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출 -3- [1권 끝] >
여기저기 불이 번졌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협곡을 울렸다. 총소리가 고막을 때리고, 변이체가 기세등등하여 공격을 가했다.
방법이 없다.
수한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기관총을 쏴서 하급 변이체 몇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B급과 C급은 온전했고, 영악하게도 하늘 위만 날아다니고 있었다. 새미를 비롯한 이능력자들의 공격이 미치지 않는 곳이었다.
그 사이에도 돌 하나가 낙하했다. 수한의 바로 코앞에 떨어져, 어지간한 수한도 깜짝 놀랐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초능창을 펼쳤다.
여전히 개발 중이라고 쓰인 글자가 보였다.
한 가닥 기대가 물거품으로 변하여 사라졌다.
여기서 초능을 각성했다면, 반전을 꾀할 수도 있었을 텐데……
손을 오므려 초능창을 접을 생각도 못하고, 수한은 기관총을 쏘고 또 쏘았다.
안쪽에 있던 지혁이 창백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번 원정은 실패였다.
휘니크로아의 새끼들이 대거 불어난 시점에 진작 포기를 해야 했다.
물욕에 어두워 냉정하게 판단하지 못한 까닭에 여기까지 질질 끌고 왔다. 그 결과 이렇게 원정대 전체가 위험에 처하지 않았나.
이럴 줄 알았다면 휘니크로아의 시체 따위 던져버리고 달아났어야 했는데……
‘아냐. 아직 늦지 않았어.’
최소한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자는 없었다.
중독된 이들도 제때 치료를 받으면 괜찮아질 터였다.
문제는 시간.
지혁은 결정을 내렸다.
“모두 ATV에 타세요! 시체를 버립니다!”
“예?”
“말도 안 돼!”
아무리 산산조각이 났어도 휘니크로아의 시체는 막대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백 억 이상이었다.
공격대가 가져가는 게 크긴 하지만 개인당 수억 씩은 받을 예정이었다. 몫이 큰 이능력자들만이 아니라, 지원 요원들도 쏠쏠히 받을 테고.
그런데 그걸 포기하자고?
힘겹게 총을 쏘던 몇몇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혁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이대로 가면 모두 전멸합니다. 당장 빈 ATV 위에 오르세요! 어서!”
일단 원정에 나선 이상, 원정대 대장인 지혁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현재까지 온전한 ATV는 총 6대.
휘니크로아의 시체가 담긴 포대를 ATV 위에서 던졌다. 너무 급박한 상황이라 2대는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모두들 4대의 ATV 위에 올랐다.
새미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수한이 탄 ATV에 자리를 잡았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해서, 수한이 기관총을 쏘다말고 새미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고, 고마……”
어찌나 힘이 없는지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했다.
수한은 새미를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그리고 기관총의 총구를 올려 사격에 열중했다.
지혁이 큰 소리로 외쳤다.
“전속력으로 이곳을 빠져나갈 겁니다. 이그지트까지 단번에 달려갈 테니 잘 따라오세요. 뒤처지면 구해드릴 수 없습니다. 본인 목숨은 본인이 챙겨야 되요. 알아들으셨습니까?”
“예!”
“준비됐습니다!”
“수한씨랑 13과 명준씨는 출발하면 휘니크로아 시체를 쏘세요. 무슨 말인지 알죠?”
“알겠습니다!”
지혁이 금방 ATV를 출발시켰다.
수한은 기관총으로 남겨둔 ATV 위의 화물을 훑었다. 차단막에 구멍이 뽕뽕 뚫리며, 휘니크로아 특유의 기운이 대기 중으로 흩어졌다.
원정대를 공격하던 변이체들의 머리가 홱 돌아갔다.
놈들의 입가에서 침이 뚝뚝 떨어졌다.
휘니크로아의 시체에서 풍기는 기운이 그들을 자극했다. 식욕이 불끈거리며 치솟고, 본능적인 탐욕이 그들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몇몇은 도망치는 원정대를 돌아보며 고민에 빠졌다.
저놈들을 먼저 죽여놓고 먹이를 먹어야 하는 거 아냐? 눈에 무척이나 거슬리는데.
이들 또한 어미 특유의 흉포함을 물려 받은 것.
하지만 몇 마리가 먼저 시체를 향해 날아가자, 다른 놈들도 눈이 뒤집혔다. 덩치가 커서 진입하기 어렵던 B급 변이체도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ATV 네 대가 항아리 같은 지점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뒤에서 변이체들이 악을 쓰는 게 들렸다.
원정대와 싸울 때는 동맹이었지만 휘니크로아의 시체 앞에서는 달랐다. 이젠 자기들끼리 치고 박고 싸웠다. 휘니크로아의 시체를 독차지하면 더 강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달리자 변이체들이 질러대는 괴성이 조금씩 멀어졌다. 30분 정도 달렸을 때는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휴!”
“따돌렸나 봐요.”
그래도 ATV들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지혁이 가장 선두의 ATV를 몰며, 더 빨리 가자고 독려했다.
수한이 탄 ATV는 일행의 후미에 위치했다.
탐지기에는 아무 것도 안 보이고, 변이체 특유의 괴성도 들리지 않았다. 수한은 속으로 조금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아직 일렀나 보다.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캬아아아악!”
분노에 차 울부짖는 소리.
듣는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수한은 망연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붉은 그림자가 저 멀리 하늘에 떠 있었다. 검은 바람이 이는 듯한 착각과 함께, 그림자가 계속해서 커졌다.
“B급 변이체입니다!”
“우릴 쫓아오고 있어요!”
수한은 고글을 조절해 변이체를 확인했다.
날개 한쪽이 너덜너덜했다. 나는 것도 힘겨워 보였다.
뿔 하나가 뽑혀져 나갔다. 눈 한쪽을 잃었는지 어쨌는지 피를 줄줄 흘리고 있었다. 긴 목과 두 다리, 뱃가죽에도 온갖 상처가 자잘하게 났다.
그럼에도 눈에서 불타오르는 광채만은 한결 같았다. 번갯불 튀기듯 번뜩이며 원정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쯧!”
지혁이 혀를 찼다.
변이체끼리 싸우고, 휘니크로아의 시체까지 먹고 올 테니 좀 늦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르게 원정대를 쫓아온 것이다.
새미가 비칠비칠 상체를 세웠다.
“한 마리 밖에 없나요?”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처리할 수 있어요.”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해야죠. 살아남으려면.”
목소리는 흐렸지만, 거기 실린 힘은 가볍지 않았다.
수한은 반짝이는 새미의 눈을 돌아보았다.
강렬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포기하지 않는 자의 눈.
그 눈에 담긴 빛을 보며, 수한은 약해지려고 했던 자신을 다잡았다.
B급 변이체가 강하다곤 하지만 이쪽에도 B급 이능력자가 있다. 더구나 그녀를 도울 C급 이능력자도 2명이나 존재하고, 여차하면 지원 요원들이 개입하는 것도 가능했다.
승산은 이쪽에 있었다.
변이체가 지근거리까지 접근했다.
“캬아악!”
또 한 번 분노에 찬 괴성을 질러댔다.
수한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어째선지는 모르지만, 변이체가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았다. 아까 봤을 때와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무심코 지혁쪽을 돌아보았다.
지금까진 몰랐는데, 지혁이 탄 ATV 위에 커다란 궤짝이 하나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어째서인지 차단막으로 빙빙 둘러놓은 궤짝.
금방 그 정체를 눈치 챘다.
휘니크로아의 심장.
손해를 벌충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변이체들의 성장을 막기 위해서인지 따로 빼돌린 것이다.
“캬아악!”
변이체가 다가왔다.
강성이 조수석에서 몸을 내밀었다. 소총을 들어 신중하게 변이체를 겨눴다. 슬쩍 방아쇠를 당기자, 오렌지색 불꽃이 으르렁대며 튀어나갔다.
역시 효과가 없었다.
수한은 변이체의 코앞에서 불똥이 튀기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강성이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또다시 속수무책.
새미가 눈을 감고 체력을 회복하려고 애쓰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마에서 흐르는 땀이 ATV 천장에 점점이 떨어졌다.
속도를 더 올릴 수도 없었다.
지금이 최고속도였다. 더구나 가끔씩 출현하는 하급 변이체를 처리하고 가느라 시간을 지체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변이체에게 따라잡혔다.
“캬아아악!”
원정대 머리 위를 따라오며, 변이체가 길게 울음을 토했다.
광폭한 눈이 원정대 전체를 훑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새미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의 기억이 생생했기 때문.
제법 신중하게 움직였다.
한 동안 새미를 살핀 이후에야 날개를 활짝 펼쳤다.
급강하 공격.
ATV들이 일제히 거리를 벌렸다. 한 곳에 뭉쳐 있다가 당하면 다 같이 죽는 거니까.
쌔애액!
변이체가 낙하하기 시작했다.
강성이 다급하게 외쳤다.
“우리가 목표야!”
“새미씨! 어떻게 좀 해봐요!”
수한이 기관총을 난사했지만 소용없었다.
기댈 것이라곤 새미 하나 뿐.
새미가 번쩍 눈을 떴다.
몸을 튕기듯이 일어나며, 늘어놓았던 양 손을 빠르게 내밀었다.
손바닥 중심에서 새하얀 전깃불이 번뜩였다.
파지직!
흰 번개가 변이체를 짧은 시간 무수히 두들겼다.
전투력을 잃은 줄 알고 공격을 감행했던 변이체였다. 번개를 뒤집어 쓴 변이체가 당황하여 소리를 질렀다.
“캬아아악!”
그 때문일까.
변이체가 방향을 홱 틀었다. 노리던 ATV를 놓치고 땅바닥에 거칠게 쑤셔 박혔다. 그 와중에 날개가 펼쳐지며 수한이 탄 ATV를 후려쳤다.
“아악!”
“새미씨!”
자세가 불안정하던 새미가 ATV 밖으로 튕겨 나갔다.
수한이 손을 내밀었지만 이미 늦은 뒤.
새미는 바닥을 몇 번이나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다 큰 바위에 걸려 활개를 치며 뻗었다.
어둠에 파묻힌 새미가, 수한의 뇌리에 유독 뚜렷이 들어와 박혔다.
눈에 초점이 없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하얀 얼굴이 밀랍인형처럼 이질적이었다.
입가에서 붉은 핏물이 점점이 흘러내렸다. 그 핏물과 함께 새미의 생명도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강성이 거품을 물고 외쳤다.
“더, 더, 더 밟아! 더!”
“알았어! 좀 닥쳐 봐!”
조수석에 앉은 강성도, 운전석에 있는 송 주임도 새미에겐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분명히 튕겨져 나가는 것을 봤을 텐데도.
이대로 내버려 두고 가면 백이면 백, 변이체의 먹이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리기만 했다.
자신의 목숨만 도모했다.
한 가지 사실을 외면하고서, 저 어둠 너머에 있을 차원문을 향해 달렸다.
수한은 이를 악물었다.
깔루 행성으로 들어오기 전, 강성이 자신을 불러다 한 얘기가 떠올랐다.
자기 목숨은 자기가 챙기라고 했지.
낙오하면 도와줄 사람도 없다던가.
그래,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이 각박한 세상에서 누가 자기 목숨 걸어가며 다른 사람을 돕는단 말이냐. 그러다 다치거나 죽으면 자기만 손핸데.
하지만……
이렇게 새미를 버리고 도망치는 게 잘 하는 거냐?
아니, 옳고 그른 것은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수한의 눈앞을 꽉 채우고 있는 한 장면이 있었다.
겨우 엊그제.
휘니크로아에게 잡혀 죽기 일보 직전이던 그때.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와 수한을 구했던 한 여자의 모습.
바람에 휘날리는 검은 머리칼이 참으로 아름다웠고, 손에서 뻗어나간 흰 번개가 수한의 가슴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더란다.
다른 사람들 모두가 외면했을 때, 유일하게 달려와 수한을 구해준 그녀.
죽게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동생들?
이제 다 컸다.
10년 전처럼 9살, 10살 꼬맹이가 아니다. 여기서 수한이 죽더라도 보험금과 보상금으로 먹고 살 수 있었다.
수한의 눈에 결연한 빛이 감돌았다.
목숨 빚은 목숨으로만 갚을 수 있는 법.
생명의 은인이자 연약한 여자를 두고 도망치라고?
그럴 거면 거시기를 콱 떼어버려라!
평생을 두고 오늘을 후회하느니,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해야겠다.
수한은 ATV에서 뛰어내렸다.
강성은 수한이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것도 잠깐이었다. 곧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부사수건 뭐건 자기 목숨이 더 소중했으니까. 그게 세상인심이고, 강성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ATV가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기이잉 하는 전기 엔진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수한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새미씨! 새미씨!”
소총만 들고 새미가 떨어진 곳으로 달렸다.
그 잠깐 사이 거리가 꽤 멀어졌나 보다. 제법 뛰어간 뒤에야 새미를 발견했다.
새미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 누워 있었다. 입과 코에서 피를 줄줄 흘리고, 뜻 모를 신음을 계속 흘렸다.
“새미씨! 괜찮아요? 새미씨!”
수한은 새미의 가슴에 한쪽 귀를 올렸다.
다행히 심장은 힘차게 뛰고 있었다.
머리에도 특별히 상처는 없었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수한이 판단하기엔 일시적인 탈진 상태 같았다.
그러나 안심하기는 일렀다.
“크르르르……”
상처 입고 분노한 변이체가 둘의 앞에 내려앉았다.
화등잔을 켠 것처럼 불타는 눈이, 기절한 새미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탕탕!
소총을 쐈지만 효과가 없었다.
불똥만 튀고 끝이었다. 형제들끼리 싸우고, 새미의 공격을 얻어맞고도 방어막이 남아 있던 것이다.
“키기긱, 키긱.”
변이체가 비웃는 듯한 소리를 냈다.
싸워 이길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
수한은 소총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탄창을 교환했다. 철컥 하는 소리가 송곳처럼 아프게 수한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변이체가 다가온다.
을씨년스럽게 부는 바람을 뒤로 하고, 거대한 그림자가 수한과 새미를 뒤덮었다.
변이체가 목을 길게 뻗었다.
흉악한 아가리가 둘을 덮치려는 그 순간이었다.
수한의 시야 한쪽이 하얗게 물들었다.
미처 접어두지 않은 초능창이 꿈틀거렸다.
글자가 떠오른다.
반딧불처럼 날아들어, 수한의 뇌리에 똑똑히 박혔다.
겨우 네 글자.
그러나 지금의 수한에겐 아주 큰 의미를 가진 그 무엇.
[개발 완료]
이제, 세상이 바뀐다.
[1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