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26화 (27/254)

< 초능 개발 -2- >

“새미씨, 정신이 들어요?”

“여기 어디에요?”

“벨레즈 협곡 안입니다. 저 알아보겠어요?”

새미는 수한을 응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멍하던 눈에 빛이 돌아왔다.

“수한씨잖아요. 연수에서 1등 했던.”

정신은 온전한 것 같았다.

수한의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우리 조난당했어요. 기억나요?”

“B급 변이체가 공격해오고, 반격해서 떨어뜨렸던 것까지만……”

“그 변이체가 떨어지면서 우리 ATV를 때렸습니다. 그러느라 우리 둘이 떨어졌고요.”

“다른 사람들은요?”

“도망친 것 같습니다. 아마 이그지트까지 가야 합류할 수 있을 겁니다.”

“아아.”

새미가 머리가 아픈지 인상을 찌푸렸다.

수한은 구급낭에서 진통제를 꺼냈다. 새미는 거절하지 않고 약을 받아먹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수한씨는 ATV 위에 앉아 있지 않았어요? 기관총 잡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랬지요.”

“그런데 떨어졌다고요?”

새미가 눈치를 챈 것 같았다.

그냥 앉아만 있던 자신과, 단단히 고정된 기관총을 잡고 있던 수한의 상태는 분명 달랐으니까.

수한은 말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잠시 둘 다 아무 말도 없었다.

수한은 공치사를 늘어놓을 성격이 아니었고, 새미는 당황해서 할 말을 잊었다.

몇 번 붉은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입을 연다.

“고마워요. 수한씨 덕분에 살았어요. 수한씨 아니었으면 오늘 해를 못 봤을 거예요.”

“뭘요. 새미씨도 절 구해주셨잖아요. 새미씨가 한 말처럼, 서로 돕고 살아야죠.”

“그래도요.”

새미는 몇 번이나 감사인사를 했다. 머쓱해진 수한이 그만하라고 손을 저은 다음에야 그만두었다.

수한은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냈다.

바닥에 펼쳐놓고, 새미와 함께 들여다보았다.

“우리는 지금 여기 있습니다.”

수한이 한 곳을 손가락으로 짚자, 새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벨레즈 협곡 안쪽이네요.”

“그렇지요. 여기서 벨레즈 협곡을 탈출하는 것은 원래 12시간이 걸립니다.”

“ATV를 탔을 때요?”

“예. 우린 도보로 이동해야 하니 그 10배는 걸릴 겁니다.”

“하루에 8시간씩 이동해도 15일은 걸린다는 얘기네요?”

“맞습니다.”

“구조대가 올 가능성은 없을까요?”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변이체가 부상 입은 것까진 봤을 테니까요.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건 그러네요.”

“SOS 신호를 보내려고 해도 방법이 없어요. 연기 피워봐야 봉우리에 막혀서 안 보일 겁니다.”

수한의 말에 새미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체력 단련을 게을리 하진 않았지만, 매일 그렇게 걷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걷거나 달린다 해도 헬스장 트레드밀 위에서가 전부였으니까.

반면 수한은 오랫동안 걸은 경험이 많았다. 개마고원에서 작전에 들어가면 9박 10일, 14박 15일은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수한은 좋은 말로 새미를 위로했다.

“그래도 구조 하러 올 가능성이 없지는 않으니까 너무 낙심하진 마세요.”

“에휴, 바랄 걸 바래야죠.”

출발하기 전, 압축 건빵을 하나씩 까서 먹었다.

맛이 참 기괴한 물건이었다.

분필 같기도 하고, 옅은 초콜릿 맛도 나고, 그냥 밀가루 씹는 것 같기도 했다.

오직 열량을 강조하여 만든 음식.

크기는 새미의 손바닥에 들어올 만큼 작았다.

맛은 없지만 이거 하나면 충분히 한 끼 식사를 대용할 수 있었다. 지금 둘의 처지에서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수통의 물도 한 모금씩 마시고 밖으로 나왔다.

새미가 눈을 크게 떴다.

“어머! 저게 뭐에요?”

B급 변이체의 잔해를 발견한 것이다.

소이 수류탄에 의해 거의 불살라졌지만, 그 형체는 대략 알아볼 수가 있었다. 뼈까지 전소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수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제 우리를 습격했던 변이체에요.”

“그건 저도 아는데, 저게 왜 저기서 죽어 있죠? 불에 탄 걸 봐선 누가 죽인 것 같은데…… 혹시?”

새미가 수한을 돌아보았다. 수한을 보는 눈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이 여자, 굉장히 눈치가 빠르다.

수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한 겁니다.”

“어떻게요? 방어막은 어떻게 뚫었어요?”

“음…… 아마 제가 이능을 각성한 것 같습니다.”

수한은 자신의 속성 부여 능력에 대해 설명했다.

최소 열흘 이상 함께 동고동락해야 할 사람이었다. 서로에 대해 더 자세히 알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레벨 업 도우미까지 언급하진 않았다.

당연한 일.

아무리 서로에게 생명의 은인이라 해도, 레벨 업 도우미는 수한의 최고 비밀이었다. 섣불리 말하고 다녔다가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

새미는 수한의 설명을 듣더니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자연 각성이라니…… 대단하시네요.”

“운이 좋았습니다.”

“에이, 운 좋아서 자연 각성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대전쟁 당시, 세라프 종족은 힘의 결정을 이용하여 각성하는 방법을 지구에 전파했다.

여러 가지 제한점이 있지만, 쉽고 확실하게 강해지는 방법.

반면 그 방법에 따르지 않고도 자연적으로 각성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을 가리켜 자연 각성이라고 불렀다.

새미도 자신의 이능을 수한에게 공개했다.

구현 계열 B급 이능, 뇌전 생성.

본인이 상상하는 대로 마음껏 번개를 뿌릴 수 있는 강력한 이능이었다. 이능 자체도 강했고, 새미 개인의 숙련도도 높아 B급 이능력자 중에선 최고의 공격력을 뽐냈다.

새미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체력을 많이 소모한다는 것만 빼면, 구현 계열 중에선 최고의 이능이에요.”

“대단합니다.”

언제까지 얘기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루에 최소한 8시간 이상은 걸을 생각이었다.

수한은 속으로 걱정이 좀 되었다.

총알이 부족한 게 특히 마음에 걸렸다. 벨레즈 협곡을 벗어날 때까지 많은 일이 있을 테니까.

가장 먼저 물부터 찾았다.

다행히 근처에서 작은 개울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구급낭에 포함된 정수 필터로 걸러 가며 수통에 물을 담았다.

“이쪽으로 가죠.”

수한은 거침없이 새미를 이끌었다.

몇 번 변이체의 습격이 있었다. 그때마다 새미가 손을 저어 번개를 뿌렸다. 변이체가 번개를 얻어맞고는 어맛 뜨거라 줄행랑을 놓았다.

“괜찮겠습니까? 무리하신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는 괜찮아요. 힘들 것 같으면 말할게요.”

“예. 절대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호호, 저도 알아요.”

슬슬 점심때가 넘어갔다.

둘은 걷고 또 걸었다. 벨레즈 협곡에서는 해가 빨리 져서, 점심 정도는 거를 요량이었다.

수한은 눈에 띄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채집했다.

정체불명의 버섯, 식물의 줄기와 뿌리, 열매, 꽃 등등……

계획서에서 본 것들이었다. 이렇게 조난당하는 경우도 생기고, 식량이 모자라지는 경우도 있어서 그 행성의 식생에 대해 조사해가는 것이다.

전투복의 주머니에 그것들을 쑤셔 넣자, 새미가 호기심어린 눈빛을 보냈다.

“그거 먹을 수 있는 거예요?”

“예. 다는 아니고 일부만요. 몇 개는 독이 있는데 구우면 괜찮아져요.”

수한은 느긋하게 대답했다.

새미는 그런 수한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참 희한한 일이었다.

지금 상황은 결코 좋지가 않았다.

외계 행성에 둘만 떨어졌다. 구원을 청할 방도는 없고, 가까운 도시까지 가려면 변이체가 득실거리는 길을 10일 이상 걸어야 한다. 절망에 허우적댈 만도 한데, 저 남자는 마실 나온 것처럼 시종일관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 휩쓸린 걸까.

새미도 적잖이 안심이 되는 것을 느꼈다.

“가죠.”

수한이 앞장서고, 새미가 뒤따르고.

가끔 나타나는 변이체만 아니면 좋았을 것이다. 그랬으면 조난당한 게 아니라 도보 여행을 하는 것 같았을 텐데.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어느덧 서쪽으로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저 안으로 들어가죠.”

수한은 근처에 보이는 동굴 하나를 가리켰다.

변이체가 뚫어놓은 동굴.

좀 작긴 했지만 둘이 눕기에는 충분했다.

그 덕에 동굴에 살던 변이체는 난데없는 횡액을 맞이했다. 새미가 번개를 날려 구워버리고, 수한이 그걸 끌고 나가 멀리 버리고 돌아왔다.

저녁은 아까 채집한 것들을 구워먹었다.

불을 피우는 것부터 요리하는 것까지, 수한이 척척 해냈다. 사실 맛은 별로 없었지만 시장기가 반찬이라고 둘 다 맛있게 먹어 치웠다.

새미가 배를 두드렸다.

“우와, 잘 먹었어요. 생각보다 먹을 만하네요.”

“그래도 최대한 빨리 지구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방 접종을 맞긴 했지만, 우리는 깔루 행성의 미생물들에게 완벽한 면역력은 없어요.”

“그야 그렇죠. 그런데 잠은 어떻게 자죠?”

근처에 변이체가 득실거리니, 마음 놓고 푹 자는 것은 불가능했다.

변이체 경보기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없고.

둘은 교대로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수한이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어젯밤부터 꼬박 밤을 샌 까닭에, 슬슬 체력이 한계에 달하고 있었던 것이다.

“3시간 후에 깨워주세요.”

“네. 푹 주무세요.”

밤 동안 별 일은 없었다. 아마도 새미에게 이미 뜨거운 맛을 봤기 때문인 듯했다. 아무리 E급과 F급의 하급 변이체라 해도 그 정도 지능은 있는 것이다.

아침이 되자 다시 길을 나섰다.

지겨운 노정이 이어졌다.

걷고 걸어도 이곳이 저곳인 것 같고, 저곳이 그곳인 것 같았다. 방향을 잡기가 어려웠다.

수한은 지도 한 장을 길잡이 삼아 하염없이 걸었다.

“맞게 가는 거 맞죠?”

새미가 그렇게 물을 때가 있었다.

가도 가도 비슷한 풍경만 나오니 의구심이 들었던 것.

수한은 묵직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 가고 있습니다. 걱정 마세요. 지금 우리는 여기 이 지점에 와 있어요.”

원정을 떠나기 전, 깔루 행성의 태양과 별자리를 이용해 방향을 잡는 법을 외우고 온 참이었다.

새미는 간혹 불안감을 내비쳤지만, 수한은 결코 당황하지 않았다. 우직하게 방향을 잡고 나아갔다.

그걸 보며 새미도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힘들고 또 힘들었지만 든든한 버팀목이 있어 버틸 수 있었다. 먹을 것을 척척 구해오고, 수통의 물이 떨어질 것 같으면 맑은 개울을 찾아냈다. 힘이 빠져 주저앉으면 부축해주기도 했다.

수한이 없었으면 절대 살아남지 못했을 터.

그래서였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수한을 보는 새미의 눈에 어떤 감정이 깃들고 있었다.

조난당하고 나흘 째.

수한은 한 물체를 발견했다.

하늘을 나는 작은 기계.

알바트로스 원정대에서 정찰용으로 사용했던 드론이었다.

“새미씨, 저거 봐요!”

“뭔데요?”

수한은 크게 손을 휘저었다. 여기 좀 보라고 조명 속성 총알까지 쏘아 올렸다.

거리가 멀어 안 보이는 것일까.

아쉽게도 드론은 둘을 못 보고 그냥 지나쳐버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크나큰 위안이 되었다.

원정대의 동료들이 둘을 버리지 않았다는 증거니까.

다음날부터는 드론을 발견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었다.

비공정을 대여하거나, ATV를 타고 달려오며 드론으로 샅샅이 훑으면 금방 찾아낼 수 있을 텐데.

의문점을 뒤로 하고 하염없이 걸었다.

습격해 오는 변이체들과 싸우고, 식용 가능한 식물들을 찾아 구워 먹고, 가벼운 배탈 때문에 고생도 하고……

그나마 큰 병에 걸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레벨 업 도우미로 올려놓은 능력치가 도움이 되었다. 새미가 너무 지친 것 같으면 수한이 부축하고 걸었다. 새미가 미안해했지만, 지금은 예의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렇게 총 12일이 지났다.

“아!”

새미가 탄성을 질렀다.

삐죽삐죽 서 있던 봉우리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 대신 옅은 둔덕이 듬성듬성 하게 보였다. 여태까지의 황량한 광경과는 다른, 녹색 풀이 옅게 깔린 평야지대였다.

벨레즈 협곡을 빠져나온 것이다.

새미가 수한을 껴안고 방방 뛰었다.

“해냈어, 오빠! 이제 살았다구!”

어느새 말을 놓게 된 둘.

“하하하하!”

수한도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저 멀리 큰 도시가 보였다.

길쭉한 탑들이 하늘로 솟아 있고, 허공에 건물들이 둥둥 떠 있는 곳.

이그지트.

천신만고 끝에 이곳으로 돌아왔다.

지구와 연결된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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