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계약 -2- >
인사부장이 한 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계약 체결 즉시, 원하는 계열의 C급 힘의 결정 1개를 지원할 겁니다. 대신 2년 간 이직하지 않는 조건입니다.”
“이직 불가라……”
거기서 또 의견이 갈렸다.
C급 힘의 결정이면 10억 정도의 가치가 있었다.
비록 양도 및 판매는 불가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알바트로스가 수한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만 했다.
그런데 이게 수한에게 정말로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겠나.
수호자 연맹에서 받은 검사에 의하면 효과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레벨 업 도우미상으로는 그와 관련된 정보가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다.
수한은 고개를 저었다.
“이직 불가는 좀 그렇습니다. 차라리 이직하거나 퇴사할 경우 같은 계열, 같은 등급 힘의 결정 1개를 반환하는 것으로 하는 게 어떨까요?”
“에이, 그건 안 되죠. 그렇게 하면 알바트로스가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는데요? 2년 동안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거잖습니까.”
“그 2년 동안, 알바트로스도 상당한 이익을 볼 거라고 확신합니다.”
“그야 그렇겠죠. 하지만 공격대는 결국 이능력자 싸움입니다. 그렇게 해서 돈을 더 벌더라도, 나중에는 다 손해가 되어 경쟁에 뒤떨어집니다.”
인사부장은 이건 양보할 수 없다는 태도를 내비쳤다.
몇 번 더 말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인사부장은 완고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대안을 제시해야겠지.
“그럼 지원은 받지 않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대신 이직 제한도 풀어주세요.”
“음……”
인사부장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받고, 이직하게 되면 2개를 내놓는 방안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서 알바트로스에 취직할 필요가 있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냥 안 받는 것으로 생각을 바꿨다.
인사부장이 궁금하다는 투로 물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이 항목을 지우려는 이유가 있습니까? 아, 이건 그냥 궁금해서 여쭤보는 겁니다.”
수한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어디에 구속 받고 싶진 않아서요.”
“아하.”
보통 이능력자들은 어디 한 곳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했다. 인사부장은 그 맥락에서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수한의 경우엔 좀 달랐다.
자신의 성장이 다른 이능력자들과 궤를 달리할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몇 년 뒤에는 AA급, S급으로 올라갈 지도 몰랐다.
지금이야 알바트로스에 소속되는 게 낫지만, 그때는 상황이 전혀 달라지는 것이다.
본인이 본인의 발목을 잡을 수는 없는 노릇.
계약 기간에서도 이견이 있었다.
인사부장은 오늘부터 1년 동안 계약하는 것을 원한 반면, 수한은 기존대로 유지하는 것을 원했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내년 6월 30일까지만 근무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수한의 요구대로 되었다. 어디까지나 아쉬운 것은 알바트로스였으니까.
조건을 안 들어주면 다른 공격대로 가버리면 그만. 굳이 한 공격대에 목 멜 필요는 없었다.
얼추 중요한 조건의 조율이 끝났다.
인사부장도 심력을 좀 소모한 모양이었다. 손수건을 꺼내더니 이마에 난 땀을 닦았다.
수한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전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대로 17과에 있게 됩니까?”
“지금 지원 17과에 계시지요? 혹시 생각하고 있는 부서가 있습니까?”
“제게 선택권이 있나요?”
“어디 보자…… 마침 자리가 남는 부서가 몇 개 있습니다. 지원부에서는 지원 2과, 전투부에서는 전투 5과와 7과가 남아 있네요. 지원 17과에 계시는 것도 가능하지만, 여러모로 열악한 부서니 제가 말씀드린 부서로 이동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지원 2과, 전투 5과, 7과라……”
지원부냐, 전투부냐?
한 번 고민해 볼 문제였다.
전투부는 말 그대로 전투에만 전념하는 곳이다. 그곳에 있는 이능력자들은 냉정하게 말하면 일선 병사에 불과했다.
단순히 변이체를 때려잡는 정도가 아니라, 공격대 고위직에 앉거나 자신의 공격대를 꾸리려면 그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지휘관의 자질이라고 할까.
이 능력을 기르려면 지원부에 남아 있는 것도 고려해 볼 만 했다. 당장 지원 1, 2, 3과에는 이능력자가 몇 명씩 배치되어 있지 않나.
면접 준비와 신입사원 연수를 거쳐 작전 계획과 전투 지휘 기술이 생겼는데, 그것들을 그냥 썩히기는 아까웠다.
수한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배우고 싶은 것도 있고, 지원 2과에서 근무하고 싶습니다.”
“전투부가 마음이 편하기는 할 겁니다. 업무량도 적을 거고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감수하겠습니다.”
“하기야 나중을 생각하면 그게 경력에 도움이 되지요. 알겠습니다.”
원래 수한은 동생들을 먹여 살리는 게 인생의 목표였다.
그건 이미 이뤘다. 몇 년 전이라면 몰라도, 이제는 수한이 어떻게 되어도 동생들이 굶어죽지는 않을 테니까.
대신 새로운 꿈이 생겼다.
공격대장.
그걸 이루려면, 지원부에서 경력을 쌓는 게 도움이 될 터였다.
또 한 가지.
전투 5과와 7과는 전력이 약한 편이어서 주로 B급 변이체를 잡았다. 그걸 감안하면 지원 2과가 더 낫지 싶었다. 보다 상급의 변이체를 잡는 게 레벨을 올리기 쉬울 테니까.
수한은 계약서를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지금까지 논의한 것 말고 특별한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이대로 사인을 할까?
아니다. 기왕이면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혹시라도 뭔가 문제가 발생하면 안 되니까.
“특별히 문제는 없는 것 같네요.”
“지금 사인하시겠습니까?”
“아뇨. 보니까 이 근처에 변호사 사무실 많이 있던데, 거기서 상담 좀 해 보고 할게요. 제가 이쪽 분야에는 아는 게 없어서요.”
“허허. 철저하시네요.”
인사부장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사실 그게 낫지요. 가끔 무턱대고 사인했다가 나중에 따지는 분도 계시니까요. 좋습니다. 수한씨가 변호사분과 충분히 의논하신 후에 최종 결정을 내리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인사부장은 수한의 USB에 계약서를 담아 주었다. 이걸 가지고 가서 상담을 받고 돌아오라는 것이다.
수한은 USB를 소중하게 갈무리했다.
이번 주 안으로만 가부를 결정해서 연락을 달라고 했다. 조정이 필요하면 조정할 거고, 거절하면 어쩔 수 없다나.
수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사부장이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나중에 보도록 하지요. 아무쪼록 우리 공격대와 일을 같이 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되길 희망합니다. 변호사분과 상담을 마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살펴가세요.”
굳이 시간을 끌 거 없었다.
수한은 적당한 변호사 사무실을 들어가려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동생인 명한이 법학 대학에 재학 중이잖아?
더구나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교였다. 대한민국 법조계는 명한의 선배들이 꽉 잡고 있었다.
기왕이면 명한에게 소개를 받는 게 나을 것이다.
현재 시간 오전 11시.
강의 중일지도 몰랐다. 전화 대신 문자를 넣었다.
금방 답장이 왔다.
[어, 형? 무슨 일이야?]
[별 건 아니고, 나 이번에 계약서 새로 쓰는 것 때문에 그래. 혹시 아는 변호사 없어? 계약서 관련해서 상담 받고 싶은데.]
[굳이 변호사가 필요해? 내가 봐줄게.]
[이번 한 번만 하고 끝낼 거 아냐. 앞으로 계속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정식으로 계약해야 될 지도 몰라.]
[알았어. 한 번 알아볼게.]
금방 명한에게 연락이 왔다.
마침 친한 선배 변호사가 있는데, 그 변호사가 도와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명한이 다니는 대학교 앞에서 점심을 같이 하기로 했다.
조금 멀었다.
여의도에서 성북구까지 가야 했으니까. 지하철을 타면 거의 1시간 가까이 걸렸다.
가까스로 약속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수한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약속 장소로 들어갔다.
음악이 흐르는 파스타집.
식당보다는 카페를 연상시켰다. 척 봐도 연인들이 많이 오는 것 같았다. 실제로 주변 손님들을 봐도 대부분 남녀 쌍쌍이 앉아 있었다.
‘그 변호사가 파스타를 좋아하나?’
속으로 의아해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명한이 일어서더니 손을 흔들었다.
“형! 여기야!”
파스타집 구석,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그 맞은편에 보였다. 명한을 따라 일어나더니, 수한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훤칠한 키에 단정한 옷차림이 인상적이었다. 머리를 질끈 묶고, 가느다란 금테 안경을 썼다. 다소 차가워 보이는 것만 빼면 상당한 미인이었다.
“안녕하세요.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변호사 박미혜라고 해요. 명한이랑은 동아리 선후배 사이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아, 그러십니까? 전 알바트로스 소속 이수한이라고 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악수를 하고, 명함을 교환했다.
일단 식사부터 시켰다.
명한과 미혜는 척 듣기에도 괴상한 이름의 파스타를 시켰다. 수한은 해산물 리조또인가 뭔가 하는 걸 선택했는데, 순전히 밥이 들어가서 선택한 거였다.
“계약서 관련해서 상담 원하신다고 하셨죠?”
음식이 나오기 전, 미혜가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예. 단지 그것 말고 나중에도 지속적으로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에 따른 수수료는 드리겠습니다.”
“계산은 확실하게 하는 게 좋죠. 그래도 아예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오늘 상담 정도는 무료로 해드릴게요.”
“고맙습니다.”
수한은 계약서를 꺼내 보여주었다.
다행히 미혜가 노트북을 가져온 상태였다. 거기다가 USB를 꽂았다. 그리고 함께 계약서를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음…… 나쁘진 않네요. 그런데 몇 군데는 조금씩 수정하는 게 좋겠어요.”
“아, 그래요?”
“네. 여기랑 여기, 그리고……”
별 건 없었다. 사소한 내용이어서, 즉석에서 수정을 했다.
식사가 나왔다.
밥을 먹고 난 후, 미혜가 계약서 대목을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이건 무슨 의미가 있고, 왜 삽입이 되어 있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등등.
아무리 명한의 선배라고 해도 좀 과했다. 수수료를 많이 지불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이런 친절을 베푸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계약서 검토만 해줬어도 될 일 아닌가.
한 가지 가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수한은 옆에 앉아 자신과 미혜를 힐끔힐끔 보는 명한에게 주의를 집중했다.
묘하게 들뜬 것 같은 모습.
그러면서도 살짝 초조해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이 녀석이……’
수한은 상황을 눈치 챘다.
정황을 보니 미혜가 명한의 여자 친구인 듯했다. 그러니 이렇게 열과 성을 다해 설명해 주는 거겠지. 문자 보내자마자 섭외해서 데리고 나온 것도 그렇고.
그런 사이일수록 계산을 확실히 해야 하는 법.
수한은 설명을 적당히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변호사님. 저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지 않으시겠습니까? 앞으로도 도움이 필요할 때가 많은 것 같은데, 그게 나을 것 같습니다.”
“좋지요. 혹시 제 사무실에 오실 수 있으세요? 제가 아무 것도 안 챙겨와서요.”
“그럼 내일이나 모레쯤 뵙겠습니다. 전 지금 휴가 중이라 시간이 많이 남아서요.”
“모레가 좋겠네요. 내일 재판이 하나 있어요.”
“좋습니다. 그때 뵙겠습니다.”
계산은 수한이 했다.
미혜가 지갑을 꺼냈지만 수한이 바득바득 우겼다. 상담도 무료로 받았는데, 이것까지 신세를 질 수는 없었다.
점심시간이 다 끝났다고 미혜가 먼저 떠났다. 명한이 그 뒤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일단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물론 앞으로도 두고 봐야겠지만……
수한은 명한에게 한 마디를 했다.
“그래, 언제부터 만났어?”
“응? 뭐가?”
명한이 시치미를 뗐지만, 수한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수한은 다 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 분이 너 여자 친구지? 다 알아 봤어.”
“어…… 어떻게 알았어?”
“눈치 보니까 딱 알겠던데? 그런데 몇 살 차이야? 변호사면 나이가 좀 될 텐데.”
“미혜 누나? 올해로 29살이야.”
“뭐?”
수한은 깜짝 놀랐다.
명한이 올해 21살이니까 8살이나 차이 나는 거 아닌가.
“나이가 너무 차이 나는 거 아냐?”
“그게 뭐? 서로 좋으면 되는 거지.”
“그야 그렇다만……”
고등학생도 아니고 성인이었다. 아무리 동생이라도 연애에 간섭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노파심에 한 마디를 했다.
“피임은 확실히 해라. 알았지?”
명한은 대답하지 않고 딴청을 피웠다.
수한은 혀를 끌끌 찼다.
명한은 강의가 있어서 강의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수한은 알바트로스 사옥으로 이동했다.
집에 돌아갈 것 없이, 바로 계약을 일단락 지었다.
인사부장이 얼굴 가득 웃음을 지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관계가 되길 희망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계약을 완전히 마무리했다.
이제 수한은 지원 17과가 아닌 지원 2과 소속이다.
알바트로스 매출의 핵심인 AA급 변이체들을 사냥하는 곳.
무슨 일이 생길지, 어느 행성으로 원정을 떠나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