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44화 (45/254)

< 새미 -1- >

그런데 월요일 저녁에 만난 새미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먹구름이 낀 하늘처럼 어두워져 있었다.

수한은 조심스럽게 새미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안 좋다.”

“나 다음 주부터 원정 나가.”

“어?”

잊고 있던 얘기였다.

지원부와 전투부의 원정 주기는 조금 다르다. 지원부는 계획서를 작성하고 보고서를 쓰느라 다음 원정 전까지 시간이 좀 필요한데, 전투부는 그렇지 않은 이유에서였다.

지원 1, 2, 3과는 거기서 자유로운 편이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아마테라스 공격대와 얽혀 보고서를 직접 작성하느라 시간을 보낸 탓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수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잠깐만, 그럼 너 지구로 돌아올 때쯤이면 나는 원정 나가 있겠는 걸?”

“맞아. 4달은 지난 다음에야 얼굴 보게 생겼다구.”

“뭐?”

수한은 비명처럼 한 마디를 내뱉었다.

얼른 계산을 해보았다.

새미의 말이 맞았다. 둘이 지구에 체류하는 게 마구 엇갈렸다. 덕분에 함께 지구에 있는 기간은 4달 뒤가 처음이었다.

그것도 전투 1, 2과와 지원 1, 2, 3과의 일정이 톱니바퀴처럼 맞아떨어졌을 때의 이야기.

“진짜 야단났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제 만나는 재미가 한참 붙었는데, 넉 달 동안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외국에 있는 거면 전화라도 하지, 외계로 나가면 그것도 안 된다. 기껏해야 편지 정도가 고작이었다.

대신 이번 주말에는 가까운 곳에 놀러가기로 했다.

롯데월드.

그 약속을 하면서, 새미가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가슴이 찌르르니 울렸다.

아무리 둔감하고 여자 경험이 없는 수한이라 해도, 새미의 눈빛이 뭘 뜻하는 지는 눈치 챈 것이다.

얼굴이 달아오르며, 마른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럼 그때 봐. 어설프게 나오면 화낼 거야!”

새미가 그렇게 말하고 손을 흔들었다.

“조심해서 가!”

“그래. 너도 조심하고, 내일 봐.”

수한은 작별 인사를 하고 새미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다리가 가벼워졌다.

집에 들어가자 먼저 와 있던 기한이 수한을 보고 고개를 모로 꼬았다.

“형 뭐 좋은 일 있어? 웃고 있는 게 수상한데?”

“아, 아무 것도 아냐.”

“흐응……”

얼버무렸지만 통하지 않았다.

기한이 코를 벌름거리더니, 뭔지 알겠다는 듯 씨익 웃었다.

“그 누나랑 잘 되는 거구나? 그렇지?”

“뭐, 그런 셈이야.”

“고백은 했어? 벌써 알고 지낸 지 몇 달이나 지났잖아. 그 누나, 형이 고백하길 기다리고 있을 걸.”

“너 어째 연애 고수처럼 이야기한다?”

“몰랐어? 나 지금까지 여자 친구 세 번이나 사귀었는데……”

“뭐?”

수한이 뜨악한 표정을 짓자, 기한이 머리 뒤를 긁적였다.

“요즘 그런 애들 많아. 중학생만 되도 연애하던 걸? 내 베프는 10번 넘게 사겨봤대.”

“하아……”

이런 것도 세대 차이일까?

수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최근 들어 삶이 급속히 윤택해지면서 나타난 현상 중 하나였다. 예전처럼 먹고 사는 것에 전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기한이 수한의 등을 장난스럽게 두드렸다.

“그래서 아직도 고백 못한 거야? 그러다 어떤 놈팡이가 채가면 어쩌려고 그래? 부서도 다른데, 항상 붙어 다닐 수는 없을 거 아냐.”

“안 그래도 다음 주에 원정 나간대.”

“그럼 언제 오는 거야? 1달 뒤?”

“그때는 또 내가 원정 나가게 돼. 아마 4달 지난 후에야 얼굴 볼 수 있을 거야.”

“헉! 진짜? 큰일 났네?”

오히려 기한이 더 호들갑을 떨었다.

“언제 만나기로 했어? 그 전에 거사를 치러야지!”

“어휴, 거사는 무슨.”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 몰라? 입술 도장을 콱 찍던가, 아니면 확답이라도 받아.”

한참 설왕설래 하고 있는데 명한도 귀가했다.

기한에게 상황 설명을 듣더니 둘이 함께 수한을 압박했다.

“그럼 이번 주 내내 만나. 내일부터 일요일까지 6일 연속으로 만나면 되잖아?”

“에이, 만나기만 해서 별 볼 일 있겠어? 고백을 해야지!”

“그래! 남자답게 말을 하라고! 왜 말을 못 해, 왜!”

“아니, 만나는 건 내가 하는데 왜 너희들이 난리야?”

수한은 어이가 없어 한 마디를 했다.

동생들이 능글맞게 웃었다.

“우리 순진한 모태솔로 형이 드디어 연애 좀 하겠다는데 우리가 도와줘야지, 안 그래?”

“맞아맞아. 안 그러면 눈치만 보다가 혼자 늙어죽을 걸?”

동생들 등쌀에 못 이겨, 이번 주 토요일에 새미와 함께 롯데 월드에 가기로 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디데이다!”

“그 누나 대단하다. 아주 대놓고 힌트를 주는데?”

“대신 그때 고백 안 하면 얼굴 보기 힘들어질 거야.”

“쑥스럽다고 머뭇거리면 안 돼. 무슨 말인지 알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희들은 이만 잠이나 자. 내일 학교 안 갈 거야?”

“알았어. 내일 또 얘기해.”

“뭘 또 얘기해?”

밤마다 동생들이 수한을 괴롭혔다.

뭘 보는 게 좋다느니, 이건 피해야 한다느니, 점심은 뭘 먹고 디저트는 어디 가서 먹어야 한다느니 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수한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우리가 하라는 대로만 해. 알았지? 그럼 그 누나를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을 거야.”

“퍽이나.”

낮에는 새미와 데이트를 하고, 밤에는 동생들에게 시달리느라 시간이 빨리도 갔다.

금방 토요일이 되었다.

기한이 새벽처럼 집을 나서면서, 수한에게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형, 파이팅! 오늘로 모태솔로 탈출하는 거야!”

“참나, 너 공부나 열심히 해. 수능이 이제 5일 밖에 안 남았어.”

“나 전국 1등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말이나 못하면.”

명한은 오후에나 나갈 터였다. 미현이 토요일 오전까지 근무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불 속에 누워 한참 꿈나라에 빠져 있었다.

수한은 신경 써서 옷을 입었다.

원래는 그냥 가볍게 입고 가려고 했는데, 그래선 안 된다고 동생들이 바락바락 악을 썼다. 어제 명한과 함께 나가서, 캐주얼하면서도 세련된 옷을 몇 벌 샀다.

처음 입는 방식의 옷인데, 몸을 움직이기 편해서 수한도 마음에 들었다. 잠깐 고민하다가, 새미가 선물해준 드워프 제 권총도 허리에 차고 집을 나섰다.

권총을 차서 그런지 주변 사람들이 수한을 힐끗거렸다.

“저 사람 봐, 총 가지고 다니네.”

“이능력자 아냐? 이능력자들은 무기 노출도 허가되잖아.”

“이능력자 치고는 옷차림이 수수해서……”

수한은 지하철역으로 갔다.

지하철의 안전 요원 하나가 수한에게 다가왔다.

대부분의 이능력자가 칼이나 도끼, 활 등 냉병기를 쓰다 보니 좀 이상했나 보다.

이능력자 신분증을 보여주자, 안전 요원이 그걸 조회해 보고는 동경 어린 눈빛을 보냈다.

“이능력자시네요?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수한은 고개를 까닥 숙이고 개표구 안으로 들어갔다.

지하철을 타는 내내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괜히 권총을 가지고 왔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무장을 해제할 수는 없었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지하철을 환승해가며 롯데 월드에 도착했다.

약속 시간보다 약 20분 정도 빨랐다. 수한은 롯데 월드 정문 앞에 서서 새미를 기다렸다.

부아앙!

맹수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와 함께, 노란색 날렵한 스포츠카 한 대가 달려왔다.

몇 번 타 본 적이 있는 스포츠카였다.

새미의 자동차.

급격히 속도를 줄이더니 수한의 바로 앞에서 멈췄다. 브레이크 패달을 어찌나 세게 밟았는지 고무 타는 냄새가 수한의 코끝을 스쳤다.

“오빠! 여기 있었어?”

새미가 창문을 열고 수한에게 소리쳤다.

가볍게 입고 나온 참이었다. 언뜻 보이는 검은색 바지와, 털이 몽실몽실한 흰색 니트가 선명하게 대비되었다. 옅은 화장을 한 얼굴에서 맑은 광채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응. 여기 있을 테니까 주차하고 와.”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새미가 롯데월드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놓고 돌아왔다.

항상 끼고 다니던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리고 허리띠에 박힌 푸른 보석 위로 하얗게 빛나는 구슬이 맴돌았다.

누가 봐도 이능력자임이 분명한 차림.

새미는 수한을 보고 방긋 웃었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방금 왔어.”

“권총 잘 어울린다. 돈 모으면 오빠도 이능 안경 괜찮은 걸로 하나 사. 그럼 오빠 이능도 더 쓰기 좋을 거야.”

“그래?”

새미는 자연스럽게 수한의 팔을 껴안았다.

주변에서 이능력자 커플이라는 단어가 언뜻 들렸다.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주목을 받는 건 수한의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반면 새미는 아주 익숙한 것 같았다.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 허리를 높이 세우고 걸었다.

“오빠, 신분증 가져왔지?”

“응. 그거 있어야 무료 혜택 받는다며.”

“완전히 무료는 아니다? 자유이용권은 받는데 음료수나 간식 같은 건 돈 주고 사먹어야 돼.”

“에이, 그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지.”

수한은 새미의 이능력자 신분증까지 받아 매표소 직원에게 내밀었다. 매표소 직원이 은빛 신분증 두 개를 보더니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은빛 별 장식 두 개를 내어주며 말했다.

“이거 옷에다 차시면 자유이용이 가능하십니다. 두 분 다 무기 소지 하고 계시죠? 그럼 나오실 때까지 계속 차고 계셔야 됩니다.”

“알겠습니다.”

두 말 하지 않고 별 장식을 옷깃에 끼웠다.

새미를 데리고 안에 들어가려는데, 새미가 별 장식을 손에 들고 멀뚱멀뚱 수한을 쳐다보았다.

직접 달아달라는 눈치.

수한은 약간 어색함을 느끼면서도 새미의 왼쪽 쇄골 부분에 장식을 달아주었다.

“들어갈까?”

“응!”

생전 처음 와보는 롯데월드는 무척 흥겨웠다.

형형색색의 장식들이 사방에서 나부꼈다. 각종 노래가 가슴을 두드렸다. 놀이기구를 타는 사람들이 질러대는 즐거운 비명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수한도 새미와 함께 놀이기구를 몇 개 탔다.

물 위를 쌩쌩 달리는 열차, 고대 유적처럼 꾸며놓은 곳으로 들어가는 기구, 360도 회전을 수십 번이나 하는 커다란 롤러코스터 등등.

놀이기구를 타는 것도 꽤 힘들었다. 몇 개를 연달아 탔더니 진이 다 빠졌다. 왼팔을 껴안은 새미가 숨을 헥헥 거리는 게 느껴졌다.

“좀 쉬었다 놀까? 커피 한 잔 어때?”

“좋아.”

근처에 보이는 카페로 들어갔다.

새미가 거울을 보더니 화장실로 들어갔다. 알게 모르게 땀이 나서, 화장이 좀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수한은 커피를 받아놓고 가볍게 몸을 풀었다.

카페에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했다.

남녀 쌍쌍이 온 사람도 보이고, 동성 친구들끼리 놀러온 사람도 보였다. 하지만 가장 많은 것은 역시 어린아이를 데리고 찾아온 가족 손님들이었다.

“어머, 귀여워라.”

화장실에서 돌아온 새미가 아이들을 보고 눈을 빛냈다.

“아이들 좋아해?”

“그런 건 아닌데, 요즘 갑자기 그렇게 됐어. 예전에는 울고 그러는 게 싫어서 피했었는데, 이젠 우는 것도 귀여워졌다니까?”

“그래? 신기하네.”

애들이 많아서 카페는 좀 부산스러웠다. 얘기를 해도 상대방 말이 잘 안 들렸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조금 앉아 있다 나가거나, 아예 처음부터 포장해서 갖고 나가는 것 같았다.

둘도 앉아서 얘기를 하다 밖으로 나왔다.

카페 밖에는 벤치가 많이 설치되어 있었다. 마침 빈 벤치가 있어 거기 사이좋게 앉았다.

서늘한 바람이 바닥을 한 번 긁고 지나갔다.

벌써 11월 초였다. 태양이 환히 세상을 비추고 있지만, 어느새 기온이 많이 서늘해졌다.

“곧 겨울 되겠다.”

“그러게.”

“이번에는 어느 행성으로 원정 나가?”

“타이누 행성이라던데?”

“타이누 행성? 아! 어딘지 알겠다. 세르엘 종족들이 사는 행성 말이지?”

“맞아. 유명한 곳이라 바로 알아듣네.”

“하하. 그런데 신기하다. 타이누 행성은 지구인 공격대에게 사냥 허가 잘 안 내주잖아.”

“어떻게 로비를 잘 했다나 봐. 나도 그 사정은 잘 모르겠어.”

타이누 행성은 지구와 기후가 아주 비슷했다. 사시사철 온난하고, 숲과 들판이 펼쳐져 있어 살기에 좋았다. 거주하는 종족들도 대부분 온순하고 신의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가장 유명한 게 세르엘 종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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