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37화 (38/254)

< 밀림에서 -2- >

어느덧 해가 졌다.

밤이 깊어지자 그 시선이 더욱 짙어졌다.

워낙에 노골적이어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수한은 눈만 깜빡이다가 밖으로 나왔다.

이사들도 잠이 안 왔나 보다.

야영지를 서성이며 시간을 보내다가, 수한을 보고 슬쩍 헛기침을 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호랑이 눈을 한 남자가 말을 붙였다.

김보훈 이사.

AA급 강체 계열 이능력자였다.

“수한씨가 서 과장에게 제보했다면서요?”

“예. 이사님도 느껴지십니까?”

“낮에는 긴가민가했는데 지금은 뚜렷하네요. 몇 번 느껴본 적이 있는 감각입니다.”

“참 더러운 일이야. 한 3년 전이었나? 그때도 아마테라스 놈들한테 당해서 죽을 뻔 했었는데.”

옆에 있던 남자가 끼어들었다.

190이 넘어가는 큰 키에, 머리를 박박 민 남자.

AA급 구현 계열 이능력자 박균정 이사였다.

보훈은 어깨를 으쓱였다.

“옛날 일은 말해서 뭐하겠어? 지금이 중요하지.”

“맞아. 이번에는 절대 사냥감을 뺏길 수 없어. 그런데 고작 B급 주제에 어떻게 그 먼 거리에서 우릴 보는 거지? 우리가 분명히 더 늦게 도시를 나갔는데.”

“매개체 같은 걸 썼을 거야.”

“아하, 천리안 종류가 아니라, 영상 수신 종류구나.”

“그럴 것 같아.”

“소리는 수신 못 하겠지?”

“B급으론 안 되지. 거리가 가깝다면 모를까, 매개체를 써도 영상이나 소리 중에 하나만 수신하는 게 고작일 거야.”

“도대체 뭘 매개체로 썼을까?”

“뻔한 거 아냐? 우린 숙소에다 우리 짐을 다 들여놨었어. 하지만 밖에 놔둔 게 있었지.”

과연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다웠다.

일단 누군가 지켜본다는 것을 깨닫자, 이능의 종류와 그 매개체의 정체까지 알아냈다.

19대의 ATV.

밤 동안 숙소 바깥에 놔두었는데, 거기에 수작을 부린 게 분명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느냐?

수한은 살짝 기대감을 가지고 질문했다.

“해제할 수 있겠습니까?”

“해야지요. 마침 저희가 가져온 것 중에 이럴 때 써먹는 게 몇 개 있습니다. 일단 찾기만 하면 쉬어요.”

자기들이 알아서 할 테니, 잠을 자면서 체력을 비축해놓으라고 덧붙였다. 수한은 블루이크와 사냥에서는 어쩔지 몰라도, 아마테라스와의 대전에서는 큰 역할을 할 테니까.

그 말을 들어서일까. 수한은 마음 편히 잠을 잘 수 있었다. 낯빛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온 몸에 활기가 넘쳤다.

다음날 아침부터는 더 이상 그 시선을 느낄 수가 없었다. 자연히 수한의 얼굴이 밝아졌다.

새미가 수한의 얼굴을 보더니 싱긋 웃었다.

“오늘은 얼굴이 좋네?”

“응. 잠을 잘 자서 그래.”

“잠이 보약이야.”

밀림으로 들어온 지 벌써 사흘 째. 먼지가 얼굴에 묻고 머리엔 기름기가 흘렀지만 타고난 미모를 가릴 수는 없었다.

수한은 가슴 한 편이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서울에서 만났을 때보다 더 예뻐 보였다. 화장을 하고 고운 옷을 입으면 여신 같은데, 보호복을 입은 지금은 전설 속의 여전사 같았다.

밀림은 질척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 ATV들은 질주하지 못했다. 바닥을 벅벅 기다시피 했다. 사람이 걷는 것보다는 빨랐지만, 답답하기 짝이 없는 속도로 나아갔다.

선두에 있던 길잡이가 손을 들어 원정대를 정지시켰다.

[무슨 일입니까?]

[저걸 보세요.]

길잡이가 한쪽을 가리켰다.

뭔가 바닥을 훑고 지나간 것 같은 자국이 나 있었다. 나무들이 몽땅 쓰러지고, 바닥이 깊게 패였다.

너비가 약 4미터 정도.

그 흔적을 보고, 수한은 한 존재의 이름을 떠올렸다.

[베루아?]

[맞습니다. 지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부랴부랴 변이체 탐지기를 설치했다. 땅에 잘 박고 안테나를 높이 올리자, 탐지기 모니터에 선명한 녹색 점이 나타났다.

누군가 모니터를 읽었다.

“거리 3500, 3시 방향, A급!”

베루아가 확실했다.

원정대는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거리가 먼 것도 아니다. 따라잡는 것도 쉬웠다. 베루아가 이동한 자리를 그대로 따라가면 되니까.

블루이크 정도까진 아니라 해도, A급 변이체도 엄청나게 비쌌다. 당연히 잡고 가야 했다.

상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냥 진형으로 바꿉니다. 빨리!”

수한은 대열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지금까지는 세라프 어 실력 때문에 일행의 선두에 섰다. 이제부터는 속성 부여 능력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을 보조해야 했다.

“수한씨. ATV 위로 올라가세요.”

수한은 추 계장이 모는 ATV에 탑승했다.

휴대용 변이체 탐지기를 꺼내놓았다. 총알이 가득한 탄창을 탄입대에 쑤셔 넣었다. 자동소총의 조종간도 이미 단발로 바꾼 상태였다.

상군이 지도를 꺼내고 적당한 지형을 찾았다. 밀림 속에서 무턱대고 싸우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5시 방향, 거리 5500에 있는 폭포 앞에서 싸우겠습니다.”

작은 폭포.

그 앞은 폭포와 거기서 흐르는 강의 영향으로 널찍한 지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수풀이 우거져 있어 은신하기도 편했고, 이능력자들이 베루아를 유인하기도 쉬웠다.

지원 2과 중 지원 요원 여섯 명만 중간에서 먼저 내렸다. 그들은 베루아를 향해 접근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장으로 이동했다. ATV들을 적당히 숨겨 놓고, 이능력자들은 폭포 앞에 버티고 섰다.

김 대리는 한쪽에 외따로 숨었다.

소환 계열 이능력자라서, 이능을 너무 많이 쓰면 존재가 변질되기 때문이다. 쉬지 않고 파랑새를 운용하고 있어서, 정말 중요한 순간이 아니면 끼어들지 않기로 했다.

수한은 소총의 차가운 총신을 어루만졌다.

“긴장 되지?”

“조금은.”

새미는 수한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사냥 경험이 많아서 그런지 태연한 기색이었다. 살짝 팔짱을 끼고 있는데, 장갑에 박힌 보석에서 흰 전기가 불꽃처럼 타올랐다.

수한이 짧게 대답하자, 새미가 빙긋 웃었다.

“어차피 진짜 전투는 이사님들이랑 전투 2과 과장님이랑 대리님이 다 할 거야. 우린 그저 보조 역할이야. 변이체 시선만 좀 끌어줘도 충분해. 무슨 말인지 알지?”

“그래. 알고 있어.”

이능 인증 결과 수한의 실질적인 등급은 C. A급인 베루아에게 유효한 타격을 입히기는 어려웠다.

수한은 속으로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속성들을 떠올렸다.

예광, 조명, 섬광, 연막, 관통, 파괴, 분열, 충격, 화염, 빙결, 폭발.

무려 11가지.

베루아는 거대한 뱀이었다. 따라서 여러 가지를 써먹을 수가 있었다.

탕!

멀리서 총소리가 울렸다.

“시작 됐나 봐.”

새미가 팔짱을 풀며 말했다.

수한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둔탁하면서도 카랑카랑하게 퍼지는 총소리.

알바트로스에서 저격 및 유인용으로 흔히 쓰는 대물저격총이 내는 소리였다.

“키이이이!”

묘한 괴성이 울려 퍼졌다.

베루아가 공격을 감지하고 쫓아오는 것이다.

탕탕탕!

총소리가 연속으로 났다.

베루아의 몸놀림은 굉장히 빨랐다. 순식간에 저격한 이들을 따라잡았다. 총을 쏘고, 자리를 이탈한 후 은신하는 게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나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그그그, 그그극.

땅 갈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조금씩 대지가 진동했다. 미약한 지진이 수십 수백 번 연달아 몰아치는 것 같았다. 폭포의 물이 흔들리며 옅은 물보라가 주변 평지를 뒤덮었다.

새들이 퍼덕거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찌르듯이 울던 벌레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상군이 휴대용 변이체 탐지기를 보고 소리쳤다.

“거리 1000! 곧 시야에 들어올 겁니다!”

공터의 반경은 약 300미터. 그 이상은 나무가 무성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대지가 더욱 흔들렸다.

수십 대의 전차가 달리는 것처럼 소음이 울리더니, 어느 순간 적막이 내려앉았다.

나무 사이에서 거대한 뱀이 머리를 내밀었다.

역삼각형 머리를 가진 독사.

몸 전체가 진녹색이고, 꽃잎처럼 화려한 문양이 그 위를 덮고 있었다. 눈은 아홉 개에, 커다란 독니 끝에서 점점이 녹색 액체가 떨어져 내렸다. 길고 굵은 몸통의 위와 양옆에 물고기 지느러미 같은 판막이 범선의 돛처럼 솟아 있었다.

“키이이익!”

베루아는 원정대를 보자마자 달려들었다.

300미터의 거리가 순식간에 단축되었다. 고작 숨 몇 벌 내쉴 시간에, 이능력자들의 코앞에 도달했다.

지구의 아나콘다 정도는 지렁이처럼 보일 정도로 거대한 뱀. 놈이 풍기는 기세에 수한은 숨이 턱턱 막혔다.

가장 앞에 있던 보훈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팔을 벌리자 황동색 빛이 폭발하듯 퍼져나갔다.

꾸앙!

범종 울리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보훈은 그 자리에서 베루아의 돌진을 받아냈다. 그 충격으로 보훈이 몇 미터나 뒤로 밀렸지만, 정작 힘겨루기를 하는 보훈의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뒤쪽에 있던 균정이 두 손을 펼쳤다.

팔꿈치까지 올라오는 장갑이 환한 빛을 뿌렸다. 일곱 가지 빛깔을 뿜어, 커다란 칼날을 형상화하여 베루아를 베었다.

“키이이익!”

베루아가 몸을 꿈틀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 일격에 방어막이 한껏 출렁였다. 몇몇 군데에서는 사금파리처럼 빛나며 그 실체가 드러날 지경이었다. 이런 공격 몇 번만 더 허용해도 방어막이 소멸되게 생겼다.

수한은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A급 변이체면 작은 도시 하나는 충분히 파괴할 정도로 강력했다. 저번에는 휘니크로아 때문에 깔루 행성에서 철수하려고 하지 않았나. 그런 A급 변이체를 이렇게 가지고 놀고 있으니 기가 찼다.

베루아가 뒤쪽의 이능력자들을 향해 독액을 뿌렸다.

균정이 팔을 교차하여 막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빛의 방어막이 형성되었다. 독액이 방어막에 닿자 순식간에 증발하여 사라졌다.

“이놈!”

한 눈을 팔아서 성이 난 것일까.

보훈이 노호하며 베루아를 밀어붙였다.

황동색 보광이 파도치듯 울렁였다. 꾸앙 하고 범종 울리는 소리가 나더니, 베루아가 속절없이 밀렸다.

“키이이이익!”

몸의 지름이 약 3미터, 길이는 20미터 가량.

그 거대한 뱀이 몸부림을 치지만 소용없었다. 덩치로 따지면 상대가 안 되는 보훈 혼자서 베루아를 십여 미터나 밀어냈다.

균정이 씩 웃더니 두 손을 내밀었다.

“총공격!”

수한은 자신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관통 속성.

모든 이능력자들이 공격을 개시했다. 새미가 번개를 날리고, 상군은 가까이 접근하여 주먹질을 했다. A급 이능력자 하나가 쌍검을 들고 뱀을 난도질했다. 다른 A급 이능력자는 뒤쪽에 앉아 구경만 했다.

전투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쉬운 거였나?

정말이지 식은 죽 먹기였다. 변이체 사냥이 원정 준비 보다 쉬웠다.

“간단하지?”

새미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원래 이렇게 쉬워?”

“이사님들이 계시잖아. 이사님 한 분만 계셔도 A급 변이체 두세 마리는 그냥 죽일 수 있을 걸? A급과 B급처럼은 아니어도, AA급과 A급 사이 차이는 꽤 커.”

“그렇구나……”

하긴 그러니까 300몫씩 받겠지.

AA급이 저 정도면 대체 S급은 얼마나 강할까?

대한민국에서도 채 10명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S급 이능력자. 대전쟁 전 같았으면, 허접한 나라 한두 개는 말아먹을 수 있는 강력한 존재라던가.

수한은 고개를 저어버렸다.

전투가 끝나고, 뒷정리에 들어갔다.

“수한씨! 여기 좀 잘라줘요!”

“예!”

기이이잉!

전기톱을 다루는 건 수한의 몫이었다.

수한은 이곳저곳을 누비며 베루아의 몸을 절단했다. 그때마다 진득한 체액이 묻어 몸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고생하는 것은 수한인데, 새미가 옆에서 안절부절 못했다. 수건을 들고 끙끙대다가, 전기톱을 들어 절단할 때면 세상이 멸망한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피했다.

“오빠, 이거!”

“고마워.”

절단이 다 끝나자 새미가 수건을 내밀었다.

수한은 적당히 체액을 닦았다. 어차피 몸을 씻기 전까진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외계 행성에서 몸을 씻는 것은 자살행위니, 한동안은 이렇게 다녀야 할 것이다.

아직 할 일은 남아 있었다.

토막 친 베루아의 몸을 보퉁이에 넣은 후 차단막으로 감쌌다. ATV 위에 싣는데, 덩치가 덩치다 보니 ATV 10대를 투입해야 했다.

나중에 블루이크를 잡고, 다른 A급 변이체도 잡고 나면 가치가 별로 없는 고기 같은 건 다 버려야 할 모양이다.

길잡이들이 함박웃음을 짓는 게 보였다.

변이체 부산물 중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저들을 통해 처리하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얻을 이익이 막대하니, 그들도 기분이 좋은 듯했다.

전투 2과 소속 이능력자들은 여기저기 늘어져 있었다.

개중 김 대리가 가장 편해 보였다. 나무 그늘에 누워 코까지 드르렁 드르렁 골았다.

슬슬 깨우려고 하는데,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급히 주변을 둘러보더니, 벼락 치듯 소리를 질렀다.

“비상! 비상! 누군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막 베루아를 잡고 어수선하던 참이다.

모두 깜짝 놀랐다.

김 대리는 검은자위가 사라진 눈으로 한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7시 방향, 거리 1만, 셋!”

동시에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흰 새가 튀어나왔다. 제멋대로 몸을 뒤틀더니, 세 남자의 형상을 만들었다.

수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

뮈노의 수호자 연맹 파견대에 있을 때 봤던 얼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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