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33화 (34/254)

< 선물 >

시간이 많이 남았다.

출근해야 하는 날은 9월 28일 월요일. 2주라는 시간이 통째로 비어 있었다.

그 시간을 활용해, 수한은 여러 가지 일을 처리했다.

가장 먼저 서울 시내에 전세 아파트를 얻기 위해 여의도 인근의 부동산 사무실을 찾았다.

이능력자들이 잘 찾는 곳이라 규모가 컸다. 서울 전역의 부동산을 다 거래할 수가 있었다.

수한이 원하는 조건은 간단했다.

여의도와 지하철로 연결되어 있을 것. 방이 최소 3개일 것. 대전쟁 이후 완공된 아파트일 것.

“예산은 얼마 정도 생각하고 계십니까?”

“1억 5천에서 2억 정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휘니크로아의 심장 배당 금액이 들어온 것이다.

당시 수한은 지원 요원이었기 때문에 배당금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대신 포상금과 위로금 형태로 수천만 원을 더 받았다. 그 덕에 지금 수한의 계좌에는 1억 5천 정도가 쌓여 있었다.

중개업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애매하네요? 그럼 강남은 힘들고, 강북에서는 가능하겠습니다.”

“강남은 전세가가 얼마나 하는데요?”

“지금 예산의 2배 정도는 잡으셔야 합니다.”

수한은 혀를 내둘렀다.

여의도에 세라프의 전당이 설치되어서 그런지 여의도와 강남의 땅값은 상상을 초월했다. 겨우 한강만 하나 건너도 2배 3배씩 오르는 마당이었다.

뭐, 굳이 강남에 살 필요는 없으니까.

“그럼 강북으로 하죠. 좋은 매물이 있나요?”

“이거, 이거, 이거가 좋습니다. 교통도 편리하고 인근에 대형 마트가 있어서 쇼핑하기도 좋은 곳입니다.”

“그러네요.”

아쉬운 점은 수한이 출퇴근하기엔 좋은데, 명한이 통학하기엔 거리가 좀 멀다는 거였다. 지하철역으로 연결은 되어 있는데, 중간에 한 번 갈아타야 했다.

막내 기한도 명한이 다니는 대학교가 목표라고 하니 조금 안타깝긴 했다.

그거 하나 말고는 모두 수한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 기색을 눈치 챘나 보다. 중개업자가 손을 비비며 씨익 웃었다.

“사장님. 직접 보고 고민하시지요?”

“그럴까요? 어, 그런데 세 군데 다 돌아보려면 시간이 걸리지 않나요?”

“어휴, 요즘 세상에 굳이 직접 가서 볼 필요가 있나요. 그냥 여기서 확인하시면 되죠.”

중개업자가 허공에 손짓을 했다.

천장 위에서 빛이 반짝였다.

몇 겹의 비단과 같은 홀로그램이 너울너울 내려왔다. 부동산 사무실을 자기 색깔로 물들이더니, 성냥갑과 같은 아파트들이 죽순처럼 돋아났다.

다음 순간, 아파트들이 수천 배로 확대되었다.

실제와 같은 비율.

사무실이 아니라 아파트 단지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장면이 연출되었다.

수한은 솔직하게 감탄했다.

“이야, 이거 좋은데요?”

“그렇지요? 서울의 아파트는 전부 여기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한 번은 직접 방문해 보는 게 좋습니다만, 10군데 갈 것을 3군데로 줄여주니 참 좋은 물건이지요.”

수한은 세 아파트를 보고 나서, J 아파트에 점을 찍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하철역에서 고작 5분 거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역세권이라고 하던가?

아직 차가 없는 수한으로서는 최상의 환경이었다. 대신 3 아파트 중 가장 비쌌지만, 그 정도는 납득할 만 했다.

“집은 언제 보시러 가시겠습니까?”

“지금 가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겠습니까? 제가 집주인과 통화를 한 번 해보겠습니다.”

“그러지요.”

수한은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기다렸다.

중개업자는 어디에 전화를 걸더니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사장님. 오늘 언제든 가능하답니다. 지금 가시겠습니까?”

“좋지요.”

“그럼 저희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두한아!”

여의도에서 출발하는 거라 시간이 꽤 걸렸다.

수한은 아파트를 눈으로 확인한 뒤 내심 흡족해했다.

집은 괜찮았다.

집주인이 관리를 잘 했는지 깨끗했다. 집 전체에서 좋은 냄새가 났다. 있는 듯 없는 듯 투명한 거실 유리문을 통해 작은 공원이 바로 내려다보였다.

지금 사는 다세대 주택과는 비교가 안 될 지경.

하지만 무턱대고 이 자리에서 결정을 내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수한은 한 번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돌아 나왔다.

하루 종일 발품을 팔았다.

여의도의 대형 사무실이 아니라 아파트 인근 부동산 사무실에도 들렀다. 인터넷으로도 시세를 알아보았다. 혹시 빠뜨린 게 없는지 꼼꼼하게 살폈다.

결론은 처음 본 곳이 가장 낫다는 것.

이능력자 대상으로 하다 보니 여러모로 잘 해주었다. 수수료도 싸고, 이런저런 편의도 제공했다.

하긴 지금 거래는 2억도 안 되는 소규모 거래지만, 언제 고위 이능력자로 성장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수백  억이 오가는 거래를 할 텐데, 미리 선점해두려는 의도가 강했다.

수한은 여의도 부동산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오전에 27평 아파트 보고 간 사람입니다. 계약하고 싶은데, 지금 사무실로 가면 됩니까?]

[아, 예! 사장님! 언제든 방문 해주시면 바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시간이 어느새 꽤 지나 있었다.

오후 5시.

슬슬 서둘러야 했다. 이러다간 밤이 늦어서야 집에 돌아가게 생겼다.

사무실을 방문하여 계약서를 썼다.

거의 계약서를 써 갈 무렵, 중개업자가 수한에게 질문했다.

“언제쯤 이사하실 생각이십니까? 아직 집주인이 집을 못 구해서, 당장 집 비워주기는 힘들답니다.”

“11월 중순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2달 넘게 남았으니까, 그 정도면 괜찮겠죠?”

“어휴, 충분하죠. 그럼 10월 말까지 집을 비우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계약금은 10% 정도만 거시면 됩니다.”

“지금 계좌이체 해드리겠습니다.”

수한이 결정한 아파트의 전세가는 1억 8천.

앉은 자리에서 1천 8백만 원을 계좌이체를 했다. 중개업자는 그걸 보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일이 진행되는 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필요하신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예, 수고하세요.”

큰일을 하나 처리했더니 발걸음이 가벼웠다.

수한은 가뿐한 표정으로 부동산 사무실을 나왔다. 그리고 전에 얘기한 대로, 미혜의 사무실에 들렀다.

알바트로스와 계약한 사실을 알리고, 전담 계약을 맺었다. 그러면서 명한의 사이에 대해 넌지시 물어보았는데, 미혜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랑 명한이는 이미 깊은 관계에요. 혹시, 제가 나이가 너무 많아서 싫으세요?”

“제가 싫고 말고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당사자들이 알아서 해야지요.”

그 말에 미혜는 안심한 기색을 보였다.

어찌 됐든 수한은 명한의 형이고, 지난 10년 간 실질적인 보호자 노릇을 했다. 그런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은 미혜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중요한 일을 처리하고도 시간이 좀 남았다.

그 시간 동안 수한은 최대한 레벨을 올렸다.

역시 지구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운동이나 공부로는 경험치가 잘 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새미와 영화를 한 편 봤더니 경험치가 크게 올랐다.

“오빠, 뭐해?”

수한이 레벨 업 도우미의 능력창을 확인하고 있자, 새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넋 놓고 허공을 보고 있으니 이상했나 보다.

수한은 적당히 얼버무렸다.

“응? 아무 것도 아냐. 그냥 정신이 좀 멍해져서……”

“에이, 뭐야.”

새미가 입을 삐죽였다.

지구로 돌아온 다음에는 처음 만나는 참이었다. 몇 번 망설이다가 연락을 했는데, 새미가 흔쾌히 승낙을 했다.

가볍게 밥을 먹고 커피도 마셨다.

여자와 단 둘이 시간을 보내는 건 처음이지만, 그게 새미라 그런지 별로 어색하진 않았다.

“지원 2과로 옮긴다고?”

“응. 17과에 있으면 좀 어색하니까 그런가 봐.”

“나도 전투 2과로 옮겨준다던데……”

“전투 2과? 잘 됐다. 같이 원정 다닐 수도 있겠는데?”

“그러게.”

한 동안 이야기꽃을 피웠다.

문득, 새미가 고개를 기울이며 수한을 보았다.

“참, 오빠는 이능력자 된 기념으로 뭐 선물 같은 거 안 받았어?”

“웬 선물?”

“원래 이능력자 되면 주변 사람들이 선물 주는 거래. 나도 이거 그렇게 부모님한테 받은 거야.”

새미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장갑. 항상 끼고 다니는 거였다.

수한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그런 건 없었어. 내 동생들이야 돈도 없고, 동생들 말곤 선물 줄 사람이 없어.”

“왜 없어? 자, 여기.”

새미가 기습적으로 작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앙증맞게 포장이 되어 있었다.

수한은 눈을 크게 떴다.

전혀 생각도 못 했다.

선물이라니?

새미가 상자를 흔들었다.

“얼른 받아! 팔 떨어지겠다!”

수한은 상자를 받아들었다.

크기는 작은데 무게가 묵직했다. 뭔지는 몰라도 간단한 건 아닐 것 같았다.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받는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대전쟁이 발발하고는 처음.

수한은 어색한 얼굴로 상자를 쓰다듬었다.

“이런 거 안 줘도 되는데…… 난 너한테 뭐 해 준 것도 없잖아.”

“해준 게 없기는. 오빠 덕분에 살아서 온 거잖아? 그리고 많이 비싼 거 아냐. 적당한 걸로 샀어. 정 부담스러우면 나중에 돈 벌어서 나도 좋은 거 하나 사 줘.”

“하하, 알았어. 고마워.”

수한은 선물을 챙겼다.

여기저기 다니며 데이트를 했는데, 선물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새미가 고양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집에 가서 풀어봐. 깜짝 놀랄 걸?”

반응이 기대된다는 듯,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밤이 늦은 시간.

수한은 상자를 갖고 집에 돌아왔다.

동생들이 사슴을 노리는 표범 같은 표정을 지으며 수한에게 모여들었다.

“형, 그거 뭐야?”

“포장지가 예쁜데?”

“그 누나한테 받았구나?”

“지금까지 뭘 하고 왔을까?”

“어이구, 그런 거 아냐.”

수한은 동생들 앞에서 포장을 풀었다.

상자를 열었는데, 전혀 뜻밖의 물건이 나타났다.

한 자루의 권총.

은색 미려한 빛을 뽐내고 있었다. 부드럽게 처리된 곡선이 제비 날개 같았다. 금으로 상감된 문양이 형광등 불빛에 비쳐 황홀하게 빛났다.

무기가 아니라, 하나의 예술품 같았다.

권총이 드러나자, 수한과 동생들 모두 숨을 죽였다.

기한이 숨을 헐떡이듯 말했다.

“이거 뭐야? 총이야?”

“장난감 같지는 않은데……”

수한은 침을 삼켰다.

살며시 권총을 들어올렸다. 묵직한 무게와 함께, 손잡이가 손에 찰싹 달라붙었다.

약실을 열어 그 안을 살폈다.

아주 희미하게, 세라프 문자 몇 개가 빛을 발하고 있는 게 보였다.

수한은 천천히 그 글자를 읽었다.

“노르헤임의 토프레 가문. 바일라의 아들 바토르.”

“그게 뭐야?”

“사람 이름이야?”

사람이라면 사람, 외계인이라면 외계인.

노르헤임은 지구인들이 상상한 판타지 세상을 연상시키는 행성이었다. 다만 인간이나 엘프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주요 종족이라면 드워프나 오크, 고블린을 꼽았다.

토프레 가문은 그 중에서도 이름 높은 드워프 장인 가문.

특히 총기류 제작에 뛰어났다. 대량 생산으로는 지구가 낫지만, 품질 면에서는 온갖 선진 개념을 도입해서 만드는 드워프의 수제 총기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권총 옆에는 15발 들이 탄창 1개와, 총알 30발이 놓여 있었다. 탄창과 총알 하나하나까지 아름답게 만들어져 있어, 실전에 사용하기가 아까울 지경이었다.

각성 축하 선물로 받기에는 과한 물건.

수한은 당장 새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물 풀어봤어?]

[너무 비싼 거 아냐? 이런 거 정말 비쌀 텐데……]

[에이. 드워프제긴 해도 양산품이야. 오빠 생각처럼 수십 억 하고 그러지는 않아. 원정 한두 번 다녀오면 충분히 살 수 있는 걸? 원래는 소총 사려고 했는데, 총알 구하기가 힘들 것 같아서 관뒀어. 이거 들고 다니다가 정말 위험할 때만 써. 알았지?]

[그래, 고마워.]

권총에는 약하긴 해도 마법적인 힘이 깃들어 있다고 했다. C급 변이체에게도 조금은 효과가 있다나.

수한은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러움을 느꼈다.

뭔가 보답을 하고 싶은데 마땅치가 않다.

비싼 선물을 하자니 돈이 없다. 정성이 들어간 선물을 하자니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고.

2주 동안의 특별 휴가는 금방 끝이 났다.

9월 28일, 지원 2과로 출근했다.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면접 때 봤지요? 지원 2과 과장, 서상군입니다.”

“안녕하세요. 이수한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수한은 알바트로스 면접에서 잿빛 학살자를 주제로 사냥 계획을 발표했다.

그때 유독 눈에 띄던 반백의 중년 남자.

그 남자가 지원 2과의 과장이었던 것이다.

상군은 호의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얘기는 들었습니다. 깔루 행성에서 여러 일이 있었다고 했죠? 면접 때도 범상치 않았는데, 과연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어쨌거나 잘 왔습니다. 참, 다음 주부터 우리 부서가 미이바 행성으로 원정 가는데 알고 계세요?”

“몰랐습니다.”

“수한씨도 이제 지원 2과 소속이니까 준비를 해두세요. AA급 변이체가 목표라서, 김보훈 이사님하고 박균정 이사님도 합류하실 겁니다.”

그들만이 아니라 전투 2과와 지원 12과도 동행할 거라고 했다.

총인원 38명.

수한은 새미가 선물해 준 권총을 쓰다듬었다.

이 권총을 쓰게 될 일이 예상보다 빨리 생길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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