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이드 커맨더-45화 (46/254)

< 새미 -2- >

세르엘 종족은 언뜻 보면 지구인 중 백인과 비슷하게 생겼다. 골격만 조금 달랐다. 그런데 남녀노소 모두 외모가 출중해서, 꼭 천사들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지구에서 가장 뛰어난 미남미녀가 가더라도, 그들 중 가장 박색인 자와 비슷하다고 하니 말 다 한 것이다.

“무슨 일 없어야 할 텐데, 걱정이다.”

“응? 뭐가?”

“처음 공격대들이 외계 행성으로 진출하기 시작했을 때, 러시아의 공격대 하나가 타이누 행성에 원정을 간 적이 있어. 그런데 원정대원 중 몇 명이 작당해서 세르엘 종족의 여자 하나를 납치하고 살해했었대.”

“그래서 어떻게 됐어?”

“그 원정대 전체가 세르엘 종족에게 학살당했지. 이후 지구인 공격대는 타이누 행성에 출입할 수 없게 됐어. 가끔 여행 허가만 난다고 하더라.”

“세르엘 종족은 들어보니까 살벌하던데? 식인 풍습도 있다면서.”

“나도 그 얘기는 들었어. 하여간 조심해. 절대 장갑 벗지 말고. 외계 행성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그나마 타이누 행성은 먼저 공격해 올 호전적인 종족은 없으니 다행이었다. 원정대가 사고만 치지 않으면, 무난하게 원정을 마치고 돌아올 것 같았다.

덕분에 적잖이 마음이 놓였다.

“일어날까?”

“응. 그런데 벌써 12시 됐네.”

“밥부터 먹어야겠다.”

점심은 간단하게 먹고 또 놀이기구를 탔다.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몇 개를 타고, 힘들다 싶으면 쉬고, 다시 놀이기구를 타는 것이 반복되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겨울이 성큼 다가와서, 해가 꽤 짧아진 것이다.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

“이만 갈까?”

“응? 으응.”

“같이 밥 먹자. 내가 근사한 곳에 예약해뒀어.”

수한의 말에, 뭔가를 눈치 챘는지 새미의 눈빛이 변했다.

짐짓 새치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맛없는 곳이면 나 혼자 집에 가버릴 거야.”

“하하, 기대해도 좋아. 평이 좋더라.”

매표소를 나오면서, 별 장식을 반납했다.

새미의 스포츠카에 함께 탔다. 워낙 튀는 디자인의 스포츠카라, 주위를 지나는 사람이 죄다 한 번씩 쳐다보고 갔다.

수한은 그걸 느끼고 푸념했다.

“나 오늘 평생 받을 시선은 다 받는 것 같아. 부담스러워 죽겠다. 다음부턴 권총 안 차고 다닐까 봐.”

“에이, 그러면 안 돼. 위험하단 말이야. 나도 장갑 놓고 외출했다가 납치당할 뻔한 적 있는 걸?”

“뭐?”

수한은 깜짝 놀라 눈을 치켜떴다.

새미가 당부하듯 말했다.

“이능력자들이 괜히 무장하고 다니는 게 아니야. 어떤 범죄자가 언제 노릴 줄 몰라서 그러는 거야. 오빠도 출근할 때 권총 정도는 가지고 다녀. 꼭 드워프 제가 아니어도 되잖아?”

“그래, 알았어.”

하긴 이능력자라고 해서 무적은 아니다. 당장 총을 들이대면 항복할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더구나 무장한 이능력자가 덮치면 꼼짝 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이능력자들이 무기를 들고 다니는 것은, 과시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범죄자에게 경고하는 의미도 있었다.

새미가 차를 출발시켰다.

부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쭉 달려 나갔다. 일순 몸이 뒤로 젖혀지며, 기분 좋은 속도감이 느껴졌다.

“어디야?”

“요 앞에 L 레스토랑이야.”

“거기 괜찮더라.”

“가본 적 있어?”

“응, 예전에 부모님이랑 한 번 가 봤어.”

차로 이동하자 채 5분도 안 걸렸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예약해둔 터라 창가에서 오붓하게 먹을 수 있었다.

고층 건물에 위치한 레스토랑이었다. 주변 건물과 롯데 월드의 불빛이 어울려 환상적인 야경을 자아냈다.

새미가 창 밖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진짜 멋지다. 언제 예약한 거야? 저번에 왔을 땐 안쪽에서 먹어서 야경 볼 수 없었는데.”

“수요일에 예약했어. 창가 자리는 예약이 빨리 찬다고 해서. 미리 예약한 보람이 있네.”

예약하면서 메뉴도 미리 정한 상태.

잠깐 앉아 있자 천천히 음식들이 나왔다.

간단한 빵, 바다가재 살을 다져 빵에 발라 먹을 수 있게 만든 요리, 부들부들 크림 같은 치즈, 전복과 버섯 등 몸에 좋은 식자재를 넣어 끓인 맑은 수프, 도미구이, 오리간 요리, 안심 스테이크, 호두 샐러드 등등.

확실히 맛은 있었다.

수한의 입맛에 맞지 않아서 문제지.

차라리 삼겹살을 구워먹거나 짜장면에 탕수육을 먹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래도 새미가 맛있게 먹고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맛있다!”

“입맛에 좀 맞아?”

“응! 최고야!”

새미가 환하게 웃었다.

밥을 먹고 석촌 호수로 나왔다.

주변에 고층 건물이 즐비한 곳이라 경치를 보는 재미가 있었다. 물 위에 빛나는 탑이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새미가 수한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춥다. 그지?”

수한은 새미의 어깨를 감쌌다.

새미가 수한을 빤히 쳐다보았다.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

그 투명한 눈동자가 수한의 시선을 무저갱처럼 빨아들였다.

“새미야.”

낮게 이름을 불렀다.

“응?”

묵직하게 깔리는 목소리에 새미가 움찔했다.

희미한 가로등 빛 때문일까. 새미의 얼굴이 도홧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부드럽게 새미를 잡아당겼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이 품에 쏙 들어왔다.

따스한 체온이 전신으로 번지며, 간질간질한 느낌이 아릿하게 올라왔다.

콩닥, 콩닥, 콩닥.

이건 누구의 심장 소리일까.

둘은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용기를 냈다.

새미를 살짝 떼어냈다.

양 어깨를 잡고, 촉촉한 눈을 들여다보았다.

천근만근 무거운 입을 열어, 속마음을 전했다.

“나, 솔직히 말해서 네가 좋아. 너에게 더 다가가고 싶은데…… 괜찮을까?”

이럴 수가.

이런 멋대가리 없는 고백이라니.

바보 같았다며 내심 자책하는 순간, 수한은 놀라운 경험을 했다.

새미가 웃었다.

눈이 반달 모양을 그렸다.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세상이 밝아진다.

태양이 떠올라 세상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것처럼, 새미의 웃음이 세상을 기쁨으로 가득 채웠다.

수한도 웃었다.

왜 웃는지, 왜 웃음이 나오는지도 몰랐다. 가슴 벅찬 감동이 치밀어 오르면서, 저절로 웃음이 터졌다.

힘껏 새미를 껴안았다.

새미가 수한의 귀에 다정하게 속삭였다.

“좋아! 말해줘서 고마워.”

한 동안 껴안고 있다가 떨어졌다.

수한은 새미의 어깨를 감싸고 석촌 호수 주변을 거닐었다.

아까 전과 같은 경치인데 왜 이렇게 예쁜지 몰랐다. 아니, 호수만 그런 게 아니라 세상 전체가 아름다워 보였다.

떨어지는 낙엽 한 장에도 웃음이 나왔다. 어디선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도 즐거웠다.

새미가 수한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렇게 좋아?”

“그럼!”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자, 벌써 밤이 깊었다.

내일도 보기로 하고 그만 헤어졌다.

수한은 히죽히죽 웃으며 집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사람들이 쳐다보았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자 동생들이 달려들었다.

“형! 어떻게 됐어?”

“잘 됐어? 고백은 했지?”

“뭐래? 사귀재? 차이진 않았지?”

하여간 동생들이 더 극성이었다.

수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렸다.

[자기 잘 들어갔어? 난 이제 막 들어왔어.]

[진짜 오빤 멀리 산다. 난 씻고 나왔는데.]

[곧 이사할 거야. 집도 구했어. 이사하고 나면 좀 가까워지겠다.]

[진짜? 잘 됐다!]

동생들이 그런 수한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더니, 동생은 뒷전이고 여자 친구 챙기는 것 좀 봐.”

“와, 형. 너무 한 거 아냐?”

수한은 그저 코웃음만 쳤다.

다음날도 새미를 만났다.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서, 꿈결 같은 시간을 보냈다.

쪽.

입을 맞추자 방긋 웃는데, 그게 너무나 예뻤다.

월요일은 참 빨리도 다가왔다.

새미가 원정을 나가는 날.

오늘부터 4달 동안은 얼굴을 볼 수 없게 된다.

둘은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매일 편지 쓸게. 알았지?”

“응응. 나도 매일 편지 쓸게.”

편지라고는 하지만 사실 발송할 수가 없었다. 수한의 영향력이 막강하다면 모를까, 수호자 연맹에서 차원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이다.

그저 매일 일기를 쓰듯 편지를 쓰고, 지구에 돌아온 새미가 그걸 보든지 해야 할 것이다.

곧 전투 2과와 지원 1과, 그리고 지원 15과가 출발했다. AA급은 잡지 않고 A급만 잡을 예정이어서, 이사들은 따라가지 않았다.

수한은 멀어져가는 ATV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하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었다. 외로움을 견디는 수밖에.

그나마 이제부터 지원 2과가 한참 바빠질 때이니, 그나마 좀 낫다고 할까.

최소한 몸이 바쁘고 힘들면 새미 생각이 덜 날 테니까.

사무실로 들어갔다.

상군이 수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배웅은 잘 하고 왔습니까?”

“예. 신경 써주셔서 잘 다녀왔습니다.”

“그래요. 타이누 행성이면 별로 위험하진 않을 겁니다. 기다리면 좋은 소식 들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말씀 감사합니다.”

새미를 보고 싶은 마음은 접어두고, 업무에 전념했다.

급한 것은 역시 원정 계획을 세우는 것.

정보부에서 몇 가지 계획서를 내밀었다. 그걸 가지고 회의를 했다. 어디로 원정 갈 것인지 결정하고, 미진한 부분을 첨부하여 돌려보냈다. 정보부와도 몇 번 회의를 하여 세밀하게 조정해나갔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수한은 꾸준히 편지를 썼다.

12월이 되기 전까진 주인에게 배달될 수가 없는 편지.

편지를 쓰는 시간은 참 행복했다. 새미와의 추억이 생각나고, 꼭 새미가 옆에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쯤 되자 동료들도 수한과 새미 사이를 알아차렸다.

편지도 편지거니와, 월요일에 둘이 안고 있었던 게 소문이 짜하니 돌았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편지 써요?”

“지극정성이네.”

“하긴 저도 교환일기 쓰고 그랬어요.”

“좋을 땝니다. 좋을 때에요.”

시간은 기대했던 것처럼 잘도 갔다.

바쁘게 원정을 준비하다 보니, 어느새 11월 12일 목요일이 되었다.

수능 당일.

수한은 아침 일찍 일어나 상을 차렸다.

수능 당일인데도, 기한은 싱글벙글 웃고만 있었다.

“긴장 안 되니?”

“응. 그냥 내가 공부한 대로만 하면 되잖아? 얼른 수능 끝나고 놀고 싶다! 나 오늘 외박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그래. 알았어.”

하긴, 저렇게 자신만만한 게 긴장해서 벌벌 떠는 것보다는 낫다.

기한이 제일 먼저 집을 나섰다.

수한이 데려다주려고 했지만 기한이 고개를 저었다. 자기를 애로 보냐며 당차게 나오니, 수한도 할 말은 없었다. 택시비도 하고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고 오라고 용돈만 두둑이 주었다.

이사는 주말을 이용해서 하기로 했다. 얼마 후면 수한이 원정을 나가야 하니, 그 전에 끝낼 생각을 한 것이다.

다행히 잘 봤다고 했다.

가채점 결과 고작 2개 틀렸다던가?

수능 점수로만 따지면 무슨 대학교든 골라서 갈 수 있는 점수였다.

내심 걱정했는데 마음이 놓였다.

일요일이 되자 새로 산 집으로 이사했다. 외곽에서 서울 안쪽으로 들어왔으니, 이제 출퇴근하기도 쉬워질 것이다.

모든 일이 잘 되고 있었다.

원정 날짜도 잡혔다. 얼마 전 원정에서 돌아와 쉬고 있는 전투 1과의 특별 휴가가 끝나기만 하면 바로 떠나기로 했다. 새미가 원정을 나간 시점부터 약 18일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수한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출근했다.

그런데 어째 분위기가 묘하다.

희미한 술렁임이 사옥 전체에 넘실거리고 있었다.

먼저 출근한 지원 2과 동료들의 얼굴도 좋지 않았다. 수한을 보더니, 슬쩍 고개를 돌리기까지 했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질문을 던지지만 답변이 없었다.

수한의 등 뒤로 상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았는데, 상군이 음울한 표정을 하고 수한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말을 붙이기 전, 상군이 입을 열었다.

“수한씨. 오해하지 말고 들어요.”

“무슨 일인지요?”

“방금 들어온 소식인데……”

상군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한동안 우물거리다가, 힘겹게 다음 말을 꺼냈다.

“저번에 타이누 행성으로 나간 원정대, 3명만 돌아왔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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