치는 것보다는 그렇게 하고 적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게 나았다.
이곳에선 거리도 멀고 봉우리들 때문에 무전기의 통달거리가 무척 짧았다. 지구처럼 기지국이나 인공위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적당한 곳에 멈춰 최대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기관총과 유탄 발사기를 거치한 ATV를 외곽에 십자 형태로 배치했다. 탐지기와 경보기를 작동시켰다. 다른 사람들도 요소요소에 자리를 잡았다.
수한은 기관총의 총신을 쓰다듬었다.
탄띠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교체할 총열도 미리 충분히 꺼내놓았다. 전투가 시작되면 미친 듯이 기관총을 갈길 생각이었다.
“옵니다!”
누군가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변이체들이 일제히 날개를 떨쳤다.
파앙!
먼 거리임에도, 꼭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변이체들이 날개를 접고 돌풍처럼 밀어닥쳤다. 주위를 빼곡 채운 봉우리 때문에 일렬로 주욱 늘어선 상태였다. 흡사 거대한 창이 날아오는 것 같았다.
“제길.”
수한은 으드득 이를 갈았다.
교활하게도 B급 변이체들이 선두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기관총을 쏘든, 유탄을 발사하든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어진 것이다. 믿을 것은 대열 중앙에 서 있는 새미 하나뿐이었다.
새미가 숨을 가다듬었다.
정신을 집중했다.
두 손을 모으자 흰 번개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번개가 점차 그 위력을 더하더니, 종국에는 커다란 번개 덩어리를 만들었다.
“하압!”
가볍게 손을 떨치자, 번개 덩어리가 느릿하게 허공으로 떠올랐다.
파지지직! 파직!
번개가 사방을 휩쓸었다.
덩어리는 변이체들을 향해 날아가며 공간 전체를 흰 번개로 물들였다. 마치 거대한 전기 그물이 허공에 생성된 것 같았다.
전기 그물은 상공 이십여 미터 쯤에서 멈췄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감을 뽐냈다.
위협을 느낀 변이체들이 급히 날갯짓을 했다. 육중한 몸이 이리저리 뒤틀리며, 겨우 허공에 정지하는데 성공했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기껏해야 선두의 몇 마리.
뒤이어 날아오던 변이체들은 속도를 줄이지 못했다. 겨우 양 옆으로 비껴 날아갔다. 혹은 앞의 변이체를 들이받아, 변이체들이 전기 그물에 걸릴 뻔 했다.
새미가 칫 소리를 냈다.
미완의 기술이라 속도가 너무 느렸다. 조금만 더 빠르게 쐈어도 회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신 수한에게 기회가 왔다.
방아쇠를 당기자 오렌지색 빛줄기가 쭉쭉 뻗어나갔다. 예광탄이 공중에서 연소되며 빛나는 것이다.
다른 요원들의 소총도 불을 뿜었다. 유탄도 변이체들을 노리고 날아갔다. 후미에 있다가 사방으로 퍼진 하급 변이체들이 순식간에 쓸려나갔다.
“캬아악! 캭캭!”
고통에 찬 비명소리가 협곡을 가득 채웠다.
녹색 체액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갈기갈기 찢어진 시체가 점점이 낙하했다.
변이체들이 급히 날아올랐다.
이미 그 수가 절반 이하로 줄어든 뒤.
그러나 전력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B급 2마리와 C급 8마리는 온전히 남아 있었으니까.
“캬아악!”
남은 변이체들이 소리를 지르며 이리저리 선회했다.
전기 그물은 곧 사라졌다.
원정대 입장에서는 한숨 돌린 셈.
“새미씨 덕에 살았습니다.”
“최곱니다!”
“B급이랑 C급이 남아 있어서 문제에요. 그물 써도 안 걸릴 것 같은데……”
휘니크로아의 새끼 답게 모두 지능이 높은 것 같았다.
처음 기술을 사용했을 때 결착을 봐야했다며, 새미는 못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변이체들이 다시 돌진했다. 새미가 또 전기 그물을 만들었다. 그새 적응했는지, 변이체들이 흩어지는 게 질서가 있었다. 상급 변이체들이 하급 변이체를 감싸며 하늘로 날아올라, 이번에는 완전히 허탕을 쳤다.
새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전기 그물은 꽤 강력한 기술이었다. 한 번 사용할 때마다 상당히 많은 힘을 소모했다. 이제 몇 번만 더 쓰면 새미가 탈진할 지도 몰랐다.
“새미씨, 괜찮아요?”
수한이 묻자, 새미가 침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은 괜찮은데, 한 서너 번 사용하면 끝이에요. 아직 미완성이라서요.”
변이체들도 그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또 하늘 위에 모여 급강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결국 원정대 전체가 변이체들의 먹잇감이 될 터.
“움직이는 게 낫겠습니다.”
“그러다 대열이 흐트러지면 우린 죽은 목숨이에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죠.”
“이 근처에 봉우리가 많아서 유난히 좁은 지역이 한 곳 있습니다. 그곳으로 일단 이동하는 게 어떻습니까? 워낙 좁아서, 변이체들이 공격해 오기도 힘들 겁니다.”
과장들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또 한 차례 공격이 지나갔다.
새미의 이마에 진땀이 맺혔다. 숨도 가쁘게 쉬는 게,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일단 그곳으로 갑시다.”
탐지기와 경보기 중 일부만 회수하고 길을 나섰다.
변이체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새미는 두 번 더 전기 그물을 만든 뒤 ATV 위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다행히 세 번 째 공격을 당하기 전, 목표로 삼은 곳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목이 오목한 항아리처럼 생긴 곳.
봉우리들이 덤불처럼 엇갈려 솟아 있었다. D급 이하의 하급 변이체라면 모를까, 그 이상의 변이체는 들어오지 못할 터였다.
“캬악! 캬악!”
변이체들이 부산하게 소리를 질렀다.
일단 새미부터 챙겼다.
“물, 물……”
새미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적당한 곳에 눕더니 물을 찾았다. 물을 좀 마시고 난 후에야 기력을 좀 찾는 것 같았다.
전투 3과 과장이 새미를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너무 무리했습니다. 최소 몇 시간은 쉬어야 해요.”
“아직은 버틸 수 있어요.”
“그러다가 완전히 탈진하면 어쩌려고요? 일단은 힘부터 회복합시다.”
다시 방어 진형을 갖췄다.
그나마 이곳으로 들어와서 다행이었다. 일단 변이체들이 공격을 멈췄다. 덕분에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수한은 기관총의 총열을 교체했다. 새로운 탄환 상자를 가져와 탄띠를 기관총에 연결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총을 쏜 까닭에 총열도 뜨거워졌고, 총알도 많이 소모했던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하죠?”
준표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지금 원정대가 머물러 있는 곳은 벨레즈 협곡에서도 가장 깊은 곳이었다. 이그지트나 바히냐크 평원으로 가려면 한참을 돌아나가야 했다.
지혁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통신은 불가능하고, 우리 능력으로 탈출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뿐이에요.”
“그게 뭡니까?”
“전투 3과에서 구원 요청을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분위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지혁의 말뜻은 간단했다.
이능력자들이 직접 이그지트까지 가서 구원을 청하라는 것.
매우 위험한 일이다.
지금 원정대를 호시탐탐 노리는 변이체들도 그렇지만, 벨레즈 협곡 자체도 위험했다. 무리를 지어 다닐 때야 기습에 대처하기 쉬웠다. 그런데 일행의 수가 줄어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 3과 과장은 선뜻 수락했다.
“좋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지요. 새미씨는 무리했으니 남기고, 저와 김 대리만 다녀오겠습니다.”
“저랑 이 대리가 따라가겠습니다. 길잡이는 있어야지요.”
“이 대리님까지 보호하긴 힘듭니다. 차라리 송 과장님만 같이 가시지요.”
“그럴까요?”
21명 중, B급 이능력자 1명과 C급 이능력자 1명, 그리고 지원 13과 과장이 떠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들이 챙긴 것은 ATV 1대.
어차피 ATV는 변이체들의 공격에 당할 확률이 높았다. 그들은 따로 식량과 물을 넣은 배낭을 챙겼다. 운이 좋으면 ATV를 타고 가고, 아니면 도보로 이동해야 할 것이다.
“며칠 걸릴 겁니다. 몸 조심히 계세요.”
“여러분이 더 위험할 겁니다. 어떻게든 버텨볼 테니까, 최대한 조심해서 가세요.”
“걱정 마세요.”
셋이 임시 야영지를 떠났다.
때를 같이하여, 원정대 전원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셋에게서 변이체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였다.
다행스럽게도 변이체들은 원정대 머리 위에 머물러 있었다.
휘니크로아의 시체를 노리는 탓에, 구원을 청하러 움직이는 세 명에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지혁이 한 시름 놓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됐습니다. 변이체들이 공격하지 않았으니, ATV는 무사할 겁니다. 하루 정도만 버티면 됩니다.”
하루……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불안에 떨며 시간을 보냈다.
원정대가 조금만 방심을 하는 것 같으면 변이체들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봉우리 사이로 날아오기도 하고, 어떤 놈은 뒤뚱뒤뚱 걸어 접근하기도 했다.
지형을 이용해 막아내곤 있지만, 원정대가 차츰 지치는 게 눈에 확 들어왔다.
밤이 되었다.
조명을 이곳저곳에 장치했다. 특히 하늘 위와 이곳으로 접근하는 통로에 중점적으로 불을 밝혔다.
“놈들이 조용하네요.”
“어디로 간 거죠?”
“어제도 한 동안 조용하더니 다른 놈들 데리고 왔는데……”
특징적인 배의 붉은 빛이 보이지 않고, 캬악 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검은 하늘 가득 맑은 별빛만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언제 다시 나타나서 어떤 방법으로 공격해올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새미씨, 괜찮아요?”
수한은 새미에게 다가갔다.
새미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얼굴이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질린 지 오래였다. 흐르는 땀방울이 애처로운 빛을 뿌렸다.
“지금은 견딜 수 있어요.”
다행히 목소리는 또렷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가겠나. 여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계속 혹사당하고 있는데.
수한이 몇 마디 말을 더 건내려고 할 때였다.
탐지기를 주시하던 준표가 소리를 쳤다.
“변이체들이 돌아옵니다!”
수한은 급히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변이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명을 환히 비춰놓은 까닭에 놈들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사람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저, 저거!”
“말도 안 돼!”
“젠장! 비행형들이 머리가 좋다더니!”
저 하늘 높이 떠오른 변이체들.
두 개의 다리마다 커다란 돌을 꽉 잡고 있었다.
그것 뿐이었으면 말도 안 한다.
B급 변이체들은 돌이 아니라 뱀처럼 생긴 하급 변이체를 잡고 날아왔다. 변이체들이 괴성을 질러대지만, 급수가 워낙 차이가 나다 보니 대항할 생각은 못하는 것 같았다.
놈들의 생각은 뻔했다.
돌과 하급 변이체를 던져 넣으려는 것이다.
그것 또한 재앙.
설마 하니 이런 식으로 공격해올 줄 누가 알겠겠나.
장애물이 많아서 이곳으로 피했는데, 이렇게 되면 오히려 악수(惡手)를 둔 셈이 되었다.
사람들이 악다구니를 쳤다.
“조심해요!”
“피해요!”
돌들이 수직 낙하했다.
땅이 진동하며, 부딪친 것은 모조리 박살내 놓았다.
ATV 한 대가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짐을 부려놓은 윗부분이 단박에 찌그러졌다. 운전석이 침범당해 써먹을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조명 하나가 깨졌다. 돌이 스치기만 한 것으로 유리 부분이 깨지고, 타닥타닥 전깃불이 드러났다.
떨어진 변이체들도 문제였다. 별로 피해를 입지 않았는지, 혓바닥을 날름대며 사람들을 공격했다.
비록 총알 몇 방에 침묵하긴 했지만 만만치는 않았다. 입을 쩍 벌리고 독액을 사방에 뿌렸기 때문이었다. 지원 요원 몇 명이 중독되어 바닥을 나뒹굴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